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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

  • 등록일
    2007/04/02 04:09
  • 수정일
    2007/04/02 04:09
어느 만우절의 농담같은 이야기 그는 죽었다. 4년전의 만우절에 농담같은 이야기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살. 도대체 왜 죽었는가? 아니,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죽었는가?"라고 묻는가? 진실게임 어쨌든 추궁은 계속된다. 그는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진실이 어디에 있기를 바란다. 진실은 없는데, 진실이 어디에 있기를 바라고 있으므로, 어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곧 진실이 된다. 그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가 되어야 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이성애자가 되어야 한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 어떤 사람에 대하여 동성애자가 아닌지 의심하는 것은 동성애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에 대하여 굳이 이성애자라고 증명해야 하는 것도 동성애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미 죽어버린 그를 통해서, 굳이 진실게임을 하면서까지 동성애는 싫다고 몸부림치던 언론들과, 또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어떤가? 수집 "나는 동성애를 혐오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싶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건 당신의 알권리로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당신이 그에 대한 어떤 정보를 안다는 사실은 결코 당신의 지적욕구로 끝나지 않는다. 궁금하다면, 그에게 직접 물어보시라. 당신은 수집광. 그가 당신에게 공개하고 싶은지, 아닌지는 관심없다. 당신은 스포츠 신문 1면에 있는 기사 제목으로 그에 대한 정보수집을 끝낸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물론, 그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들었고, 얼굴도 알고 있었으나, 그의 생전에 그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본적도 없고, 그의 노래를 들은 적도 없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불안을 통해서였다. 나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때까지 내가 죽으면 내 안의 고통들이 평화로워질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죽어서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의 존재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나를 움츠리고, 몸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려고만 했다. 꼭 당신의 혐오가 아니더라도, 불특정다수의 혐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나를 가두고, 아무리 술에 취해도,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않는다. 말하고 나면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잠재적 성범죄자 마치 '잠재적인 성범죄자'인 것처럼... 불결한 무언가가 항상 묻어 있는 사람처럼... 눈을 마주칠까봐. 피한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볼까봐, 꼭꼭 숨는다. 군대 어떤 마음은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놀라운 곳이다. 마음이 금지되다니... 그런데,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들의 바로 그 어떤 마음들은 낮은 계급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왜곡하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일방적으로 더듬고, 때로는 일방적으로 성기를 만지고... 그게 바로 성폭력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성폭력으로 보지 않는다. "여자한테 그러지, 왜 남자한테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좀 높은 사람들은 아랫사람들 앞에서 뻔뻔하게 말한다. 하기야, 매매춘을 하지 말라면서 전국에 산재해 있는 경찰이 집중단속하는 매매춘지역들을 남한 지도를 보여주면서 설명하기도 한다. 마치 거기말고 다른데가서 하라는 듯이... 경찰에 안 걸리기만 하면 된다는 듯이... 그리고 그런 어떤 마음을 가지느니, 차라리 매매춘이 낫다는 식이 되기도 한다. 추궁의 시선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이 혹시 ○○○ 아닌가요?" 본명을 묻는다. 나이를 묻는다. 또 다른 어떤 것들을 묻는다. 기록을 남긴다. 끊임없이 기록을 남긴다. 내 사진이 어딘가에 올라가고, 내 이름은 누군가에 의해서 회자된다. 경찰과 국정원은 통신기록도 반드시 남겨두라고 한다. 우리에겐 물어도 답하지 않을 권리가, 우리들을 구성하는 어떤 것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 분신 여기는 그의 경우와는 반대다. 묻지 않는다. 분신한 사람이 누구인지만 관심이 있을 뿐. 분신한 사람들의 주장은 애써 외면한다. 고요하게 4년전 그의 죽음을 회고하던 그 순간, 분신기사를 봐야 했다. 나는 삶의 또 다른 무게를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 곳에 가지 않은 나. 그저 이렇게 오래된 기사나 퍼왔다. 링크를 걸려고 했으나, 해당사이트에 로그인을 해야 볼 수 있는 기사라서 전문을 들고 왔다. (오래전에 퍼 둔 것이 있었으므로...)


2003년 4월8일은 장궈룽(장국영·레슬리 청)의 장례식날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지만, 사후 1주일 동안 조문 대신 추문이 떠돌았다. 언론은 그의 동성애를 이해하는 척 이용했고, 팬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동성애를 부정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웅성거림을 통해 한국 사회는 동성애 혐오증을 다시 한번 커밍아웃했다. ‘호모냐 아니냐’ 혹은 ‘커밍아웃을 했는가 아닌가’. 장궈룽의 성 정체성을 둘러싼 스포츠 신문과 장궈룽 팬들의 전쟁은 그의 부음이 전해진 다음날 터졌다. 먼저 스포츠 신문이 ‘동성애 삼각관계’때문에 자살한다는 내용이 담긴 유서로 선제공격했다. ‘동성애 삼각관계'는 소설이다 “20대의 청년을 알게 되었고, 그와 탕탕(당당)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매우 괴롭다. 이에 자살한다.”(스포츠 신문에 보도된 유서 내용) 황색 언론은 핑크빛(동성애자들의 상징색) 이야기를 좋아하게 마련. 그의 동성애를 기정사실화하는 속보가 잇따라 지면을 장식했다. 유서 공개 다음날 스포츠 신문에는 ‘450억원의 유산을 동성애 애인 탕허더(당학덕)가 물려받게 되었다는 속보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이들은 탕이 유족들을 ‘제치고’ 상주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파파라치들이 찍은 ‘삼각관계’의 주인공 20대 청년 케네시의 사진도 인터넷을 떠돌았다. 스포츠 신문은 애도하는 척하며 그의 죽음을 즐기고 있었다. 배우 장궈룽의 발자취를 기리는 짧은 기사에 그의 사생활을 ‘회고’하는 긴 기사가 따라붙었다. 한동안 지면은 ‘동성애’ 타령으로 채워졌다. 장궈룽의 애인 탕허더는 누구인가, 장과 탕의 관계 등 시시콜콜한 사생활이 지면을 장식했다. 선정적 보도 속에서 동성애는 우울증을, 죽음을 부른 ‘원죄’로 다시 한번 부정됐다. 더구나 동성애에 삼각관계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장궈룽의 팬들은 슬퍼할 틈이 없었다. 팬들은 ‘거거’(哥哥·오빠·장궈룽의 애칭)를 지키는 정의의 사도로 스포츠 제국의 습격에 맞섰다. 이들은 팬 사이트를 베이스캠프로 스포츠 신문이 장궈룽을 동성애자로 몰고간 근거를 일일이 반박했다. 이들이 홍콩·대만 등 해외 언론을 서핑한 결과에 따르면, 장궈룽의 유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국내 스포츠 신문에 보도된 ‘동성애 삼각관계’ 등은 홍콩 언론의 ‘소설’을 그대로 받아쓴 것이다. 팬들의 항변은 과거로 거슬러올라갔다. 이들은 자신의 기억을 뒤져 “장궈룽은 커밍아웃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단 한 차례 인터뷰에서 “진정으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는 언급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황색언론이 ‘애인’으로 공식화한 탕허더에 대해서도 장궈룽은 “그는 좋은 친구(好友)다”라고 답했다고 팬들은 전한다. 이들의 사실 확인은 스포츠 신문의 추측 보도를 압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소총’은 스포츠 제국의 무차별 ‘폭격’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그저 인터넷의 바다에 대고 외칠 뿐. “장궈룽은 커밍아웃하지 않았다. 고로 그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언론은 우리 오빠를 두번 죽이지 말라.” 팬들은 각종 게시판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오빠는 동성애자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를 ‘양성애자’로 말한 방송사 게시판에는 비난이 빗발쳤다. 일부 팬들은 장궈룽과 연인관계를 인정한 탕을 거짓말쟁이, 심지어 살인 혐의자로 몰았다. 홍석천을 향한 엉뚱한 분풀이 지극한 애정에서 출발하는 팬들의 ‘부인’에는 이 사회가 앓고 있는 동성애 혐오증의 전형이 들어 있다. 동성애는 인정하지만 우리 오빠가 동성애자인 사실은 참을 수 없다는 여동생의 심리다. ‘동성애자 유족 증후군’이라는 신종 돌림병이다. 이들은 열렬한 ‘부인’ 끝에 꼭 한마디의 단서를 붙인다. “그가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상관없다”고. 이들의 숨겨진 동성애 혐오증은 이 사회의 상식 있는 시민들이 동성애를 부정하는 전형적 방식이다. 이들의 믿지 않고 싶은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장례식을 전후해 이들의 열렬한 부인에 찬물을 끼얹는 ‘비보’가 전해진다. 일부 팬들이 “중국팬들도 장궈룽이 양성애자 혹은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중국어를 하는 팬들이 최신 정보를 전달하지 않아 오해가 생겼다. 이제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는 글을 올린 것이다. 더구나 탕이 장례식장에서 “그대여, 하늘과 땅 사이에 시간이 멈출지라도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라며 울먹이자 동성애 혐오증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끝끝내 ‘아니’라고 도리질쳤다. 다른 이들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양성애자’라는 애처로운 항변을 이어갔다. 장궈룽이 동성애자(양성애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 엉뚱하게 분풀이는 “장궈룽은 내 첫사랑이며 동성애자들의 우상”이라고 인터뷰한 홍석천씨에게 돌아갔다. “오빠를 이용하지 말라”는 분노였다. 물론 그를 진정으로 기리는 일부 팬들은 “당신은 우리들의 영원한 데이(<패왕별희>에서 장궈룽이 맡은 동성애자 역할)로 남을 겁니다”라는 멋진 조사를 남기기도 했지만. 망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 장궈룽에게 ‘섹슈얼리티’는 “게이다 아니다”라는 한마디에 담기 힘든 복잡하고 모호한 진실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말하지 않고 드러냈다. 집요한 의혹의 눈길 속에서도 <패왕별희>와 <해피투게더>의 게이 역을 피해가지 않았고, 호모에로틱한 뮤직 비디오를 찍었으며 콘서트 도중 남자친구를 향해 ‘당신과 눈이 맞았다’는 노래를 바쳤다. 마치 “당신 호모 맞지”라고 캐묻는 파파라치들을 비웃듯. “오빠 아니죠”라고 애원하는 소녀들이 보라는 듯. 추궁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넘겨짚지도 부인하지도 않는 것, 망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일 게다. 어떤 사람은 묻지 않아도 답하고, 어떤 이들은 물어도 답하지 않는다. 커밍아웃할 용기만큼이나 커밍아웃하지 않을 자유도 중요하다. 발 없는 새는 마지막 비상을 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음을 통해 커밍아웃을 하고 싶었을까, 죽음과 함께 영원한 비밀로 묻히기를 바랐을까. 그는 죽었다. 그에게 영면을 허하라. 잘 가라, 내 청춘! 신윤동욱 기자 / 한겨레‘왜냐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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