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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 - 드디어 같은 말 되풀이하는 논쟁

  • 등록일
    2007/02/20 03:40
  • 수정일
    2007/02/20 03:40

EM님의 [채식(주의)]라는 글에 (이 글을 "EM님의 첫번째 글"이라고 칭하겠습니다.)

내가 [나에게 채식은...]이라는 글을 트랙백했고, (이 글은 "저의 첫번째 글")

다시 EM님이 [다시 채식(주의)]라는 글을 트랙백하셔서 ("EM님의 두번째 글")

내가 [계속 채식 논쟁]이라는 글을 트랙백했고, (이 글은 "저의 두번째 글")

다시 EM님이 [채식: 자투리 생각들]라는 글을 트랙백하셔서 ("EM님의 세번째 글")

또 그에 대한 답변을 쓰는 글입니다.

이제 슬슬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 논쟁의 구도가 되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EM님의 첫번째 글에서 '취향'이라고 논하면서 뒤에 내린 결론이 "채식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달라"라고 이야기해야 한다였기 때문에, 저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취향'은 (채소에 대한)'선호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했다고 저의 두번째 글에서 말씀드렸는데, EM님은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반론도 없이 그런 의도로 '취향'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만 늘어놓았습니다. 좋습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칩시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첫번째 글에서 '취향'이라고 하면서, '취향'을 선호도의 문제로 이해한 것에서 '취향'이라는 단어를 한발짝도 더 나아가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취향'이라는 말을 선호도의 문제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EM님께서 처음에 그렇게 해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의미를 기준으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EM님이 굳이 '취향'이 '정치적 취향'을 의미한다고 말한 것에서 스스로 의미를 변화시켰기 때문에, 어이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두번째 글에서 그렇게 이해한 제 판단이 잘못된 것이냐고 물었으나, 돌아온 이야기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합의가 안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취향'이라는 단어에 대한 저의 견해를 아직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견해를 주장하지도 않았는데, 합의를 할 것도 없는 것이고, EM님이 '취향'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한 것인지 명확히 밝히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취향'이라는 말을 제가 처음에 이해했던 선호도의 문제로 생각하신다면, '정치적 취향'이라는 말은 잘못 사용하신 것이고, '취향'이라는 말을 '정치적 취향'이라는 의미로 생각하신다면, EM님의 첫번째 글에서 쓰셨던, "육식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채식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달라"라고 하는 것은 저의 "채식은 육식을 거부하는 실천"이라는 (EM님의 표현대로 따졌을 때의) 정치적 취향을 왜곡하는 것일 뿐입니다. (EM님의 표현대로 따져서) 저의 정치적 취향은 육식과의 공존이 아니라, 육식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저의 정치적 취향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저의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뿐입니다.


EM님의 세번째 글에서 왜 "육식"에 반대하느냐는 질문에 제가 명확히 대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제 글을 읽고서 생각하는 건지 의심스러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분명히 도살을 반대하기 때문에, 육식을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이 어디에 나와 있는지 굳이 설명해야할까요?) 저는 명확하게 대답을 했는데도,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EM님이 내세운 기준, 즉 그 논리의 내적 일관성/정합성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육식반대"라는 것은 결국 존귀한 다른 생명을 내 이익을 위해 취하지 않겠다는 원칙에 대한 일종의 "단계적" 실천이라는 게 저의 설명인 것은 맞습니다. 저는 저의 두번째 글에서 이것이 EM님의 운동론을 기준으로 볼 때, 논리의 내적 일관성/정합성을 어떻게 갖추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설명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그리고 어떠한 논리적인 반박도 없이 저의 논리가 내적 일관성/정합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다고 우기는 건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저도 지금처럼 그저 EM님이 우기고 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EM님이 이렇게 우기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EM님의 세번째 글에 나와 있습니다. "도살반대"니 "육식반대"니 하는 원칙들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하기엔 좀 약하다. 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저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EM님의 이 생각 자체를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저와 EM님의 생각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원칙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이 부분에서 놀라운 것은 "고기"에 대한 현실인식부터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EM님 세번째 글에서 주위를 보면 가난때문에 "고기"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고기"가 귀한 이유는, 가난 때문이 아닙니다. 부자들에게도 "고기"는 귀합니다. 그건, "고기"가 곧 일정정도의 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왜 가진 자들이 더 많은 고기를 소비하고 있고, 왜 남성들이 더 많은 고기를 소비하고 있고, 왜 전쟁에 나가는 군인에게는 고기를 주면서, 그때의 (여성을 중심으로 한) 민간인들에게는 고기를 주지 않는지... 등등등 수많은 논의들은 모두 뒤로 넘겨둔 채 (EM님이 동의하시든 아니든), 가난 때문에 "고기"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고기 자체가 가난 속에서의 생존의 수단이라는 의미입니다. 귀하고 비싼 고기지만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채식을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고기 자체가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채식의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부르주아적인 사치가 아니며, 많은 비용을 소비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기"가 가진 파괴적인 권력을 해체하는 길에 서는 것입니다. 채식을 함으로써 고기가 결코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채식은 고기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어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누구에게나 어필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채식을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의 문제는 '보편성'입니다. EM님은 "남녀평등"이라는 가치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운동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 EM님의 두번째 글에서 "새마을 운동"도 운동이라고 하신 걸로 봐서는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지만, "새마을"이라는 가치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채식은 운동이 아니라고 하신 걸로 봐서는 "채식"이라는 가치는 보편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세 가지 정도의 비판을 제기하겠습니다. 첫째, '보편성'과 '운동'의 관계는 결코 '보편성'이 보장되어야 '운동'이 성립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떠한 주장이 '운동'을 통하여,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주장이 보편적이냐 아니냐를 선험적으로 논하는 것은 '운동'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 예로, "남녀평등"이라는 가치가 처음부터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보편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그건 뒤로 하고...) 끊임없는 여성주의 운동을 통해서 "남녀평등"이라는 가치가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채식"의 경우도 현재 보편성을 가지지 않고 있다면, 끊임없는 운동을 통해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것이 보편성을 가지는 것은 그 시대나 사회적인 상황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보편성을 가진다고 할 것이고, 한국사회에서의 남성들에게는 '군대를 가는 것'이 보편성을 가진다고 할 것입니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그 사회의 주류적인 체제에 속하여 연동할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일 뿐이고, 그렇지 않는 '운동', 또는 '이론'들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편성'을 기준으로 어떠한 사안에 대하여 평가하는 것은, 그것이 '운동'이든, 아니면 EM님의 의견에 따른 '정치적 취향'이든, 주류적인 체제에 대하여 무비판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접근하면, '새마을 운동'은 그 시대에 충분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반대로 '반자본주의 운동'은 현재의 시대가 자본주의시대라는 이유만으로 보편성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EM님의 논리에 따르면 '반자본주의 운동'이라는 말 자체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건 보편성이 없기 때문에, 운동이 아니라 개인적인 취향일 뿐입니다. 셋째, 결국 보편성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를 판단하게 되는 EM님의 의견조차도 자의적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EM님은 보편성을 논하는 근거들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고, 또 설령 제시했다고 치더라도, 보편성은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구조를 가진 개념입니다. 모든 경우에 통할 수 있는 이론인지 아닌지는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편성의 논쟁으로 '운동'을 논한다면, 저는 더 이상 EM님과 논의할 것이 없게 됩니다. 저는 저의 운동을 자의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인데, EM님은 감히 저의 운동을 EM님의 뜻대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편성의 기준으로 (EM님의 운동이 아니라) 저의 운동을 논할 때는 저는 충분히 주관적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여기서 이 운동 논쟁의 구조를 조금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저의 운동으로 '채식'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EM님은 그것은 운동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EM님의 운동이 아닌 것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운동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운동이 될 수 없는 근거로 주장의 정당성/보편성의 문제와 논리의 내적 일관성/정합성의 문제를 제시하였습니다. 이 각각의 근거에 대하여, 저는 이미 충분한 반박을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채식"을 하는 근거를 제시하였고, 어떻게 담론을 만들것인지를 제시하였고, 어떻게 재생산할 것인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제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이유도 없습니다만...) 주장의 정당성의 문제는 EM님과 생각이 다른 부분을 지적하였고, (이 부분에서 EM님이 근거도 없이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우기시면 곤란하겠습니다.) 보편성의 문제는 보편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논리의 내적 일관성/정합성의 문제는 저는 저의 두번째 글에서 분명히 설명했는데, EM님께서는 근거도 없이 무조건 성립하지 않는다고 우겼으므로, 성립하지 않는 근거를 EM님께서 제시하시기 전까지는 제가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p.s.1 "그런 식의 운동의 미래상은 이미 몇몇 선진국들에서 볼 수 있다는 거다." 라는 말은 곧 "니네가 채식 해봤자 별 수 있냐?"라는 의미입니다. "니네가 고민해봤자, 걔들이랑 똑같은 거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또 다른 누군가는 EM님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어떤 운동들에 대해서도 "그거 해봤자 별 수 있냐?", "그거 예전에 누가 했는데, 이미 망한 거잖아." 라는 식으로 말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p.s.2 그리고, 지각생님의 글을 읽으신 것인지 모르겠으나, 저의 글하고 많이 다른데, 저의 글에 대한 답변으로 대신하기는 무리라고 봅니다. 따로 답변을 하시든, 안하시든 그건 EM님의 자유입니다만, EM님의 세번째 글로는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지각생님의 중대한 문제제기를 아무런 생각없이 무시하고 넘어가지는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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