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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스뻭따끌한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덕에 내 취향과는 맞지 않은 영화를 연거푸 2탄이나 보았다. 이번에는 장장 3시간 반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보지 않으려고 했으나, 소개팅女의 소망에 이끌려 3탄도 봤다. 영화보구나서 3시간 반동안 고문당하고 나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스펙터클, 과감한 액션, 실사와 맞먹는 CG효과.. 모두 좋다. 하지만 그 지리하게 긴 시간동안 필연성없는 폭력에 시달리고 나면 "도대체 쟤들은 왜 저렇게 싸우지?"라는 물음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머, 서양의 중세에 대해 잘 모르지만, 서양의 중세 신화가 현재의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기껏해야 현실로부터의 도피? 하물며 프로도를 위해 헌신하는 샘, 그리고 왕들과 영웅들을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아랫것들'을 보며 이 시대의 "자발적인 복종"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 봤다. 이 영화의 원작인 반지전쟁이 2차대전이전, 그러니까 귀족과 평민으로 대표되는 영국 구체제의 신분질서가 어느 정도 남아 있던 시절에 씌여졌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범상치 않은 '윗것'을 위해 희생을 감내하는 것이 '아랫것들'의 아름다운 의무라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스펙터클을 가장한 영화가 바로 반지의제왕이 아닐까.

 

게다가 반지의제왕에서의 곤도르의 섭정은 거의 광인 수준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곤도르를 다스렸던 이실도루의 후손 아라곤왕이 돌아오면서 악의 세력은 물러가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 얼마나 웃긴 혈통주의인가? 혈통에 의한 왕위의 계승... 삼성그룹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그룹승계는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혈통에 의한 왕위의 계승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는 그들에겐 왕손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요정을 아내로 맞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근대이전의 서구이야기가 오히려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인기를 끄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고스포드파크 등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구귀족층은 더이상 시혜적인 동정조차 베풀지 않는 쓰레기일 뿐이다. 그러나 모리카오루의 엠마나 기타 메이드류 만화에서 보여지는 귀족층은 부와 명예, 그리고 도덕성까지도 거머쥔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혈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경배와 의무의 이행은 자발적이며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된다. 실질적인 법적 평등조차 거머쥐지 못한 세상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혈통주의가 판을 치다니.. 이것은 야만으로의 복귀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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