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03/18 22:52

나를 위한 노래        - 오철수

 

나는 늘 묻곤 했다
이 길이 정말 옳은가 하고

하지만 답할 수 없었다
내 눈빛이 강렬할지라도
그것은 내 바램에 대한 믿음을 증명할 뿐
옮음의 증거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자꾸 되돌아보려고 했다
가능하면 더 멀리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람의 눈은 한 모퉁이 이상을 볼 수 없었고
되돌아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설혹 볼 수 있더라도
산을 오를 때 본 풍경과
내려갈 때 본 풍경이 완전히 다르듯이
나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길은 길을 증명하지 못하고
나는 늘 길 위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길의 진위에 대해서 모른다
누군가 나에게 길의 옮음을 묻는다하더라도
나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다

하지만 먼길을 걸어본 사람들은 안다
길은 항상 내 발걸음에서 시작했고
내 발걸음에 의해 변해가고
내 마음의 빛과 똑같이 빛나고 있었음을
희망하는 자의 길은 스스로 빛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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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8 22:52 2007/03/18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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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3/12 11:27

거울 앞에서 (이효정)

겨울 야산을 어설피 이고
골 깊은 산맥을 그렸네요

모으고 가다듬고 다독여 본들
어지러이 흩어져 내리는 매무새
어쩔 수 없네요
어쩔 수 없네요

평생을 다스려 오는 안으로의 역사
참으로 쉽지 않은 작업인 줄 알고 있지만
그 길 밖에 없는 것을
바람 자고 햇살 따사로우면
교만이 고개 들고
궂은 비 내리면 좌절과 비굴이 꿈틀거리고

쌓으면 무너지고
쌓으면 무너지고
수없이 되풀이 하는
곡괭이질 삽질이 힘 겨웁네요
이제 남아 있는 세월 몇 뼘이나 될런지
뼘 수가 다할 때까지
이 작업 늦출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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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1:27 2007/03/1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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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3/12 11:21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서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베를 짠다

첫번째 저주는 하느님에게
추운 겨울에도 굶주리며 그에게 기도하였건만
우리의 바람과 기다림은 헛되었다
우리는 그를 원숭이처럼 놀리고,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베를 짠다

두번째 저주는 국왕에게, 부자들을 위한 국왕에게
우리의 비참한 삶을 본 체도 않고
우리를 협박하여 마지막 한푼까지도 앗아가고
우리를 개처럼 쏴죽이게 한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베를 짠다

세번째 저주는 잘못된 조국에게
이 나라에는 오욕과 수치만이 판을 치고
꽃이란 꽃은 피기도 전에 꺾이며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북은 나는 듯이 움직이고 베틀은 삐걱거리며
우리는 밤낮으로 베를 짠다
썩어빠진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거덕거리며 베를 짠다
-하이네(독일), <직조공의 노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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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1:21 2007/03/1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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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3/12 11:18

전사 1  -김남주-


일상 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엄수가 규율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분 일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몸같이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은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 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만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 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자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나의 칼 나의 피, 1993,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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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1:18 2007/03/1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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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둘 글 - 2007/03/12 10:37

 

[지구촌] 랑군의 봄이여 다시 오라


밀림으로 간 학생들. 버마 군사정권의 대량학살로 막을 내린 88년 "랑군의 봄" 이후, 국경 밀림에서 반정부 무장투쟁을 벌여온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이 올해로 창립 10돌을 맞았다. 동시에 내가 이들을 취재해온 지도 10년이 된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이들을 취재하면서 친구가 됐고, 한편으로는 이들의 10년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관찰자가 됐다.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도덕성


세월의 흐름은 국경의 밀림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당시 열예닐곱살 먹은 앳된 얼굴의 중고등학생들은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됐다. 대학생으로 참여했던 이들은 가정을 이루고 민주투쟁 2세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버마 국내외적인 정치환경이 변하면서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전략전술도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럼에도 나는 결코 변하지 않는 학생들의 모습 두가지를 눈여겨 보아왔다. 하나는 조국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고, 다른 하나는 높은 도덕성이다.


그동안 나는 세계 곳곳 혁명세력들을 취재해왔지만 버마학생민주전선이 지닌 도덕적 강고함과 순결함은 어느 곳의 어떤 단체와도 비교할 수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 도덕성이 바로 열악한 조건에서도 지치지 않는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원천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점을 간과한 버마 군사정권은 학생들의 도덕성을 겨냥해 치명적인 공격을 감행하곤 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여러 차례에 걸친 스파이 침투작전과 학생포섭작전도 매번 좌절감만을 맛봐야 했다.


버마학생민주전선의 군법 체계도 처음부터 도덕성 확보에 중심을 두었다. 학생군법은 조직의 명예를 크게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위반할 때는 매우 엄한 징계를 받게 된다. 특히 "성"(性) 문제를 일으킬 때는 그 어떤 경우보다 무거운 징계를 받았다. 남녀 학생들이 함께 조직을 결성했고 다양한 계층과 직종의 시민들이 참여한 까닭이다. 성 문제에 관한 원칙은 전투지역에서 주민을 접촉할 때도 매우 신중하게 지켜졌다. 이 점은 바로 버마학생민주전선이 모든 소수 민족들로부터 환영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버마 국경지역 어디에서나 절대적 환대를 받았고,이들 주민들로부터 보급투쟁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높은 도덕성이 전투에서의 대량희생을 막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버마학생민주전선은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무장투쟁에서 약 250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기록했다. 전체 조직원의 12%를 웃도는 숫자다. 이들의 전사와 무장투쟁은 버마 현대사에 각별한 의미를 남겼다. 버마학생민주전선의 무장투쟁에 여러 민주혁명세력이 합세하면서, 버마사회에 새로운 정치적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버마 분쟁"은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위해 버마인 중심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형태에 불과했다.


비록 숫적으로는 3천여명에 지나지 않지만 버마학생민주전선의 가세로 소수민족들의 해방군과 민주혁명세력이 함께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군사적 통일전선인 버마민주동맹(DAB)과 민족민주전선(NDF)이 결성됐다. 동시에 버마연방민족회의(NCUB)라는 정치결사가 이뤄졌다. 이는 이후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과의 연대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버마의 소수민족 해방군과 민주혁명세력들은 "민주적 중앙정부 수립과 동시에 각 소수민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형태로 연방제를 추진함으로써 해묵은 분쟁을 종식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군사독재 타도 이후의 미래설계를 끝마친 셈이다. 바로 이것이 버마학생민주전선 10년 투쟁의 엄청난 결실이다.



아웅산 수지와의 완전한 연대


95년 아웅산 수지는 가택연금에서 석방된 뒤 나와 가진 단독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바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국경으로 떠나라고 한 적이 없다. 더구나 무장투쟁을 하라고 말한 적도 없다. 학생들은 나와 완전히 다른 노선을 걷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96년과 97년의 인터뷰에서는 버마학생민주전선에 대해 친밀감과 동료의식을 보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희생이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학생들은 우리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이 무장투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군사정부의 공격 때문이었다."


5년 동안의 가택연금 상태에서 아웅산 수지가 현실을 읽을 수 없었던 한계가 있었지만, 이후 아웅산 수지와 버마학생민주전선 사이의 정기적 교신이 그에게 국경 투쟁상황을 이해시켜준 것이다. 특히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나잉옹과 현 부의장 모티준(88년 8월 "랑군의 봄" 당시 학생운동지도자)의 편지가 아웅산 수지를 감동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상황은 아웅산 수지와 버마학생민주전선이 완전한 연대를 통해 공동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다만 아웅산 수지가 표방하는 비폭력평화투쟁 노선과 군사정부의 악선전이라는 반작용 때문에 아직까지 공개적 통일전선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통일전선이 곧 가시화할 수도 있다. 최근 버마연방민족회의(NCUB)는 현재 아웅산 수지가 차량을 동원해 벌이는 "지방방문 투쟁" 결과에 따라 그 가능성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8월21일을 디-데이로 정한 이들의 투쟁은 "랑군의 봄" 10주년을 맞아 더욱 뜨거운 불길로 타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토록 끈질기고 완강하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국경의 민주화투쟁 10년.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버마의 민주화는 학생들의 더 많은 피를 요구하고 있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92년 3월8일. "잠자는 개" 전선을 향한 정부군의 무차별 포격 아래에서 엎드려 쓴 나의 취재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학생들이 부모 형제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가 그 동안의 회포를 나누고, 총 대신 펜을 들고 못다 이룬 학문의 열정을 토해내고, 한편으로는 건설의 망치를 두드릴 때 우리는 버마의 새로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 매사리앙(버마-타이국경)=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1998.8.28 『한겨레21』)



 [지구촌] 특별기고/참으로 아름답던 시절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이른바 "8888"로 불리는 버마의 88년 8월8일 민주화운동에 대해 군사정부가 야만적인 공격을 자행했던 날로부터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릴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지난 10년간의 민주화투쟁은 한편으로 내 삶에 가장 값진 의미로 되살아난다.


88년 당시 의대를 마친 나는 버마에서 각광받는 직업이자 안락한 삶이 보장되는 내과의사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학창시절 나는 정의와 인권을 외치며 나의 직업을 통해 민중들을 돕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고, 그 이면에는 이미 따논 사회적 지위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한때 전선에서도 "왜 안락한 삶을 버리고 밀림을 헤매고 있는가"라는 비이성적인 감상에 빠진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 준엄한 채찍을 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단언컨대, 나의 민주화 투쟁 10년은 그전에 내가 살아온 26년 세월의 어떤 안락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나는 전선에서 동지들과 함께 민주화를 꿈꾸고 버마의 미래를 설계하면서 비로소 인간의 가치와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에 눈뜨게 됐다.



피말리는 전투와 보급투쟁


다시 88년으로 되돌아가면, 당시 나는 군사정권의 시민학살을 보면서, 처음 학생들이 외쳤던 부패한 정치.경제구조의 개선이라는 인식의 틀로는 학살자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투쟁방식을 실현할 수 있는 해방구를 찾아 타이 국경으로 발길을 옮겼다. 88년 9월부터 하나둘씩 타이 국경에 모여든 학생들은, 대영국 반식민 투쟁과 대일본 독립투쟁을 선도했던 선배들의 영혼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학생운동의 상징인 다운(깃발) 아래 결성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은 민주화를 쫓는 모두에게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되었다. 인종, 종교, 계급의 평등을 내건 버마학생민주전선은 88년 "랑군의 봄" 주역들과 교사, 공무원, 농민, 군인, 노동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민주혁명의 집합체로 태어났다.


그러나 조직 경험의 부재와 소수민족해방군들의 불신으로 인해 처음부터 우리의 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소수민족해방군들은 당시 학생들을 믿지 못해 총도 지급하지 않은 채 우리를 전선으로 투입했다. 이 "시험기" 동안 버마학생민주전선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생명을 바쳐 "믿음"을 얻었고, 그 희생이 무기 확보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군사훈련은 실전으로 대치되었고, 단 한발의 총알이 목숨보다 귀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나에게는 버마학생민주전선 전체의 생명이 맡겨졌다. 나의 군사작전 실수는 곧바로 동지들의 귀한 목숨으로 이어진다는 피말리는 긴장과 더불어 동지들을 먹여야 하는 보급투쟁에 대한 책임이 또하나의 과중한 현실로 다가왔다. 심지어 버마혁명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된 1992년의 "잠자는 개" 전투에서도 우리는 소수민족동맹군들과는 달리 식량보급에 쪼들렸다. "전선 전투조 하루 두끼, 후방 투쟁조 하루 한끼"라는 당시의 상황은 아직도 나에게 가장 가슴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피냄새가 역겨워 밥을 못 먹겠다"는 핑계를 대며 먹는 자리를 피하던 동지들의 그 의연함은 바로 우리의 명예였고, 민중의 승리를 예견하는 도덕적 가치였다.


그러나 우리가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이해에서는 국제사회가 매우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한겨레21>이 나에게 준 귀한 지면을 통해 "우리의 무장투쟁 10년은 생존을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세계의 양심들에게 약속한다


국제사회는 1만명이 넘는 학생, 시민들이 학살자들에게 쓰러져가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평화"만을 노래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어떤 문명에서도 불의 앞에 고개숙인 채 죽어가라고 배운 적이 없다. 우리는 어떤 문화에서도 왜곡된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배운 적이 없다. 조국 버마의 역사는 우리에게 진실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나는 민주투쟁 10년을 맞아,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세계의 양심들에게 마음으로부터 고마움을 전하면서, 명예로운 투쟁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지킬 것을 거듭 다짐한다.


끝으로 나는 한국인들의 빛나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늘 우리의 곁에서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가 돼 왔음을 이 기회를 빌려 고백하고 싶다. 덧붙여 지난해 아태평화재단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한겨레21>의 오귀환 전 편집장을 비롯한 한국의 정신적인 많은 친구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전하고 싶다. [나잉옹(Naing Aung) 버마학생민주전선] □ 번역 정문태/ 프론트라인 뉴스서비스.국제분쟁 전문기자(1998.8.28 『한겨레21』)




[지구촌] 버마학생민주전선(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


88년 8월8일의 버마민주항쟁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군사정부의 폭압적인 유혈진압에 항거해 국경으로 투쟁의 장을 옮겼다. 타이쪽으로 주력이 이동했고 일부는 중국, 방글라데시, 인도 국경으로 해방공간을 찾아나섰다. 초창기에는 거의 1만5천명을 웃돌았으나 대개는 산악밀림에 적응하지 못해 국외로 망명하거나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들 가운데 약 3천여명이 88년 11월1일부터 카렌민족해방군(KNLA)의 코무라부대에서 제1차 버마학생민주전선 대표자회의를 열고 정식으로 조직의 깃발을 올렸다. 이후 이들은 카렌, 몬, 카레니, 카친, 산을 비롯한 버마 국경의 소수민족 해방군들과 동맹을 맺고 무장투쟁에 돌입했다.


88년 11월 이후 버마학생민주전선은 버마 내의 거의 모든 전선에 투입되면서 지역과 인적 지지를 성공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94년 소수민족 해방군들이 버마 군사정부와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동맹은 치명타를 입었고, 96년엔 카렌민족해방군이 다스리던 국경지역을 잃고 말았다. 결국 버마학생민주전선은 해방구를 상실한 채, 97년부터 무장투쟁노선의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에 처했다. 이들은 97년 8월부터 무장투쟁노선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정치투쟁" "외교투쟁" "교육투쟁"을 벌여나가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1998.8.28 『한겨레21』)



[아시아네트워크] 내 인생의 여섯 가지 물음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겸 버마연방민족회의 중앙위원 나잉옹의 고백


1965년 양곤 출신인 나잉옹은 맨달레이 의과대학을 마치고 벽촌 의사로 주민들을 돌보다가 1988년 9월18일 군사쿠데타 직전 버마-타이국경의 산악밀림으로 탈출했다. 그는 선배들의 대영국 반식민지투쟁에 빛났던 깃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을 재건하고, 1988년 이른바 ‘양곤의 봄’에 참여했던 학생과 시민을 조직해 군사독재타도와 민주화를 외치며 무장투쟁에 돌입했다. 그는 버마학생민주전선의 민주해방군을 이끌고 카렌과 몬을 비롯한 국경의 민족해방세력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한 이른바 버마민족민주동맹(NDF)의 한 중요한 축이 되어 버마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해 왔다. 현재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의장 겸 버마의 민주․민족해방세력들의 결집체인 버마연방민족회의(NCUB)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정치투쟁에 주력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지닌 정치적인 전망과 견해는 그가 일생동안 경험한 일들의 농축물이다.󰡓


이 기본적인 명제를 떠올리며 늘 친숙한 <한겨레21>에 나의 고백을 시작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물음’과 함께 삶을 시작한다고들 말한다.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서서히 제한된 자기 영역으로부터 뛰쳐나오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다른 모든 이들도 자기와 똑같이 대답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안식처를 찾기 위한 대답들을 좇아 결국 사람들을 󰡐물음의 강󰡑에 함께 뛰어들어 함께 흘러가게 되고, 어떤 이들은 지치거나 가라앉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헤엄을 치기도 한다.



나는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가


첫 번째 물음 : 내 길지 않은 삶에서 가장 끈질긴 물음은 “왜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나”라는 것이다. 이 물음이 어떤 이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겐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숙제다. 아홉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심하게 싸운 뒤, 나를 품에 안은 어머니가 이혼하겠다면서 흘리던 눈물이 내 얼굴을 적신 적이 있다. 이때 나는 충격을 받았고 처음으로 가족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어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큰 공포심으로 다가왔다. 이때부터 내가 누군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나도 죽게 될 것이고 내가 죽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사람이 얼마나 미물에 지나지 않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기댈 곳이나 안식처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도 함께 느꼈다. 정직하게 말하면, 이런 생각의 사슬 안에서 아직도 나는 아이처럼 살아가고 있다. “내가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는 무엇인가?”


두 번째 물음 : 그뒤 나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이웃에 개인도서관을 가진 ‘책부자’ 할머니가 살았고, 그는 내가 책을 즐겨 읽는다는 사실을 알고 내게 제한없이 많은 책을 빌려주었다. 그 중에서도 당시 유행했던 중국 무협지는 어린 나를 매료시켜 버렸다. 무협지 속에 등장하는 지적이고 용맹한 인물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고 남을 위해 희생해 가는 과정들이 마치 나의 신념처럼 내게 각인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독서가 안식을 주는 좋은 상대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독서를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넓게 보는 다행스런 버릇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물음을 하나 더 보탰다. “왜 교과서는 내가 바깥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담고 있지 않는가?”


세 번째 물음 : 학교생활, 그게 성적을 말한다면 나는 분명 최고의 학생이었다. 모든 종류의 시험에서 나는 늘 가장 뛰어난 점수를 받았고 해마다 최고 학생으로 뽑혀 상을 휩쓸었다. 이건 부모님의 정열적인 지도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기억한다. 그럼에도 내겐 교육에 대한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8학년 때, 나는 버마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정부가 지원하는 여름캠프인 ‘루웨춘 프로그램’의 학교대표로 선발되었고, 다시 지역대표 경선에 출전했다.


이건 집권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이 전국의 인재들을 뽑아 당원으로 충원하던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당시 나의 마지막 경쟁자는 지역군사령관인 연대장의 아들이었다. 결과는 그의 승리였고 나는 패배했다. 당시 나는 내가 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심한 동요를 일으키며 수많은 의문 속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내가 모두 잘못되었단 말인가?”



의사의 이상형에 대한 끝없는 의문


네 번째 물음 : 내가 어릴 적부터 늘 의사가 되기를 권했던 아버지는 물리학자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마에서 극존칭에 해당하는 사야(스승)라 불렸고, 나는 이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내 스스로도 의사가 되겠다고 너스레를 떨고 다녔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나는 수학과 물리학에 크게 재미를 붙였고 공과대학으로 진학하겠다는 뜻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부모님은 내 계획을 거부했고, 난생 처음 부모님과 심한 논쟁을 벌인 끝에 가출해 버렸다. 17살 때 일이었다. 얼마 뒤 어머니에게 붙들린 나는 어머니에게 설득당해 공과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가슴에 손을 얻고 “네가 의사가 되는 길만이 내가 늙어 병들었을 때 나를 보살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건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이길 수 있는 버마식 설득법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나는 결국 어머니의 뜻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무렵 나에게는 또 하나의 의문이 추가되었다. “누가 누구를 선택하는가? 내 삶을 내가 선택하는가 혹은 내 삶이 나를 선택하는가?”


다섯 번째 물음 : 대학 진학을 위한 최종 시험 결과 전국의 550등 상위권에 들었다는 사실도 내겐 의미가 없었고, 맥빠진 의과대학에 진학해서도 나는 의사가 되는 일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A학점 학생의 꼬리표는 이제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간판을 따기 위해 그저 재시험을 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정열을 바쳐 공부할 까닭도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여학생 기숙사 주위를 맴돌았고 밤새도록 기타치며 노래나 불렀다. 시를 끼적이는 재미에 빠져 공부란 건 그저 시험이 가까워 오면 날치기로 넘어가는 정도였다.


그러던 내게 고민의 시간이 다가왔다. 고통받는 환자들이 쪼그려 앉아 있는 병원 모퉁이에서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간판용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갔을 때, 저 환자들의 생명이 나의 부족한 지식과 미숙한 경험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면….” 나는 갑자기 불안감에 휩싸였고, 이때부터 최선을 다해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에 대해 공부하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돈만을 좇는 의사들을 보면서 나는 다시 갈등에 빠졌다. 의사들이 병원에서 무료로 지급하는 약을 빼돌리는 대신 가난한 노동자들이 바깥에서 약을 사서 병원에 들어오는 현실은 나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이무렵 나는 또 하나의 충격을 받았다. 같은 의과대학을 다니던 한 친구의 모습은 나에게 삶의 긴장을 강요했던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붕이 없는 집에서 살고 있던 농부들인 그의 가족들과 우연히 마주친 순간 나는 정신없이 달아났다. 알고보니 그 친구는 야간엔 공사장 경비원으로 일하며 학비를 벌고 있었다. 그뒤 의사란 직업의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스스로 의사의 이상형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오직 환자의 건강에 대해서만 물을 뿐 환자들에게 치료비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의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의과대학생 가운데 유일한 환자가 되었다.



혁명전선에서 희망의 빛을 보다


여섯 번째 물음 : 의과대학 졸업반 시절, 양군의 대학생들은 화폐개혁반대와 경제개혁을 내걸고 반정부 시위에 돌입했다. 정치적 집회는 불법화되었고, 나는 결국 아버지를 따라 카렌주의 몰메인으로 옮겨가 시골 벽지에 조그만 의원을 열었다. 당시 의과대학을 마치고 의사면허증을 받은 이들은 대개 정부 산하의 의료원에서 숙련기간을 거치기 위해 또다른 시험을 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는데, 버마식 사회주의체제 아래 정부 병원에 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당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였다. 내겐 이런 구조가 지성의 존엄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졌고, 따라서 그런 그물망에서 벗어나 벽지에서 내 방식대로 최선을 다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무렵 민주화와 인권을 외치는 학생들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여기서 나는 빛을 보았다. 이 빛은 군사독재로부터 자유를 찾는 일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존경하며 삶의 의미를 누려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해 절망하고 있던 젊은이들에 대한 희망의 빛이기도 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내 판단에 따라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혁명전선에 뛰어들었다. 돌이켜보면, 이전까지 나의 삶은 쉽게, 쉽게 현실을 따라 떠다니는 꼴이었다. 혁명전선에 뛰어들고부터, 혁명은 내가 지녔던 편리한 현실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스스로 내린 결정을 결코 후회해본 적이 없다. 비록 나의 길은 멀고 험할지라도 나는 나의 목적지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나는 스스로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직도 나는 많은 물음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의문들에 대해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분명히 어떤 미래 속에 내가 있을 것이며, 대답들을 찾아낼 수 있는 오솔길을 보았기 때문이다.

닥터 나잉옹(Dr.Naing Aung)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겸 버마연방민족회의 중앙위원(『한겨레21』 2000년09월20일 제326호)




[아시아네트워크] 󰡐무장항쟁󰡑전략을 재점검한다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나잉옹의 고백II- 버마 민주화투쟁 어디로 가는가


1988년 9월 나는 무장투쟁을 위해 학생들보다 다소 일찍 버마-타이국경에 도착했다. 그 국경밀림지대는 1947년 버마 독립 뒤부터 평등과 자결을 요구하며 중앙정부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소수민족들의 해방구였다.


그 무렵 버마 내부에서는 민주화를 외치며 시민․학생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고, 이들을 무력진압하던 군부는 결국 1988년 9월18일 유혈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부터 청년․학생들은 무리지어 국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장투쟁을 결심한 까닭은 군사정부가 중무장군인들을 투입해 평화적인 시위를 유혈진압했던 탓이고,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는 비무장투쟁 전략으로는 전망이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청년․학생들은 무장투쟁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으면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을 재건했고 산하에 학생군을 조직하게 되었다.



밀림의 땅바닥에서 자던 시절


그러나 버마 각지에서 몰려 온 서로 얼굴도 모르던 3만여명의 청년․학생들을 조직해내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이 넘는 이들이 국경 밀림의 고통스런 생활을 견디지 못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부모님들의 품에서 안락한 생활을 해왔던 학생들에게 생존을 위한 밀림의 삶은 마치 달콤한 꿈에서 갑자기 깬 것 같은 무거운 현실이었다.


이불도 없이 땅바닥에서 잠을 잤고, 모닥불을 피우고 거친 삼베를 뒤집어 쓴 채 산악밀림의 혹한을 견뎌내야 했다. 먹을거리라곤 콩죽과 버무린 물고기반죽이 다였고, 만연하는 말라리아에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져갔다. 이런 가운데 다행스럽게 몇몇 이들이 오두막 만드는 재주를 지녀 집단별로 서로 상의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이를 계기로 각 지역 단위의 운영조직을 마련할 수 있었고 마침내 선거를 통해 중앙 단위의 지휘부를 결성하게 되었다. 모두 힘이 부쳤지만 강한 결심과 역동성을 밑천삼아 불굴의 의지로 일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도착했던 국경지역에도 학생조직이 만들어지면서 나는 캠프를 총괄하고 간이진료소를 책임지는 캠프 리더로 선출되었다. 캠프를 이끄는 책무가 힘든 만큼 진료소는 또 내게 기쁨을 주었다. 적어도 나는 이 진료소를 찾는 환자들에게 내가 챙길 돈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던 셈이다. 그러면서 이 간이진료소를 입원실까지 갖춘 작은 규모의 밀림병원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히자, 점점 요구가 확대돼 혼자서 일을 처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국경으로 온 이들 가운데 의과대학생들을 불러 모으는 한편 일부 학생들에게 의료교육을 실시해 위생병 역할을 맡겼다.


이런 가운데 1천여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캠프를 이끌어야 하는 지휘부는 내남없이 탈진했다. 지휘부로서, 우리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희생과 인내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이나 반대쪽으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에 시달려야 했다. 갖가지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스스로의 용기와 결심을 시험당한 시절이기도 했다. 총구를 들이댄 한 젊은 승려에게 칼로 목구멍을 서너 차례 찔리는 일도 있었고, 술에 취해 찾아와 욕설을 해대는 이들을 상대하는 일쯤은 그저 일상이었다. 어쨌든 나는 인내하고 아량을 보여야 했다. 이들 모두가 동지들이고 한편으로는 이들에게 투쟁의식의 토태를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뒤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도 처음 국경에 도착했을 때와 비교하자면, 각자의 정치적 의식은 크게 성숙되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쏟아지는 포탄 속에 소총을 껴안고…


우리가 처음 국경에 도착했을 때를 회상해보면, 품고 온 무장투쟁의 꿈과 달리 우리의 손에는 단 한 자루의 총도 없었다. 물론 누구도 무기를 주지 않았다. 다만 재외 버마망명단체들과 국제단체들의 일부 인도적인 차원의 지원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군사정부의 폭압에 맞서 무장항쟁의 뜻을 안고 국경에 도착한 시점은 국제적으로 냉전이 와해되기 시작하는 들머리쯤이었다. 1년 뒤엔, 중국공산당의 지원이 약화된 버마공산당(CPB) 내부에서 소수민족과 연계된 일부가 쿠데타를 감행했고, 이에 따라 버마공산당의 고위지도부가 중국으로 도피하면서 이들의 무장투쟁도 급격히 붕괴되던 때였다. 지역적으로는 강대국들이 캄보디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내걸고 개입하기 시작하던 무렵이기도 했다. 게다가 새로운 개념과 용어들이 국제사회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평화적 결속’이니 ‘상호주의’ 같은 말에다가 ‘정치적 문제는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한다’는 개념들이 나돌았고, 특히 자유무역을 내세운 ‘세계화’라는 말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말하자면 반대쪽 이데올로기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일 자체가 명분을 얻기 힘든 시기였다. 우리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급변기 한복판에서 총을 들 꿈을 꾸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강력한 자결에 대해 태만하지 않았다. 그 첫걸음으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소수민족들을 지원했다. 물론 소수민족들로부터 ‘믿음’의 신호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우리가 바로 그들을 억압했던 버마의 중심부에서 온 버마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와 같은 버마인 억압자들로부터 우리가 받았던 압박감을 이 국경의 소수민족들이 똑같이 느끼며 업악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소수민족들과 똑같은 미래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소수민족들이 볼 수 있게 노력했다. 우리는 소수민족들이 잠자는 대로 똑같이 잠을 잤고 그들이 먹는 대로 함께 따라 먹는 일부터 시작했다. 우리는 소수민족들의 무장투쟁을 돕겠다며 탄약과 먹을거리를 지고 그들이 싸우는 전선으로 함께 따라 나섰고, 전선에서 부상당한 소수민족 전사들을 본부로 옮겨다 주는 일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수민족들의 정치적 지혜와 우리의 연대의식을 통해 마침내 우리는 소수민족들에 ‘민주혁명세력’과 ‘소수민족해방세력’들 사이에 정치적 목적과 목표를 통일하자는 정치적인 제의를 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소수민족해방군들로부터 무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장투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기의 ‘무’자도 몰랐던 우리는 스스로 모든 과정을 하나씩 익혀 나갔다. 버마인들의 해방을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한다는 우리의 과업과 결의를 명예로 여기며. 군부가 우리의 강력한 신념과 결의를 보고 더이상 무기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 믿으며. 그리고 우리의 무장항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내 우리는 무장항쟁을 지탱하기 힘든 수많은 현실들과 부딪혔다. 무엇보다 우리는 말만 무장항쟁이었지, 버마정부군이 지닌 화력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열악한 무기를 지녔음을 깨달았다. 버마정부군이 비오듯이 포탄을 쏘아대는 동안 우리는 소총을 껴안고 숨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적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항은 계속된다


정의를 위해 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국내외의 민주화와 관련된 여러 조직들로부터 보급과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공격적인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 전쟁을 수행한다고 믿고 있던 우리로서는 이들의 지원이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기를 바라기까지 하면서. 그러나 이 희망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버마의 시민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우리의 모든 노력은 냉전의 종식을 선언한 국제정치의 변화, 말하자면 강대국들이 정의보다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강조하는 발상에 가로막혀 헛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결코 억압된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억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의 무장항쟁은 버마 내부와 국제사회로부터 강력한 지원 없이는 더이상 발전할 수는 없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20세기 초, 대영국 반식민지․독립투쟁을 벌이던 때와 현재 우리의 반군사독재투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민중에 기반을 두고 민중 사이에서 발전시키는 무장항쟁.’ 이 전통적인 전략이 오늘날의 시민들에게는 더이상 유효한 대답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대다수 소수민족해방세력들이 생존을 찾아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 압박을 강요하는 주변국들에 눌려 버마군사정권과 휴전협정을 조인해버린 상황 속에서, 현재 우리는 심각하게 현실을 다시 점검하고 있다.


무장항쟁의 역할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떻게 적들을 물리칠 것인지, 어떻게 시민들의 열망을 실행시켜낼 것인지…. 우리에게 넘겨진 새로운 질문들에 대해 이제 우린 대답을 해야 할 시간 앞에 서 있다.  □ 닥터 나잉옹(Dr.Naing Aung)/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겸 버마연방민족회의 중앙위원 (『한겨레21』 2000.9.27 328호)



[아시아네트워크] 국경밀림에서 싹튼 사랑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나잉옹의 고백 III- 동지들에 대한 책임과 혁명적 애정관계


“벌써 12년간이나… 혁명에 대한 애착이 결국 결혼생활 4년 동안의 애정보다 더 중요한 건지….” 결혼한 지 4년 만인 1988년, 아내를 고향에 남겨둔 채 혁명의 꿈을 안고 버마-타이국경으로 온 한 동지는 최근 밀선을 통해 고향의 부인으로부터 이런 사연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동지들의 󰡐가족정신󰡑이 뿌리내리다


우리 모두는 이해한다. 오랫동안 홀로 남겨진 아내들의 이 감정 폭발을. 혁명에 대한 애착과 결혼에 대한 애정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나는 그의 부인이 말한 혁명에 대한 우리의 애착과 혁명전선의 동지애는 모두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고향을 떠나올 때 부모님과 가족들에 대한 정은 그리 힘들지 않게 끊을 수 있었으나, 혁명에 대해서는 쉽게 그럴 수가 없다.” 한 동지의 말처럼 이게 진실이다.


개인적인 이익과 상관없는 12년간의 혁명과업을 오늘날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까닭은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자유’에 대한 즐거움 탓이다. 물론 이건 아이들이 가출하면서 느끼는 종류의 자유와는 다른 것이고. 내가 혁명에서 느끼는 자유의 즐거움은 압박과 공포로부터의 해방이며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믿음 속에서 표현하고 반성하는 자유에 대한 배움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에 대한 책임 같은 것이다. 자유를 추구하면서 나는 자신을 발견하는 ‘부수익’도 얻었다. 내가 자유를 발견했을 때, 마침내 나는 내 두발로 일어서기를 시도했다. 이건 스스로를 찾기 위한 시도였다. 나는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의장으로서 혁명공동체의 동지들과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야 했고, 스스로 생존할 때만이 독립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걸 성숙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기회로 여겼고 또 비록 상황은 가혹했지만 자유의 경험은 민주화를 위한 혁명전선의 고통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 모두에게는 쉽게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애착이나 애정 같은, 말하자면 동지애가 형성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처음 국경 밀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대다수는 서로 얼굴도 몰랐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공동의 신념 아래 함께 살기 위해 그리고 혁명적인 삶을 나누기 위해 서로를 지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셈이다. 우리의 밀림생활은 고향의 경험과 같을 수도 없었고 같지도 않았다. 병영에서는 고향의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음식을 마련해주셨던 것처럼 우리 서로가 부모님이 되어 동지들의 먹을거리를 장만했다. 부모님이 만들어 주셨던 침대에서 잠을 잤던 우리는 이제 각자 부모님이 되어 동지들의 병영을 만들었다. 병든 부모님 보살피기를 주저했던 우리는 지금 대신 병든 동지들을 보살피고 있다.


가족과 집을 떠나온 우리에게 동지들이 유일한 가족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는 ‘가족정신’이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담요 한장을 두명이 덮었고 슬리퍼 하나를 순서대로 신기도 하면서 나는 동지들의 것을, 그들은 나의 것을 내것처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결코 누구도 질투하거나 근심하거나 쩨쩨하게 굴지 않았다.


때때로 우리는 잠자리도 없었다. 누울 만한 빈자리가 보이면 그게 누구의 자리든 함께 몸을 부대꼈다. 언제든 어디서든 모두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이런 동료의식과 가족의식은 우리에게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제공했다.



최고전략가 툰우의 죽음


밀림의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우리는 수많은 죽음과 결혼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목격했다. 내가 밀림에서 처음 맞이한 동지의 죽음은 말라리아 때문이었다. 그는 예전에 우리의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는 그의 죽음 앞에 참으로 공허해졌다. 병영의 모든 이들은 낙담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해 그의 장례식을 치렀다.


내게 가장 큰 슬픔을 주었던 동지의 죽음은 버마학생민주전선 군사작전의 최고 전략가로 모두가 신뢰했고 내가 크게 의지했던 툰우였다. 그의 죽음은 버마정부군이 맹렬하게 버마학생민주전선의 본부를 공격하고 있던 1995년이었다. 정부군의 공격이 극에 달했던 이 기간에 나는 주로 배를 타고 전선 시찰을 다녔다. 하루는 길을 떠나기 위해 배를 준비하고 있던 내게 툰우가 다가와 말했다. “미스터 체어맨, 나도 함께 가겠소.” 나는 “당신은 어젯밤에 한잠도 못 잤으니 여기에 남게”라고 말했으나 그는 “괜찮소. 이건 내 의무이기도 하오”라며 따라나섰다.


결국 나는 그의 동행을 허락했다. 사실은 잠시나마 그에게 전투로부터 긴장을 풀게 해주고 싶었던 뜻으로. 그러나 우리가 탄 전선 시찰용 배는 바위에 충돌해서 전복되었다. 당시 살윈강은 그리 깊지는 않았으나 물살이 매우 거칠고 빨랐다. 툰우는 수영을 할 줄 몰랐고 결국 실종되고 말았다. 적들에 포위된 상태였던 우리는 그의 주검을 수색할 수 없었다. 그의 죽음으로 모든 동지들은 참으로 큰 비탄에 잠겼다. 툰우의 장례식에서 우리 모두는 울었다. 나도 몹시 울었다. 버마에서 밀령을 통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나는 결코 울지 않았다. 그러나 동지, 툰우를 잃은 슬픔은 참을 수가 없었다.


모든 동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버리고 버마를 위해 몸바쳐 싸우다 불의의 죽음을 당하는 현실 앞에서, 사라져간 동지들의 끝나지 않은 과업을 위해 살아남은 이들은 책임지고 혁명의 완수를 위해 노력할 것을 우리는 수도 없이 다짐했다.


사라져가는 동지들의 영혼 아래, 한편 새삶을 건설하는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인구도 늘어갔다. 대다수 동지들이 처음 혁명에 참가할 무렵 미혼이었으나 그사이 세월이 흘러 많은 이들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밀림의 결혼식? 나는 직책상 동지들의 부모님을 대신해서 신부- 국경의 소수민족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는 경우- 쪽 부모님을 만나 상견례를 하고, 동지들은 새로 태어나는 부부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그들이 살 집을 지어준다. 그리고 신혼부부는 밀림에서 마련한 조촐한 먹을거리로 동지들을 초청해 함께 한끼를 나누는 것이 밀림결혼식의 전부다.


이렇게 병영에서 태어나는 새 생명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 아이들은 결국 우리와 같은 혁명전사로 자라나고 있다. 우리는 버마의 미래가 달린 이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한 어린 시절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면서 특히 교육사업에 집중했다. 우리는 밀림 속에 학교부터 지었다. 처음엔 보육원을 지었으나 아이들의 성장에 맞춰 지금은 고등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다. 나는 밀림 속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훗날 이 아이들이 자랐을 때 안전하고 풍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보여주고 싶다는 소망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이러다보니 처음 우리가 국경에 도착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책무가 커져가고 있다. 세월의 흐름과 동시에.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는 절대금기


다른 동지들처럼 나도 혁명 속에서 결혼을 했다. 지난해 10월 결혼한 나는 이제 결혼 1주년을 앞두고 있다. 내 아내는 나와 같은 신념을 지녔고 같은 삶을 살아온 이다. 아내는 1990년 밀림을 떠나 미국에서 공부한 뒤 1998년 다시 국경밀림으로 돌아와 현재 혁명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가 국경으로 되돌아온 1998년부터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혁명의 조건 속에서 혁명의 지도자라는 나의 위치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처음엔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순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든 장애물을 넘어섰다. 혁명전선의 시작으로부터 살아 있는 현재까지를 통틀어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한 여성으로부터 지금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내 아내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럼에도 현실은 우리 부부의 사랑에는 우리 둘만을 위한 삶을 건설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주저없이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혁명 속의 삶이 결코 평범하지 않듯이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개인적인 것들보다는 동지들과 혁명을 위한 것들이 늘 우선된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혁명과 결혼한 신랑과 신부 모두에게 주어진 공동의 과제다. 따라서 모든 동지들이 결혼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항상 맨처음 묻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너의 혁명적인 삶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 부부에겐 잠자리에 들 때말고는 개인적인 시간이 없다. 귀가시간과 출근시간이 따로 있을 수 없고 토요일과 일요일 같은 휴일도 의미가 없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때가 바로 근무시간이고 이 근무시간은 혁명이 완수될 때까지 계속될 성질의 것이다. 이건 규칙이나 명령이 아니라 다만 동지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우리의 판단 때문이다. 만약 우리들이 동지들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동지들은 그만큼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우리에게는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무도 강요한 적이 없는 금기 같은 게 하나 있다. 절대로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상황이 발생하면 조건없이 일을 찾아 길을 떠나고 공동체의 남은 이들이 우리의 가족들을 돌보는 책임을 지게 된다.


사실은 우리의 혁명적인 삶은 상호 깊은 애정으로 묶여 있고, 동지들에 대한 책임은 미래에 대한 출발로 늘 인식되고 있다. 여기 이 밀림은 작은 사회지만 우리가 건설하고 싶은 미래와 매우 닮았다. 조직을 위해 모든 우선권을 바치는 혁명에 대한 헌신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다른 동지들의 아이들을 위한 것으로 믿고 있는 사회다.


여기서, 나는 우리의 자아에 대한 의문들을 <한겨레21> 독자들에게도 남기고자 한다. 󰡒당신들은 우리의 혁명적인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까?󰡓□ 닥터 나잉옹(Dr.Naing Aung)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겸 버마연방민족회의 중앙위원 (『한겨레21』2000년10월11일 제329호)



 


[아시아네트워크] 󰡐학생정치󰡑를 떠나 󰡐기성정치󰡑로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나잉옹의 고백IV- 무장조직을 떠나며 존경하는 동지들에게 마지막 인사


비록 무장투쟁을 통해 혁명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정치적 이념과 경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자면 혁명에는 무장투쟁의 법칙과 동시에 정치투쟁이 함께 존재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 같은 것이었다. 나는 버마 내부의 서로 다른 민족들이 힘을 모아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완전한 평화라는 최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시간표를 지녀야 한다는 데 주목했고, 결국 혁명전략을 일부 수정하게 되었다.



이기적인 국제사회에 대한 절망


그동안에도 우리 버마학생민주전선은 민족화해를 외치며 군사정권에 대화와 협상을 촉구해 왔다. 우리는 이를 통해 평화를 정착시키고 빈곤에서 벗어나 국가를 재건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가 군사정부를 두려워해서거나 우리가 혁명의 토대를 잃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해왔다고 군사독재를 인정한다는 뜻은 더욱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완전한 복구를 향한 평화적이고 순조로운 이행과정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군사독재정권은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왜? 그 까닭은 너무 명백하다. 공포를 억압의 무기로 사용한 이들은 자신들이 늘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사람들은 대개 진실을 보는 능력이 공포에 가려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류사를 통해 시민들은 수많은 독재자를 봐왔고, 그 독재의 억압이 혁명을 낳았고, 마침내 혁명이 독재를 타파하고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줄기차게 해왔다. 시민들의 항거와 세상의 변화는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이유로도 중단될 수 없었던 것이 역사의 경험 아니던가.


이쯤에서 나는 버마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투쟁과 국제사회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1988년부터 버마 군사독재정권이 시민들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이자 버마 민주화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현실 국제사회는 세계 시민들의 관심과 달리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미국, 캐나다, 유럽 그리고 스칸디나비안 국가들은 버마의 실질적인 독재기구인 국가평화개발회의(SPDC)에 경제제재를 비롯하여 강력한 압박정책을 펼친 반면, 아세안(ASEAN) 회원국들은 이른바 ‘건설적인 관여’라 말해온 회원국 상호간의 국내 문제 불간섭 원칙을 내걸고 버마를 고립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아세안의 이런 입장은, 첫째 회원국 사이에 서로 다른 원리와 정책을 지닌 탓이며 둘째는 오랫동안 깊이 뿌리내려온 전통적인 신념을 바꾸고 싶지 않은 탓이며 나머지 하나는 버마가 중국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참고로 중국은 버마군사정권이 1988년 유혈쿠데타를 일으킨 때부터 이 독재정권을 지원해온 중추세력이다. 중국은 국제공산주의를 폐기처분하면서 다른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고, 결국 강력했던 버마공산당이 해체되면서 버마 상황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버마를 경제․군사적 최대 전략지대 가운데 하나로 여겨온 중국은 버마의 민주화를 직접적으로 방해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버마가 서구식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중국의 대버마 정책이란 건, 버마와 국경무역을 원활히 하고, 국경 안보문제에 말썽이 없고, 마약 근절과 같은 사회문제를 잘 이끌어갈 안정적인 정부라면 그게 누구든 상관없다는 수준인 셈이다. 이런 까닭에 아세안 회원국들 입장에서는 중국 정부라는 든든한 배경을 지닌 버마정권을 놓고 부담을 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중국과 경쟁관계에 있는 인도마저 버마군사정권과 좀더 강력한 관계를 형성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아시아의 시장 확대를 통해 아시아의 경제 군주가 되고 나아가 세계경제를 주도하겠다는 야심에 찬 일본도 버마의 독재자들과 꾸준히 협력해 오고 있는 현실이다. 이처럼 모든 나라들이 버마 사안을 놓고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좇는 이기적인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말이다.


국제사회의 이기심 속에서 버마사회는 이미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군사정권의 압박에 못 이겨 피난민이 되어 국경을 넘고 있으며, 경제파탄으로 생존 위기에 직면한 시민들은 불법노동자의 꼬리표를 달고 한국을 비롯한 외국으로 흩어지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알다시피 버마는 국제사회에서 마약의 온상으로 악명을 떨치지만 군사정권의 독재자들은 실질적인 마약퇴치에는 관심도 없다. 이 버마의 마약문제는 에이즈문제와 관련을 맺고 쌍둥이형 폭발력을 보이며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인간적인 세계화


자, 마약과 에이즈문제, 이걸 버마만의 문제로 무시해버릴 것인가, 아니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할 것인가. 이건 당신들의 선택이다. 인류의 대중적인 민주화와 인권문제를 언제까지 영역과 지역에 따라 제한적인 용어로 사용할 것인가. 물론 이것 또한 국제사회, 당신들의 선택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계화는 경제적 이익에만 골몰해온 신자유주의 같은 천박한 꼴이 아니라, 진정으로 세계의 시민들이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함께 나누고 상호 이해의 바탕 위에서 서로에게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교감 같은 것이다.


이건 관세장벽을 뚫기 위해 교묘히 설쳐대는 다국적기업의 성장을 극찬하기보다는 폭격지역에서 부상당한 보스니아의 아이들을 안전지대로 옮겨내야 한다고 이역만리 버마-타이의 산악밀림에서 울분했던 우리의 정서 같은 것이다. 물난리를 겪고 있는 중국의 할머니들에게 먹을거리라도 보내고 싶은 우리의 심정 같은 것이다. 탈리반의 극단적인 근본주의 아래 고통받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소녀들을 위로해 주고 싶은 우리의 마음 같은 것이다. 비록 그 가능성은 눈곱만치도 없지만, 세계 어디를 여행하든 비자없이 신분증만 있으면 되는 세상, 이게 바로 시민들을 위한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고, 이게 우리가 바라는 세계화다.


나의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나는 한국의 친구들에게 그동안 내가 느낀 감상을 전해주고 싶다. 1998년 아태평화재단의 초청으로 나는 한국을 방문했고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을 직접 만져볼 수 있었다. 한국은 역사적 경험에 충만한 사회이기에 그 시민들은 정치적 경계심과 인식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특히 나는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한국 시민들의 경험을 배우면서 그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당시 나는 한국사회의 가장 진보적인 추동세력인 학생과 노동자들을 통해 한국의 시민사회가 매우 강력한 토대 위에 있음을 깨달았다. 다양한 종교단체들의 사회운동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런 강력한 시민사회의 조건 위에서 어떻게 한국 시민들이 국제문제와 국제연대에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아태평화재단에서 만났던 김대중씨는 조용하며 평화로운 인상을 주었고 특히 그의 정치적 식견과 지혜에 나는 깊은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이건 김대중씨가 아태평화재단을 통해 버마군사정권에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던 대통령이 되기 전의 일이었고, 그가 대통령이 된 뒤 그의 정부뿐만 아니라 아태평화재단마저 버마군사정권에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버마 시민들은 참으로 어두운 국제사회의 현실을 실감하고 있다. 사실 한국과 일본은 현 버마상황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들인데도 그들 스스로 그 역할과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비하의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 버마 군사독재정권은 결코 한국과 일본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들의 돈줄이 이들 국가에 달렸고 따라서 버마 시민들은 두 나라의 민주화 지원을 간절하게 염원해 왔다. 특히 한국은 민주화과정의 스승으로서 우리에게 누구보다 큰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한국의 시민들에게 참으로 바라는 것


어쨌든 이런 인연들로, 버마학생민주전선의 많은 동지들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고, 우리 사이에 김치와 불고기가 유명한 주제가 되고 있듯이, 나는 한국과 버마 시민들 사이에 좀더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건 버마독재정권과 한국 정부 사이의 이익관계가 아닌 철저히 두 시민끼리의 이익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는 진정으로 한국의 시민들이 우리 버마 시민들의 참뜻을 한국 정부에 전해 주기를 염원한다. 여기 <한겨레21>에 어리석은 질문으로 시작했던 나의 이야기 마지막 연재인 이 네 번째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버마학민주전선과 나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가장 먼저 <한겨레21> 독자들에게 보고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지난주 버마학생민주전선은 중앙위원회를 소집해서 그동안 국내외적인 환경 변화에 따라 핵심의제가 되어왔던 조직체계의 재창출을 결의했다.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도전기를 맞게 된 이 조직 변화는 기본적으로 무장투쟁조직과 정치투쟁조직으로 이원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나는 군사독재정권의 무력에 맞서는 무장투쟁조직으로 남기고, 다른 하나는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서 미래를 준비하며 특히 희망잃은 젊은 세대들을 엮는 직접적인 정당 창설을 위한 준비를 의미한다.


이 결정과정에서 나는 그동안의 󰡐학생정치󰡑에서 벗어나 이제 새로운 기성정치조직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제 나는 버마 민주화를 위해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고 가장 어려운 이 시기에 지난날의 의문들에 대한 정리를 하면서 새롭게 떠오른 미래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버마 민주화를 위한 투쟁 속에서 태어난 버마학생민주전선의 무장조직을 떠나면서 나는 가장 존경하는 동지들에게 가장 큰 예를 갖춰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버마상황으로 돌아가서 본다면 저는 그동안 성장도 하지 못했고 철도 들지 않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사 어른이 된 듯하고 기쁨도 느낍니다. 저 자신과 정치를 배우고 수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버마학생민주전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 저의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허락해 준 조직과 저의 지도력을 추인해 주었던 동지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특히 저는 그동안 민주혁명을 위해 생명을 바쳤던 동지들께 깊은 경의를 표하면서, 이 자리를 빌려 저의 삶을 통해 절대로 어기지 않을 약속 하나를 먼저 산화해간 동지들과 앞으로도 민주혁명을 위해 투쟁해 나갈 동지들께 올립니다. 저는 독재정권을 타파하고 완전한 민주화를 성취하는 날까지 버마학생민주전선과 손을 맞잡고 저의 몸을 바쳐 주어진 책임과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겠습니다. 저는 결코 버마학생민주전선의 동지애와 정신을 잃지 않을 것이며 어디서든 버마학생민주전선의 깃발에 대한 맹세를 지키며 헌신할 것을 다짐합니다. 버마학생민주전선은 영원할 것입니다.󰡓 <끝>  □ 닥터 나잉옹(Dr.Naing Aung)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겸 버마연방민족회의 중앙위원 (『한겨레21』2000년10월25일 제331호)



기사시각 : 2000/05/0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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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0:37 2007/03/1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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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민중가요 - 2007/03/1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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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0:35 2007/03/1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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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민중가요 - 2007/03/12 10:32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De pie, cantad, que vamos a triunfar.
Avanzan ya banderas de unidad,
y tú vendrás marchando junto a mí
y así verás tu canto y tu bandera florecer.
La luz de un rojo amanecer
anuncia ya la vida que vendrá.
De pie, luchad,
el pueblo va a triunfar.
Será mejor la vida que vendrá
a conquistar nuestra felicidad,
y en un clamor mil voces de combate
se alzarán, dirán,
canción de libertad,
con decisión la patria vencerá.
Y ahora el pueblo que se alza en la lucha
con voz de gigante gritando: ¡Adelante!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La patria está forjando la unidad.
De norte a sur se movilizará,
desde el Salar ardiente y mineral
al Bosque Austral,
unidos en la lucha y el trabajo irán
la patria cubrirán.
Su paso ya anuncia el porvenir.
De pie, cantad que el pueblo va a triunfar
millones ya imponen la verdad.
De acero son ardiente batallón.
Sus manos van llevando la justicia
y la razón, mujer,
con fuego y con valor,
ya estás aquí junto al trabajador.
Y ahora el pueblo que se alza en la lucha
con voz de gigante gritando: ¡Adelante!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La la la la la la la…

 

 

1.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

당당히 일어서서 노래하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연대의 깃발은 이미 전진한다.
그대 또한 나와 함께 행진하리라.
그리고 그대는 곧 그대의 노래와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리라.
새벽의 붉은 기운이 이미 새 세상을 예고하고 있다.

굳세게 일어서서 싸우라, 민중은 승리하리라.
우리의 행복을 쟁취함으로써 얻은 세상은 더 나으리라.
투쟁에서 드높여지는 수많은 목소리로 우리는 해방을 노래하리라.
우리의 결의로 조국은 승리하리라.

(후렴)
지금은 민중들이 투쟁 속에서 일어설 때
거대한 함성으로 외치리라. "전진!"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

2.
조국은 북에서 남까지 단결을 이루어간다.
투쟁과 노동 속에서 결집하여
불타는 소금광산에서 남쪽의 숲까지 열어젖히리라.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그 발걸음은 이미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일어서서 노래하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수백만의 민중들은 이미 진실을 완성하고 있다.
그들은 강철로부터 나온 불타는 대대이다.
그들의 손은 정의와 이치를 나른다.
열정과 용기가 가득한 여인
당신은 이미 여기 노동자의 곁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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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0:32 2007/03/1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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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민중가요 - 2007/03/12 10:28

 

mireille_mathieu_-_la_marseillaise

 

 

1)

Allons enfants de la Patrie

나아가자, 조국의 아들 딸들이여,

Le jour de gloire est arrivé.

영광의 날은 왔도다!
Contre nous, de la tyrannie,
폭군에 결연히 맞서서
L'éandard sanglant est levé,
피 묻은 전쟁의 깃발을 올려라,

l'éandard sanglant est levé,
피 묻은 전쟁의 깃발을 올려라!

Entendez-vous, dans la compagnes.
우리 강토에 울려퍼지는
Mugir ces farouches soldats
끔찍한 적군의 함성을 들으라
Ils viennent jusque dans nos bras
적은 우리의 아내와 사랑하는 이의
Egorger vos fils, vos compagnes.
목을 조르려 다가오고 있도다!

 

(Refrain = 후렴구)

Aux armes citoyens!
무기를 잡으라, 시민들이여!
Formez vos bataillons,
그대 부대의 앞장을 서라!
Marchons, marchons!
진격하자, 진격하자!
Qu'un sang impur
우리 조국의 목마른 밭이랑에
Abreuve nos sillons.
적들의 더러운 피가 넘쳐흐르도록!

 

2)

Que veut cette horde d'esclaves,
De traîtres, de rois conjurés ?
Pour qui ces ignobles entraves
Ces fers dès longtemps préparés ?

Ces fers dès longtemps préparés ?

Français, pour nous, ah! quel outrage
Quels transports il doit exciter ?
C'est nous qu'on ose méditer
De rendre à l'antique esclavage !


저 노예, 반역자, 공모자의 무리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
끔찍한 족쇄와 오래도록 준비한 이 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 (두번)
우리 프랑스인에게, 아 ! 이 무슨 모욕인가
끓어오르는 분노인가
바로 우리가 노예제를 과거로
되돌릴 용기를 가졌다 !

3)
Quoi ces cohortes étrangères !
Feraient la loi dans nos foyers !
Quoi ! ces phalanges mercenaires
Terrasseraient nos fils guerriers,

Terrasseraient nos fils guerriers !
Grand Dieu! par des mains enchaînées
Nos fronts sous le joug se ploieraient
De vils despotes deviendraient
Les maîtres des destinées.

뭐라고 ! 외국의 무리들이
우리 땅을 지배한단 말인가 !
뭐라고 ! 저 돈에 팔린 용병들이
우리의 자랑스런 전사들을 쳐부순단 말인가 ! (두번)
신이시여 ! 결박당한 우리 손
속박하의 우리 전선이 쓰러진단 말인가 !
비열한 폭군이 우리 운명의
주인이 된단 말인가 !


4)
Tremblez, tyrans et vous perfides
L'opprobre de tous les partis,
Tremblez ! vos projets parricides
Vont enfin recevoir leurs prix,

Vont enfin recevoir leurs prix ! 
Tout est soldat pour vous combattre,
S'ils tombent, nos jeunes héros,
La France en produit de nouveaux,
Contre vous tout prêts à se battre

각오하라, 압제자와 너희 배신자여
모든 이의 치욕이여
각오하라 ! 너희들의 반역은
결국 대가를 치르리라 ! (두번)
모두가 전사가 되어 너희들을 물리치고
우리 젊은 영웅들이 쓰러지면
이땅은 새로운 영웅들을 태어나게 하리니
모두가 너희와 싸울 준비가 되었다 !


5)
Français, en guerriers magnanimes

고결한 전사 프랑스인들이여
Portez ou retenez vos coups!

공격하라 그리고 또 반복하라
Épargnez ces tristes victimes,

이 슬픈 희생자들을 다치게 하지마라 

A regret s'armant contre nous

마지못해 우리를 경계하면서

a regret s'armant contre nous

마지못해 우리를 경계하면서
Mais ces despotes sanguinaires,
그러나 이 피비린내 풍기는 압제자들

Mais ces complices de Bouillé,

그러나 부이예의 이 음모자들
Tous ces tigres qui, sans pitié,

이 모든 호랑이들은 잔인하게 그들의
Déchirent le sein de leur mère !
어머니의 젖가슴을 찢어 발긴다.


6)
Amour sacré de la Patrie,

조국의 신성한 수호신이여,
Conduis, soutiens nos bras vengeurs

우리 복수심에 불타는 군대를 보살피고 지켜다오
Liberté, Liberté chérie

자유여, 사랑하는 자유여
Combats avec tes défenseurs !

적과 싸우라!

Combats avec tes défenseurs !

적과 싸우라!
Sous nos drapeaux, que la victoire
우리 깃발 아래,

Accoure à tes mâles accents

승리의 노래가 힘차게 울려퍼질지니
Que tes ennemis expirants

쓰러져가는 적들도
Voient ton triomphe et notre gloire !

그대의 승리와 영광을 보도록!

 

7)
Nous entrerons dans la carrière

Quand nos aînés n'y seront plus,
Nous y trouverons leur poussière
Et la trace de leurs vertus

Et la trace de leurs vertus
Bien moins jaloux de leur survivre
Que de partager leur cercueil,
Nous aurons le sublime orgueil
De les venger ou de les suivre !

우리는 그 길로 들어가리라
우리의 선열들은 더이상 없는 그때
거기서 그들의 흔적과
용기의 자취를 발견하리라 (두번)
그들을 대신해 살아남기보다는
죽음을 함께하고자 하는
우리는 숭고한 자존심을 지키리라
그들의 복수를 이루고 그들을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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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0:28 2007/03/1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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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민중가요 - 2007/03/12 10:16

 

산디니스타에게 바치는 노래

Himno del FSLN

 

 

Adelante marchemos companeros
avancemos a la revolucion
nuestro pueblo es el dueno de su historia
arquitecto de su liberacion.

 

앞으로 행진해라 동지들아
혁명을 향해 앞으로 전진하자
우리들의 삶은 역사의 주인이다
자유를 만들어 나가자


 

Combatientes del Frente Sandinista
adelante que es nuestro porvenir
rojinegra bandera nos cobija
¡Patria libre vencer o morir!

 

Sandinista 의 전사들아
전진은 우리의 미래이다.
검붉은 깃발을 우리의 가슴에 품고
조국의 자유를 얻거나 아니면 죽음뿐이다.

 

 

Los hijos de Sandino
ni se venden ni se rinden
luchamos contra el yankee
enemigo de la humanidad.

 

Sandino 의 아들들아
굴복하지도 말고 항복하지도 말거라
미국놈들에 대항해서 투쟁하자.
인류의 적들이다

 

 

Adelante marchemos companeros
avancemos a la revolucion
nuestro pueblo es el dueno de su historia
arquitecto de su liberacion

 

앞으로 행진해라 동지들아
혁명을 향해 앞으로 전진하자
우리들의 삶은 역사의 주인이다
자유를 만들어 나가자

 

 

Hoy el amanecer dejo de ser una tentacion
manana algun dia surgira un nuevo sol
que habra de iluminar toda la tierra
que nos dejaron los martires y heroes
con caudalosos rios de leche y miel.

 

오늘 여명이 욕망을 남기었다.
내일 언젠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것이다
그리고 모든 땅에 빛이 가득할 것이다.
우리가 남겨놓은 희생자와 영웅들과
풍요로운 우유와 꿀이 가득한 강들과 같이..

 

Adelante marchemos companeros
avancemos a la revolucion
nuestro pueblo es el dueno de su historia
arquitecto de su liberacion

 

 

 

산디니스타에게 바치는 노래(Himno del FSLN)

곡 출처 : http://www.fsln-nicaragu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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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0:16 2007/03/1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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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둘 글 - 2007/03/12 10:11

 

○ 사상투쟁에 대하여

사상투쟁(이하 ‘사투’)이란 피티가 수행하는 계급투쟁의 하나로서 관념의 대립이 아니라 피티가 적대 계급의 기만, 왜곡, 은폐에 대립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투란 비타협적인 것이며 적대적인 것이다. 또한 동시에 피티에 대한 계급의 연대성, 당파성, 그리고 뜨거운 동지애를 동전의 양면으로 삼고 있다. “이념투쟁을 거부하며 무원칙한 화평을 지지함으로써, 퇴폐적이며 속물적인 자세를 야기시키며, 당과 혁명조직의 일단의 부분과 개인에게 정치적 타락을 초래시킨다”(모택동)


첫째, 단결의 무기로서가 아니라, 차별성 분열의 무기로서 사투가 진행되었다.

이념투쟁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투쟁을 위하여 당과 혁명조직내에 통일을 확보해 내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모든 공산주의자의 혁명적 활동가는 이 무기로 무장되어야 한다.”(모택동) 사투의 심화과정은 피티가 피티로서 자기인식을 심화하는 과정이며, 이는 피티의 단결성, 연대성을 강화하는 과정이다. 학운은 언제부터인가 사투가 연대와 단결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고 너는 이렇다. 그래서 우리는 다르다. 같이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하였다.


둘째, 사투를 남을 압도하려는 무기로 사용하였다.

사투는 동지들 사이에 관계를 생산적, 건설적으로 만들고 적과의 올바른 투쟁을 수행하게 한다. 동지들 사이의 나쁜 성향, 잘못된 사고와 행동을 폭로하고 이를 수정하여, 적의 분열공작을 뚫고 적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사투인 것이다. 우리는 남을 제압하고 자기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투를 사용하는 경험이 강했다. 비지의 자유경쟁적, 영웅주의적 속성의 발로이며, 종파주의의 교묘한 악질적인 형태이다.


셋째, 자신과의 투쟁을 방기한 채 남과의 투쟁만을 일삼았다.

자신과의 투쟁이 배제, 방기된 사투는 사투가 아니라 언쟁, 비방, 비난이다. 자신의 악질적인 품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돌아봄이 없이, 주체혁신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도 않으면서, 남의 잘못은 하나의 꼬투리라도 잡고, 이를 과장하고, 사방에 퍼뜨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는 동지의 잘못을 고쳐주려는 뜨거운 동지애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으로, 이것을 빌미로 상재방을 밀어 젖히고, 자신의 지위를 높여 주도권을 잡으려는 파렴치한 종파의 발로이다.


넷째, 사투를 관념의 대립으로만 파악하는 경향이다.

사투는 적대계급의 표상에 대립 투쟁하는 것이며, 적의 침투를 폭로, 분쇄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투를 일정 관념체계를 수정, 채택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해서, 우리도 이론을 가져야 한다는 굳센 신념으로 사방에 널려 있는 온갖 잡다한 관념을 뜯어 맞추어 하나의 기기묘묘한 관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것을 독야청청, 하늘과 땅 사이에 제일가는 종파로 남아야 한다는 이유로 삼는다. 이렇게 세운 관념이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조금은 수정한다. 그리고는 ‘우리의 논리는 이만큼 발전했다’라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다섯째, 실천과 유리된 언쟁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사상과 이론이 필요한 것은 올바른 실천을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투를 벌여야 하는 이유도 실천을 잘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에게는 사투를 종파의 체면을 세우는 것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명백히 틀렸다. 따라서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이들은 당면의 현안에 대하여 종파의 명예를 걸고 무언가 말을 해야 하는 데, 저놈들의 이야기에는 찬성할 수 없고, 그렇다고 마땅히 대안은 없는 것이다. 이들의 말은 다음과 똑같다. ‘자본주의는 나쁘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훼방이나 놓자’. 이런 자들은 운동을 떠나는 것이 옳다.

(강철 『대동단결과 반종파투쟁 / 강철서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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