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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workshop에 갔다가 너무도 일찍 돌아온 금요일 오후, 지난 밤에 뽀지게 마신 술기운에 어지러운 머리를 추스르며 올드보이를 보았다. 이른 오후인데도 상영관은 만원이었다. 박찬욱이라는 감독이 그리 대중과 친한 감독은 아니지만, 그간 마케팅에 때려박은 돈이 장난이 아니어서인지 올드보이는 주말예매1위에 올랐다.


아무리 일본 아해들의 만화에서 빌려온 착상이라지만, 사적으로 운영되는 감방의 존재와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한 15년간의 감금은 너무나도 기괴한 설정임에 틀림없다.(하지만 원작만화보다는 영화가 낫다.)


영화 초반 최민식의 감금생활과 거기서 풀려나 감금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나를 완전히 영화에 몰입하게끔 만들었다. 또한, 최민식이 망치를 들고 감금방의 깡패들과 벌이는 사투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폭력적인 것이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역설의 미학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영화의 중반 이후, 감금의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그리고 복수를 완성하는 주체가 돈으로 칠갑을 해도 돈이 남는 멋드러진 부자로 이미지화 되면서 왠지 모를 불쾌감이 고개를 들었다.

 

전편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그 주제는 "복수"였다. 올드보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감정의 폭발이 극을 이끌어가는 추동력이었으나, 그래도 당시 박찬욱은 개인적 원한과 복수가 사회와 분리될 수 없이 톱나바퀴처럼 맞물려 움직이고 있음을 영화 곳곳에서 드러내려 애썼다.

 

"복수는 나의 것"의 분노는 신하균과 송강호의 개인적인 분노만은 아니었던 것이고, 그들의 사회적 역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런 고통과 분노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감독은 사회적으로 강제된 고통과 분노로 범벅이 된 아비규환을 감각적으로 그려내었고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최소한 불편함(!!!)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또한 신하균에게 마지막 복수를 가했던 송강호를 아나키스트단의 이름으로 단죄함으로써 감독은 결국 신하균의 손을 들어준다.


그런데, 개인적 원한과 복수... 게다가 "모래알이나 바위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속편이 어디있나. 공중파 CF까지 내보내는 등 엄청난 마케팅비용을 지출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올드보이는 대중을 위한 상업영화다. 그건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상업적인 면에서나 메시지적인 면에서나 박찬욱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화를 원한다. 박찬욱은 그만큼 큰 능력을 가진 감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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