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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당수 박헌영 (1)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당수 박헌영 (1)
『이정 박헌영 일대기』 / 임경석 / 역사비평사 / 2004


10여년의 '고투' 끝에 되살려낸 박헌영의 삶과 죽음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가수 김정구가 부른 '눈물젖은 두만강'이다. 박헌영의 친아들 원경 스님에 따르면 이 노랫말의 지은이는 가수 김정구의 친형 김용환이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정신병자 흉내를 내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1928년 8월 부인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했다. 김용환은 신문에 대문짝하게 보도된 박헌영의 탈출 소식을 두만강변에서 접하고 이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이정 박헌영 일대기』는 남북한 모두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았던' 박헌영의 삶과 죽음을 '지구 위에 산재하는 모든 자료를 수집하겠다'는 각오로 작업한 10여년의 '고투' 끝에 연보 형태로 완성한 역작이다. 임경석은 말한다.

"1994~1996년 2년 간의 모스크바 체류 동안 나는 기대 이상의 행운을 맛보았다. 문서보관소의 문서철 속에서 60~70년 전에 작성된 박헌영 관계 각종 기록의 원본들을 목도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전율을 느꼈다. 내가 느낀 생생함이란, 그 감격이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박헌영뿐만이 아니었다. 분단체제하에서 남한에서는 '빨갱이'란 이유로, 북한에서는 '종파분자'라는 이유로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사람들의 혁명운동 족적이 생생하게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자료들은 운동 전개과정의 굽이굽이에 얽힌 그들의 고뇌와 격정, 생각과 숨결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책은 박헌영에 대한 "섣부른 평가"를 자제하고 있다. 임경석은 박헌영에 대한 역사 평가를 "훗날 다시 쓰게 될 '박헌영 평전'"으로 조심스레 미룬다. 우리 또한 '평가'에 앞서 우선 이 책을 따라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 당수 박헌영의 행적을 쫓아가 보자.


상해, 첫번째 구속,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의 짧은 기자생활

박헌영은 1900년 5월 28일 충남 예산에서 농민 박현주와 그의 둘째 부인 이학규의 사이에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고 대흥보통학교를 나온 후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소설 『상록수』를 지은 심훈이 경성고보 동창이다.

1920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박헌영은 그해 11월 상해로 망명,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했다. 21년 3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비서가 됐고 5월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에 입당했다. 고려공산당이 운영하는 사회주의연구소에서 활동하던 박헌영은 이 시기에 상해로 유학온 주세죽과 결혼했다. 21년 8월 북경에서 고려공청 중앙총국이 결성됐고 박헌영은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22년 3월 고려공청 제2차 중앙총국의 책임비서가 됐다.

22년 4월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은 비밀리에 조선으로 입국하려다가 중국 안동현의 한 음식점에서 신의주 경찰에게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1년 10개월을 복역했다. 24년 1월 출옥한 뒤 곧바로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은 2월 신흥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3월 고려공청 중앙총국 책임비서로 재선임됐다. 4월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했고 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됐다.

25년 4월 17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렸다. 박헌영은 화요회 야체이카(세포) 대표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했다. 다음날 박헌영과 주세죽의 살림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제1차 창립대표회가 열렸고 4월 21일 박헌영은 고려공청 책임비서에 선임됐다. 그해 5월 동아일보를 퇴사한 박헌영은 8월 한양청년연맹 집행위원을 맡았고,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조선일보에서는 논설위원 신일용의 필화사건으로 10월에 바로 해직됐다.


두번째 투옥, 소련으로의 탈출과 '국제선' 활동

25년 11월 국외로 발송한 고려공청의 비밀문건이 일본 경찰에 압수되면서 박헌영과 주세죽은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두번째 투옥된 박헌영은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박헌영의 진술이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추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어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8명의 경찰들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박헌영은 재판도중 자살 시도와 단식을 거듭하며 정신병자 흉내를 냈고 몇차례 병보석 신청 끝에 27년 11월 감옥문을 벗어났다.

28년 8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따돌리고 박헌영은 만삭인 주세죽과 함께 함흥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주세죽은 딸 비비안나를 해산했다. 11월 모스크바로 간 박헌영은 29년 1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고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국제레닌학교에서는 호치민 등 아시아의 젊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공부했다. 박헌영은 31년말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32년 1월 박헌영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사업을 위해 상해로 파견됐다. 상해에서 김단야와 함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기관지 『콤무니스트』를 발행했다. 이 잡지는 33년 7월까지 발간됐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비밀리에 국내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국내 공산주의운동에서 '국제선'으로 불렸던 그룹이 바로 이 조직이었다.


세번째 체포와 6년만의 출옥, 도피와 지하운동

33년 7월 박헌영은 상해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됐다. 박헌영은 심문과정에서 28년 8월 탈출 이후 약 5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필사의 위장진술에 나섰다. 다행히 박헌영의 해외활동에 대한 아무런 물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은 박헌영에게 징역 6년형을 선고했다.

34년 주세죽은 모스크바에서 김단야와 재혼했다. 37년 11월 김단야는 스탈린의 대숙청에 휩쓸려 소련비밀경찰에 체포돼 사형당했다. 38년 주세죽은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39년 9월 박헌영은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했다. 12월 이관술과 만나 경성콤그룹의 지도자가 됐다. 그리고 41년 2월까지 청주와 서울의 비밀 아지트에 기거하면서 지하운동을 벌였다. 이 기간에 박헌영은 아지트 키퍼였던 정순년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박헌영과 정순년 사이에 41년 3월 태어난 아들이 박병삼, 원경 스님이다.

41년 1월 경성콤그룹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체포됐다. 박헌영은 서울 아지트를 버리고 대구로 피신했다. 박헌영은 "행상인도 되어보고…약사나 심지어 점쟁이 노릇"까지 해가며 검거를 피해 계속 도피했다. 42년 12월 광주로 피신한 박헌영은 45년 8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김성삼이라는 가명을 쓰며 종연방직공장 변소 청소부와 벽돌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박헌영은 김삼룡의 처 이금순을 비롯해 전남 일원의 경성콤그룹 조직원들과 비밀활동을 계속 했고 서울주재 소련영사관과도 비밀교신을 주고받았다.

45년 8월 15일, 박헌영은 벽돌공장 감독에게 "장래를 위하여 서울로 가겠다"는 간단한 말을 남기고 광주를 떠났다.

(계속)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당수 박헌영 (2)
『이정 박헌영 일대기』 / 임경석 / 역사비평사 / 2004


해방조선, 조선공산당 총비서

1945년 8월 15일 서울 종로 네거리에 "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려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는 비라가 붙었다.

박헌영이 광주를 떠난 것은 8월 17일, 건국준비위원회 전남 대표단과 함께였다. 상경 도중 막 출옥한 김삼룡과 전주에서 합류했다. 18일 서울에 도착한 박헌영은 그날 저녁 이주상,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 경성콤그룹 멤버들과 만나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만들고 『해방일보』를 창간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에서 부영사 샤브신과도 회동했다. 이날 이후 46년 10월까지 박헌영과 샤브신은 거의 매일 한두차례씩 만났다.

8월 20일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날 회의에서 「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8월테제)이 채택됐다.

9월 6일 오후 4시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가 결성됐다. 며칠 후 9월 9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했으며 9월 11일 재건위원회를 기반으로 조선공산당이 재건됐다. 박헌영은 서열 1위의 중앙위원으로 '총비서'라는 직임을 가졌다. 김일성은 서열 2위의 중앙위원으로 지목됐다. 9월 20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8월테제」를 토대로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채택했다.

10월 8일 개성에서 박헌영은 김일성과 만났다. 이날 회동에서 '당 중앙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이냐, 북조선 분국을 설치할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박헌영은 일국일당 원칙을 강조하며 북조선 분국 설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논란 끝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치가 합의됐다.

10월 10일 오후 2시 안국동에서 조선공산당의 첫 기자회견이 열렸다. 27일 박헌영은 미 제24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회담을 가졌다. 이날 박헌영은 하지에게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이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10월 29일 박헌영은 이승만과 회담했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친일파 즉각 숙청에 반대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은 미룰 수 없는 문제라고 반박하고 인민공화국 해산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11월 5일~6일 이틀 동안 서울 중앙극장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보낸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의 축사는 김삼룡이 대독했다. 박헌영은 대회 명예의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대됐다.

11월 28일 박헌영은 소공동 공산당사에서 AP통신 등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했다. 이 자리에서 전평, 전농, 전청, 전부 등 대중조직체를 기초로 한 민족통일전선에 입각해 민족통일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또 민족반역자의 토지와 지주 일반의 토지를 구분해서 시점을 달리해 몰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11월 30일 중앙방송국 라디오방송을 통해 4대 정당의 정견을 차례로 발표하기로 한 일정에 따라 조선공산당 대표가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게 됐다. 이날 방송에는 조선공산당 대변인 정태식이 대신 출연했다.

12월 9일 전국농민조합총연맹, 12월 11일 조선청년총동맹, 12월 24일 전국부녀총동맹이 결성됐다.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12월 25일 평양으로 간 박헌영은 12월 31일 김일성과 함께 민정사령관 로마넨코와 회견했다. 로마넨코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해 하는 수 없이 절충안으로 5년간 후견제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46년 1월 2일 새벽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성명서를 발표했다.

1월 24일 서울 중앙방송국 라디오방송을 통해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명의로 「오늘 정세와 우리 민족의 살 길」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2월 15~16일 종로 YMCA 강당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한 박헌영은 해방 후 처음으로 공개된 군중집회에 모습을 드러내 조선공산당 총비서 자격으로 연설했다. 박헌영은 여운형, 허헌, 김원봉, 백남운과 함께 민전의 공동의장으로 선임됐다.

3월 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막됐다. 박헌영은 3월 22일 『해방일보』, 『자유신문』, 『조선인민보』, 『서울신문』 등에 미소공위에 의해 수립될 임시정부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박헌영은 4월 2일 밤 38선을 넘어 3일 오후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 소군정 인사 등과 회담하고 6일까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간부들과 회담한 후 평양을 떠났다.

4월 6일 미국 센프란시스코 방송은 미점령군 당국이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모색하는 중이라고 보도했다. 4월 7일 조선공산당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11일 박헌영은 미소공동위원회 대표 환영 시민대회에 참석해 1만5천여명의 청중 앞에서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연설했다.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식은 좌익과 우익이 각각 따로 개최했다. 우익은 대한노동총동맹 주최로 서울운동장 육상경기장에서, 좌익은 전평 주최로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각각 집회를 가졌다. 박헌영은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정판사 위조지폐사건과 체포령

5월 8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같은 날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이 위조지폐 사건 혐의로 미군정 경찰에게 체포됐다. 15일 미군정 경찰 제1관구 경찰청장 장택상은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과 중앙위원 겸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과 서무과장 송언필을 포함해 조선정판사에 근무하는 조선공산당원 14명이 위조지폐 발행에 연루됐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른바 위조지폐 사건과 조선공산당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5월 18일 미군 첩보기관 CIC 요원들이 조선공산당 당사와 해방일보 사무소를 수색했다. 27일 미군정청 적산관리과는 조선공산당에게 현재 입주해 있는 근택빌딩에서 40시간 내에 퇴거할 것을 명령했다. 5월 30일 조선공산당은 본부 사무실을 남대문 일화빌딩으로 옮겼다.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자 다음날 조선공산당은 남조선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24일 일제치하인 1925년부터 서울에 주재해왔던 소련영사관이 남한에서 철수할 뜻을 밝혔다. 27일 박헌영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했다. 4차 월북이었다. 7월 1일에는 조선공산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회견했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좌익 정당들의 통합 필요성을 주장했다.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통합해 노동당을 결성하는 '3당합당'이 여기서 비롯됐다. 박헌영은 7월 중순경 서울로 돌아왔다.

7월 26일 민전 의장단이 좌우합작 5대 원칙을 발표했다. 7월말 박헌영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다섯번째 회동을 가졌다. 9월 4일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9월 6일 미군정의 명령으로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3개 좌익 신문이 폐쇄됐다. 같은 날 밤 미군정 경찰에 의해 박헌영 등 공산당 지도자 체포령이 발령됐다. 다음 날 7일부터 10일까지 박헌영을 체포하기 위해 6천명의 경찰이 서울시내를 수색했다. 9월 8일 이주하가 체포됐다. 10일 이후 수사망은 서울 근교로 확대됐다.

남로당 부위원장

9월 6일 민전 의장단회의에서 대미협조노선 철폐를 재확인했다. 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종업원 7천명의 파업을 시발로 9월 총파업이 발발했다. 9월 29일 박헌영은 관에 담긴 채 산악을 헤매며 월북했다. 9월 30일 경찰과 우익단체가 서울 철도파업단을 습격해 유혈진압했다. 10월 1일 대구에서 민중항쟁이 발발했고 항쟁은 11월 중순까지 경남북, 충남북, 경기도 일대로 확산됐다.

10월 6일 박헌영은 평양에 도착했다. 월북 직후 평양에 대남사업 중앙연락소를 설치했다. 10월 하순 박헌영은 38선 이남인 개성에 잠입해 일주일간 머물면서 이승엽, 김삼룡 등과 접촉했다.

11월 23~24일 서울에서 남조선노동당 결성대회가 열렸다. 12월 10일 박헌영은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12월 12일 박헌영은 소련군 25군 정치사령관 스티코프, 김일성과 회견하고 남한 입법의원에 대한 태도와 남북 노동당의 단일 비합법 중앙기관 창설에 합의했다. 47년 1월 대남사업 해주연락소가 설치됐다.

47년 2월 27일 경무국장이 박헌영 체포 유공자에게 황금 120돈쭝을 수여하겠다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3월 21일 작성된 미군 정보문서는 지금 만일 총선거가 실시된다면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5월 21일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됐다.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여운형이 암살됐다. 10월 1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됐다. 12월 10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는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채택해 UN 감시하에 실시되는 남한 단독선거에 대해 반대할 것을 천명했다.

48년 2월 7일 UN 한국위원단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발발했다. 3월 12일 김구, 김규식, 홍명희 등이 '7인 성명'을 발표해 단독선거를 반대했다. 4월 3일 제주에서 4.3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4월 19~24일 평양에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렸다. 8월 21일 해주에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가 개막됐다. 박헌영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영등포구 선거구)으로 선출됐다. 8월 25일 박헌영은 남북조선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중앙위원 겸 제2비서로 선출됐고, 9월 2일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 참석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 한국전쟁

9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박헌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임됐다. 49년 3월 북한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박헌영은 수상 김일성, 부수상 홍명희 등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49년 9월경 박헌영은 평양에서 윤레나와 재혼했다. 박헌영과 윤레나 사이에 딸 나타샤와 아들 세르게이가 태어났다. 50년 5월 박헌영은 김일성 등과 함께 북경을 방문했다.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7월 2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미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0월초 박헌영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연전연패하는 인민군 내 총정치국을 창설하고 책임자가 됐다. 11월 26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UN 총회 의장과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성명을 보내 미군의 학살 만행을 UN이 중지시킬 책임이 있음을 촉구했다. 51년 5월 8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UN 총회 의장과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성명을 보내 미군이 조선에서 세균전 무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규탄했다.

52년 8월 3일 이승엽 등 12명의 남로당 출신 당간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 연루자로 지목돼 체포됐다. 10월 17일 박헌영은 조선정전협정 초안 등 3개 문건을 외무상 명의로 UN에 타전했다.

53년 3월 하순 박헌영은 체포됐다. 당내 종파를 조직하고 당 기밀을 미국에 누설했으며 한국전쟁 패배의 원인을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7월 2일 내각 부수상 허가이가 자살했다. 8월 5~9일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박헌영은 당에서 제명되고 재판에 회부됐다.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 의해 이승엽 등 12명에 대한 공판이 진행됐다. 53년말 주세죽이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55년 12월 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검찰소 검사총장 이송운은 박헌영을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 기도' 혐의로 기소했다.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에서 박헌영은 사형 및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1956년 7월 19일, 총살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이 1990년 러시아 여행중에 전직 북한 고위 관리 박길룡에게 들은 박헌영의 사망 경위는 이렇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동유럽과 소련을 순방중이던 김일성이 돌아와서 "그 이론가 어떻게 됐어?" 하면서 증거가 있건 없건 방학세에게 그날 안으로 박헌영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서둘러 처형을 지시한 까닭은 아마도 '8월 종파'와 박헌영 세력이 제휴할까 우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처형자들은 내무성 지하감옥에 수감중이던 박헌영을 끌어내어 어느 산중으로 데려갔다. 밤중에 허리까지 오는 잡풀 속을 헤치고 가면서 박헌영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달라"고 말했다. 처형 직전에 박헌영은 부인 윤레나와 어린 두 자식을 외국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방학세는 박헌영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두 번 방아쇠를 당겼다. 시체는 그 자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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