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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영근

늦은 작별

 

                                  박영근

 그 언제부턴가

 가을도 다 지나고

 

 가슴속에

 식은 채 묻혀 있던

 불덩어리 하나

 

 다 피어나지도

 저를 떨구지도 못한

 꽃덩어리 하나

 

 오늘은

 허연 잿더미를 헤치고

 말갛게 불티로 살아난다

 

 이제 그만

 저를 놓아주세요

 

 찬 바람 속

 몹시 앓다가

 한 여드레쯤 지나면

 문밖 골목에도

 고즈넉이 흰 눈 내리겠다

 

 기억하느냐, 그 종소리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천년의 꿈이라 한들

 제자리에 있겠느냐

 

 우리가 사는 일이 온통 고통이라 해도

 오늘 바람 속에 흔들리는

 저 풀잎 하나보다 못하구나

 

 기억하느냐

 겨울 빈 들에서 듣던 그 종소리

 

 

 

 폐사지에서 1

 

                            박영근

 

 내가 여기서 보는 건 사금파리가 된 나의 문자(文字)들이다

 

 절벽에 서 있던 시간들이 붙잡고 있던

 그리움 하나

 반조가리 몸뚱이로 비에 젖고

 

 그리고 웬 주검이 저를 보내지 못하고 옛길에서 저렇게 완강하다

 

 나는 탑과 부도를 돌아 먼 데 마을을 바라본다

 길을 끌어당기고 있는

 오래 묵은 풍경들과

 

 마음이 끝내 허물지 못한 낡은 집 한 채

 

 돌아가고 싶었다

 이 폐사지를 건너

 뜨거운 해와 바람과 물소리마저 사라진 뒤

 밝아올 어둠의 자리

 

 거기 내가 두고 온 바다에 종소리가 떨어지고 있을 게다

 막 태어나 젖먹이 울음을 머금고

 별자리 하나 눈 푸르게 돋아나고 있을 게다

 

 늙은 산수유 한 그루 나를 보다가 빗속으로 가뭇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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