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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여우 - 콘 사토시

 

역시 조선사람 정서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더 잘 어울리는 듯 하다. 물론 그들과 많은 면이 다르기는 하지만, 일본애니를 보고 있을라치면 소소한 심리묘사 등에서 우리와 코드가 비슷한 점이 많음을 느낀다.

 

난 천년여우라고 해서 여우라는 동물이 나오는 애니인 줄 알았는데, 밑에 영어자막을 보니 "Chiyoko once and forever"라는 자막이 나와서 그게 아닌 줄 알았다. 영화는 갑자기 영화계에서 사라져버린 후지와라 치요코라는 일본 여배우를 두사람의 다큐멘터리작가들이 추적하면서 시작된다.

 

치요코는 1922년 생으로 그녀의 인생은 격동기였던 일본의 현대사에 얼마간 연결되어 있는데, 우연히 경찰에게 추격당하던 민권운동가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게 되면서 그에 대한 사랑이 싹트게 되고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배우가 되어 그를 찾아 나선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이 영화를 서양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정말 우스운 줄거리일지도 모른다. 아무 관계도 없었던 남자와 잠깐 이야기를 했던 것에 불과한데도 그와의 너무나도 조그마한 약속같지도 않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갖 역경을 마다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 또한 현실과 치요코가 출연했던 여러편의 영화가 뒤섞여 치요코 자신과 민권운동가 사이의 만남이 천년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던 남녀간의 운명적 사랑의 조그마한 일부일지 모른다는 설정. <은행나무침대>나 성유리의 어색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끈 최근의 드라마(제목도 기억 안 난다)와 많은 부분 닮아있다.

 

그러나 분명 빠른 편집, 여러 이야기를 뒤섞는 교묘한 장치들, 연거푸 오버액션을 일삼으며 치요코를 연모하는 겐요로 인해 이 이야기는 식상한 틀에도 불구하고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끔 만들고 있다.

 

중반 이후, 치요코가 사랑을 찾아 훗카이도까지 달려가는 장면에서 나는 사실 좀 짜증이 났다. 별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목숨까지 걸 듯한 치요코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을 마치 지고지순한 사랑, 순정으로 포장하려는 겐요를 비롯한 주변의 시선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종반 전직 일본 순사를 통해 치요코가 그토록 찾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겐요 또한 수십년 동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치요코에게 말하지 못했던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나는 비로소 이 영화가 "Chiyoko once and forever" 가 아닌 "Genyo once and forever"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 영화가 맘에 들었다.

 

치요코가 쫓던 그 사람은 이세상에 존재치 않는 사람이었고 치요코가 현실에서 했던 모든 행동들은 무의미한 것, 한낱 자아도취의 결과물이나 자위행위로 생각될지 모른다. 그런데 왜 겐요는 치요코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치요코가 간직한 사랑이 치요코로 하여금 치요코의 남은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었으며 치요코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사랑에 대한 욕망은 치요코의 존재이유였고, 또한 치요코에 대한 사랑은 겐요의 존재이유였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사랑이란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사람 이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사랑은 조그마한, 일견 허망해보이는 조그마한(치요코와 그 남자의 조그만 약속과도 같은) 계기에서 비롯된다. 나만의 개똥철학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랑, 그리고 그것의 허망함, 그러나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나름의 성찰이 담겨 있는 좋은 작품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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