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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03
    상념
  2. 2009/10/02
    한심한 정치평론(2)
  3. 2009/10/01
    여성적 글쓰기
  4. 2009/09/30
    췟!(2)
  5. 2009/09/30
    성은 예외적인가(12)
  6. 2009/09/28
    La Adelita
  7. 2009/09/27
    실록 연합적군
  8. 2009/09/27
    자본주의와 가족제공동체
  9. 2009/09/26
    페미니즘 무엇이 문제인가(5)

상념

여대를 다녔던 나는 입학하자마자 무려 다섯명의 친구가 생겼다. 항상 여섯명이 몰려다녀야하니 즐거울 때도 있었고 괴로울 때도 있었다. 미팅을 하거나 클럽에 가거나 술을 마실 때는 행복했다. 사람이 많을 수록 좋으니까. 하지만 평소에는 힘들 때가 더 많다. 1학년 때는 노는게 좋으니까 그냥 좋았는데 2학년이 되니까 내 생활에 회의가 생겼다. 친구들은 많았지만 그 중 내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 뒤로도 어딜 가든 여자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던 기억은 없다. 여자들과는 개인적으로는 친분을 맺었지만 아무래도 내 사회성은 여자들과는 안맞는것같다. 내 친구들은 주로 남자들이다.

 

지금은 친구가 고참주부가 되었지만 처음 결혼했을 때는 누구가 그러하듯이 남편에 대한 하소연을 많이 했다. 그 중 하나가 남편이 집안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놀랍게도 친구 남편의 편을 들었다. 너는 하루종일 집에만 있으니까 관심사가 집밖엔 없지만 남편은 하루종일 밖에서 일만 하는데 집에 들어오면 쉬고싶지않을까. 친구는 넌 친구도 아니라고 막 화를 냈다. 왜냐면 그 때 나는 직장을 다녔고 언니는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내가 집에 들어오면 언니가 나한테 넌 집안일에 관심도 없다고 나를 들들 볶았기 때문이다. 가재는 게 편.

 

운동을 상당히 늦은 나이에 시작했던 나는 어느 조직에 있었는데 그 조직은 남녀비율이 대략 3:1이었다. 뭐 활동가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상당히 분위기가 좋았고 나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여기서도 나는 친구들이 주로 남자들이었다. 남자들과 주로 대화하다보면 결국 남자들의 하소연을 듣게된다. 그들의 하소연은 이렇다. 여자들의 판단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여성활동가가 여자는 가슴이 빵빵해야돼라는 말을 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말을 남성활동가가 하면 성희롱이 된다는 것이다. 아.. 그들의 피해의식은 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무서워서 술을 못마시겠단다. 물론 나는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저지르는 짓이 술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적매력이 없기 때문에 사소한 말실수도 여자들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섹시하면 여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거란다. 흑흑..

 

얘기가 산으로 가는데 나는 논쟁을 할 때 논쟁의 당사자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논쟁하지 않을 때도 있다. 서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논쟁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 그럼 왜 논쟁을 하는가. 그 논쟁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논쟁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옮음을 주장하기 때문에 비판자가 아무리 자기 논리가 틀렸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줘도 잘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경우를 지난 십년동안 수도 없이 봐왔다.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있을때 주관적이지 객관적이 되기 힘들다.  우리는 선악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 따를 때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로우면 선이라고 하고 자신에게 해로우면 악이라고 한다. 선악의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부시는 이란, 이라크, 북한이 악이고 우리에게 부시는 악이다. 그람시의 [감옥에서 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그때 잠깐 손만 대었던 그 주제를 <사심 없는> 관점에서, 즉 영원히 fur ewig 천착하고 싶습니다. 두번째는 비교언어학 연구입니다. 순전히 그것뿐이랍니다. 그보다 더 사심 없고 영원한 fur ewig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심이 없다는 것은 이해관계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틀릴 수도 있고 상대가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하지만 논쟁을 할 때는 전혀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나는 얼마전 누군가에게 헛소리로 도배하지 말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이 말은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 개소리니까 입닥치고 있으라는 말이다. 나는 이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정말 무서워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추신. 남자들이 하소연하는거 들으면 나도 초큼 미안해져서 응.. 그렇구나.. 미안해.. 나도 앞으론 조심할께 그러지만 또 내 신경 건드리면 다시 악마근성 나온다. 정념에 사로잡힐 때 인간은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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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정치평론

나는 정치평론은 별로 쓰고싶지 않다. 현실정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신문도 안 보고 테레비도 보지 않는다. 국회의원 이름도 잘 모르니 그 사람들 머리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알 턱이 없다. 그런 내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얼마전 <레디앙>에서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진보신당이 1.9%의 지지율을 얻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 정도면 존재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3.9%의 지지율을 얻어 도찐개찐이지만 친박연대와 창조한국당보다는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는 점에서 축하할만하다. 도대체 우리의 진보정당은 악마같은 이명박이 통치하는 이 엄혹한 시기에 무엇을 하고있나. 슬프다.

 

어제 점심을 먹다가 어느 분이 한탄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폴레옹은 인민은 이익과 공포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했다고 한다. 확인해보지 않아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또 어느 분은 자신이 노조위원장이었을 때 조합원들한테 파업하자고 해도 안하니까 저 XX놈들 더 당해봐야돼 그랬는데 사측이 더 탄압을 하니깐 아예 사측에 붙었다고 하신다. 이것도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기본적으로 정치는 통치의 기술이고 윤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던 고대 그리스에서도 자유인들은 정치에 대해 논했지만 어차피 정치에 대해 논할 수 없었던 여자와 노예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치하는 기술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았을까. 근본적으로 해방의 정치는 반정치를 지향해야지 정치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된다. 미국에서는 이미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pc용어)이란 말은 냉소적으로 쓰이고 있다. 뭐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말해서 ~지.

 

미국은 진보정당이 아예 없다시피 하고 두 개의 자본당이 번갈아가며 통치를 하고 있는데 그건 미국에서 대선이 하나의 쇼이기때문이다. 미국은 선거인단제도가 있기 때문에 선거인단을 뽑아도 정당에서 매수할 수 있고 오직 관건이 되는 특정주에서의 대결이 판세를 가르는 경우가 많다. 근본적으로 이 선거인단제도는 17세기(아마도)에 미국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이 직접투표를 했을 경우 정치가 급진적이 될 수 있다는 매우 계산적인 판단하에 고안한 제도로 알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던 그 대선에서 네이더가 출마했을때 한국의 좌파조직 중에서 네이더를 지지하고, 네이더를 지지하지 않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미국 좌파들을 비판하는 글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네이더가 출마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부시의 당선에만 도움이 될뿐이지 미국은 선거인단 제도를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진보정당 후보가 골백번 출마해도 당선되는 일은 없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악의 세력이라고 해도 자기들끼리 번갈아가며 집권하는게 좋지 집권세력이 자기 잘못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은 좋은게 아니다. 물론 부시의 재선이 네이더 탓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네이더는 대단하지 않다.

 

당시 부시의 재선은 근본적으로 깜빡이전술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는 각종 색깔의 경보를 수위를 조절해가며 발동했는데(오렌지색 경보, 적색 경보 기타 등등) 이것때문에 미국인들이 느낀 공포감은 대단했다. 항상 전투태세였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줄 사령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주당도 호전적이지만 공화당에 비해서는 야성적인 맛이 많이 부족하다. 실질적인 위협을 느끼는 민중의 정서를 이해하지 않고 부시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선전/선동하는 것은 사람들이 결국 자신들을 위협하는 세력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민족해방과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전략하에 의회주의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데 근본적으로 선거공약이라는 것은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일종의 상품과도 같은 것이고 유권자에게는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은 무상의료나 무상교육이나 용산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좀 비참하게 말해서 강남에 이사갈 수 없으니까 자기 아이가 나중에 커서 피해보지 않도록 강남 버금가는 교육시설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는 것이고 재개발이 되서 집값이 오르는 것이고  자기 동네에 무슨 시설을 설치해주든가 없애주든가 하는 그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꼭 비난받아야 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 평소에 진보정당은 용산집회에나 가 있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면 사람들이 보기에 진보정당은 선거때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준다고 하지만 막상 집권하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을 할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요즘 대학생들이 학생회 선거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나는 분명히 들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정치는 윤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고 힘이 없으면 그 세력 지지하지 않는다. 진보정당은 의회주의 전술을 구사하는 이상 힘을 길러야하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적절히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대중을 기만할 줄 알아야한다. 진보정당 당원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분열된 자신을 발견하고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죽일듯이 싸우는것은 정력낭비라고 본다. 의회주의 전술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을 택했다면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장하는 방법을 연구해야한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이게 중요한 것이다. 나는 제발 의회주의 전술을 구사하는 진보정당이 고도의 세련된 기만술에 대해 공부하길 바란다. 집권하고 나서 엎어버려야지 집권하면 엎어버리겠다고 벌써부터 얘기하면 사람들이 무서워하잖아.

 

추신. 이명박은 그짓을 하고도 왜 40%의 지지율을 획득하는가. 그는 기만에 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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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 글쓰기

얼마전 술자리에서 어떤 여성에게 마초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건 내가 앞에 앉아있던 남자와 기염을 토했기때문이다. 나는 목소리가 큰 편이고 흥분하면 목소리가 더 커진다. 이건 상태가 심각하게 좋아진건데 예전에 아주 안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에 대해서는 지금 얘기하고 싶지 않다.

 

오늘 우연히 뭔가를 보다가 사이버페미니즘이라는 태그를 발견했다. 예전에 사이버걸이라는 번역글이 있었던게 기억이 나서 그건가 하고 열어봤더니 다른 글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

 

"웹이라는 공간에서조차 여성은 남성의 권위적이고, 논리적인 글쓰기 체계를 강요받는다. 이는 익명성을 담보로 여성에게 폭력적이며, 억압적 형태로 재현되기도 한다. 사회, 문화, 정치적 이슈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쓴 글에 대한 남성의 반응은 이슈에 대한 논의점을 찾는 것이 아닌 “논리적이지 못하다”, “체계적이지 못하다”로 귀결된다. 하지만 여성주의 웹진에서는 이러한 남성적 글쓰기에 대한 강박증을 지양하며, 여성적 글쓰기를 통한 담론을 추구한다.

현실에서 여성 간 대화는 딱딱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하려는 남성의 대화방식과는 다르다. 여성의 대화는 육하원칙 아래 정형화된 틀로 이루어진 남성들의 대화방식과는 달리 상대방을 배려한 친밀성을 바탕으로 한다. 여성적 글쓰기는 대화에서처럼 구어체적이며, 수사법을 무시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이를 통한 공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어렵다”고 표현될 수도 있는 남성적 글쓰기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난 여성적 글쓰기는 여성들에게 좀 더 많은 참여와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소통체계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성적 글쓰기 방식은 사적이라 치부되는 여성의 경험을 좀 더 쉽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즉,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중심적 체제에서는 불가능한 표현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 여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곳, 여성주의 웹진 (1) 글쓴이 | 박명희

 

이 글은 아마 예전에 쓰여진 글인것같다. 이 글의 필자는 지금은 어떤 견해를 갖고있을지 좀 궁금하다. 인터넷이 대중화되었던(매트릭스 영화를 패러디한 두루넷광고가 나오던 그 시절) 그 때에는 실제로 여성들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식으로 면박을 당했다. 물론 여기에 맞서는 여성들의 독설도 장난아니었다. 그리고 여성이 글을 많이 쓰는 공간에서는 내 글이 아무래도 여성적 글쓰기가 아닌것같다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여성도 심심찮게 발견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단적으로 말해서,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적 글쓰기란 없다고 보고 있어서도 안된다고 본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남성이 여성에게 당신 글이, 혹은 당신 말이 논리적이지 않다고 한다면 정말 그런지 아닌지가 문제인 것이지 그 문제제기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논리적이지 않고 횡설수설하는 남성을 보면 짜증난다. 남자들이라고 다 논리적인가. 여성의 대화가 상대를 배려하는 친밀성을 바탕으로 한 것은 사실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가치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아닌가한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지 특별히 여성은 타인을 배려하는 친밀한 글을 써야하는건 아니다. 원래 글이란 개인적인 것이고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지 특별히 남성적 글쓰기와 여성적 글쓰기를 나누는 것은 사회에서 규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폭력적인 환경 속에서 자란 여성은 타인을 이해하기보다는 증오가 많을수밖에 없고 권위적인 부모밑에 눌려서 자란 여성은 글에도 남성 못지않은 엄격함이 배어있을 수 있다. 문제는 글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이 글을 통해 얼마나 자신을 표현하는지, 혹은 기만하는지, 자신에 대한 성찰을 얻는 것이지 여성적 글쓰기는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구속일 수밖에 없다. 나는 때려죽여도 여성적 글쓰기는 쓸수도 없고 그게 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사회관계의 총체라면, 글에도 그 자신이 살아온 삶이 은연중에 배일 수밖에 없다.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개인이지 남성이나 여성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사족이지만 예전에 내 친구는 남자들이 쓴 글은 지겨워서 여자들이 쓴 글을 주로 읽는다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다들 자기랑 비슷하게 써서 재미가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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췟!

오늘 직장에서 퇴근 30분전에 마구 구박당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저번에 산 책 하나도 안 읽었는데 저번에 급여 나왔을때 또 책 샀는데 그동안 하나도 안읽었는데 방바닥에 널려있었는데 집에 들어와봤더니 아빠가 두 줄로 쌓아놓으셨다. 그러실 필요없는데..

오늘도 책 한 줄 읽지 않았다.

이마트에 갔더니 추석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옷을 사고 싶은데 값은 싼데 맘에 드는게 없다.

1층에서 호가든 맥주를 무척 싸게 팔길래 네 병 샀다.

지하에 갔더니 김말이 튀김 3천원짜리를 1950원 정도에 할인판매하길래 맥주랑 먹을려고 두통이나 사왔는데 맛이 하나도 없다.

한통도 많은데..

한심한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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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예외적인가

 

얼마전 사회과학 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페미니즘 강의에 갔다. 젊은 연구자가 강의를 한다는 것밖에는 모르고 갔었는데 가보니 해러웨이 강의였다. 세시간 동안 굉장히 많은 얘기들을 했고 해러웨이에 대해 잘 몰라서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웠다. 그런데 이 분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은 인상적이었다.

 

"하나의 보편적인 억압이 존재하는가"

"성매매인가 성노동인가"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사회에서 성만이 예외적일 수 있는가"

"(성이 상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순결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 아닐까"

 

나는 이와 같은 주장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강의를 하는 동안 나는 반론을 제기했고, 강의 동안 그리고 술자리에서 그 연구자는 자신의 생각을 풍부하게 밝혔지만 나는 우선 그 분의 생각보다는 애시당초 나온 저 주장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싶다. 왜냐면 이 글은 그 연구자에 대한 반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상황이 어수선해서 그 분 생각이 어떤지 잘 정리되지 않았다) 또한 나는 연구자도 아니고 이론가도 아니기 때문에 성에 대한 단순한 나의 느낌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저런 주장은 그 연구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그동안 많이 제기되어온 주장이다. 5년전 방지법 시행 이후에 어떤 사이트에서는 육체노동자로 보이는 어떤 남성(그는 전부터 글을 계속 써왔다)이 "나도 몸 파는데 왜 그 여자는 몸 팔면 안돼"라는 식의 울분을 터뜨리는 글을 썼다. 그에게는 자신이 노동력을 파는 것과 그 여성이 성을 파는 것이 비유적이기는 하나 동일하게 몸을 파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매매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노동(질료의 변형)이 아니라 성기의 임대이다.

 

그렇다면 왜 성은 문제가 되는가. 나는 이것에 대해 달리 답변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을 바꾸어서 성이 문제가 안된다면 성폭력도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논리에 도달한다고 본다. 성이 문제가 안된다면 성폭력도 일반 폭력가 다를 바가 없고 실제로 내가 술자리에서 이런 주장을 했을 때 내 앞에 앉아 있던 한 남성은 바로 그렇다고 했다. 구타를 당해도 그 정신적 충격이 성폭력을 당했을 때와 크게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 바꿔말해 언어폭력과 성적인 언어폭력은 근본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이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사회관계를 무시하는 발언이며, 남성도 군대에서 구타를 당했을 때와 성폭력을 당했을 때는 그 정신적 충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심지어 군사정권 때는 고문을 할 때 "너네 빨갱이들은 거기도 이렇게 생겼냐"고 모멸을 준 사례도 있었다. 성적으로 모멸감을 줄 때 인간은 가장 견디지 못한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사회가 비정하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육은 상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못배우면 가난이 재생산될 뿐만 아니라 무시당하고 서럽다. 우리는 의료는 상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돈만 있으면 살릴 수 있는데 돈이 없어서 가족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자는 그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은 상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난자매매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성매매보다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남자들은 난자는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데 반해 여성의 성은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성매매에 대해서는 성매매폐지무용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대리모 사업이 성행하고 있는데 대리모는 자궁임대와 아이 생산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노동개념에 가깝다. 대리모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난자매매, 장기매매, 매혈과 같은 판매들은 자기 신체에 대한 처분이라는 점에서 성매매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낙태를 허용할 것을 원한다. 신체처분이라는 잣대로 이 모든 것을 동일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역주변에 있는 업소들 영업 못하게 한다고 성매매가 없어진다는 발상은 순진하지만 성산업 종사자들의 단 몇 퍼센트도 안되는 집결지 여성들의 단결이 성에 대한 남성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온라인에서는 "시키는대로 할께요"라는 개인사업자 형태의 프롤레타리아가 넘쳐나고 있다. 이들을 조직화할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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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Adelita

"Adelita"or "La Adelita, "like "La Cucaracha," is a song from the Mexican Revolution in the early years of the twentieth century. Adelita was a soldadera, or woman soldier, who not only cooked and cared for the wounded but also actually fought in battles. In time the word adelita was used for all the soldaderas, who became a vital force in the war ef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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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연합적군

 

実録・連合赤軍 2007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해방구와 소변은 붙어다니는 모양이다. 뉴욕에서도 파리에서도 해방구에서는 학생들이 노상 방뇨를 했다고 한다. 해방된 인간의 감정과 소변과는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 실제 패널 토론이 진행되고 있을 때도 요의를 느낀 학생들은 때때로 강단 위로 뛰어올라와 뒤쪽으로 바쁘게 사라졌다. 왜 저러지 하고 궁금했는데, 화장실에, 아니 노상 방뇨하러 간 것이었다. 또한 토론회 도중에 유리창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이것도 뭔가 폭력적인 행위였던 것이 아니라 만원인 강당에서 화장실 갈 길을 못 찾아서 참지 못해 창문을 깨고 탈출한 학생의 행위임이 밝혀졌다. (미시마 유키오)

 

그리고 우리는 타자의 진실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있다. 공동체를 부정하는 욕망이 시간의 외연 속에서 거의 무한에 가깝다면, 이 열린 욕망의 계열 속에서 행위를 통해 살아가는 중에 육체는 있으리라. 행위 속에서 처음으로 관념성과 폭력적인 육체성은 결합한다. 지속되는 육체는 초월된 것을 환상의 혁명 과정으로 지니면서, 현실을 육체로 사는 것이다.

미시마의 태양이 천황이라면 나의 태양은 5월 혁명이 외친 선언, 즉 '명석함이란 태양에 가장 가까운 상처이다'라는, 자아가 도달해야 할 이상과 진흙탕인 현실 사이에서 행위를 낳는 것이다. 비록 기성의 좌익 운동과 단절하는 지점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동경대 투쟁은 미완이며 하나의 서막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처참한 백년 전쟁이 가까워 온 것을 예감할 수 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는지... (전공투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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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가족제공동체

클로드 메이야수(C. Meillassoux), 『자본주의와 가족제공동체:여성,곡창,자본』 (김봉률 역), 까치, 1989.

 

Femmes, greniers et capitaux (1975, Maspero; transl. as Maidens, Meal and Money: Capitalism and the Domestic Community)

 

Claude Meillassoux (December 26, 1925 - January 3, 2005) was a French neo-Marxian economic anthropologist and Africanist.

Meillassoux, a student of Georges Balandier, did fieldwork among the Guro (Gouro) of the Côte d'Ivoire: his thesis was published in 1964. In the 1970s he criticised Marshall Sahlins's use of the notion of "domestic mode of production". Meillassoux was throughout his life a politically committed critic of social injustice.

 

The early period of Meillassoux’s work also marked the feminist debates of the 1970s and 1980s. Many participants in these debates were indebted to Meillassoux for pointing out generational rivalry, the importance of marriage in the constitution of the farming unit, and transitions to market production. In the style of those decades, however, Meillassoux drew as much fire as praise. In particular, his Femmes, greniers et capitaux (1975a), which with translations into six languages is the most widely diffused of all Meillassoux’s writings and offered a systematic account of the absorption of the self-sustaining farm community into the capitalist world, was criticized for confusing social and demographic reproduction, for making women invisible, and for homogenizing the category of women. It is possible that a dispassionate reading today would draw more tempered conclusions (as, e.g., in Guyer 1981), but Meillassoux responded by trying to clarify some of his positions.

 

친족 개념이 인류학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미개사회에서조차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하나의 사회조직 원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재생산, 그것은 경제적 차원에서는 모든 형태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엥겔스의 이런 관점에도 불구하고 사적 유물론은 이 문제에 대해 주의를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족제공동체에서부터 출발하여 발전하고 그것을 지배하여 물질생산과 생명재생산 능력을 착취하여왔던 '여러 생산양식'을 가족제공동체보다도 모든 점에서 우선하며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은 엄밀히 말해 정확하지 않다. 그런 생산양식은 물질생산의 능력에서는 고차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생명의 재생산의 능력에서는 가족제공동체보다도 저차원적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가족은 명목적으로 종속적 지위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가족은 자본주의의 존재에서 필요불가결한 '자유로운 노동자'(노예, 농노나 군졸 같은 예속상태로부터 자유로운)를 생산하는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엥겔스도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저작에서 보다 더 적절한 접근방법의 몇몇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1)자급자족적 농업을 경영하며 2)공동의 토지에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며 그 토지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에 귀속되어야 하며 3)사용가치만이 발전하는 공동체로서, 상품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격적 종속이라는 불평등한 관계에 의해 결합된 개인들로 구성된다.

 

("역사를 소급하여 거슬러올라갈수록 생산하지 않는 개인뿐만 아니라 역시 생산자도 종속의 상태, 그리고 보다 커다란 총체 - (...) 가족, 확대가족, 부족, 부족 공동의 분열, 합병 등에서 파생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 의 구성원으로서 나타난다.

"가장 오래된 공동체에서는 기껏해야 남자 성원의 평등이 문제될 뿐이었다. 여자, 노예, 그리고 연소자는 당연히 이 평등의 문제에서 배제되었다.

"[가장 오래된 공동체는] 성원들의 혈연적 유대에 의거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친족으로 편입되든가 양자로 되지 않고는 공동체의 성원이 될 수 없다. 이들 공동체의 구조는 족보 나무이다. 베라 자수리치에게 보낸 마르크스의 편지)

 

거듭 말할다면, 공동체가 자급자족적이라고 하는 명제는 물질적 생산에 관해서만 정확한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재생산은 비슷한 공동체들의 집단에 또 하나의 공동체가 개입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살린즈는 가족제생산양식의 주요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는 최소 가족에 기초를 둔,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의 성별 분업이고, 둘째는 개인적으로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인간과 도구와의 관계, 셋째는 기본적인 필요의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이다. ... 넷째는 인간에 대한 권리를 통하여 행사되는 재물에 대한 권리의 발생이고, 다섯째는 가족제생산물의 '내부로 향한' 유통, 즉 사용가치의 우월이 생긴다는 것이다.

 

고도로 다양한 성격을 지닌 사회를 하나의 총체로 연결시키는 일반화는 검토의 대상인 각각의 체제를 하나하나 분석하여 인식한 후가 아니고서는 적용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생산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엥겔스)는 위의 말에서 명시적으로 정식화시키지는 않았지만 '혈연'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생산관계를 넘어 생명의 재생산 때문에 사람들이 결합하고 있는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근친상간의 금지는 보편적이었다는 가설은 족외혼과 여자의 교환의 기본적 요인으로서 즉 친족이론의 기초로서 구조주의학파도, 기능주의학파도 똑같이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족외혼:공동체 귀속집단 외부와의 결혼. '여자의 교환'은 보다 일반적 현상, '가임기 남녀의 이동이라고 하는 현상'의 특수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가임기의 남자보다 여자의 이동이 더 선호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로빈 폭스는 근친상간의 금지를 친족이 기초로 하고 있는 네 개의 공리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즉 '일급의 친족은 서로 교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친족' 집단의 성원은 이런 금지이유로 서로 성적 관계를 가질 수 없고 그 집단 밖에서 상대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여자의 교환'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성원들끼리 성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귀속집단의 규모가 충분히 큰 경우에도 이런 '여자의 교환'은 준수되었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근친상간의 금지는 자연의 원리에서 발생하였는데 혼인규제가 정치권력의 한 요소가 되었을 때 내혼금지(즉 사회적 성격의 금지)가 성교 금지(즉 '자연의' 혹은 도덕상의 절대적 효력을 지닌 금지)로 전화되었던 것이다.

 

즉 생명의 재생산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들에게 여자를 어떻게 평등하게 분배하느냐가 아니고 그 집단에 속한 생식 가능한 여성의 수태능력이다.

 

그는 이런 계산에서 수렵채취민의 경우에는 '원초적 집단은 지극히 한정된 수의 남녀에 의해 구성되며, 그리고 이 집단의 존재는 '생명재생산의 필요'에 일치하는 교환망을 통하여 인근의 여러 집단과 결합하고 있다고 추론했다. 두 가지의 집단화의 수준 사이에서 원초집단(부부 또는 가족)의 경우에는 식량의 획득이 현저한 특징을 이루는 데 비해 대집단(친족, 부족)의 경우에는 혼인의 확보(아내의 획득)가 지배적이다.

 

이런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집합과 이들의 동맹은 단순한 물질적 생산, 교환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재생산이라는 지상명령에 의해 요청된다.

 

만약 '생산양식'이 존재하게 되면 그것은 생명의 재생산을 위하여 조직되는 이러한 여러 생산세포의 집합적 수준에서 연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메이야수는 가임기의 남자보다 여자의 이동이 더 선호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친족의 기본구조를 지닌 사회들의 결혼에서 남성들이 교환의 주체로 행위하기 때문에 남성들이 여자를 교환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메이야수는 노동력의 생산자로서의 여성이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메이야수가 말한 가족공동체, 혹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친족사회는 여자를 둘러싸고 벌어질 수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비해 여자들을 사회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기구의 성격을 지닌다. 물론 그 1차 목적은 가족형성과 재생산이다. 그러나 [군중과 권력]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사례는 여자를 둘러싸고 피비리낸나는 비극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원래, 타울리팡 족과 피샤우코 족은 서로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여자를 놓고 다툼이 일어났다. 먼저 피샤우코 족이 숲속에서 타울리팡 족 총각 한 명을 습격하여 살해했다. 그리고는 한 젊은 타울리팡 족 부부를, 그리고 그 후에는 3인의 타울리팡 족을 숲에서 또 죽였다. 이래서 타울리팡 족은 피샤우코 족 전체를 없애 버리고 싶은 열망이 점점 강해졌다. ... 여자를 두고 다툼이 시작되었고 총각 몇 명이 살해되었다. 주목을 끌게 된 것은 다른 종족이 죽였다는 사실 뿐이다. 타울리팡 족 전체에게는 적이 자기들을 멸종시키려 한다는 확고부동한 확신이 서게 되었다. ... 16인은 아무런 전리품도 없이 돌아왔다. 승리는 했지만 어떠한 부도 얻지 못했다. 그들은 단 한 명의 여자도 아이도 남겨 두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적대적인 상대방 무리를 말살,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남김없이 싹 쓸어 없애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흥이 나서 설명했다. 살인자였으며, 또 살인자로 낙인찍혀 남게 된 자들이 자기들이 아닌 남이었던 것처럼."

 

노동력과 생명의 재생산을 위해 여자를 평화롭게 교환하고 재분배했다는 메이야수의 설명은 논리적이다. 그러나 말년의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했듯이 쓸모없는 것, 이상한 것, 별난 것, 앞뒤가 안 맞는 것은 역사를 보여주는 기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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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무엇이 문제인가

 

지은이 캐롤린 라마자노글루는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 책은 1997년에 국내에서 출간되었고, 나는 이 책을 빌렸기 때문에 대충 훑어보고 빨리 반납해야 한다. 옮긴이 김정선은  "여성의 적은 여성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해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 아닐까 싶다"고 한다. "라마자노글루는 모든 여성들이 다 똑같이 억압받지 않는다는 건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여 페미니즘 이론으로 구성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모든 여성은 "다 똑같이" 억압받지 않는다.

 

"1960년대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이러한 페미니즘의 논리는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분리를 간과하고 있다. 때문에 1970년대의 많은 페미니즘 이론들은 이러한 여성들의 공유된 억압 대신, 여성들의 차이와 분리에 주목하게 된다. " "여성들은 현실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억압을 경험하고 있으며, 여성들끼리보다는 오히려 남성들과 여러 형태의 억압을 공유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라마자노글루가 이를 위해 이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이유는 분리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야말로 그 분리를 해소하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인 듯하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간과한 일반화된 페미니즘 이론이야말로 오히려 여성과 여성을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을 서로 분리시키기에 이르며, 이것은 헤어날 수 없는 페미니즘의 모순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 페미니스트의 과제는 남성 지배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사이의 차이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접합점을 인식하는 것이 된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나와 너의 다름을 받아들일 수있는 상황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앞으로의 여성운동을 풀어나가기 위한 정치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여성들 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노동자들 간에도 존재하고 흑인들 간에도 존재하고 성적 소수자들 간에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정치적 연대가 가능한 것은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조건에 처해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지배자는 언제나 분리 지배하고 노동자들도 소수에게는 생존을 보장해주며 이러한 차이는 끔직한 노-노갈등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대를 말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다 똑같이" 억압받지 않지만 동일한 지배 하에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동일한 지배자의 속성 때문에 우리의 정치적 연대가 가능한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세심한 비판이 필요하지만 글은 반납일까지 보충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부분.

 

p.228 

"여성할례가 여성에게 성적 즐거움을 상실시키고, 정신적 고통과 질병을 야기하며, 여성의 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를 강화시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el Saadawi 1980). 그러나 이슬람과 아프리카 여성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무차별적인 금지에 대해, 특히 데일리(Mary Daly 1978)의 분석에 강하게 반대한다. 이러한 반대는 여성의 할례를 다른 측면, 예를 들어 식민지주의와 세계적 자본주의의 발전에 위협받는 아랍과 아프리카의 문화적인 특성과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다. 만약 외부인이 여성할례를 금지한다면, 그들은 한 문화, 그리고 그 문화의 사람들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다. 만약 이슬람 여성들이 가장 불만스러운 것으로 여성할례를 지적한다면, 그들 또한 자신도 그 안에 속해 있는 종교를 포함한 문화 전체를 공격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위험하다. 타집단의 현실에 대한 관심도 없는 무차별적인 금지(이를테면 아동노동에 대한 반대)는 순진하지만 아랍과 아프리카 남성들이 세계적 자본주의의 발전때문에 위협받는다고 해서 여성할례를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 타자의 타자에 대한 억압적인 행위에 대해 개입할 수 있다. 만약 미국 여성이 이슬람 남성에게 여성할례를 하는 야만인이라고 공격하면 이슬람인들은 미국인들에게 전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씨를 말리는 살인마들이라고 상호비방하면 된다.

 

p.26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사회적 성차 때문에 차별받고 있다고 인식하지만, 양성의 관계를 특수한 권력관계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성의 정치학의 권력관계와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급진적 페미니즘이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는 이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다르다." "만약 그들이 포함된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는 해방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해석을 하는 아주 다른 종류의 이론과 정치적 실천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확대는 페미니즘의 정의를 정치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게 만든다."

 

라마자노글루는 리버럴들을 페미니즘에서 배제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리버럴들은 래디컬들이나 맑스펨들처럼 양성의 관계를 권력관계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사라진 리버럴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미국의 거짓말] 서두에 언급된 부분을 발췌했다.

 

"많은 기념비나 기념물들이 여성의 활동을 생략한 탓에 다수의 미국인들이 여성은 지금까지 위대한 업적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고 믿는 한 여성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한 세대가 현장에 새겨넣은 것은 다음 세대의 마음을 구속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 일리노이 주에는 여성을 기리는 기념비가 전혀 없다. 여성 개인을 위한 기념비는 물론이고 1890년 시카고에 창설되어 1910년에는 무려 100만 명의 회원을 갖게 된 여성 클럽 총연맹, 에번스턴에 본부가 있으며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단체인 여성 기독교 금주 연합, 1920년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창설된 여성 유권자 연맹 등을 위한 기념비조차 없다." "노동자 계층은 '가끔' 그들의 역사를 돌에 새기는 반면 상류 계층은 '항상' 그렇게 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리버럴들이 양성관계를 권력관계로 보건말건 남성들은 리버럴 여성들의 투쟁을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본다는 것이다. 리버럴들이 요구하는 "평등과 재분배, 즉 동등한 임금, 동등한 시민권, 교육, 건강과 복지에 대한 동등한 기회, 민주주의 정치과정에 대한 동등한 접근"을 여성들에게 주었을 경우 자신들의 권력이 심각하게 도전받는다는 것을 남성들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리버럴은 리버럴이 할 일이 있고 그 일도 제대로 못하면 사회주의자들이 굉장히 고달퍼지게 된다. 리버럴이 해야 할 일까지 다 해야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운동만 소중하고 남이 하는 일은 한심하다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질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변화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진보하는 것이다. 전공투 A의 말을 들어보자.

 

"가령 현실에서 러시아 혁명의 문제를 봅시다. 이 혁명은 레닌이 지도한 무혈 혁명입니다. 그리고 레닌은 위대하다는 것이 민청(民靑:일본공산당 계열 학생운동 조직. 전공투와 적대적이었다. 동경대 점거 투쟁을 물리적으로 저지했다.)이나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사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혁명전 100년간, 50년간을 보면 차르에 대한 수많은 나로드니키들의 피로 점철된 투쟁이 있습니다. 그때 수많은 폭동을 지휘하고 처형되어 죽은 사람들이 없었으면 러시아 혁명은 절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피비린내나는 처형을 기꺼이 받아들여 테러리즘에 스스로를 내걸고 농민 폭동을 지휘한 것이죠.그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물론 우리는 절대로알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 되기 위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어야 했던 여성들이 권력관계를 자신처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여성해방에 대한 열정이 없다고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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