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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T-46]일단 정지

우물은 서늘하면서도 따뜻하다

내려갈수록 평화롭다

그러나 언제든 나갈 수 있다고 믿을 때만 그렇다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하면

그만한 지옥도 없다

팔을 휘저을수록 호흡은 고통스럽고

물은 차가와지면서 결국 온 몸이 바닥에 내려앉을 때

눈을 감아버리면 죽을 수도 있다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눈과 귀와 입를 열어서

숨을 쉬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산다

나는 살아서 기어이 이 밖으로 나갈 것이다

 

 



꼬박 석 달동안 매달렸던 일을 일단 정지하기로 한다

숨을 쉬어야겠다

 

부산에서 사흘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보고 싶은 영화는 모조리 매진이었고

딱히 만날 사람도 해야할 일도 없었다

바다를 원없이 보고 추리문학관에서 녹차를 마시다가

시장에 들어가 국밥을 먹거나

지하철을 타고 끝에서 끝까지 가보기도 했다

 

많이 쉬고 많이 느긋해졌다고 믿었는데

아닌가 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담담하게 요리하기에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책도 읽고 바람도 쐬고 음악도 들으면서

<우리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하려고 했던 내 이야기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자

 

재원이가 편집한 향촌사람들에 관한 영상은

지난 9월 KBS 열린채널 심사에서 선정되었다

예정대로라면 12월에 방영될테지만

출연하신 철거대책위 주민들 가운데 공개를 원하지 않는 분이 계셨다

처음 완성본을 시사할 때는 흔쾌히 허락하셨던 분들이

왜 최근에 마음을 바꾸셨을까

월요일 저녁에 재원이와 함께 찾아 갔다가

그 사이 달라진 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 영상이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공개될 경우

오히려 사태수습에 걸림돌이 되거나

주민들 마음에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고

그 분들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 분들은 내게 자꾸만 죄송하다고 했고

우리가 들어야할 말이 아니기에 마음이 아팠다

이런 과정도 공부다

우리가 뭔가를 설득하거나 강요해서는 안된다

지금 가장 힘든 건 주민들이고 결정도 주민들이 해야한다

우리는 잃을 것이 없지만 이 분들은 생존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너무 늦게 완성해서 오히려 우리가 죄송하게 생각해야한다고

재원에게는 담담하게 타이르고 돌아왔는데

부디 향촌 주민들이 다가오는 겨울을 또 그 곳에서 차갑게 보내지 않기를

서로 상하고 다친 마음들을 잘 보살펴서 환하게 웃게 되시길

공동임대주택이면 더 좋고 최소한 이주보상금만이라도 제대로 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향촌에 관한 부분은

지난 8월부터 내가 편집하고 있는 <우리의 노래...>에도 제법 많이 들어가 있어서

상당한 분량을 덜어내야한다

집에 와서 편집용 컴퓨터를 켜지 않았다

나흘 째 안켜고 있다

켜고 싶을 때 켤거야

약한 사람들을 더 약하게 만드는

아니, 충분히 씩씩하지만 그 용기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듯

그녀와 나를 비웃는 듯한 이 세상에 화가 나서

간신히 벗어난 우울증이 도질까 무섭다, 젠장

 

<우리의 노래...>는 즐겁고 신나는 영화이길 바란다

내가 즐거워야 영화도 관객도 즐거워진다

기분 좋게 다시 시작하려면 월동준비부터 해야겠다

돈이 될만한 일거리도 다시 찾아보고

김치도 담그고 밑반찬도 몇 가지 만들어놔야지

밥도 제 시간에 먹고 잠도 제시간에 자고

다시 규칙적인 생활을 해보려고 한다

잘 될까? 잘 되겠지, 안되면 어쩔거야!

잘 될때까지 덤비는 거지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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