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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42] 더위

4일날 떠나서 12일밤에 돌아왔다

 

시간 맞춰 식당에 찾아가면 하루 세 끼를 내주었고 음식도 먹을만 했다

새벽 2시경에 잠들어서 4시간 뒤에는 일어나야하는 강행군이었지만 잠자리도 쾌적했다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확인했어야 할 일들을 현장에서 확인하느라 작업이 많이 늦어졌지만

발빠른 전문인력이 둘이나 대기하고 있었던 덕분에 결과물에 큰 지장은 없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지인을 만나러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전화도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었기에

종일 일에만 몰입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돈 버는 일은 서글프다는 생각을 하면서 며칠을 보냈다.

그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새겨져있었던 건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계속 내 눈치를 살폈고

한번은 내가 열고 나간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히자 우루루 일어나서 내다보기도 했다

그 문은...내가 처음 그 곳에 갔을 때 부터 그랬는데, 고장난 문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가기 전날 용역계약서를 작성했고 내 역할은 작가였지만 감독은 여럿인데 조연출이 없었기 때문에

소품과 일정과 섭외와 인터뷰 내용과 촬영현장에서 출연자와 그 외 사람들을 제어하는 일까지

다양한 업무를 처리해야해서 피곤했던 건 사실이다, 울고 싶은 건 결코 아니었지만

누군가 말해줬다, 그 부은 얼굴은 잠을 설쳐서 그런거냐, 아니면 대체 뭐가 불만이냐고

 

네, 불만이 조금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정당한 노동의 댓가 따위는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걸 알지만

저를 고용한 사람들은 저의 시간과 노동력을 구매했을 뿐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제 표정과 제 감정과 마땅히 누려야할 제 휴식시간까지 차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지요

제 경력이나 능력에 무관심한 사람들속에서 하루 종일 '상냥한 얼굴'과 '보살핌'을,

그러니까 '유일한 여성으로서 같이 일하는 남성들의 마음과 몸을 조금 더 편안하게 해줄 의무'까지

강요받아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 불만이었다, 그러니 붓기가 빠질 수 없었던 건지도, 큭큭...

 

선금으로 내 후진 컴퓨터의 메인보드를 갈아끼우고 200기가짜리 새 하드디스크를 살 수 있다

잔금까지 받으면 재원이와 내가 두 달 정도 다른 아르바이트 없이 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몇 년째 망서리고 있는 치과 치료를 시작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이 좋은 일이나 기쁜 일이 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부은 얼굴로

먹어야하니까 꾸역꾸역 삼키는 마른 밥처럼 살아야하니까 어기적어기적 하는 이 마른 일

돌아오니 서울은, 내 작업실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잠시 앉아있기도 불편하고

밤새 끝도 시작도 없는 꿈이 이어져 하루가 멍하다

 

일단 새 하드디스크를 끼우고 컴퓨터를 다시 켜본다

우웅, 착하지 얘야, 너랑 나랑은 그래도 마른 일을 억지로 하는 건 아니잖니

조금만 더 견뎌보자, SHOUT, 한번은 질러봐야지, 우웅... 



 No Doubt - Tragic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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