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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는 별을 꿈꾸는 A's People 윤가브리엘

 [2006년 12월,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에 기고한 글입니다]

 

차별없는 별을 꿈꾸는 A's People 윤가브리엘


권미란(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 HIV/AIDS감염인과 감염인의 인권을 지지하는 활동가들은 에이즈확산을 막고 편견과 차별을 넘기 위해 유시민 복지부장관이 해야 할 일은 감시와 통제를 본질로 하는 에이즈예방법 전면개정과 한미FTA협상중단이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유시민 장관이 바로 에이즈확산의 주범이 될 것임을 경고하려고 하였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에서 후원한, '편견과 차별을 넘어'라는 제목의 기념행사에서 감염인의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행사장 진입도 제지를 당했다.

감염인의 목소리를 배제한 반면, 버시바우 미국대사의 격려사가 행사장을 채웠다. 버시바우 미국대사는 부시대통령이 2003년 에이즈구제를 위한 대통령긴급계획을 마련하여 아프리카의 감염인을 위해 지원을 하고 있고, 에이즈.결핵.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국제기금에도 제일 많은 돈을 냈다며 에이즈확산을 막는데 미국이 최선에 서 있음을 자랑했다. 부시의 긴급계획은 복제의약품 사용금지, 금욕 등을 옹호하는 국가에 직접 지원하는 형태를 고수하면서 초국적제약자본에게 이윤을 몰아주고, 자신이 원하는 보수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에이즈를 이용하고 있다. 자신을 위해 에이즈를 악용하고 금욕과 순결을 에이즈예방이라고 떠들고 있는 부시를 칭찬하면서 기념행사는 끝이 났다. 억울함과 분노사이로 가브리엘에 대한 그리움이 차올랐다. ‘새로운 에이즈치료제를 구할 때까지 이를 악물고 버틸게. 우리 같이 싸우자’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는 눈물이 쏟아졌다.


한국다국적제약협회의 약제비적정화방안 반대 기자회견장. ‘에이즈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약을 먹을 수 없어서 죽는 것이다’라는 영문글귀가 새겨진 티셔츠를 들고 초국적제약자본이 말하는 신약에 대한 환자의 접근권이 거짓말임을 폭로하는 가브리엘 (사진: 정우혁. 네트워커)

 

6월 15일 한국다국적제약협회(KRPIA)가 약제비적정화방안에 대해 반대입장을 표명한 기자회견장, ‘환자의 신약에 대한 접근을 저해하고,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의욕을 감소시킬 것’이라며 약제비적정화방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투자를 철수하겠다고 협박을 하자 기자회견장은 소란스러워졌다. 이때 한 HIV/AIDS감염인의 목소리에 기자회견장이 순간 조용해졌을 뿐 아니라 단상에 앉아있던 제약회사 대표들은 당황해 했다.

"나는 에이즈환자입니다. 로슈는 푸제온을 왜 그렇게 비싸게 팔려는지 대답하십시오"


8월 15일 국제에이즈회의가 열리고 있던 캐나다, 활동가들은 애보트가 주최한 심포지움이 시작되자마자 단상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애보트는 에이즈치료제 노비르(성분: lopinavir)와 칼레트라(성분: lopinavir/ritonavir)를 판매하고 있다. 노비르와 A에이즈치료제를 함께 복용하면 A의 효과가 증대된다. 애보트는 다른 제약회사의 에이즈치료제와 노비르를 함께 복용하는 것을 막고 칼레트라의 시장을 확대하기위해 미국에서 노비르의 가격을 500%인상한 바 있다. 게다가 칼레트라의 가격은 환자들이 사먹을 수 없는 수준이고,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는 판매하지 않고 있으며, 냉장보관을 해야 한다. 전 세계 HIV/AIDS감염인의 2/3가 살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냉장보관을 해야하는 약은 먹을 수 없는 약이다. 애보트는 8월 13일에 ‘개발도상국에서 lopinavir/ritonavir에 대한 접근을 확대하기위해 새로운 시도’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아프리카와 최빈국에서 연간 환자당 500달러로 인하하겠다는 것이다.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민중에게 연간 500달러는 죽음을 부르는 가격이다. 한 HIV/AIDS감염인이 행사장 단상에 있던 애보트 광고판에 기습적으로 락카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는 애보트측에 의해 행사장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4000:3800=100:30 말이 안되는 이 등식은 전 세계 HIV/AIDS감염인의 현실이다. 보고서(UNAIDS, 2006)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HIV 감염인이 4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2600만 명으로 전 세계의 HIV 감염인의 2/3를 차지한다. 아시아에는 830만 명,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150만 명, 라틴아메리카에는 160만 명의 HIV감염인이 살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전체 에이즈치료제 시장의 70%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아시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HIV/AIDS감염인 약 3800만 명에게 공급되는 에이즈치료제는 전체 에이즈치료제 시장의 30%도 안된다는 얘기다. 2005년 한 해 동안 410만 명이 새로 에이즈에 감염되었고, 280만 명이 에이즈로 숨졌다. 하루에 8천명이 에이즈로 사망하고 있다. 약이 있어도 약을 못 먹기 때문에 죽어가고, 에이즈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11월 30일, 태국에서는 최초로 의약품에 대한 강제실시계획이 발표되었다. 태국 국영제약회사가 에이즈치료제 에파비렌즈를 미국의 제약회사인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보다 30배이상 싸게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번 강제실시 결정은 태미FTA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태국 HIV/AIDS감염인들의 강제실시 투쟁은 1998년부터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1998년 태국 의약품특허재조사위원회가 과도한 의약품 가격이 공중보건의 이해에 반할 경우 강제실시를 촉구하도록 권고를 했다. 당시 태국국영제약회사는 에이즈치료에 사용하는 화이자의 플루코나졸과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의 디다노신에 대한 강제실시를 통해 싸게 공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미무역대표부와 미제약협회는 무역보복을 가하겠다며 강제실시 폐지, 의약품특허재조사위원회 폐지, 지적재산권 침해에 대한 감시강화, 독점보호기간 연장을 요구하였다. 결국 태국정부는 에이즈치료제를 포함하여 필수의약품의 강제실시는 제한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태국 감염인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2004년 2월에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이 디다노신에 대한 특허권을 태국에 양도, 2006년 8월에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이 콤비드에 대한 특허권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 2006년 11월 에파비렌즈에 대한 강제실시에 이르게 되었다.


다국적제약협회앞에서 '로슈는 왜 푸제온을 비싸게 팔려는 겁니까?'라고 외쳤던, 애보트 행사장 단상에 락카를 뿌려대던 가브리엘은 병원에 있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13가지 에이즈치료제에 모두 내성이 생겨서 새로운 치료제가 필요하다. 2000년 이후에 미FDA승인을 받은 에이즈치료제는 약제성분기준으로 12가지이지만 한국에서 시판허가를 받은 것은 3가지. 이 중에서 실제 판매가 되고 있는 것은 2가지뿐이다. 로슈는 푸제온에 대해 시판허가를 받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팔리는 가격을 요구하면서 판매를 하지 않고 있다. 연간 2만달러(약 2천만원). 다행히 인도 제약회사에서 한국에 판매되지 않고 있는 신약 중 2가지에 대해 복제약을 생산하고 있다. 가브리엘은 인도 제약회사의 복제약과 미국의 에이즈구호단체로부터 푸제온을 구하고 있다. 하루하루를 어렵게 버티면서 새로운 에이즈치료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가 더욱 기다리는 것은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져서 함께 싸우는 것이다.

태국의 강제실시 발표에 누구보다 기뻐하는 가브리엘, 차별 없는 별을 꿈꾸며 싸울 준비를

한다. 걷기가 힘들어졌지만, ‘다리가 한결 부드러워졌어’라며 가브리엘은 오늘도 재활운동을 한다.

에이즈운동가 윤가브리엘 치료비 마련을 위한 후원인이 되어주세요

 

▲후원계좌(001502-04-153002 국민은행 정욜)로 후원금을 보내주세요.

▲정기후원(CMS)을 해주실 분은 신청서를 보내주세요.

* 신청서 다운받는 곳: http://rainbowsnail.pe.kr/data/support.hwp

* 신청서 보내실 곳: aspeople@jinbo.net

* http://blog.jinbo.net/As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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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글] 먼저 떠난 상덕에게

 
[추모의글] 먼저 떠난 상덕에게  “부디 그곳에서는 질병과 고통 없이 편안히 살기를”
윤가브리엘(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26일 세상을 떠난 고 김상덕 활동가를 추모하는 글을 윤가브리엘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대표가 보내왔다. 김상덕 활동가가 글리벡 투쟁을 이끌었던 환자 당사자라면, 윤가브리엘 대표는 현재 HIV/에이즈 감염인들의 인권보호 활동을 이끌고 있는 감염인 당사자다. 윤가브리엘 대표는 현재 병세가 악화돼 서울대 병원에 입원 중이며, 병상에서 추모의 글을 작성해 보내왔다.[편집자주]

 

지치고 힘든 하루를 보내고 초저녁 설핏 든 잠을 전화벨 소리에 깨고 이렇게 모니터 앞에 앉았다. 오늘은 아주 길고 힘든 하루를 보냈었어. 날벼락 같은 너의 죽음을 듣고도 병실에 갇혀 꼼짝 못하는 내 자신도 원망스럽고 그렇게 황망히 가버린 너도 야속하고 그렇더구나.

 

너를 민중의료연합 사무실에서 권미란의 소개로 처음 보았을 때 구구한 자신의 소개를 하지 않아도 너의 살아온 이력을 다 알 것 만 같았어.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에 화상을 입은 듯한 너의 외모를 보고 나 못지않게 아프고 힘들게 살아온 친구라는 걸 단박에 느끼면서 진 한 동질감을 느꼈었다. 너나 나나 어떻게 병마와 싸워 왔는지 앞으로도 어떻게 병마와 싸워야 하는지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뭔가가 있었다고 생각해. 우린 한번도 서로의 아픈 이력에 대해 얘기해 본적이 없었잖아.

 

너가 앓고 있던 백혈병이나 내가 앓고 있는 에이즈란 병이나 환자들의 문제는 거의 대동소이 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어떤 방법이 환자들의 권익에 도움이 될까를 늘 고민하고 문제의 핵심들을 잘 짚어내던 풍부한 너의 경험과 지식에 배울 점 이 참 많은 친구라고 늘 생각 했었다.

 

그리고 훗날 에이즈 환자나 백혈병 환자나 모든 환자들이 다같이 연대하여 환자의 권익을 찾기 위한 일들을 해야 한다고 그래 놓고서 그렇게 황망히 가버리다니,,,

 

나의 신체 한쪽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너에게 내가 참 많은 기대를 했었나봐. 죽음은 망자의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산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던데 그 말 이 딱 맞는 것 같구나.

 

나 역시 앞으로도 내가 얼마나 살아 나갈 수 있을까 문득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얼마를 사는 게 뭐 중요해 하루를 살아도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지’라고 다짐 했었는데, 너의 죽음을 접하고 얼마를 사는 것도 중요 한 일이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나도 참 우매한 인간에 불과 한 것 같아. 난 죽음 이라는 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었어. 훌쩍 떠나버리면 그만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남아있는 사람도 생각해야 한다는 걸 또 배우게 된다. 아마 너도 그렇게 편안히 눈감지는 못했을 것 같아.

 

그동안 너를 힘겹게 짓누르던 삶의 무게를 이제 그만 내려놓고 먼저 간 그곳에서라도 고통 없이, 아픔 없이, 질병 없이, 편안히 살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함께 하려던 우리의 일들을 너를 생각해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먼저 간 그곳에서 라도 날 지켜봐줄 거 라 믿는다!

 

상덕아! 그곳에선 제발 아프지 말아라!

 

 [2006년 5월, 당시 입원중이었던 윤가브리엘이 먼저 떠나간 김상덕님을 추모하는 글을 민중언론 참세상에 기고한 것입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36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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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25년속의 에이즈운동

 [2006년 7월 동성애자인권연대 진보포럼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에이즈 25년 속의 에이즈운동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윤가브리엘


1) 미, 에이즈발견 ‘에이즈 이데올로기로 게이들 죽이기’


올해로 에이즈 발견 25년이 되었다. 미국에선 에이즈 25년을 맞아 25년 정리와 에이즈 문제가 어떻게 왜곡되고 이용되어 왔는지 언론들이 특집기사들을 통해 다루었다. <이글 에서는 시사 주간지<뉴스위크>가 에이즈25년 ‘에이즈가 미국을 어떻게 바꿨나’의 특집기사에서 일부분 인용하였다.>


1981년 미국 질병관리센터(CDC) 의사들이 “남성 동성애자"들이 감염되는 특이한 급성폐렴과 피부암 사례”로 보고하면서 에이즈는 세상에 존재를 알렸다,

당시 대통령 레이건의 보좌관을 지낸 팻 뷰캐넌은 1983년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를 이렇게 묘사했다 “동성애자들이 자연과의 전쟁을 시작했고, 자연은 가공할 천벌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 한마디로 레이건 정부와 극우파, 언론 등이 왜곡과 무시, 비난의 질병으로서 에이즈를 다루었다는 것을 단 적으로 알 수 있다.

에이즈발견 25년 역사를 돌아보면 당시 미국 사회는 마치 중세 인들이 흑사병을 대하듯 무관심과 적의, 오해로 에이즈를 다루다 질병을 키웠고, 특히 남성동성애자들은 극우파와 기독교에 의해 질병을 확산시키는 악마 취급을 당하며 “신이 동성애자에게 내린 천벌”이란 낙인을 받고 죽어 나갔다. 82년 美 의료인ㆍ언론, 등은 에이즈를 "동성애자 관련 면역 결핍증"으로 소개. 질병관리센터 는 에이즈(AIDS) 로 명칭을 지정하였다, 아이티 출신, 동성애자, A형 혈우병환자, 정맥 약물주사자, 를 4대 위험요인으로 지목하였다. 종교적, 도덕적 이유로 게이와 약물 주사자 들에게 관심이 없던 레이건 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였고 언급자체를 꺼렸다. 미국에서만 에이즈로 1만 2천여 명 이 사망할 때까지 공식석상에서 한 번도 이를 언급하지 않은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레이건의 입에서 ‘에이즈’라는 말은 1987년에야 나왔다. 그것도 ‘비정상인들’인 남성 동성애자들끼리의 성관계가 유일한 발병원인인 ‘게이 암’으로 에이즈를 언급하여 이른바 ‘정상인들’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들을 조소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1980년대 미국 언론들도 에이즈 보도에 무관심 했다. 뉴욕 타임스는 81~82년 사이 새로운 치명적인 전염병에 대해 10건 미만의 기사만 실었으며, 그나마도 작은 박스 기사로 다루었다. 뉴스위크도 83년 4월에야 커버스토리로 다루었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성애자도 감염된 1982년 2월 '게이들에게 종종 치명적인 질병이 여성과 이성애자에게도 발병하다'라는 제목으로 처음 보도했다. HIV감염인 들은 가정에서 쫓겨나고, 직장에서의 해고, 학교, 병원, 등 에서 기피, 격리대상이었으며 의료 보험 혜택도 받지 못했다.


당시 게이 사회도 에이즈에 대해 무관심 했다. 게이 언론도 에이즈를 취급하지 않았다. 언론에서 “게이들에게 치명적인 질병”에 다룬 기사들을 게이 언론들은 “질병관련 소문은 대체로 근거 없다”는 제목을 달았다. 에이즈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는 게이사회 일각에서 여러 해 동안 지속되어 왔다. 주변인들이 피부암으로 또는 심한 폐렴으로 입원 하는 동안에도 70년대의 파티를 이어가길 원했던 다수의 게이들은 자신들의 성적자유에 에이즈가 찬물을 끼얹는 걸 원치 않았다. 84년에 가서야 샌프란시스코 게이 전용사우나 폐쇄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동성애자 권리 운동가이자 작가인 ‘래리 크레이머’(87년 ACT-UP 을 조직한 활동가)는 당시 게이들이 많이 모이는 행락지에서 에이즈 연구기금 모금 운동을 벌였으나 불과 769 달러 밖에 안모였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처음으로’ 에이즈를 알게 된 것은 영화배우 록 허드슨이 85년 게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에이즈로 끝내 사망하면서 그때서야 미국인 들은 에이즈를 처음으로 인식했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감염인 근처에만 가도 병을 옮는 줄 알았던 당시 상황에서, 친구 록 허드슨의 손을 잡으며 그의 뺨에 키스를 하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사진은 혁명적 인 것 이었다. 이 후 테일러는 에이즈 자선 재단을 운영하며 미 정부 보다도 더 먼저 발 벗고 나서서 에이즈 연구기금과 환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자선 활동을 시작하였고 에이즈 자선재단의 대표적인 얼굴이 되었다.

그 이후 91년 농구 스타 매직 존슨의 감염은 '버젓하고 건강해 보이는 스포츠 스타'도 에이즈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충격적 이었고, 영국의 유명 록 그룹 퀸의 리드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 의 감염사실 과 죽음은 전 세계를 놀라 게 만들었다


2) 미 에이즈환자들 거리를 나서다! ‘침묵은 죽음이다’


81년 에이즈 가 처음 발견 된 이후 이 질병과 질병의 확산을 수수방관한 미 정부에 분노를 터뜨려온 에이즈 운동가 “래리 크레이머”는 87년 실의에 빠져있는 에이즈 환자 1만 여명을 모아 뉴욕 맨하탄 동성애자 지역봉사센터에서 '직접행동' 조직 액트업(ACT UP “권력의 해방을 위한 에이즈연대”)을 결성한다.  액트업 은 ‘침묵=죽음 Silence=Death’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고. 백악관 앞에서 에이즈로 사망한 환자의 관을 들고 정부의 무대책에 항의하며 투쟁에 나선다. 액트업 이 결성된 같은 해 87년 미 FDA에 첫 승인 된 에이즈 치료제 AZT (지도부딘)를 환자들이 먹을 수 있게 하고 조속한 치료제 개발과 지원을 촉구 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치료제 AZT를 개발한 제약사가 있는 월스트리트를 봉쇄했다. 이후 에도 액트업 과 연대하는 많은 단체들(옥스팜, 국경없는의사회 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점거하고 성패트릭 성당에서 대규모 시위 등을 지속적으로 벌인다. 이 들의 지속적인 투쟁에 힘입어 에이즈에 대응하기 위한 미 정부의 본격적인 대책 마련인 에이즈지원 법 과 예산 배정은 1990년대에야 이뤄졌다.


95년 클린턴이 백악관에서 최초의 HIV/AIDS 회의를 개최하고 에이즈 치료제 단백분해효소 억재제인 신약들이 개발 되어 에이즈 치료가 좀 더 쉬워진다. 97년 세 가지 향바이러스제 를 섞는 칵테일 용법 덕분에 미국에서 에이즈 사망자가 전년대비 40%이상 감소 하지만 비싼 치료제 때문에 돈 없는 환자들은 약을 먹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미국은 사 보험 제도에다 주마다 보험관련법이 달라 현재도 에이즈는 보험적용이 안 되는 곳이 많다) 액트업 은 특허라는 명목으로 폭리를 취하는 다국적 제약사들을 비난하며 지속적인 약값인하 투쟁을 벌리 고 2년마다 열리는 국제 에이즈 회의에서 “비싼 치료제가 우리를 죽인다!”는 구호를 외치며 다국적 제약사의 전시장들을 때려 부시 며 항의 한다.

그 외에도 반세계화 투쟁의 집회가 있었던 1999년 시애틀, 2000년 제노바, 그리고 2002년 유럽사회포럼이 열리고 있는 피렌체에서 에이즈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반세계화 행진에도 결합하였다. 처음 에이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된 액트 업이 적극적으로 ‘반세계화, ’반자본주의 운동’에 참여 하는 건 에이즈의 문제가 단지 질병의 문제가 아니고 빈곤과 계층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현재 에이즈 환자의 95%는 저개발국에 집중돼 있고 특히 아프리카 사하라이남 국가들에 무려 2천 8백만 명이 몰려 있다. 또한 계층적으로도 의료 접근권이 취약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감염 율 이 많다.(미국의 현재 감염 율 통계를 보면 가난한 흑인들이 50%이상을 차지한다)


에이즈 25년 미국 사회를 평가해보면 초기 게이의 질병으로 왜곡하여 초기대응 하지 못한 실패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부터 현재 이라크 전쟁에 이르는 모든 전쟁에서 죽은 미국인 보다 더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역사와 문화에 지우지 못할 흔적을 남겼고 동성애를 묘사하는 언론의 태도를 바꾸었다. 미국인들은 무시하고 욕해왔던 한 사회의 인간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에이즈 란 질병도 바뀌었다 게이와 약물사용자를 죽이는 질병에서 ‘빈곤과 인권 취약 계층의 질병’으로 바뀌었다. 에이즈 환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한 액트업 은 수수방관하던 미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냈고 에이즈 환자들이 적극적인 행동을 벌이지 않았다면 암 환자 , 림프종 등의 난치병 환자들이 오늘날과 같은 열성적인 환자 권익운동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3) 한국 에이즈25년 감염인 인권침해25년 ‘감염인 들이 인권을 말하다‘


한국에서는 1985년 에이즈 환자가 처음 발견 되었다. 당시 에이즈란 질병을 강 건너 불구경 하던 정부는 87년 부랴부랴 대책이라며 에이즈 예방법을 제정, 감염인 색출, 격리, 통제에 들어간다. 에이즈 예방법을 통해 공포의 이데올로기를 조장하면서 미국이 초기 대응에 실패한 직접적 원인인 동성애자 ‘고 위험 집단’ 정책으로 일관한다. 미국의 실패한 에이즈 정책을 답습하는 정부를 비판해야할 한국의 언론들은 오히려 에이즈 공포를 더 부추긴다. 감염인문제가 발생하면 보복 심리로 문제를 일으킨다며 에이즈문제의 원인이나 연구는 없고 사건에만 초점을 맞춘다. 언론에서 감염인 들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으로 심각한 문제이고 정부에 감염인 감시와 관리를 더 철저히 하라는 기사들을 쏟아낸다. 국가인권위가 지난해 발간한 ‘HIV 감염인과 에이즈환자 인권실태 조사보고서’를 보면 3대일간지 에이즈 관련보도 1600건 중 5.3%인 85건만이 감염인 인권을 기사로 다뤘다.


또한 에이즈를 정부가 제대로 알리지도 않아 국민들은 에이즈 발견 25년이 지난 지금도 에이즈에 무관심 하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로 인식한다. 그나마 에이즈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언론에 의해 왜곡된 공포의 대상 일뿐이거나 입에 올리기 싫은 금기의대상이다. 나와는 무관한 일로 받아들이지만 감염인들 에겐 심한 편견을 보이고, 감염인 들이 퍼트리고 다녀 문제라는 피해의식도 상당하다. 감염인 들은 여전히 부도덕한 ‘걸릴 만한 짓을 한사람들’이란 낙인 이 찍 혀 한국에서 에이즈 25년은 ‘감염인 인권침해 25년‘ 으로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다. 이런 한국사회의 잘못된 에이즈 인식을 조장하는 배경엔 에이즈 예방법(후천성 면역결핍증 예방법)이 존재한다. 87년 제정 후 몇 차례 개정을 통해 감염인 격리 조항 같은 독소조항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감염인은 감시와 통제, 관리의 대상일 뿐이고 에이즈 공포에 기반 한 조항 도 변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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