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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보고서

  • 등록일
    2007/06/18 16:36
  • 수정일
    2007/06/18 16:36
슈아님의 [초대합니다]에 관련된 글. 방금 마지막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제 졸업논문만 쓰면 됨.ㅋㅋ) 그 보고서에 <멋진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넣었어요.ㅋㅋ 두 달 전에 본 그 영화에 대한 내 맘대로의 해석에 바탕을 둔.ㅋㅋ <멋진 그녀들>에 대한 후기를 이것으로 대신하겠어요.


이번 수업에서 기말고사를 대체하는 보고서는, 그 주제로 “인간주체의 자기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와 “현대 예술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서술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 학기 내내 둘 중에 어떤 주제로 쓸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을 하다가 이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하여 모두 답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두 가지의 질문은 매우 중요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나의 입장에서는 거의 동일한 질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현대예술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시작하여, 이것이 인간주체의 자기 정체성과 어떻게 연결되는 지에 대하여 서술하겠다. “현대 예술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하기 위해서는, “현대 예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다시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존재 의미에 대하여 논할 때의 ‘현대’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우선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현대’는, ‘모던’이 가진 의미 중에 사전적인 의미로서 ‘지금’이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즉, ‘현대’는 지금 내가 이 보고서를 쓰고 있는 순간이고, 내가 예술의 존재 의미를 규정하고 있는 순간이며, 내가 인간주체의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 순간이다. 다만, 현대는 시간적인 의미로서 과거와는 단절된 ‘순간’의 의미로서만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는 역사적인 정의에 가깝다. ‘과거와는 다르지만, 과거의 것으로부터 이어져 온 지금’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예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수업시간을 통해, 구석기시대의 미술에서부터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예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사회구조에 따라, 예술가들의 주관에 따라 예술은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그 어느 시대라도 예술에 대하여 접근하는 공통적인 관점이 있었다. 그것은 ‘개인 또는 집단이 제작하는 창조물’에서 비롯된다는 것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철학’이 어떤 형태로든 반영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봤을 때, 결국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거나, ‘사회 속에 놓여져 있는 개인’을 반영하는 결과물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제 ‘현대 예술’은 ‘역사적으로 과거의 것으로부터 이어져 온 지금, 곧 현대를 반영하는 창조물을 제작하는 과정’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예술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또 다른 것들을 예술이 아니라고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구조주의적 관점을 지지한다. 우리가 예술을 규정하는 것은 위와 같이 단순히 ‘예술의 역사적 규정들에서 공통점을 분석하는 것’으로만 진행해서는 안 된다. 예술을 규정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것들과의 ‘차이’를 통해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는 내가 이번 학기에 [XXX XX]이라는 수업을 신청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을 확장하게 된 계기가 몇 가지 있었다. 그 중에 하나를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2007년 4월 5일부터 4월 12일까지 열렸던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작품들 중에 주현숙 감독의 <멋진 그녀들>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었다. 이 작품은 국제결혼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보통의 다큐멘터리와는 다르게, 감독이 대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주석 1번)의 위치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 자신이 이주여성들과 함께 소통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주관적 관찰자’의 위치로 등장하고 있다. 주현숙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에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주여성들을 보는 시선에 있어서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 지에 대하여, 날카롭지만 따듯하게 그려내고 있다. 나는 이것을 보기 위해, 영화 상영시간이 [XXX XX] 수업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한 번 결석해야 했다. 결석을 감수하면서까지 봤던 그 작품에 대하여 대체로 만족스러웠다고 평가하고 싶다. 내가 만족스럽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영화를 보고 나서 새로운 고민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첫째, “미(美)는 어디에서 오는가?”의 문제였고, 둘째는 “다큐멘터리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멋진 그녀들>을 통해서 전자의 질문이 성립하게 된 이유는, 내가 <멋진 그녀들>을 보면서, 이 영화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느낀 아름다움은 시간적으로 봤을 때, [XXX XX] 수업시간에 “미(美)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내가 겪은 어떤 좋은 느낌들을 ‘아름답다’ / ‘아름답지 않다’의 범주에서 표현한 결과에 불과하다. 이미 수업 게시판을 통해 밝혔듯이, 나는 아름다움이란 ‘욕구의 대상화’(주석 2번)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멋진 그녀들>은 다큐멘터리 중에서는 내가 경험하고 싶었던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아니, 반대로 말해야 한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새로운 시각을 경험했고, 그 새로운 시각이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나의 욕구로 대상화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후자의 질문에 대하여, ‘다큐멘터리’ 라는 개념은 다른 상업 영화, 또는 예술 영화와의 ‘영화 내에서 드러나는 차이’(주석 3번)에 의하여 성립된 것임을 지적하고 싶다. 그런데, <멋진 그녀들>은 이런 점에서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있다. 주제 자체로는 기존의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영화를 전개하는 방식에서는 앞에서 논한 차이가 발생했다. 이제 질문은 “다큐멘터리와 예술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로 바뀐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앞서 제시한 예술에 대한 역사적 공통점 - ‘개인 또는 집단이 제작하는 창조물’에서 비롯된다는 것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철학’이 어떤 형태로든 반영된다는 것 - 을 근거로, 다큐멘터리를 예술과 구분하는 것은 매우 모호한 작업이며, 다큐멘터리가 예술로서 인식되는 데에 역사적 맥락에서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멋진 그녀들>에서 감독이 ‘주관적 관찰자’로 등장하는 것은 감독 자신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철학’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이었다. 이제, 문제는 “예술로 규정되는 것과 예술이 아니라고 규정되는 것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의 문제로 접근한다. 앞서 설명한 <멋진 그녀들>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 차이는 창조물의 형식이나, 내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는 ‘미(美)’의 문제에 있다. 즉, 우리가 어떤 창조물에 대하여 예술로 규정하는 것은 ‘미(美)’를 느끼느냐 아니냐의 주관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것에 대하여 주관적인 문제에서 출발한다고 인식하는 이유는 ‘미(美)’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욕구의 대상화를 인식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주석 4번)이런 의미에서 봤을 때, 결국 ‘미(美)’를 느끼는 것만이 예술이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예술은 주관적인 영역을 넘어서,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왔다. 이것은 곧 ‘미(美)’로 규정할 수 있는 개인의 욕구가 개인의 고유한 영역으로만 해석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집단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집단화 과정에서 ‘미(美)’는 사회의 질서 속에서 재해석된다. 그러므로, 예술은 사회에 대한 인식과 철학이 반영된 것이지만, 그것이 예술로 규정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그것이 어떤 위치에 서고, 어떤 역할을 하는 지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재해석이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바로 예술을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의 ‘차이’가 된다. 그렇다면, 예술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에서의 집단화된 ‘미(美)’의 재해석을 진행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어느 정도의 집단적 동의를 얻어내는 과정이다. 앞서 논의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결국 ‘현대 예술’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하나는 현대사회에서 집단화된 ‘미(美)’의 재해석을 진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현대사회에서 아직 집단화 되지 않은 욕구들을 ‘미(美)’라는 이름으로 집단화하는 것이다. 이제 “현대 예술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 질문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질문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현대의 창조물들을 집단화된 ‘미(美)’의 재해석을 통하여 예술로 규정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현대의 창조물에 대하여 느끼는 주관적인 수준에서의 ‘미(美)’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집단화, 또는 객관화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다. 전자의 질문은 현대 예술의 존재 의미를 역사적인 분석을 통하여 확인하려는 것이다. 집단화된 욕구들을 재해석하여 지식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작업은, 대상화 된 욕구가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술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던 속성 중에,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우월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곧 이것은 ‘미(美)’ 역시도 ‘미(美)’가 아닌 것에 대한 우월성을 가지는 것을 반영한다. 그런데, 개인의 욕구는 어디에도 우월성이 없다. 개인의 욕구에 대해서는 “욕구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만 있을 뿐이다. 결국 대상화된 욕구가 권력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것과 대립하는 욕구보다 우월한 것이 되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술의 역사적 변화 과정에서 이전의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반정립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역시 현대 예술도 예술의 역사적 변화 과정에서의 반정립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후자의 질문은 욕구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의 대상화된 욕구가 타자의 욕구와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것 역시 자신의 욕구를 긍정하기 위한 것임은 전자의 질문과 일치한다. 그리고, 집단화, 객관화의 과정 역시도 어느 정도의 권력을 추구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때의 권력은 동일자와 타자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결국 여기서 현대 예술은 현대사회에서 동일자와 타자를 구분하여, 동일자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과정으로서 존재 의미를 갖는다.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종합하면, 결국 현대 예술은 현대사회에서의 ‘미(美)’의 재해석을 통하여 예술로 규정함으로서 동일자와 타자의 구분 속에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으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앞에서 서술한 현대 예술의 존재 의미가 인간 주체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 지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에서의 문제는 “인간 주체가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달려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규정하는 방식에 있어서 사람들마다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여기서 다 논의할 수는 없고, 여기서는 그 중에 많이 논의되고 있는 방식 두 가지를 서술하겠다. 우선, 자기 정체성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방식이 있다. 이것은 혈연, 지연, 학연 등, 대인관계를 통하여 규정하는 방법이 있고, 직업이나 소속단체를 통하여 전체 사회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고려하여 규정하는 방법이 있다. 즉, ‘○○○의 아들’, ‘○○○의 친구’, ‘○○○의 선배’등의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이 전자의 방법이고, ‘나는 학생입니다’, ‘나는 ○○○학교의 누구입니다’라는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이 후자의 방법이다. 이것은 언어적으로 매우 명확한 규정 방법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우선적으로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두 번째로, 자기 정체성을 자신의 욕구를 중심으로 규정하는 방식이 있다. 이것은 성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에 많이 쓰이지만, 꼭 그곳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희망, 자신의 꿈 등이 자기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자신의 욕구를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고, 욕구는 충족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남기 때문에, 이런 규정 방식은 대인 관계에서는 보통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는 매우 중대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첫 번째의 사회적 관계 속의 규정의 방법에서도 그 규정은 결국 욕구에서 비롯된다.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욕구 자체도 하이퍼리얼리티에 의해, 조건화되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관계는 조건화되고 왜곡된 욕구들이 구성한 관계라는 의미다. 또, 많은 사회적 관계 중에 자신이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에 쓰게 될 몇몇 관계들을 선택하는 것 역시 자신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관계의 문제가 결국 욕구의 문제로 치환되고,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문제는 결국 욕구의 문제로 해석된다. 결국 인간 주체의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의 욕구를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문제는 자신의 욕구를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여기서부터 다시 현대 예술의 존재 의미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현대 예술의 존재 의미를 욕구의 대상화 과정에서 해석했다. 인간 주체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도 욕구를 대상화하는 과정에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도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 ‘나’의 동일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욕구의 대상이 되는 ‘그것’들의 차이에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는 사과와 배를 원하고, B는 감을 원한다고 하면, 사과와 배에 대하여, 그것을 원하는 A라는 ‘나’는 동일하지만, A가 원하는 사과와 배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또, 사과를 원하는 사람으로서의 A와 사과가 아닌 감을 원하는 B가 서로 자기 정체성이 다른 이유는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주체가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과정은 욕구의 대상화 과정 그 자체다. 또, 그 과정은 인간 주체를 욕구가 대상화된 지점을 통해 다시 한 번 대상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A는 사과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기를 희망한다고 A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규정하는 것이다. 결국, 현대 예술은 인간 주체의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과정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작가나 관객의 욕구를 예술 작품을 통하여 대상화시키고 있을뿐더러, 자기 정체성을 예술 작품에 대상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주체의 자기 정체성이 대상화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의 존재 의미는 인간 주체의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욕구를 보여주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주석 1) 다큐멘터리는 정치적인 의도가 많이 깃들여져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에, 결코 객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객관적 관찰자’라는 의미는 감독이 자신의 생각의 근거를 작품 속에서 제시하기 위해, 작품 속에서 대상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중립적인 위치에 서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것은 ‘다큐멘터리는 객관적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관찰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입장을 객관화시키기 위하여, 감독이 ‘객관적 관찰자인 척’ 연기하는 것이다. 2)‘대상화’라는 말은 ‘어떠한 사물을 일정한 의미를 가진 인식의 대상이 되게 함’이라는 의미와 ‘자기의 주관 안에 있는 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하여 밖에 있는 것으로 다룸’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보고서에서 쓰이는 ‘대상화’라는 단어의 의미는 후자의 의미에 가깝다. 즉, ‘욕구의 대상화’는 내면의 욕구를 밖에 있는 대상을 통하여 논한다는 의미다. 3) 이것은 영화의 내용을 구성하는 주제나 소재의 차이, 또 영화를 전개하는 방식의 차이를 포함하는 의미다. 4) 다만, 미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인식한 것을, 욕구는 ‘고유한’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욕구가 발생하는 과정 자체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또, 나는 그것에 대하여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예술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의 근원적인 질문이 아니라, “예술은 보통 어떤 것으로 규정되는가?”의 해석상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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