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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사회주의자 25] '미래소년 코난'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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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사회주의자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애니메이터
[세계의 사회주의자 25] '미래소년 코난'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만화 영화는 재미로 본다. 이런 재미도 있고 저런 재미도 있지만, 미국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 주는 재미는 경쾌함과 발랄함, 그리고 무엇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누릴 수 있는 재미이다. 물론,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도 나름의 ‘교훈’이 있지만 미국의 상업 영화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속 보이는 감동’이기 쉽다.

디즈니의 만화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 본다면 놀랄 만한 애니메이션이 있다. 바로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다. 그 장르가 다양해서 재미도 여러 가지인데, 사회와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면서도 극적 긴장감 또한 뒤지지 않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여럿이다.

그 중에서도 기술 문명의 위태로움, 인간 사회의 갈등, 인간과 자연의 긴장을 역동적이고도 재미있게 연출하기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그 철학적 깊이에 놀랄 만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재미로만 볼 수는 없게 한다.

   
  ▲ 에니메이션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SF와 마르크스 주의의 결합

미야자키는 1941년에 도쿄 부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비행기 공장을 운영했다. 이 비행기 공장은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등장하는 날아다니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행은 미야자키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수직 상승과 하강이라는 미야자키만의 역동적 애니메이션은 기계와 등장인물의 비행으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그 비행기 공장에서 산업 사회의 계급적 차별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작품에 고도로 산업화된 문명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미야자키는 어린 시절 만화가가 되길 원했다. 그래도 그림을 배우기 위해 미대에 진학하지는 않고 정치경제학부에서 일본산업론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에 일본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白蛇傳)(1958)>에 감동을 받고 애니메이터가 되고자 했다. 대학 시절 아동문학 연구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동서양의 많은 문학을 접한 것이 이후의 작품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과정이 없었음에도 미야자키는 ‘그림을 그리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었다. 스스로는 그림에 재능이 없다고 했지만 작화, 원화를 그릴 뿐 아니라 때로는 동화도 직접 수정한다. 애니메이터로 시작했으나 다양한 인문적 지식과 철학적 성찰이 연출 능력을 키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청년 시절 사회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던 미야자키는 대학에 다닐 무렵 일본공산당의 기관지인 '아카하타(赤旗)'의 청소년판인 <소년소녀신문>에 <사막의 백성>이란 제목의 만화를 연재했는데, 그가 밝혔듯이 이 작품은 SF와 마르크시즘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의뢰를 받아 만들어진 이 만화는 ‘단결하면 큰 힘이 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중앙아시아를 배경으로 잔인한 강대국에 맞서는 소수민족의 항쟁을 그리고 있다. 그 그림을 변형해 만들어낸 것이〈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라고 한다. 무엇보다 ‘힘을 합친다’는 연대의식은 많은 작품에서 공동체 사회(마을)로 등장한다.

학교 졸업 후 한때 노동조합 서기로 지내기도

미야자키는 대학 졸업 후 애니메이터로 일하게 된 도에이동화의 노동조합 서기로도 활동하였다. 노조활동은 그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은데 이는 작업 공간에 대한 태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미야자키는 도에이동화에서 만난 다카하타 이사오와 사상적 교감을 나누며 노동조합 활동도 함께했다. 1985년 그들은 스튜디오 지브리를 만들었고, 1990년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과는 달리 스태프를 월급제로 고용하였다.

스태프를 작품마다 계약하는 방식이 아닌, 상시적으로 고용하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고용을 안정시킴으로써 작품의 질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이는 스태프들을 한 자리에서 일하게 하여 관리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또한 이는 적지 않은 스태프들을 월급제로 고용할 자금을 투자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브랜드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다.

이런 ‘파격적’ 고용 방식을 두고 <공각기동대(1995)>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지브리를 소비에트의 크렘린에 비유했다. 그는 지브리의 조직화된 구조가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한 양질의 작품을 만들어 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창조성을 저해한다며, “그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을 아직도 노조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고 했다.

오시이의 발언은, 지브리의 고용 방식이 작업 효율보다는 그 설립자들의 활동 궤적에 기인한다고 여기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시선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지브리라는 제작사를 통해 미야자키는 다카하타 이사오와 하나로 이해되기도 한다. 도에이동화에서 만난 다카하타는 사회주의 사상에 밝았는데 미야자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작품 성격은 다르다.

다카하타는 <반딧불의 무덤(1988)>, <추억은 방울방울(1991)> 등 상당히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다. 미야자키가 기획한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은 우화적이기 하지만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강해서 다카하타다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다카하타의 작품이 미야자키의 작품보다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평가도 있다.

다카하다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1974)>, <엄마 찾아 삼만리(1976)>, <빨강머리 앤(1979)> 등 TV애니메이션들도 연출했다.

맹목적인 기술 추종의 위험성

   
  ▲ <미래소년 코난>
 
미야자키는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미래소년 코난(1978)>,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붉은 돼지(1992)>, <모노노케 히메(1997)> 등을 연출했다. 이 작품들은 고도로 산업화된 문명의 위협과 어리석음, 파괴적인 전쟁과 독재 권력,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 인간과 자연의 갈등과 공존을,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경쾌하게 그리고 있다.

이와 달리 최고 정점에 오른 작품성을 보여주면서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0)>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은, 한편으로는 미야자키의 면모를 이어가고 있지만, 사회, 정치적 문제 등과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에서는 벗어났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미래소년 코난>은 초강력 전자력 병기가 세계의 절반을 일순간에 소멸시킨 200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만든 ‘거신병’이라는 무기로 세계가 불타버린 먼 미래가 배경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 이어진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도 기술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전쟁과 파괴 기술 때문에 인간 사회가 위기에 처했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그 파괴 기술을 독점하여 남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이들 작품들은 인간적 가치가 발전할 수 있도록 기술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착취 사회와 공동체 사회의 대비

미야자키의 작품은 억압과 착취의 사회와 조화로운 공동체 사회를 대조하기도 한다. <미래소년의 코난>의 인더스트리아와 하이하바,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원작인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도르메키아, 도르크와 바람계곡이 그러하다.

인더스트리아, 도르메티아, 도르크와 같은 도시와 국가는 <붉은 돼지>의 주인공이 스스로 사람이길 포기하고 차라리 돼지가 되어버린 이유를 제공한 전쟁과 파시즘 국가와 관련이 있다. 그것들은 악독한 계급 사회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나 국가를 폭력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이기도 하다.

이런 대군사 제국에 저항하는 사회는 다분히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하이하바와 바람계곡과 같이, 개인이 상품가치를 지니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그리고 있다. 미야자키는 “일정한 공동체 속에서 일정한 일을 하고 있으면 능력차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회가 된다. 어지간한 게으름뱅이가 아닌 한에는, 마을이 굶주릴 때에는 함께 굶주리고 마을이 풍요로울 때에는 자신도 풍요로워지는” 사회상을 그리고자 했다.

미야자키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마스크를 뒤집어쓴 채 곰팡이로 뒤덮인 음침한 폐허를 지나는 한 여행자의 독백, “마을이 또 하나 죽었군.” 이 대사로 시작하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1950년대 발생한 미나마타병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미야자키는, 대표적인 ‘공해병’을 낳은 이 사건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오염 물질의 끔찍함을 목격함과 동시에, 강력한 복원력으로 그 오염 물질을 빨아들여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연을 보았다.

미야자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개봉 10주년 기념으로 하게 된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당대를 반영하지 않은 예술작품이란 없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70년대에 등장한 환경론적 세계관이 반영된 작품이다”라고 했다.

당대를 반영하지 않은 예술작품은 없다

이처럼 미야자키는 인간과 자연의 긴장감을 많이 다루었다. 그렇다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평면적으로 그리지는 않았다. <모노노케 히메>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걸 뚜렷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숲을 파괴하고 무기를 만들지만 그것도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그러한 행위에 저항한다. 인간이 자원을 이용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산업 기술 문명을 이룩했다는 것 자체가 자연과의 대립을 영원히 피할 수 없게 한다. 대립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웃집 토토로>는 전후에 사라져가는 일본의 숲을 소재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방식을 동화적이고도 신비롭게 그리고 있다.

   
  ▲ <이웃집 토토로>
 
미야자키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의 국경 분쟁은 과연 그 국가들의 사회주의가 진실한가를 의심하게 했다. 그래도 그는 1990년대 이전까지는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결국 동구권의 몰락은 그에게도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붉은 돼지>를 제작한 후에는 “정치를 좌우로 가르지 않는다. 다만 물질문명에 비판적이라는 진보적 경향은 남아 있다”고 했다.

미야자키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자연을 착취하지 않는 인간 사회의 이상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작품을 통해 이상주의적인 사회주의를 그렸을 뿐 그다지 실천적 활동을 보여 준 사회주의자는 아닐 지도 모른다.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게다가 그의 어느 작품에서도 ‘흑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인종주의’의 혐의를 받고 있다. 미야자키는 단지 ‘색감의 문제’라고 하지만 오히려 이 말이 ‘검은 피부색’은 아름답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그와 교감으로 평생 동료로 지내고 있는 다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의 무덤>이 전쟁의 가해자인 일본을 마치 피해자인 양 그렸다며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배급을 위해 미국의 거대 미디어 재벌 디즈니사와 제휴를 맺은 점, 무엇보다 지브리의 설립자들은 상업적 성공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 이 때문에 그들의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의식과는 별개로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는 이들인가 의심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에는 이러한 주제의식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고 평가 받기는 하지만- 미야자키의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의식, 이상적 사회상이나 인간관계는 사회주의 철학에 가깝다.

미야자키는 자신이 꿈꾸고 있는 바를 작품에 담았다. 오히려 미야자키는 현실 사회주의나 사회주의 정당과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아 자신의 꿈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지라도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미야자키에게 배워야 할 덕목은 그의 작품 속 주제의식보다 자신의 꿈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일지 모른다.

 
2007년 02월 01일 (목) 14:55:27 문성준 / 객원기자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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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판결 공개를 반대했을까

 

 

 

조선은 왜 판결 공개를 반대했을까
긴급조치 9호 발표하자, 사설로 “이정표는 제시됐다”
 
 
하니Only 구본권 기자
 
 
» 1월 31일 한겨레 그림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위원장 송기인 신부)가 1월31일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대한 판결문 분석 보고서’를 공개했다. 판결문 분석보고서에는 1412건 긴급조치 판결의 내용과 담당 판사의 이름도 실려 있다. 법원공보 및 판결집에 실리는 판결은 판결내용은 물론 판사의 이름도 실려 있다. 대법원 홈페이지에 공개된 수많은 판결들의 경우에도 모두 판사 이름이 실려 있다. 공개법정에서 이루어진 판결 내용은 결코 비밀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실화해위가 긴급조치 판결을 분석한 것을 보면 더욱 당시 판결문 분석보고서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유신 당시 긴급조치 판결을 진실화해위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음주 및 대화 도중 대통령과 유신 비판’이 전체의 48%를 차지하며, 유신독재에 항거한 ‘학생운동’이 32%, ‘반유신 재야운동’이 14.5%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작 간첩행위를 처벌한 사건은 2건뿐이었다.

 

▶▶관련기사: “박정희 운좋아 대통령됐다” 12년 징역형

조·중·동, 긴급조치 판결 분석공개에 일제히 ‘강한 비난’




 

하지만, 일부 언론은 사설과 기사를 통해, 긴급조치 판결문 분석 보고서 공개를 강하게 비난했다.

<조선일보> 31일자 [사설] ‘과거사위의 ‘인민재판’에 끌려나온 판사들’
<동아일보> 31일자 [사설] 反화해 과거사委 본색 드러내기
<중앙일보> 2월1일자 [사설] 진실 규명도 화해에도 도움 안된 명단 공개

 

왜, 이들 보수언론은 진실화해위의 판결문 분석 보고서를 일제히 비난했을까?

 

긴급조치는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독재정권 유지의 초법적 조처임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긴급조처는 정권이 국민을 영장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고 민간인에게 비상군법회의 재판을 받도록 했던 박정희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제도였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 중에서도 ‘기념비적 판결’은 사형판결 18시간 만에 8명의 형을 집행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75년 4월8일)이다. 하지만 지난달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인혁당 사건 재심 선거공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를 모두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판결했다.

 

 

동아일보 “본보는 유신정권에 저항하다 백지광고” 사설에 민언련 “파렴치한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선명한 ‘적반하장’의 태도를 취했다. “본보는 유신정권에 저항하다 언론사에 유례가 없는 백지광고 사태를 겪었다. 그럼에도 이번 판사 명단 공개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은 진정한 화해에 역행한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사설을 31일치로 실었다..

 

민언련은 31일 성명을 내어 이날치 동아일보의 사설을 “파렴치한 주장”이라며 “‘백지광고 사태’의 진실을 왜곡하는 동아일보의 행태를 접하며 우리의 낯이 뜨거워질 정도의 모욕감을 느낀다”고 비판했다.

 

동아일보가 ‘유신정권에 저항’하다 겪었다는 이른바 ‘백지광고 사태’는 동아일보가 쫓아낸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운동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중앙정보부 요원의 언론사 상주와 편집권 간섭 등을 거부하는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섰고, 정권은 광고주들에게 동아일보사에 광고를 주지 못하게 해 이른바 ‘백지광고 사태’가 벌어졌다. 시민들은 지지 광고를 통해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 투쟁을 성원했지만 동아일보사는 유신정권과 한 편이 되어 75년 3월 17일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선 113명의 언론인을 쫓아낸 것이 이 사태의 전말이다. 당시 해직된 113명의 동아일보 기자들은 32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아일보로부터 한마디의 사과도 받지 못하고 있다.

 

 

조선일보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 준 국민책임 물어야 할 판”이라고?

 
» 유신시절 대통령 긴급조치 3호가 발표됐을 때(1974년 1월14일)의 조선일보 사설, 조선일보는 문답식 풀이를 통해 긴급조치3호로 인해, 월 7만원 받는 월급쟁이가 매달 5252원의 혜택을 입게 된다고 보도하며, 그 필요성과 유익함을 적극 홍보했다. 온라인뉴스팀
 

조선일보는 31일치 사설에서 “명단이 정식으로 공개되면 정권의 ‘과거사 캐기 바람’에 올라탄 세력들은 해당 판사들을 ‘독재정권에 순응한 반민주 판사’로 몰아붙일 게 뻔하다”며 “과거사위의 이번 결정은 판사들더러 법전을 보지 말고 나중에 욕먹지 않을 판결만 궁리하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비난했다. 조선일보 사설은 “결국엔 유신헌법 국민투표에서 90% 넘게 찬성해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을 줬던 국민의 책임까지 물어야 될 판”이라고 결론지었다.

유신시대 긴급조치 발동의 책임이 박정희독재정권이 아니라,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통해 90% 이상 지지로 찬동한 국민들에게 있다는 논리를 조선일보는 21세기에 와서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타당하고 공정했다’는 전제 아래서나 가능한 주장이다. 유신헌법을 통해 종신집권을 획책한 박정희정권의 국민투표 홍보는 야당과 민주시민들의 반대와 저항이 철저하게 통제당한 채 일방적으로 정권이 홍보하는 ‘유신헌법 개정필요성’이 전달됐을 따름이다.

그 핵심적 역할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당시의 언론이 맡았다.

긴급조치 9호가 공표된 75년 5월15일치 당시 <조선일보> 사설이 32년이 지난 뒤의 진실화해위의 긴급조치 판결 분석문 공개에 대한 조선일보사의 ‘불쾌함’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된다.

 

조선일보, 긴급조치9호 공표에 사설로 “이정표는 제시됐다” 적극 지지

 

 

긴급조치9호가 시행됨으로써 한국사회는 전시상태나 다름없는 비상체제로 진입했다. 박 정권은 반정부활동을 언론이 보도하거나 전파하는 일까지 금지했고 조치 위반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ㆍ구금할 수 있게 했으며 이 조치를 비방하는 행위 역시 1년 이상의 징역형에 10년 이상의 자격정지가 부과됐다. 긴급조치9호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같은 해 12월 8일 0시를 기해 해제됨으로써 끝이 났다.

 

조선일보의 긴급조치 판결문 분석 공개에 대한 비난 사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긴급조처 9호 발동 당시 조선일보의 논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조선일보의 당시 사설(1975년 5월15일)을 다시 보자.

 

[조선일보 1975년 5월15일치 사설] 새 질서 확립의 이정 -긴급조치선포를 보고

 
»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반대를 금지한 긴급조치 9호 발표에 대한 조선일보의 사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이정표는 제시됐다‘며, 긴급조치의 필요성을 극력 옹호했다. 온라인뉴스팀
 

“…이상과 같은 긴급조치 내용에 따라 우리는 분명히 새로운 생활체제에 직면했다. 헌법이 부여한 권한에 따른 대통령 긴급조치권에 의한 새로운 생활질서가 요구된 것이다. 변화된 생활질서에 익숙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의 변화과정이 그러하듯이 적지않은 시간을 필요로 하리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있어서라도 결코 의외의 또는 애매한 질서이탈의 착오현상이 있어서는 안될 것을 우선 바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착오현상의 빈발은 변화된 질서에서 오는 긴장을 더욱 가중시키는 작용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표는 제시됐다”는 한마디로 요약되는, 긴급조치 9호에 대한 조선일보사의 ‘굳은 결의’를 다짐하는 사설의 마지막 부분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4. 우리에게 가해지고 있는 잠재적 또는 현실적 위협이 용이한 것이 아니라는 시국관에 이의를 달 선량한 국민은 한 사람도 없으리라. 그러한 위협이 우리에게 새 질서의 생활을 요구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이며 또한 현실을 직시하려 한다.

우리 사회에는 각종 이익단체와 기능이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다. 그 것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회, 곧 반공산주의 이데올로기사회의 조건이며 특징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포용하고 있는 전체이며 유일한 국가의 존재를 보위하고 유지하는 데 심각한 양상이 제기됐을 때 개개 이익단체는 국가존립을 위한 이익에 우선적으로 종속돼야 한다는 이치와 현실을 우리는 이미 익혀오기도 했다.

이러한 우리의 입지조건을 지양하는 날을 가져온다는 이념과 결의에서 유신을 지향한 헌법이 마련됐고, 그 헌법이 우리에게 요청한 새로운 생활질서를 외면하고 우리가 달리 갈길이 없음을 우리는 이 시점에서 거듭 확인하는 것이다. 그 길이 우리가 처한 여건에 의해 이상적이고 최선의 길은 아니라 하더라도 불가피한 길임을 우리는 확인하는 것이다.

문제는 다함께 새로워져야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모든 지도계층의 생활자세의 더한 변화의 시범에서부터 비롯돼야 할 것이다. 긴급조치의 정신이 지향하고 요구하는 이념적 체득이 얼마만큼 절실하며, 그 것이 생활실천을 통해 얼마만큼 참되게 표현되느냐에 오로지 애타게 추구하는 국민총화의 관건은 좌우됨을 우리는 명심코자 하는 것이다.

이정표는 제시됐다. 그곳을 가는 도정에서의 소득이 결코 부 아닌 승의 결과로 요청돼야 한다는 숙제가 남았을 뿐이며 우리가 기대하는 모든 새로운 생활변화에 의해 그 숙제가 풀릴 것은 우리는 확신코자 한다.

 

 

“이정표는 제시됐다”며 조선일보가 그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옹호한 유신헌법 아래서의 대통령 긴급조치 9호는 어떤 내용이었나?

 

 

 

1975년 5월13일 공표된 긴급조치 9호의 주요내용

1. 다음 각호의 행위를 금한다.

(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나)집회와 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문서, 음반등 표현물에 의해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학교 당국의 지도,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의례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 시위 또는 정치관여 행위

(라)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2. 제 1에 위반한 내용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들을 제작, 배포, 판매, 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한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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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7-02-01 오후 02:30:00 기사수정 : 2007-02-01 오후 02:5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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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조동문 프레임' 깨지 못해 지지율 낮아&quot;

 

 

 

참여정부, '조동문 프레임' 깨지 못해 지지율 낮아"
'한국판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펴낸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
텍스트만보기   손병관(patrick21) 기자   
 
 
 
ⓒ 지식공작소
"열린우리당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선거마다 패배를 거듭하는가? 별로 잘한 것같지 않은 한나라당은 왜 그리 선전하는가? 참여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왜 일관성 없이 널뛰기를 하더니 바닥으로 주저앉아 움직일 줄을 모르는가?"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신간 <마법에 걸린 나라>(지식공작소, 사진)를 펴냈다. 그의 책은 독자들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조 교수가 올해 12월 대선에서 진보진영의 대응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의 원제는 <진보는 죽었다>였다. 그의 시각에서 참여정부가 출범한 뒤 '나 몰라라' 뒷짐을 진 진보진영을 질타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데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러나 책은 출간을 앞두고 보다 상징적인 제목(<마법에 걸린 나라>)으로 바뀌게 됐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성추행 사건을 일으켜도, 공천헌금 비리가 발각되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술에 걸린 것 같다"고 푸념한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말에서 영감을 얻은 제목이다.

조 교수는 이 책에서 참여정부가 보수진영과의 담론 경쟁에서 패배한 과정을 상술했다. 지난해 정가에 화제를 모은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를 쓴 조지 레이코프 교수의 '프레임 이론'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한 것이다.

그는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수구성향의 조간신문에서 만들어낸 프레임을 석간신문 <문화일보>가 확대재생산하는 이른바 '조동문 프레임'을 깨지 못한 것을 참여정부의 가장 큰 실패 원인으로 꼽았다.

조 교수는 이러한 보수언론에 맞서 대항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한 진보언론과 시민단체에도 책임을 물었다. "노 대통령은 여론을 거역했으므로 선거에 의해 뽑힌 독재"라고 비판한 최장집 교수도, "참여정부와 언론의 싸움은 어른과 애의 싸움"이라고 주장한 강준만 교수도 그의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진보언론과 시민단체가 어용시비를 피하기 위해 보수언론보다 더 가혹하게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고, 열린우리당도 여기에 가세하는 등 결과적으로 진보진영의 분열이 참여정부의 위기를 자초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주고, 탄핵으로부터 구해주고, 열린우리당에 국회 과반수 의석을 몰아준 국민들이 참여정부를 질책하며 등을 돌리는 것에도 그는 "당신은 대통령만 달랑 뽑아놓고 뭘 했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탄생한 것은 국민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인정한 것이지, 새로운 패러다임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는 항변이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노 대통령을 비교하며 두 사람의 성패가 엇갈리는 환경을 비교한 대목도 흥미를 끈다. 두 사람 모두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 ▲기득권 세력과의 대립 ▲여소야대 국회라는 악재를 안고 출발했지만, 클린턴의 경우 노 대통령만큼 언론환경이 불리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조기숙 교수가 지적한 노 대통령의 3가지 잘못

그렇다고 해서 조 교수가 노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참여정부가 낮은 평가를 받는 데 노 대통령이 가장 큰 책임이 있다"며 대통령의 세 가지 잘못을 꼽았다.

"첫째는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의 성공신화에 매몰된 것이 대통령으로서 성공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지역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필생의 신념이 오히려 지역주의를 한국정치의 상수가 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셋째는 초유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적 당청관계에 있어서 한국적 정서를 무시함으로써 바람직한 관계설정에 실패한 것이다."

대통령이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상'을 거부하고 '노무현스러운' 대통령이 되길 원했기 때문에 참여정부의 청와대에서 참모들이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이나 바람직한 대통령상에 대해 조언하는 것을 꺼렸다는 뒷얘기도 소개했다.

그의 여당에 대한 평가는 한층 혹독하다. 대통령의 문제가 스타일에 있다면 여당의 가장 큰 문제는 '콘텐츠의 부재'에 있다는 점에서 열린우리당의 죄질이 더 나쁘다는 지적이다.

그는 "여당은 5·31 지방선거에서도 핵심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복지 정책이 존재하지 않았고 '부패는 용서해도 무능은 용서할 수 없다'는 보수언론의 프레임을 스스로 받아들여 '오만과 독선을 반성하니 싹쓸이만 막아 달라'고 읍소하는 등 제 발등을 찍는 선거운동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열린우리당의 현재 위기는 탄핵 여파로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잡탕정당의 문제라고나 할까. 탈지역정당의 한계라고나 할까. 당내 성공적인 의사소통이 없는 것도 문제다. 초선의원이 108명이나 되니 위계질서가 없고 팝콘처럼 튀어서 의견조율이 여간 어렵지 않다. 한 발씩 양보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오기와 감정싸움으로 끌고 오다보니 결국엔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당내 지역갈등까지 겹쳐서 열린우리당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정당의 이념적 정체성이 불명확하다는 데에 있다. 개념 없는 정당에게 누가 표를 주겠는가."

최근의 통합신당 논의에 대해서도 그는 "콘텐츠에는 큰 관심이 없고 스타일만 바꿔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했다.

조 교수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앞서가는 가장 큰 이유는 여권이 우왕좌왕하기 때문"이라며 "2002 대선이 무너뜨리는 선거였다면 2007 대선은 쌓아 올리는 선거가 될 것이다. 혼란과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 업적의 축적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는 쪽이 이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2007-02-01 09:2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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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의 '백지광고 사태' 호도 파렴치하다

 

 

 

동아>의 '백지광고 사태' 호도 파렴치하다
[민언련 논평]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관련 <동아> 사설에 대해
텍스트만보기   민주언론시민연합(ccdm1984)   
 
<동아일보>가 언론민주화의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진실화해위원회 흔들기'에 나섰다.

31일 <동아일보>는 사설 '반(反)화해 과거사위 본색 드러내기'를 싣고 과거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대한 판결문 분석 보고서'를 공개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본보는 유신정권에 저항하다 언론사에 유례가 없는 백지광고 사태를 겪었다. 그럼에도 이번 판사 명단 공개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은 진정한 화해에 역행한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파렴치한 주장을 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 대해 '재판관 실명 공개'만 의제로 삼아 반(反)화해, 정략적 의도, 편가르기 등 억지 주장을 편 것도 문제지만,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백지광고 사태의 진실'까지 멋대로 끌어다 붙이는 행태는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오늘의 브리핑
 
"보수언론은 왜
사법부 반성 가로막나"
[판사 실명 공개]
 
 
참여정부, '조동문 프레임' 못깨 실패
'IMF 괴물', 자살 3번 결심케한 요물
중국의 모든 길은 올림픽으로 통한다
"핀란드 들어오려면 한국어시험 봐라"
"한국 드라마 모르면 북한서 '왕따'"
박태환 선수 훈련파트너 소개합니다
인기검색어 전파 속도 빛보다 빠르다?
"석궁 습격은 판·검사 오만의 반증"
 
<동아일보>가 "유신정권에 저항"하다 겪었다는 이른바 '백지광고 사태'는 <동아일보>가 쫓아낸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운동에서 비롯된 것임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중앙정보부 요원의 언론사 상주와 편집권 간섭 등을 거부하는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섰다. 그러자 정권은 광고주들에게 동아일보사에 광고를 주지 못하게 했고 이 때문에 '백지광고 사태'가 벌어졌다.

시민들은 지지 광고를 통해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 투쟁을 성원했지만 동아일보사는 유신정권과 한 편이 되어 75년 3월 17일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나선 113명의 언론인을 쫓아냈다.

어디 그 뿐인가? 당시 <동아일보>는 지면을 통해 자유언론 수호투쟁에 나선 언론인들에 대해 "일부 과격한 사원들의 제작 방해" 운운하며 사태의 진상을 호도하려 들었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 자신들이 쫓아낸 언론인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도대체 누가 유신정권에 저항했고, 누가 탄압을 받은 것인가?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는 언론인들을 쫓아냈던 <동아일보>가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백지광고 사태'를 자신들의 '민주화운동 전과'로 내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과거청산 작업을 공격하는 데 악용한단 말인가?

당시 <동아일보>가 쫓아낸 언론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가 바로 민언련의 전신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이다. 우리는 백지광고 사태의 진실을 왜곡하는 <동아일보>의 행태를 접하며 우리의 낯이 뜨거워질 정도의 모욕감을 느낀다. 아울러 철저한 과거청산이 왜 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의 오늘 사설은 사과해야 할 사람들이 '피해자'인 양 나서는 적반하장과 역사 왜곡을 더 이상 방관해서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현재 진실화해위원회는 박정희 정권시절 <동아일보> 광고탄압과 대량 기자해직 사태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우리는 진실화해위원회가 '동아일보의 진실'을 낱낱이 밝혀 국민 앞에 투명하게 공개해주기를 당부한다.

덧붙여 재판관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조차 "반(反)화해"라며 과거청산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동아일보>에게 거듭 촉구한다.

잘못된 판결을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면 국민들은 누구와 '화해'를 해야 한단 말인가? 또 반성할 사람들이 최소한의 반성을 하지 않는데 국민들은 무조건 '용서'부터 해야 하는가?

국민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공개하는 것을 두고 '반(反)화해', '정략적 의도' 운운하며 과거청산 작업을 흔드는 일을 즉각 멈추기 바란다. 지금 <동아일보>가 벌이고 있는 '언론민주화의 역사 왜곡', '진실화해위원회 흔들기'가 모두 후대에 청산해야 할 과거로 남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2007-01-31 21:1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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