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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절대 일한 만큼 주지 않는다.

아직도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긴 국어사전에도 임금을 '노동의 대가로 받는 보수'라고 정의해 놓은 걸 보면 임금에 대한 오해는 단순한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노동의 대가라면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한 보수가 지급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임금은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도 천차만별이다.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것은 '임금'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비정규직이 양산되기 전에도 임금은 노동의 대가로 기능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 24시간이고, 노동시간은 최대 15~16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수천, 수억원대의 임금 차이가 발생하는 자본주의에서 '임금은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라는 맑스의 정의는 불변의 진리다.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임금으로 생활하는 노동자들이 1백만이 넘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자본가들은 이야기한다. 노동의 질이 다르기 때문에 보수도 다르다고..

그럼 많이 배운 사법고시 출신들이 재벌들 밑에서 그 보다 더 적은 보수를 받고 일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재벌들이 가진 노동의 질은 자동차 범퍼를 교체해주는 정비업소 노동자들의 질보다 훨씬 못하지 않은가?

자본가들은 또 이야기한다. 파이를 키우고 난 후에 나누자고..

파이가 커진다고 노동자들에게 돌아올 몫이 있을 것인가? 그럼 10년 전보다 훨씬 파이가 커졌는데 왜 노동자들의 삶은 자꾸 곤궁해지는가? 파이는 누가 다 먹어버렸나?

자본가들은 파이가 커질수록 더 많은 큰 파이를 가지려고 한다. 이것이 자본의 법칙이다.

한국경제가 성장일로를 달리고 있던 지난 90년대 초반부터 노동자들 중 가장 허약한 체질을 가지고 있던 경비직, 청소직을 비정규직화 하고 소사장제, 사내 하청을 도입해 노동자들을 분리하기 시작한 자본가들의 횡포를 보라.  

임금이 노동의 대가로 받는 보수가 되기 위해서는 자본이 공유되어야 한다. GDP1 만달러면 4인가족의 연간 수입은 4만달러. 여기에서 "일한만큼"의 +-가 주어지면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자본주의가 자본의 공유를 허락하겠는가?

일한 만큼 받을 수 있는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노동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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