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1

<펌>비정규직운동 : 조합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비정규직운동 : 조합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현 시기 비정규직 운동의 성격과 사회주의자들의 과제


1. 서 문


비정규직 운동을 둘러싼 2006년 지금의 상황은 2002년과 유사하다. 2002년은 1999~2001년 비정규직 운동의 첫 번째 대중적 진출이 실패한 이후 숨을 고르면서 지난 국면을 평가하고 다음 국면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지금 상황도 그 때와 유사하게 2003~2005년 비정규직 운동의 두 번째 대중적 진출 이후 대열을 정비하면서 다음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지형지물을 살피고 나아가야 할 좌표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직 운동의 위상과 전망을 두고 운동진영 내부에서는 마치 오리가 수면 아래서 쉼 없이 발짓하듯 조용한 계급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비정규직 운동에 관한 운동진영 내 논쟁은 자본과의 적대전선 속에서 어떻게 전체 노동계급의 전투대형을 갖출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계급투쟁일 수밖에 없다. 운동진영 내부에는 노동계급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입장만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르주아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입장, 소부르주아적이고 중도주의적인 입장이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사회주의 노동자》는 2호, 3호에서 「대공장 사내하청 투쟁 3년, 평가와 과제」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바 있다. 이번 호 기획특집에서는 비정규직 운동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과 쟁점을 돌아보고자 한다. 나아가 현 시기 비정규직 운동의 성격 변화와 전체 운동에서의 위상 그리고 사회주의자의 과제를 제출하고자 한다.


2. 새로운 물결?


비정규직 운동에 관한 과거의 논쟁이 생각난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대략 5년 전일 것이다. 당시 비정규직 운동은 갓 출발점에 있었고, 활동가들의 투신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비정규직 운동이 갖는 잠재력에 주목한 우리는 대공장 운동에서 비정규직 분야에 역량을 투입하자고 요구했다. 그러자 많은 다른 그룹 동지들이 그것에 대해 ‘정규직 운동을 포기하는 것’이며, ‘사실상 대공장 운동을 청산하는 것’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비정규직 노동자투쟁, 그 새로운 전진을 주목하자!」『노동해방』2005-10-05


《노동해방연대》(구 《미래연대》)는 5년 전, 정확히 말하면 6년 전 비정규직 운동에 관한 논쟁을 떠올리면서 다른 그룹들의 ‘정규직 운동을 포기하는 것이며 사실상 대공장 운동을 청산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회고한다. 그러면서 다른 그룹들은 2-3년 전부터 그 실천에서 사실상 자신들의 계획을 수용하고 있다며, “이것은 5년 전에 우리가 상당히 겸손한 방식으로 제기했던 바로 그 명제 - 각자 노동해방의 원칙을 가지고 실천하자. 객관적 상황의 흐름은 무엇이 올바른지를 증명해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논쟁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하나의 흐름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 가 옳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논쟁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논쟁은 여전히 하나의 대립된 구도로 지속되고 있으며, 더군다나 지금, 2002년 상황과 유사한 2006년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비정규직 운동이 대중화되고 그 운동에 사회주의자들이 개입하고 있는 현실을 두고 ‘거 봐라. 그 때 우리가 말한 게 옳지 않았나’라고 자족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다른 그룹들의 정당한 비판을 진지한 자기평가 없이 사후적으로 손쉽게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다.

《노동해방연대》는 2000년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의 투쟁(롯데, 새한, 게이츠, 임창, 동우공영, 통인가게, 영남금속, 동방제약, 베스콘, 일진, 마마, 고속철도공단, 이랜드, 광주금속 동명분회, 대우금속, 갑을전자 등)을 주목하면서 ‘새롭게 떠오르는 희망의 물결’, ‘남한판 이스트엔드 운동’으로 바라보았다. 숫자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의 규모, 열악한 임금과 근로조건, 계급구성에 있어서 젊은 연령층과 여성노동자의 우위 등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운동의 성격을 ‘남한판 이스트엔드 운동’으로 규정했던 근거였다. 하지만 5~6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볼 때 과연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운동이 엥겔스가 주목했던 영국의 이스트엔드 운동을 재현하고 있는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이 운동이 《노동해방연대》가 과거에 주장했던 바대로 “대기업 노동자 운동의 퇴행의 물결이 낳은 일종의 가장 더러운 거품”을 쓸어버릴 새로운 물결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숙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5~6년의 경험은 오히려 비정규직 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조합주의 운동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에 기반을 둔 노동조합운동을 혁명적으로 이끌어 ‘제2의 87년’, ‘제2의 전노협’ 운동을 건설하자는 《노동해방연대》의 노선은, 한 마디로 말해 ‘혁명적 신조합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노선은 대공장 정규직 운동을 일종의 노동귀족으로 규정하고, “귀족화되고 결코 노동해방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영국의 거만한 기존 노동조합들”과 유비하였다. 이들의 노선은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대공장 정규직 운동에 대해서는 실천적 개입과 지도를 유보하면서 선전활동으로 제한되는 것으로(때문에 당시 다른 모든 사회주의 그룹들은 ‘기권주의’, ‘청산주의’라 비판했던 것이다) 비정규직 운동에 대해서는 조합주의와 대기주의 경향을 물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혁명적 신조합주의


어떻게 보면 《노동해방연대》가 주장했던 바대로 전투적으로 올라오는 새로운 운동에 자신의 배를 띄우고 그 물결을 따라 항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것이, 유일하지는 않겠지만 유력한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공장 정규직운동에 대한 개입과 지도를 기권한 데 있었던 게 아니라, 실은 대공장 정규직운동을 휘감고 있는 조합주의와의 투쟁에서 기권했으며 새로운 조합주의·전투적 조합주의·혁명적 조합주의에 자신의 배를 띄운 것에 있었다.

이는 6년 전 이 동지들이 주장했던 투쟁요구들에서도 드러난다. 당시는 IMF 이후 전 사회적인 구조조정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목줄을 겨냥하고 있었으며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계급적 전선이 형성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동지들은 구조조정 반대투쟁을 전 사회적인 문제의식으로 확장시키고 그것을 전 계급적인 투쟁으로 밀어 올리는 대신, 구조조정 반대를 추상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정리해고 철폐, 외주 용역화 격퇴, 노동강도 강화 반대”같은 명확하고 구체적인 요구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이 민주노총과 소부르주아 기회주의 세력들의 ‘일방적 구조조정 반대, 해외매각 반대’와 같은 껍데기 요구들을 비판하는 효과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역으로 전선을 해체하고 단사주의와 조합주의에 영합하는 결과를 불러온 것도 사실이었다.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517일 투쟁에서 구조조정 저지투쟁과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사진: 구 한통계약직노조 홈페이지)
《노동해방연대》(구 《미래연대》)의 혁명적 신조합주의는 투쟁요구안 뿐 아니라 전술과 조직노선에서도 그 조합주의적 경향을 드러냈다. 이러한 경향은, 2001년 말 운동이 다시 내리막길로 치닫자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조직적 퇴각론’이었다. 517일간의 영웅적인 한통계약직 투쟁에서 당시 이 그룹은 “‘정규직화 쟁취’도 노동조합의 중요성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 어떤 식으로 결정이 내려지건, 한통계약직 투쟁은 ‘노동조합 사수와 강화!’라는 단 하나의 원칙에 충실해야 하며 그것이 포기된다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라며 공공연맹과 함께 ‘조직적 퇴각론’을 주장했다. 한 마디로 조직을 남기고 투쟁을 접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동전화국 점거투쟁 등 비정규직 철폐와 정규직화 쟁취를 선도적으로 요구했던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은 단지 한 사업장의 투쟁이 아니라 2000년 이후 끈질기게 이어져 오고 있었던 비정규직 투쟁의 구심이었다. 따라서 캐리어사내하청 투쟁 이후 한통계약직 투쟁의 승패 여부가 전체 운동에 미칠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고, 비록 패배하더라도 ‘어떻게△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517일 투쟁에서 구조조정 저지투쟁과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패배하는가’가 당시 정세에서는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조직적 퇴각론’자들은 투쟁 패배를 전제로 놓고 민주노조를 거점으로 질서정연한 퇴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러한 논리는 ‘초기업노조건설’ 주장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논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특수한 존재양식, 즉 고립성·이동성·분산성을 이유로 산별노조나 일반노조, 지역노조와 같은 조직형식을 무슨 특별한 대안인양 제출하는 것과 맥을 같이 했다. 그러한 논리들은 당면투쟁을 회피하는 기회주의의 근거로 작용했다.

산별노조는 민주노총 관료들에게 비정규직 투쟁을 외면하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민주노총 관료들은 산별노조가 비정규직과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의 희망이라고 강변해 왔으나, 실제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나자 산별 전환이 되면 문제가 풀리니까 그 때까지 기다리라는 논리를 들이대며 비정규직 투쟁을 가로막았다. ‘조직적 퇴각론’에 이은 초기업노조건설 또한 2001년 말 대부분의 비정규직노조들이 장기투쟁으로 지쳐갈 때 투쟁을 접자는 관료들의 이데올로기로 나타났다. 당시 《노동해방연대》(구 《미래연대》)의 혁명적 신조합주의는 ‘우리가 하면 다르다’는 것 외에는 현실 운동에서 개량적 신조합주의와 구분되지 못했고, 그런 식으로 신조합주의 경향을 비정규직운동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5년 전 당시에 우리의 주장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동지들의 상당수는 지금 비정규직 투쟁의 현장에서 때로는 조역으로 때로는 주역으로 마주치고 있다. 그들은 2-3년 전부터 그 실천에서 사실상 우리의 계획을 수용하고 있다”니.

■ 이스트엔드와 신조합주의

이스트엔드(East End)란 영국 런던 북동부 템스 강 북안에 있는 구역으로 산업혁명 후 공업지대와 항만지구가 형성되어 이곳에서 일하는 극빈노동자가 사는 빈민가로서 유명했다. 이에 연유하여 런던뿐만 아니라 각 대도시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극빈계급의 거주지역도 이스트엔드라 부르고는 한다.

19세기 후반 영국 노동운동은 대공장과 숙련공 노조를 중심으로 개량주의와 조합주의가 창궐했다. 이러한 시기에 1880년대 후반부터 이스트엔드에 거주하는 하층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신조합주의’라고 불리는 전투적 노조운동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북부 직물공업지역에서 여성노동자들 중심의 새로운 조합들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기존 노조에서 소외된 많은 저임금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 또 제강업 분야의 반숙련공과 부두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도 결성되었다. 특히 1889년 부두노동자들의 파업 등 전투적 노동운동이 성장하였다. 이는 80년대 후반의 호황과 고용증가, 노동구성의 변화, 치안당국의 유화적 태도, 고용주의 묵인 등이 작용한 결과였다.

당시 영국에 거주하고 있던 엥겔스 역시 이스트엔드 운동에 주목하며 이 운동이 낡은 조합주의자들의 부르주아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운동 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처지』독일어 제2판 서문)

하지만 1890년대에 신조합주의는 침체에 빠지기 시작했다. 전투적 노동운동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 자본가들이 1893년 불황기를 타고 전면적인 탄압 공세로 나왔던 것이다. 새로운 노동조합들 중 하역·건축·가스 분야의 노동조합들은 탄압에도 살아남았지만, 이전보다 더 강화된 자본가의 권한을 받아들이는 대신 노동조합을 인정받는 방식으로 타협해야 했다. 그리하여 점차 기존의 숙련공 노동조합의 보수적이고 분파적인 모습을 닮아갔다.


개량적 신조합주의


이런 혁명적 신조합주의는 비정규직을 미조직 조직화의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민주노총 주류 이데올로기 집단의 개량적 신조합주의와 상당히 많이 닮아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노동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개량적 신조합주의자들은 2000년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이하 ≪비정규노동센터≫) 건립을 통해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사상적, 실천적 영향력을 점차 넓혀왔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남한 부르주아 노동운동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벗을 자임하는 ≪비정규노동센터≫는 지속적으로 남한 노동운동의 ‘낮은 노동조합 조직률’과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영국노총의 새 노조주의 운동, 미국 서비스노조의 ‘청소부에게 정의를’ 모델에 관한 윤진호 교수의 연구는 민주노총의 조직활동가 양성 프로그램, 전략조직화 사업 50억 기금 추진에 있어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비정규센터 기관지 『월간 비정규노동』은 “비정규·중소영세 노동자 조직화 경로로서의 지역일반노조”를 꾸준하게 특집으로 다루면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에 이론적 자원을 제공해왔다.

“비정규 노동자의 조직화는 초기업단위 조직을 통하여 실현된다. 지역일반노조이건 전국업종단일노조이건 비정규직의 조직화는 기업별 분단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으며 직·간접 고용 비정규 노동자의 조직화도 과도기적인 독자 조직을 넘어서 진정한 산별노조의 건설을 통해 계급적인 단결로 나아가야 한다”며, ≪비정규노동센터≫는 이를 “사회운동으로의 지향 - 사회개혁 투쟁으로서의 비정규노동자운동”이라고 규정했다. 다양한 업종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는 지역노조와 일반노조 동지들의 활동은 존중되어야 하며, 현재의 조건에서 그러한 활동방식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개량적 신조합주의자들의 노선으로써 제출되는 일반노조는 사실상 비정규직 운동에서 성장하고 있는 부문주의, 조합주의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개량적 신조합주의자들은 2005년 들어와서 ‘노동시장에 따른 노동조합 조직화 모델’을 제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단일노조로, 중공업·조선은 지역노조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대공장 정규직 운동의 조합주의를 그 외피만 건드릴 뿐 정면돌파 대신 우회로를 걷자는 것이다. 왜냐면 비정규직 운동이 대공장 정규직 운동의 조합주의와 매 시기 충돌하고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조합주의의 혁신과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삼는 게 아니라 기존의 조합주의 질서를 피해 새로운 조합주의를 위한 모델 찾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개량적 신조합주의자들은 최근 들어서는 ‘지역별 조직건설안’을 하나의 노선으로 제출하고 있다. 지역별 조직건설안은 지역노사정협의회의 현실화 흐름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비정규노동센터≫는 작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서 제기되었던 원청사용자성 인정투쟁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다자간 협상’ 그리고 이를 실질적으로 주도할 ‘민주노총 지역본부의 위상 강화 방안’을 제시한다. 지역별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협조적 노사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 개량적 신조합주의를 배경으로 제출되고 있는 비정규지역센터 사업과 김금수의 지역노사정협의회 구축 흐름은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이름으로 노동운동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3. 비정규직운동의 자주성


한통계약직 투쟁이 패배로 마감되면서 비정규직 운동은 잠복기로 들어섰고 사회주의자들은 평가와 전망 수립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문제로부터 캐리어사내하청 투쟁, 한통계약직 투쟁 등 지난 몇 년간의 뼈저린 경험과 실패로부터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은 ‘비정규직운동은 정규직운동의 엄호 없이는 홀로 생존하기 힘들다’, ‘장기간의 모색을 위해 현장에 뿌리내리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현중사내하청노조의 박일수 열사투쟁은 비정규직 스스로가 현장을 조직하고
자주성을 고양해야 한다는 임무를 제기했다. (사진: 현중사내하청지회)
2002년 모색기 동안 그러한 인식은 현실에서 다양한 논리와 방식으로 사회주의자들의 패배주의·대기주의적 실천양식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권력을 향한 전진》(이하 《전진》)그룹은 비정규직투쟁이 노동조합운동 차원에서는 전혀 받아 안을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대부분의 전투적 활동가들은 기존 정규직 운동 내 전투파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받아 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투파조차 비정규직 투쟁을 받아 안지 못했고 오히려 이들을 탄압하는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한라중공업과 캐리어, 한국통신 등에서 나타났다. 전투적 조합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비정규직 투쟁을 받아 안을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을 통해 확인된 것이었다.

《전진》은 또한, 비정규직 운동이 정규직 운동과 동떨어져 홀로 싸운다면 전체 운동의 발전은커녕 두 운동 모두 몰락과 붕괴에 처할 것이라는 점을 지난 투쟁의 교훈으로 삼았다. 두 운동이 분리된다면, 비정규직 문제는 서구처럼 시민사회운동으로 포섭되고 정규직운동은 노골적인 조합주의로 귀결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대공장 정규직의 선진노동자 운동과 새롭게 올라오는 전투적 비정규직 운동이 합류하여 하나의 뚜렷한 정치적 경향 즉 사회주의 운동으로 결집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사회주의자들의 당면과제 역시 그로부터 도출하였다.

《전진》은 1999~2001년 민주노총 관료들이 보인 전형적인 조합주의적 방식의 비정규직 노조 건설을 비판하고, 노조 건설은 새로운 조합을 ‘하나 더’ 만드는 데 목적을 두는 게 아니라 기존의 대공장 정규직 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재편’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전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공장 속으로 비정규직투쟁을 도입해야 하며 노동조합질서를 뛰어넘어 대공장을 중심으로 생산계열로 편재되어있는 사내하청 뿐 아니라 외주노동자들까지 단결시킴으로써 대공장 운동을 계급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이를 통해 대공장을 혁명운동의 관제고지로 만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시민운동으로 이끌리며 원자화되고 있는 비정규직운동을 끌어당겨야 한다. ··· 비정규직 투쟁을 통해 대공장에 계급 의식적 운동질서를 재구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될 선진노동자들을 결집시켜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 시기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선진노동자의 가장 중요한 당면 임무로 제기되어야 한다.

-「비정규직운동을 계급투쟁으로 대공장을 혁명의 관제고지로」
『노동자권력을 향한 전진』2호 2003-6-20

이는 선진노동자 운동 내 기회주의적 경향들은 사회주의라는 이념 자체에 대한 동의만으로 재편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대공장 사내하청투쟁이라는 실천적 잣대를 통해 선진노동자 운동 내에서 아직 건강하게 남아있는 계급의식적 활동가들을 재구축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진》의 입장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오히려 2003~2005년 다시 고양된 비정규직 운동은 기존의 민주파 혹은 전투파 현장조직의 실상을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전진》이 제기한 선진노동자 운동의 재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괴’를 통한 ‘창조’로 나아가지 못하고 확인사살에 그쳤을 뿐이었다.

왜 선진노동자 운동의 재편은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우선 대공장 선진노동자 운동의 붕괴와 타락 속도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해체 일로에 있는 대공장 선진노동자 운동 속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받아 안을 수 있는 정규직 운동 내 전술주체는 부재하거나 아주 미약했다.

반면에, 2003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대공장 하청노조 건설운동은 과거와 달리 대중적 운동으로 나타났다. 현대중공업과 같은 극단적인 예를 제외하고 자본은 하청노조의 건설과 생존을 어느 정도 용인해 주었다. 융합할 정규직 내 선진노동자 운동은 미약하거나 부재했고 사내하청 투쟁 자체로는 전(全)공장을 흔드는 투쟁으로 등장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사내하청노조들은 일정 규모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퇴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속에서 투쟁을 계속 밀고 나갈 만한 사회주의자들의 주체역량도 미약했다. 특히 구체적인 현실투쟁과 사회주의 정치선동을 결합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현실의 객관적 운동 상황과 사회주의자들의 주체 역량은 대공장운동의 사회주의적 재편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은 기존 운동의 재편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의 기반을 잡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며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대중투쟁 속에서 사회주의 정치선동의 활성화를 통해 차근차근 사회주의 운동의 기초를 밑바닥부터 형성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


비정규직 운동의 성격 변화


2002년 휴지기와 모색기를 거쳐 2003년 비정규직 운동은 다시금 노동자투쟁의 구심으로 떠올랐다. 현자아산사내하청지회가 노조 건설의 포문을 열자 그 열기는 울산으로, 광주로, 전국으로 이어졌다.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정규직노조가 나서주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노조 깃발을 세우고 원청자본과의 투쟁에 나섰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기아자동차 등에서 속속 건설된 비정규직 독자노조는 그 출발부터 대공장 정규직노조의 조합주의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자노조는 ‘현자비투위’의 독자노조로의 전환에 유감을 표명했고, 현중노조는 박일수 열사투쟁에 배신으로 일관함으로써 금속연맹에서 제명됐다. 1999년 한라중공업 권성원 집행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남한에서 비정규직투쟁의 의의는 단지 미조직노동자의 조직화라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비정규직에 대한 기존 정규직운동질서의 반(反)계급적 태도는 비정규직 투쟁이 ‘조합주의에 찌든 민주노조 운동의 혁신’이라는 과제를 부여받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비정규직노조 대표자들의 준비모임이었던 ‘전국비정규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이하 전비연)이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투쟁을 거치면서 기존 정규직노조의 조합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비공식적인 밀실협상으로 마무리된 것은 열사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했던 모든 동지들의 염원을 저버린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열사투쟁 과정에서 보인 대책위의 비민주성, 밀실교섭 등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우리 운동의 풍토를 바꿔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비판에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진지한 자세와 꾸준한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현장의 능동성과 자주성을 고양해야 한다” - 전비연(준) 홍영교 의장과
사노신의 이메일 인터뷰」『사회주의노동자신문』2004-4-14

2003년 이용석 열사, 2004년 박일수 열사 투쟁을 겪으며 “지역과 업종을 떠나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공동투쟁이 필요하다”는 자각 속에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이하 전비연)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전국적 공동투쟁을 기획하고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업은 조합주의적 운동질서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현실에서 결코 쉽지 않았다. 현중 박일수 열사투쟁에서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 투쟁을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사측의 이해를 철저히 대변했으며 상급단체는 정규직노조 눈치 보기로 일관했다. 하지만 비정규직 주체들은 역량의 부족함을 한탄하기보다는 비정규직 스스로가 먼저 나서서 자본에 맞서 공동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노조 운동을 아래로부터 혁신해야 함을 인식했다. 주체 역량의 미약함으로부터 각 단위노조들의 투쟁을 지도하고 묶어세우지는 못했지만, 전비연 활동을 통해 전체 운동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2003~2005년 투쟁시기를 경과한 지금, 그동안 비정규직 운동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단일한 성격이 점차 엷어지고 있다. 2003년 10월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비정규직 철폐하라”를 외치며 산화해 간 이용석 열사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비정규직의 문제를 알림과 동시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철폐’의 투쟁요구를 내걸고 투쟁할 것을, 연대할 것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각 노조가 처한 조건과 현안은 달랐지만 비정규직 철폐만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본질적인 문제임을 인식하고 연대투쟁에 나섰다.

2004년 겨울, 비정규직법 개악저지를 위해 전비연 소속 노조 4인의 동지들이
국회 앞 철탑 고공농성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사진: 현중사내하청지회)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고 비정규직 내에서도 사내하청, 특수고용, 건설일용, 일반노조, 공공,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운동이 확대되면서 더 이상 ‘비정규직 철폐’라는 단일한 요구로 비정규직 노동자 전체를 묶기 어렵게 되었다. 전비연의 ‘비정규권리보장입법 쟁취’ 투쟁은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전비연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며 각자의 핵심 요구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한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5대 요구’를 선전하며 법개악 저지 투쟁을 중심으로 투쟁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 운동은 특수고용을 중심으로 한 권리보장입법 투쟁흐름과 대공장 사내하청을 중심으로 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흐름으로 크게 이원화되었다. 노동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사용주들과의 투쟁도 중요하지만 노동3권 쟁취는 물론이고 유류비 보조, 부당과적 해결, 불법다단계 근절 등 현실문제 해결을 위한 대정부투쟁과 교섭을 필요로 했다. 하기에 법제도개선 투쟁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편으로 만 명 이상의 조합원이 있는 큰 노조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조직률이나 정책역량, 노조운영경험 등 노조의 물질적 기반이 취약하여 민주노총의 지원이나 대정부 교섭틀 마련에 의존하는 경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반면에 사내하청노조들은 현장 기반이 취약하기도 했지만, ‘원청사용자성 쟁취’, ‘파견법 철폐’가 아닌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에 갇혀 전국 투쟁에 결합하지 못했다. 사내하청노조들은, 비정규권리보장입법 쟁취 투쟁에서 보인 민주노총의 국회 중심의 대응(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주체를 배제한 채 노사정대표자회의를 통한 의견 접근에 공을 들이는데 골몰했다.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엄호하고 이 투쟁의 힘으로 정권․ 자본과 정면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사업장들을 교섭압박용으로 동원했다.)과 전비연의 국회 회기 중심의 대응 흐름에 대해 타당하고 건강한 비판들을 제기하였지만 이에 걸맞는 실천투쟁을 조직하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에 힘을 싣지 못했다.


사내하청 운동의 한계


비정규직 운동 내에서 전투적·계급적 입장을 제기하려 했던 사내하청 운동의 한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짚어보자. 독자노조건설투쟁 - 비정규직법개악저지투쟁 - 불법파견정규직화투쟁을 거쳐 오면서 사내하청노조 대표자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이러했다.


홍영교 : 대공장 사내하청노조가 많은 주목을 받고 출범했지만 과연 전체 비정규직 투쟁에서 간접고용노동자 부분이 무엇을 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이번 불법파견 투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모습이 있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투쟁 상을 가지고 있다. 정규직화 투쟁이 아니라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선봉에 서야 하는데 직접고용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에 집중하여 전국적인 노동자들의 이해를 받아 안아야 하는데 자기 현장의 문제만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한다. (중략)

홍성호 : 금타 정규직화와 직접고용의 사례를 봤을 때, 정규직화 된 사람들과 직접고용 된 사람들이 어제까지만 해도 동지였는데 오늘은 적이 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런 것을 봤을 때 일부 정규직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히 검토되어야 한다. (중략)

조성웅 : 하반기 정세에서 연대회의는 자신의 실력을 전투적으로 밀어왔다. 열우당, 크레인 점거투쟁은 모두 민주노총 압박전술이었다. 그 선에서 목표가 정해진 점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활동을 제한했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 자신의 현장을 조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첫째는 손배문제를 민주노총이 안받음으로 인해서이다. 둘째는 이 투쟁을 확대하기 위한 자기계획이 없고 형식적으로 대표자 회의 거쳐 민주노총 계획으로 입안되는 구조... 어찌 보면 평화로운 측면으로 이루어졌다. 정치적으로는 합의주의에 포섭될 가능성, 정치적 허약함을 보여주었다.

-「[좌담]비정규직운동의 자주성,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회주의노동자신문』2005-1-15


자본의 가공할 탄압과 원청노조의 노골적인 배신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의 크레인점거투쟁, 현자 비정규직의 불법파견 정규직화투쟁, 기아 비정규직지회의 라인점거 독자파업, GM-대우창원 비정규직지회의 고공농성 등 대공장 사내하청 투쟁의 불꽃은 2003~2006년 쉬지 않고 작렬했다. 하지만 투쟁주체들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바대로 사내하청노조들은 결정적인 약점과 한계를 안고 왔다.


GM대우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고공농성을 돌입하자 지난 4월 1일 창원공장
정문 앞에서 공장진격 투쟁이 벌어졌다.

첫째, 단사 안에 갇혀 비정규직운동의 일부이자 주도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울산지역의 경우 현대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던 업체가 폐업돼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사활을 건 투쟁을 전개한 대덕사지회가 있었다. 대덕사지회는 현대자동차의 이중개발을 계기로 업체가 폐업돼 공장과 현대자동차 정문에서 농성을 전개했다. 바로 정문 앞에서 공동의 적인 현대자동차 자본을 상대로 투쟁을 전개한 대덕사지회의 농성이 진행되었지만, 현자울산비정규직노조는 적극적으로 연대하지 못했다. 당시 5공장 조합원들이 휴게실을 점거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지속하는 등 비정규직노조 투쟁 중이었지만 연대투쟁을 통해 현대자본을 압박하는 투쟁으로 확대하지 못했다.

현자울산비정규직노조 뿐만 아니라 사내하청노조들은 눈앞에 보이는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아니라, 당시 벌어지고 있던 법개악저지투쟁에서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전국적인 노동자들의 이해를 받아 안아 선봉에 서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가 이기면 전체가 이기는 거다’라는 식의 왜곡된 대공장주의가 정규직운동에서 비정규직운동으로 흘러들어간 결과였고 사내하청 주체들의 목적의식적인 전망과 계획의 부재 탓이기도 했다.

둘째, 정규직노조와의 관계에서 비정규직 운동의 자주성을 올곧게 세워내지 못했다.

“19세기 말 영국 탄광노동자들이 자신들은 9시간 노동제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노동자 형제(자매 - 인용자)들과 함께 10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해 투쟁의 대열에 동참했던 높은 계급의식을 현 시기 남한의 대공장 노동운동에 불어넣을 수 있을 때, 중소영세 사업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든든한 엄호부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내하청 운동은 정규직 조합주의를 혁신해서 계급 의식적으로 이끌지 못했고, 비정규직 운동의 자주성은 역설적으로 정규직노조에 대한 의존성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었다. 기아 화성공장이나 현자 울산공장에서 모범적인 원하청 연대투쟁의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몇몇 선진적이고 전투적인 정규직 활동가들의 연대였지 정규직 운동과 비정규직 운동의 융합이라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현자노조 이상욱 집행부를 포함해 대공장 정규직노조는 사내하청의 연대 호소에 괄시와 외면으로 일관하는 속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은 단사 안에서 쟁취한 조그만 떡고물에 만족하며 서서히 정규직 정서를 닮아가고 있다.

셋째, 정치적으로 ‘전투적 조합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구조조정의 일방적인 희생양이었던 금속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사실 남한 비정규직운동의 첫 번째 주자였고 비정규직 운동의 초기 주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전체 계급운동의 가장 선도적 부분이라고 스스로를 자임했고, 추상적이고 모호하나마 조합운동을 뛰어넘어 노동해방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 역시 금속대공장의 선진노동자 운동처럼 전투적 현장주의를 넘어서지 못했고, 그로 말미암아 명확하게 사회주의적인 지향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못했다. 비정규직 철폐는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모호한 인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가운데 비정규직 철폐, 동일노동 동일임금 같은 전투적 구호를 제기하는데 머물렀다. 비정규직 운동이 전투적 조합주의에 자신을 한정시키는 것은 썩어 고름이 터져 나오는 조합주의에 새살을 덧붙여주는 격이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불법파견 정규직화투쟁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명확한 목적과 좌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대중의 정서에 영합해 들어가는 활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운동과 사회주의


현 시기 비정규직 운동이 확대되면서 그 내부에서는 단사(업종)주의, 개량주의, 조합주의 경향이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지금 극복하지 않으면 비정규직 운동은 기존 운동의 조합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정규직 운동은 끊임없이 내부투쟁을 통해 스스로를 쇄신하고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자 계급의 규율로 단련해야 한다. 또한 정규직 운동에 대해 한편으로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기대하고 의존했던 그동안의 관성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 운동의 선도적 주체들은 조합주의에 맞서 헌신적으로 투쟁하고자 하는 적지만 소중한 정규직 활동가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또 자신보다 더 열악한 임금과 노동조건 아래서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임금노동으로 살아가는 90%의 대다수 노동자들과 전체 운동의 대의를 위해 기꺼이 투쟁의 선봉에 서야 한다.

비정규직 운동은 이제 사회주의 운동의 기치를 선명히 해야 한다. 비정규직 운동은 그동안 신조합주의 뿐 아니라 사회개혁운동, 반(反)관료주의 전투적 현장운동, 반(反)신자유주의 불완전노동운동, 빈곤철폐를 위한 사회운동 등 다양한 내용으로 규정되어 왔다.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비정규직을 활용하고 비정규직 운동을 종속시키고 있다. 비정규직 운동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계급의 이해도 아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만도 아니다. 현 시기 비정규직 운동은 전체 노동계급의 정치 강령과 투쟁요구안을 내걸고 전진해야 한다.


4. 사회주의자들의 과제


이제 현장의 사회주의자들은 정규직,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전체 노동계급의 전위’라는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더욱 더 확고한 정치적 입장과 명료한 선전선동, 헌신적인 대중조직화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지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파업투쟁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현장 제조직들이 공투체를 형성하여 적극적으로 연대했던 것은 현장공동투쟁의 위력과 가능성을 보여준 소중한 계기였다. 또 현장조직·대의원 활동가들과 비정규직지회 활동가들이 모여 전 공장적인 지형과 정세를 함께 분석하고 파업투쟁 전술을 공동으로 기획·집행·평가했던 경험은 현장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실천이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작은 선례를 남겼다.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 현장위원이 정규직의 연대를 호소하는 선동 내용을
지회 조합원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하지만 ‘조합운동 차원에서의 공동전술팀’에 머물러 있는 우리 운동의 현실을 또한 냉정하게 직시해야 하며, 현 시기 사회주의자들의 과제가 무엇인지 깊이 각인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대공장 사내하청 운동을 초점으로 해서 전체 비정규직 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진한다 함은 비정규직 운동이 자신의 깃발에 명확한 강령을 새겨 넣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만의 문제라는 부문주의적 사고, 운동의 목적을 오로지 노조의 확대로만 바라보는 조합주의 사고를 벗어던지고 전체 노동계급의 입장을 견지할 때, 비정규직 운동은 비로소 민주노총과 대공장 정규직 운동을 혁신하는 수단 혹은 먼 미래의 ‘새로운 물결’이 아니라 현 시기 ‘전체 노동계급 운동의 선진부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선전·선동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당면 투쟁을 위한 선진노동자들과의 공동전술팀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이 아니라 선진노동자이자 사회주의자로서 함께 모여 사회주의를 학습하고 토론하고 조직하는 현장모임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실천과 선동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회주의 학습과 정치토론이 현장에서 대중을 만나고 현장투쟁을 조직하는 과제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의 학습-토론-조직이 첫 번째 과제와 연동하여 현 시기 사회주의 운동의 당면과제와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은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활동에 전 계급적인 의의를 불어넣고 사회주의적 이론과 정책 및 요구안을 정식화하고 제시하는 작업을 체계화해야 한다. 당면 투쟁에 대한 지지와 지원도 중요하겠지만, 현재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운동을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강령-전술-조직 모든 측면에서의 작업에 ‘톱니바퀴’가 되어야 하며 현장 상황을 핑계로 사회주의자로서의 조직적인 활동을 등한시하거나 주저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美 부동산 버블 붕괴 조짐… 세계로 번지나

美 부동산 버블 붕괴 조짐… 세계로 번지나
지난달 주택판매량 급감… 급매물 급증 집값 하락 본격화
韓銀 “美·英 등 6개국 급락 가능성”… 한국도 침체 양상

저(低)금리 덕에 지난 5년간 유례없는 부동산 경기 호황을 누려왔던 미국이 부동산 버블(거품) 붕괴에 직면했다. 통화당국이 금리 인상에 나서면서 지난 여름 캘리포니아 등 일부 지역에서 시작된 주택가격 하락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곳곳에서 급매물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뿐 아니라 최근 몇년간 집값이 급등했던 영국·호주·아일랜드 등 세계 주요국의 부동산시장도 곧 미국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23일(현지시각) 전미부동산중개인협회(NAR)는 “지난달 주택 판매가 전달 대비 4.1% 떨어진 633만 가구로 집계됐으며, 전년 동기와 대비하면 11.2% 급락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주택 판매량은 월가 전문가들의 예상치 655만 가구를 훨씬 밑도는 것으로 2004년 1월 이후 2년 반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지난달 주택 재고량 역시 전달에 비해 3.2% 증가한 386만6000가구가 매물로 나와 있고, 이달의 주택 체감경기지수(전미주택건설업협회·NAHB)는 15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메릴린치의 선임 이코노미스트인 세릴 킹은 “주택가격이 이달부터 본격적인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부동산시장 침체는 올해 내내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에 따르면 버블이 가장 심했던 동서부 해안과 플로리다 지역에서 주택 판매량이 가장 많이 줄어들었다. 캘리포니아와 샌디에이고의 지난달 주택가격은 지난해에 비해 2% 가까이 떨어졌다. 버지니아 북부 지역의 하락률은 4%에 이른다.

미국의 최대 주택건설업체 허튼(Horton)의 최고경영자(CEO)인 도널드 톰니츠는 “올해 2분기 순이익이 21%나 감소했다”며 “주택 수요자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부동산시장은 2001년 이후 1%까지 내려간 저금리정책 덕분에 싼 값에 빌린 돈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하지만 최근 2년 동안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17차례에 걸쳐 연 5.25%까지 금리를 올리는 과정에서 거품이 빠지고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저금리 기조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이어서 한국·영국·호주·스페인·아일랜드 등의 주요국의 부동산 거품 논란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달 초 한국은행은 미국·영국 등 주요 6개국의 주택가격에 거품이 끼여 있어 앞으로 급락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었다. 한은은 ‘주요국의 주택가격, 리스크와 정책과제’라는 보고서에서 “2000년대 들어 각국 중앙은행이 경기 하강에 대응해 정책금리를 대폭 인하하면서 자금이 주택시장으로 몰려들었다”며 “이에 따라 주요국 집값에는 거품 가능성이 있으며, 특히 영국·호주·스페인·아일랜드에서 문제가 크다”고 지적했다. 아직까지 버블 붕괴가 현실화되진 않았지만, 주택 가격이 꼭짓점을 쳤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투자 자문회사 인디펜던스 인베스트먼트의 존 포렐리 부사장은 “고유가가 소비 경기에 부담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부동산시장 둔화는 향후 민간 소비를 더욱 압박해 경기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며 전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역시 서울 강남과 경기도 지역의 주택값 급등세가 꺾여 조정을 받고 있으며, 지방은 아파트 미분양 물량이 쏟아지는 등 부동산 경기가 침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지은기자 ifyouare@chosun.co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조업 일자리, 14년간 71만개 사라져

제조업 일자리, 14년간 71만개 사라져
  [산업공동화, 이대로 좋은가 2] 효율화 전략과 해외진출 탓
  2006-08-22 오전 9:05:12
  지난 10여년 간 제조업 분야에서 일자리가 매우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특히 양질의 일자리로 볼 수 있는 대기업의 일자리가 중소기업의 일자리보다 훨씬 빨리 감소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탈공업화 및 서비스화가 진전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제조업 분야의 고용이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제조업 분야 고용 감소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에서 우려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특히 이 문제는 고용을 떠받치는 국내 산업기반의 와해, 즉 산업공동화와 깊이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제조업 취업비중 20% 아래로 곤두박질…대기업 일자리 감소 두드러져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체 취업자 중 제조업 취업자의 비중은 20% 중반 대였다. 그러나 2004년 현재 이 비중이 20% 이하로 뚝 떨어진 상황이다. 제조업 취업자 수도 1992년 489만4000명에서 2006년 7월 현재 418만 명으로 71만4000명 줄어들었다.
  
  특히 제조업 부문의 고용 감소는 중소기업보다 대기업 쪽에서 더 두드러진다. 아무래도 대기업의 일자리가 중소기업의 일자리에 비해 고용의 안정성과 임금 수준이 더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조업 분야의 대기업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더 위축됐다는 것은 양질의 일자리가 그만큼 더 많이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전체 고용에서 종업원 500인 이상 대규모 사업체(광공업 기준)의 고용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1993년 30%에서 2004년 17.1%로 크게 축소됐다. 500인 이상 대규모 사업체의 수 자체도 1993년 719개에서 2004년 383개로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대기업의 고용 흡수력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의 이같은 제조업 분야 고용 감소 속도는 선진국들의 경험에 비해 매우 빠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노사정위의 이덕재 전문위원은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 30~40년 간에 걸쳐 진행된 제조업 분야의 고용 감소가 우리는 불과 10여 년 만에 진행됐다"고 말했다.
  
▲ (왼쪽)1980년대 중반 이후 500인 이상 광공업 사업체의 평균 종사자 수가 급격하게 감소해 왔다. ⓒ 노사정위원회; (오른쪽)제조업 사업체 중 종업원 500인 이상 사업체들의 고용 규모가 특히 빠르게 축소돼 왔다. ⓒ 통계청

  기업의 해외진출이 적지 않은 영향 미쳐
  
  이처럼 유례 없이 빠른 고용 감소에 대해 전문가들은 1990년대부터 기업들이 '자본합리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데 따른 부작용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1970~80년대에 정부가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대대적으로 덩치 불리기에 나섰던 우리 기업들이 1990년대부터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이덕재 전문위원은 "1970~80년대에는 재벌 기업들을 중심으로 고용창출 효과가 큰 조선과 자동차 같은 장치산업이 빠르게 성장했다"며 "그러나 1990년대부터는 대기업들이 설비투자를 늘리기보다는 작업장의 효율화와 인력조정 등을 통한 이윤확보 쪽으로 기업전략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장개방이 가속화된 이후 기업들의 해외진출이 갈수록 늘어난 것도 부문별로 고용감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분석된다.
  
  한 조사에 따르면 2003년 현재 해외에 진출해 있는 기업들 가운데 해외투자가 국내의 고용 확대로 연결된 경우는 18.8%에 지나지 않은 데 비해 국내 고용의 축소나 중단으로 연결된 경우는 28.7%에 달한다. 수송기계, 섬유, 전자통신 등 부문별로 해외투자가 국내 고용에 미친 영향은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다.
  

  제조업 고용 감소…빈곤층 확산과 양극화의 배경
  
  우리나라에서는 제조업 분야에서 이탈되는 노동인력을 흡수해낼 다른 산업분야가 없기 때문에 제조업 분야의 고용 감소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된다. 제조업 분야에서 이탈되는 노동인력은 조건이 괜찮은 새로운 일자리로 옮겨가기보다는 영세 자영업자로 전락하거나 서비스산업 부문의 비정규직 일자리에 하향취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업연구원의 하병기 연구위원은 "과거에는 농업에서 이탈된 노동인력을 제조업이 충분히 소화해냈기 때문에 산업고도화 과정의 부작용이 비교적 작았다"며 "그러나 최근에 제조업에서 이탈되는 노동인력은 달리 갈 곳이 없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LG경제연구원의 이지평 연구원도 "탈공업화 현상은 소득수준의 향상과 함께 서비스업에 대한 수요가 유발되면서 제조업의 비중이 하락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며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탈공업화의 이런 선순환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요컨대 안정된 일자리에서 불안정한 일자리로, 고임금 일자리에서 저임금 일자리로의 노동인력 대이동이 10여 년 간에 걸쳐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중산층이 몰락하고 빈곤층이 크게 확대되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와 최저생계비에 비해 120% 미만의 소득만을 올리는 차상위계층(잠재빈곤층)의 인구가 2005년에 700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국민적인 빈곤 상태를 극복했다는 우리의 자부와 달리 현실은 공업화를 거친 뒤에 빈곤의 문제가 새로운 형태로 심각하게 다시 대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기업의 해외진출 확대와 긴밀하게 연관된 국내 제조업 분야의 고용흡수력 저하라는 문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사정위의 이덕재 전문위원은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가 취약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제조업 분야의 급격한 고용 감소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면서 "제조업에서 이탈된 노동자들이 '통닭집 차리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주고받는 현실을 직시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창간18호]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인가 명백한 자본주의인가?(번역)

 

 [창간18호]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인가 명백한 자본주의인가?(번역) 

  

노정협    2006-07-27 20:15:12, 조회:65, 추천:2 

중국의 사회성격을 둘러싼 논쟁들이 다시 벌어지고 있다. 중국이 애초부터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는 주장, 모택동 사후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으로부터 사실상 자본주의로 되었다는 주장, 중국의 사회주의가 관료주의적이지만 아직 완전히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주장, 중국공산당이 상부구조를 차지하고 있지만 공산당이 자본가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경제적 토대는 이미 사적 소유기업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자본주의라고 보는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글은 우리사회의 변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중국사회를 인식하는데 도움을 주는 글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기회가 되는 데로 이와 관련한 다양한 시각의 글을 번역해서 소개할 것이다.(편집자 주)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인가


명백한 자본주의인가?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에 대한 많은 시각들이 있다. 그런데 쉽게 간과되고 있는 사실은 그 큰 나라가 19세기 중반에는 제국주의 권력에 의해 수탈당했었고,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1930년대의 일본의 침략은 계속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일본을 패배시켰고 계속해서 30년의 기간 동안 세계인구의 1/4이 살고 있는 거대한 국가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완전히 무능력함을 보여주었던 중국의 부르주아 정당인 국민당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혁명은 앞선 러시아의 혁명과 같지는 않았다. 러시아 혁명에서 존재했던 노동자 민주주의의 시기가 중국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1930년대에 중국공산당은 이미 스탈린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에서처럼 스탈린주의에서 경제 성장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인적, 물적 자원의 많은 희생 속에 만들어 낸 것이었다. 초기 몇 십 년 동안 연간 성장률은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악영향에도 불구하고 9%를 웃돌았다. 전후 자본주의 진영의 심각했던 첫 대공황 기간인 1974년에도 중국은 GDP 10%대의 성장을 보였다. 독립 당시 중국과 비슷한 발전수준이었던 인도의 경우 1957년에서 1970년까지 중국의 절반 수준의 성장률을 보였다. 경제성장은 중국사회를 변화시켰지만 80년대에는 산업화된 국가들에 뒤처지게 된다.



외국투자에 대한 개방



중국 체제가 외국 투자에 개방하기로 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것은 중국 경제의 부진을 고려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당시 사회에 노동자에게 완전한 발언과 비판의 자유가 보장돼 있었다면 개방은 통제될 수도, 사회주의를 강화하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적 체제의 분위기 속에서,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배반당한 혁명’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사적소유와 경쟁에 기초한 생산력은 운명을 다해왔다. 대조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결과로서의 소유관계는 분명 새롭게 형성된 국가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쁘띠 부르주아 경향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우위는 경제 형태로 인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닌-그 조차 여전히 멀었지만- 독재에 의한 정치적 수단을 통해 확보되었다. 경제의 총체적인 성격은 국가 권력의 성격에 따른다.”


이것은 사회주의 경제가 모든 인구의 물질적 요구를 보장해 주는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소유에 대한 욕망을 대신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지 못하는 동안 모든 것은 진정한 의회나 소비에트 같이 노동자들의 결정권을 향상시킬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 성장을 유지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러시아와는 달리 중국에는 이들 중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은 권력을 잡기 이전부터 관료화되고 있었다.


그렇게 혁명 이후 몇 십 년 동안 중국공산당과 국가 기구에는 부패와 관료주의가 존재하고 있었고, 80년대 초반 자본주의의 매력에 이끌리게 되었다. 트로츠키가 설명했던 것처럼 관료화된 스탈린주의자들은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시스템에 대한 남용으로 보았고, 그것을 소유권으로 바꿔 가지려했다.


이러한 변화가 동유럽과 90년대의 소련연방에서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통제 하에서 경제성장을 수반하며 보다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중국 관료들은 소련연방의 경험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었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전에 이미 시장경제의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었다.



등소평의 승리



공산당 내의 개방에 대한 논란은 등소평 사후 문화혁명의 계속을 주장했던 사인방을 1976년 10월에 체포하면서 축출시킨 바로 뒤 1977-78년에 시작되었다.


등소평은 홍콩과 마카오 주변에 4개의 특별 경제구역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국 등의 중국계 화교자본을 유치하려 시도했다. 그것은 느리고도 모순적으로 진행되었다. 80년대 초반 집체농장을 각각의 농민들에게 장기간 대여하도록 하고, 80년대 중반 상당수의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가격통제를 없애면서 질적 변화가 시작되었다.


외국의 투자가 들어오자 농업 생산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인플레도 발생했다. 1980년에서 1985년까지 약 1억대의 텔레비전이 판매되었다. 1985년에서 1990년까지 약 5천만대의 세탁기와 4천만대의 냉장고가 판매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고위급 관료의 자녀들은 주로 미국과 영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천안문



첫 번째의 주식 거래는 1988년 심천에서 시작되었고, 1990년대 상하이가 뒤를 이었다. 이는 베이징 천안문 항쟁으로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가 대량학살을 당했던 1989년 6월 3,4일  바로 그 시기였다.


가격 인상과 공산당의 부패에 맞서 한 달 동안 진행되었던 저항운동은 대량학살로 끝났다. 저항에는 수백만의 학생, 노동자뿐만 아니라 그에 공감하는 당국가 기구의 일부 층도 함께했다. 자오쯔양 총리는 진압명령에 동의하지 않고, 정치의 일부를 개방해야한다는 의견으로 실각 당하고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 되었다.


등소평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핵심을 비판하던 시위대를 주저 없이 공격했다. 일 년 여의 논쟁 끝에 결국 자본주의에 대한 개방의 속도를 늦출 것을 요구하는 당 일부의 의견을 채택하지 않았다. 무력진압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연안 지역과 베이징의 외국 투자 개방을 추진했다. 그래서 푸동과 상하이에 맨하탄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고, 오늘날 이곳은 중국의 중요한 상업허브가 되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1991년에 이미 농촌지역의 실업자는 1억을 넘어섰다. 지방에는 실업자 혜택이나 연금 계획이 없기에 이들은 전적으로 가족에 의존하고 있다. 그 해에 60억 달러의 외국 투자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 20%는 대만에서 온 것이었다.


1992년 10월 중국 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이러한 변화를 ‘사회주의시장경제’라고 명명하였다. 93년에는 13.7%의 GDP 성장이 있었고, 그 후 8%대의 평균 연간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1993년 9월 14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건설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에 대한 결정”을 공식 채택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국가적 소유가 국가 경제의 주요한 토대에 남아 있더라도 국가나 집산, 사적 소유 등 모든 형태의 소유는 경제발전에 이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공적 소유가 지배적 역할을 하는 여러 경제 분야에 결합된 발전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 소유 기업의 더 많은 경영 기법의 변화가 필요하며 시장경제의 요구에 부응하는 현대적 기업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당과 정부가 어떻게 거시적 경제 통제를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뜨겁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결국 노선은 바뀌지 않았다. 1996년에는 중앙 계획의 자취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중국공산당의 자본가들에 대한 개방



1998년에서 1999년까지 대량 해고와 노동자 희생을 동반하는, 경제에서의 국가적 영역을 과감하게 줄이면서 외국 투자에 더 넓은 길을 터주도록 하는 과정이 공식적으로 진행되면서 저항도 많았던 개방의 시도는 더욱 확고해진다. 그렇지만 민주적 개혁과 관련된 문제들에는 여전히 인색했다. 국영기업 중에서 손실을 남기는 기업과 이윤을 남기는 기업을 구분해내기 위한 분리, 통합이 진행되면서 국영기업은 뒤죽박죽되었다. 이윤을 남기는 기업은 민영화 되고 손실을 남기는 기업은 도태되도록 남겨졌다. 그 과정에서 당 고위 관료와 가족들이 가장 좋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결과 지난 6년 동안 적어도 7천만의 국영기업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2001년 7월 1일에는 자본가들이 당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공식결정이 있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WTO에 가입하게 된다.


중국에서 친자본가적 입장이 비교적 쉽게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네 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계속된 경제 성장으로 농촌에서 유입되는 수많은 새로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는 한편 경제성장은 소수의 자본가들을 더욱 부유하게 했다. 농촌에서 20-25 유로하던 임금이 도시에서는 80-180유로로 상승했다.


중국 상품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0여 년 간 480기업이 6천억 달러의 거대한 투자를 벌인 과정에서 발전한 기술력, 그리고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10배에서 20배 정도 저렴한 노동력이라는 조건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빠른 수출의 증가는 수입의 증가와 보조를 맞추었고, 기간시설에 대한 투자도 증가했다. (1994년에서 2004년 사이 35000킬로미터의 도로가 건설되었고 앞으로 10년 간 85000킬로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84개의 도시에서 곧 지하철 체계를 건설할 것이며 철도나 항공, 산업단지 등이 또 준비되고 있다.)

새롭게 형성되는 자본가계급의 핵심은 외국의 중국계 거주지에서 들어온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관료의 가족들, 친척들이 차지했다. (상하이에만 해도 대만에서 돌아온 이들이 60만 정도 살고 있다.)


개혁개방에는 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 그리고 홍콩의 중국으로의 통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은 마치 자본주의의 트로이 목마와 같았다. 홍콩을 통해 심천 경제특구는 지난 20여 년 동안 연간 31%가 넘는 성장을 해왔다. 홍콩의 주요 자본가들은 중국 대륙의 새로운 자본주의로 통합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다. 97년의 홍콩반환은 자본가계급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중국인들의 해외 거주지 또한 중국 자본주의를 성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3년 까지 전체 외국 투자의 2/3가 외국 중국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 중 상당수는 대만에서 온 것이었다.


국가에 의한 재정관리나 통화의 불환성이라는 특징은 중국이 97년의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증가하는 지불불능의 대출금(98년에 전체의 40%를 차지했다)의 영향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수입의 35%를 저금하는 중국의 높은 저축율과 6천억 달러를 축적하게 했던 무역 흑자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국가의 빚은 급격하게 증가했지만 여전히 GDP 25% 이하로 남아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국내 저축으로 충당되고 있다.


2002년 가을 16차 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은 대 자본가들을 상당수 선출하면서 중앙위원회의 40%를 교체하였고, 당내의 부르주아지들의 위치를 강화하였다. 전체 인구의 5%가 공산당 당원인 반면에 자본가들의 당원 비율은 30% 수준이다. 이렇듯 새로이 형성되는 계급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전 부주석 룽이런의 아들 룽즈젠을 들 수 있는데 800억 유로에 달하는 자산을 신고한 그는 항공산업, 통신, 건설, 도로 산업 등에 다양하게 투자하는 ‘CITIC’ 이라는 투자금융회사를 지배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기초 세우기



과거 자본가들에 대한 투자 개방은 사회주의 경제 영역을 강화시키는 한에서 사회주의적 경제 내에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GDP의 절반정도가 사적 기업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통계가 체제 전체가 작동되는 방식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자본이 충분치 못한 국영기업들이 어떻게 최저의 가격으로, 손해를 보면서 사영기업으로 넘어가고 있는가를 보다 중요하게 봐야할 것이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20%가 국가 수입의 47.5%를 소비한다고 한다. 최근 2년 동안 중국은 BMW의 최대 시장이었으며, 자동차 수요에 대한 급격한 증가로 상하이에서는 새 번호판을 경매로 팔기까지 한다. 2004년 8월에 번호판 가격은 2600 유로정도로 올라갔으나 4월까지 가격은 4500 유로로 치솟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이 세계 생산의 중심이 되어왔다는 것은 명백하다. 작년에 5% 증가한 세계무역 중 60%의 성장이 중국의 몫이었다. 중국 수출품에 대한 보호주의적 조치를 취해야한다는 요구가 있음에도 중국의 무역이 높은 비율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미국, 유럽, 일본, 대만, 한국 등의 상품의 상당수(약 60%)가 자국으로 다시 수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근 유럽 연합에서 중국의 섬유제품 수입에 제한을 두려는 것은 네덜란드나 벨기에, 덴마크 같은 국가들과 가을-겨울 (의류) 컬렉션에 지장을 받는 ‘자라’나 ‘베네통’ 같은 상당수 다국적기업의 반대를 받았다. 상위 500개의 다국적 기업 중에 470여개 기업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 계급



중국혁명은 세계에서 가장 단물이 많은 식민지 지역을 제국주의자들의 지배에서 떼어놓았다. 십여 년 동안 중국은 식량 생산을 자급하도록 했고, 산업화의 기초를 놓았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인적, 물질적으로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도 계속 나아갔다. 그들은 그들의 특권을 계속 강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로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과거의 국제주의에 대한 립서비스마저 공세적인 민족주의로 탈바꿈했다. 엄청나게 들어오는 외국 자본과 농촌에서 유입되는 새로운 노동자 계급의 결합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중국은 이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할만한 많은 양의 상품을, 거대한 노동력을 손에 넣게 된 자본가들을 위한 높은 이윤을 생산하게 되었다.


엥겔스가 19세기 중반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묘사했던 노동자 착취의 수준이 21세기에 재현되고 있다. 중국의 노동자 계급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며 연간 2천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조합의 전통도 없고 법률상으로 보장된 권리도 없다. 임금은 체불되기 일쑤이다. 중국의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당국가 관료가 결탁한 적에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와 불평들을 인식하면서, 노동자 스스로의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미 투쟁은 시작되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추산하는 것 만해도 2003년 동안 3백만 노동자들의 58000여 건의 투쟁이 진행되었다. 십 년 전 이 수치는 9000건에 머물러 있었다. 최근 2년 동안 임금이 50% 오른 것도 사실이다.


2004년 5월 19일 ‘La Repubblica’는 유럽에서 150 유로에 팔리는 팀버랜드의 부츠가 어떻게 중국 중산지방에서 일하는 14살의 아이에게 45센트의 임금을 지급하면서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글을 실었다. 어린 노동자들은 안전장치나 유급휴일도 없이 하루에 16시간을일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에서 수차례 보았던 것처럼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착취에 저항하는 투쟁을 벌일 것이다. 나폴레옹의 말을 바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력한 중국의 노동자 계급이 일어날 때 자본주의 세계는 흔들리게 될 것이다.”

출처: www.marxist.com (In Defence of Marxis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2-이코노미21]격동하는 세계 경제, 한국 경제 뒤흔들 5가지 변수

 

[펌2-이코노미21]격동하는 세계 경제, 한국 경제 뒤흔들 5가지 변수 

  

미국발?    2006-08-16 15:10:04, 조회:12, 추천:0 

[커버]격동하는 세계 경제, 한국 경제 뒤흔들 5가지 변수 

 

이정환 기자(cool@economy21.co.kr)  2006년 07월 18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논의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느냐로 요약된다. 성장의 방식을 놓고 첨예한 의견 대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논의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의 현재 상황과 세계 경제의 큰 흐름을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올해 하반기와 멀리는 내년까지 우리 경제를 뒤흔들 7가지 변수를 살펴본다.


1. 미국의 경제 불안, 세계를 위협하다.


세계 경제의 가장 큰 변수는 역시 미국의 경제 불안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소비 시장인 미국이 흔들리면 세계적으로 그 충격이 확산된다. 문제는 이미 천문학적인 규모로 불어난 미국의 부채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지난해 기준으로 8천50억달러, 국내총생산(GDP)의 6.4% 규모까지 늘어났다. 순 대외채무 역시 2004년 말 기준으로 2조5천422억달러, GDP의 21.7%까지 늘어났다.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이 정도 부채는 정말 심각한 부담이다.

미국은 그동안 달러를 마구 뿌려대면서 이 엄청난 부채를 감당해 왔다. 달러가 기축통화라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미국이 채권을 찍어내면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대만 등이 이를 사들여 미국 경제를 지탱해 왔다. 외환위기에 대비해 외환보유액을 충분히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다. 어느 한 곳이라도 미국 채권을 내다팔기 시작하면 달러 가치가 급락하고 다 같이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게 된다.

미국이 계속해서 금리를 인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달러 자산이 이탈하고 달러 가치가 급락하는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다. 원자재 가격 인상에 따른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우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의 기준금리가 이미 5.25%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2001년 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2004년 6월부터 올해 6월까지 17차례나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 끝났다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일부에서는 FRB가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씩 두 차례에 걸쳐 5.75%까지 올릴 거라는 전망도 있지만 역시 금리 인상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데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한다. 소비 위축을 마냥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은 달러 가치의 하락을 막는 동시에 경기를 끌어올려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세계 경제는 그동안 미국의 소비에 의존해 성장해 왔다. 미국은 빚을 늘려가면서도 소비를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전쟁까지 벌였다. 다른 나라들은 기꺼이 돈을 빌려주면서 미국에 물건을 팔아왔다. 분명한 것은 이런 불균형이 언제까지나 계속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빌려주는 쪽이나 빌리는 쪽이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미국의 빚이 너무 많아졌고 무엇보다도 미국의 소비가 늘어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세계 경제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2. 무너지는 달러, 누가 덤터기를 쓸까.


미국이 엄청난 빚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제2의 플라자 합의다. 플라자 합의는 1985년 9월, 미국과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5개 나라가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에 모여 달러 가치를 낮추기로 합의한 것을 말한다. 미국은 금리를 낮춰 달러 약세를 유도하기로 했고 다른 나라들은 환율을 낮춰 상대적으로 화폐 가치를 높이기로 했다. 미국의 빚은 크게 줄어들었고 미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덕분에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다. 1985년 260엔이었던 엔/달러 환율은 그 이듬해 150엔으로 폭락했고 10년 뒤인 1995년에는 80엔까지 떨어졌다. 일본 제품의 미국 수출 가격이 세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는 이야기다. 일본 기업들이 우리나라 기업들에 뒤처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일본은 금리를 낮추면서 내수 부양에 나섰지만 심각한 자산 거품을 낳았고 오랫동안 그 후유증을 앓았다.

무역적자와 경상적자,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이 최근 다시 제2의 플라자 합의를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빚을 탕감해 달라는 노골적인 요구다.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IE)는 지난해 말, 우리나라를 포함한 20개 나라들이 자국 통화를 달러 대비 25% 이상 절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들의 기준에 따라 원화 가치를 19.2% 절상하면 원/달러 환율이 700원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런 주장은 언뜻 황당무계하게 들리지만 달러 가치의 급락이 자칫 미국의 경기 침체와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마냥 무시하기는 어렵다. 플라자 합의를 끌어냈던 1985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GDP의 3.5%였는데 지난해에는 6.4%로 거의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났다. 올해는 6.7%로 늘어날 전망이다. 그래서 미국의 외환 위기나 심지어 미국의 몰락 이후를 이야기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미국은 특히 엄청난 무역 적자를 보고 있는 중국에 강한 압력을 넣을 것으로 보인다. IIE는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43.3% 절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선진 7개국 모임인 G7은 올해 4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회담에서 "세계경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신흥 국가들이 환율을 유연화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아시아 신흥국가와 석유수출국들의 환율 조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미국은 중국에 압력을 넣으려고 IMF까지 동원하고 있지만 자존심 강한 중국이 순순히 미국에 굴복할 이유가 없다. 중국은 환율 절상 대신 금리 인상으로 미국을 달래고 있지만 문제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굳이 제2의 플라자 합의까지 가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달러 약세는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 충격이 어느 정도일지, 그리고 그 충격을 세계 경제가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지가 중요한 변수가 된다.


3. 물가 잡으려다 경기 발목 잡을라.


올해 세계 경제의 큰 흐름은 '글로벌 인플레이션'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2002년 이후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세계적으로 소비자 물가가 동반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는 달러 약세로 상대적으로 원자재 가격의 부담이 컸고 소비자 물가도 그만큼 크게 올랐다. 올해 들어 미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4%를 웃돌아 199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미국 경제가 성장 둔화 사이클로 접어들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이라는 반갑지 않은 상황을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버냉키는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천명하고 선제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거듭 강조한 바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올해 들어 세계적으로 금리 인상과 긴축 정책이 쏟아지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는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의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지난 4년 동안 가파른 성장이 지속되면서 성장 여력이 고갈됐기 때문이고 둘째, 에너지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째, 중국의 저가 공산품이 물가를 잡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넷째, 시중에 너무 많은 금융 유동성이 풀려있기 때문이고 다섯째, 경제 주체들이 모두 인플레이션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1970년대를 뒤흔들었던 인플레이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특히 중국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중국은 생산과 고용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해왔다. 그런데 만약 중국의 생산성이 지금보다 더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중국의 임금 상승률은 이미 10%를 웃돌고 있다. 세계의 공장이라던 중국이 세계 경제의 화약고가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장 필립 코티스 OECD(세계경제개발기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물가 급등이 중국의 저가 공산품 수입에 따른 인플레이션 억제 효과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당장 중국이 인플레이션 수출국으로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 대우증권 고유선 연구원은 "농촌과 비교할 때 소득 격차가 3.2배에 이르고 저축률 역시 무려 47%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임금 상승 압력이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뿐 한동안 인플레이션이 확산되고 긴축 정책이 계속될 거라는 데는 대부분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바야흐로 세계 경제는 고유가와 고금리, 고물가라는 3고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자칫 성장 둔화와 물가 상승의 악순환을 낳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인플레이션 공포 못지않게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그만큼 불확실성이 많다는 이야기다.



4. 양극화 방치하고 내수 회복 가능할까.


전문가들의 전망을 종합하면 세계 경제는 올해 하반기에 정점을 찍고 한동안 내리막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크다. OECD 경기선행지수는 여전히 상승 추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눈에 띄게 둔화하고 있고 미국의 경기선행지수는 이미 올해 2월부터 추락하고 있다. 하나증권 곽영훈 연구원은 "미국 경제는 구조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의 시대로, 순환적으로는 경기 하강 국면으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미국이 세계 경제를 끌어내리고 있는 모양새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결코 좋지 않다. GDP 성장률은 올해 1분기 6.2%에서 4분기에는 4% 수준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한국은행은 하반기 성장률을 당초 예상했던 4.6%에서 4.4%로 낮춰 잡았다. 이밖에도 경기 선행지수나 교역조건, 심리지표 등이 모두 경기 부진을 예고하고 있다. 소비 증가율 역시 올해 1분기를 정점으로 둔화되는 추세다. 실질 소득을 반영하는 국민총소득(GDI)이 2년째 줄어들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계 부채가 여전히 걸림돌이다. 부채비율은 2002년 이후 여전히 횡보 수준이다. 부동산 담보대출이 크게 늘어난 데다 가뜩이나 금리가 오르면서 원리금 상환 부담도 크게 늘어났다. 정부가 소비 회복의 근거로 제시하던 신용카드 사용금액도 2004년과 큰 차이가 없다. 그만큼 소비 여력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한편 해외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올해 1분기 가계 부문의 해외소비는 지난해 4분기보다 11.5%나 늘어났다. 반면 국내 소비는 0.9%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해외 소비가 단기적으로 국내 소비를 대체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소득 양극화가 불러온 소비 위축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한동안 내수 회복이 어려울 거라는 전망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수출이 성장의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인데 역시 기대에 못 미칠 것으로 보인다. 산업자원부는 수출 증가율이 올해 상반기 13.9%에서 하반기에는 10.0%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산자부는 원화 절상과 고유가에 따른 수출 채산성 둔화, 조업일수 부족 등을 수출 증가 둔화의 원인으로 꼽았다. 다행히 설비 및 건설투자가 회복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경기를 선도할 수준에는 못 미친다는 평가가 많다.


5. 가계와 기업의 양극화, 그리고 성장의 함정.


눈에 띄는 변화는 국민경제에서 기업의 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상장회사 순이익은 GDP의 7.5% 수준, 이 비율은 올해 1분기 8.1%까지 올라갔다. 사상 최고 수준이다. 기업 이윤과 요소비용 국민소득의 비교는 더욱 놀랍다. 1996년 8.5%에서 지난해에는 17.1%까지 늘어났다. 반면 임금소득의 비중은 63.4%에서 60.4%로 줄어들었고 이자소득 역시 26.8%에서 20.4%로 줄어들었다.

이자와 임금의 비중이 줄어든다는 것은 가계의 체감 경기가 그만큼 위축된다는 걸 의미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력 강화를 의미한다. 우리나라 상장회사들 현금 유보율은 이미 400%를 넘어섰다. 상장회사들의 현금성 자산 규모는 3월 말 기준으로 56조원, 사상 최대 수준으로 불어났다. 현금성 자산이 많다는 건 그만큼 재무구조가 탄탄하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설비투자가 부진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편 배당과 자사주 매입이 늘어나는 것도 주목된다. 설비투자 대비 자본시장 투자비용의 비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30.3%까지 늘어났다. 실물 투자가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금융시장을 통한 관리비용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맥락에서 기업의 영업외수지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영업이익 대비 영업외수지의 비중은 2004년 10.6%에서 지난해에는 15.5%까지 늘어났다.

한국투자증권 김학균 연구원은 "주식시장이 기업의 자금조달 창구로 활용되기 보다는 기업의 잉여 유동성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자본의 효율성은 크게 늘어났지만 그 결과 주가와 경제 성장률의 상관관계가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성장하지 않는데도 주가가 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설비투자를 줄여 현금성 자산을 쌓거나 자사주를 사들이고 배당을 늘리는 기업들의 주가가 오른다.

펜실베니아대학 제레미 시겔 교수는 일찌감치 이를 '성장의 함정'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시겔은 성장성이 투자 수익률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한 말이지만 거꾸로 보면 투자 수익률이 장기적인 성장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한미 FTA는 자칫 이 성장의 함정으로 우리 경제를 몰아넣을 위험이 있다. 이미 그 징후는 IMF 외환위기 이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바야흐로 우리는 성장의 한계를 맞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아무런 설비투자도 하지 않는데도 엄청난 이익을 내고 그 이익의 상당부분을 다시 금융시장에 쏟아 붓고 있다. 이 모든 게 제조업이 금융시장에 종속되면서 나타난 변화다. 그래서 기업은 성장하는데 그 성장의 혜택은 배분되지 않고 소수의 투자자들에게 독점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성장에는 미래가 없다.


이정환 기자 cool@economy21.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민주노동당 자게]왜 소련 관료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닌가?(만델)

 

[펌-민주노동당 자게]왜 소련 관료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닌가?(만델) 

  

소련사구체    2006-08-17 22:10:39, 조회:11, 추천:2 

만델이 제시한 소련 관료가 자본가가 아닌 이유


글쓴이 : 참이슬

저명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제4인터내셔널(FI) 지도자였던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이 1979년 미국의 권위있는 맑스주의 저널『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31권에 기고한 글 「왜 소련 관료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닌가?」(Why The Soviet Bureaucracy is not a New Ruling Class?)을 소개하면서 간단한 요약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소련을 관료들이 지배계급인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손쉽게 알 수 있도록 요점만을 간추려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만델은 역시 저명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이자 『먼슬리 리뷰』편집자였던 폴 스위지(Paul Sweezy)와 지상 논쟁을 하면서 소련 관료가 왜 지배계급이 아닌지를 논증했습니다. 본디 지배계급은 자신이 지배하는 사회구성체가 계속 유지되도록 노력함으로써 기득권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급적 피지배계급을 더 가혹하게 착취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소련 관료들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있었던 소련이 계속 유지되도록 노력하기보다 이에 저해되는 행위를 벌여왔습니다. 소련 관료들은 경제 운용의 비효율성과 낭비를 늘리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 자본가들이 보다 더 생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죠. 이는 경제가 효율적으로 운용되어 사회적 잉여 생산물(social surplus product)이 늘어나도 이를 모두 자기들이 갈취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또한 소련 관료들은 자신의 지위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굳이 스탈린 시대의 ‘피의 숙청’까지 들먹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련 관료들이 그 자식 대까지 자신의 지위를 유지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죠. 무엇보다도 소련 체제에서는 다량의 재산을 축적하거나 유산을 상속하기가 어려웠으니까요. 부정부패를 통해 한 몫 잡으려는 경향이 관료들 사이에서 번지긴 했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복원의 위협을 높이는 요인이 될지언정, 소련 관료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근거로 활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련의 관료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관점은 자본주의에서의 계급투쟁을 ‘노동 대 자본’의 양극 구도가 아니라 ‘노동 대 자본 대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3극 구도로 전망해야 함을 함축합니다. 더불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이행”이라는 맑스주의의 전망이 “자본주의에서 ‘관료계급’이 지배하는 새로운 계급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사실’에 의해 부정됨을 의미하지요. 문제는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 주장하는 이들(SWP 및 그 산하 ‘런던연합’을 포함한 유사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이에 포함됨)이 이런 맑스주의 전망과 모순되는 논증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소련 관료들과 같은 ‘새로운 지배계급’이 자본가보다 더 나쁘다는 판단이 설 경우, 자본가계급과 관료계급 사이의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계급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결론까지 유도될 수 있습니다.(그래서 ‘런던연합’이 2004년 4월 ‘노무현 살리기’를 위한 시위에 적극 나섰던 걸까요? ^^)


만델은 소련의 관료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주장은 도덕적인 분노에서 기인했을 뿐 냉철한 과학적인 분석은 결여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소련 관료들은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정말 나쁜 존재인데, ‘사회주의자’의 눈으로 가장 나쁜 존재는 자본가계급이니까 소련 관료들도 자본가와 다를 바 없는 지배계급이라 간주하는 격이라 할까요? 열정은 과잉이지만 합리적이고 냉정한 분석은 모자란 ‘런던연합’의 행태를 보면 “소련의 관료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주장은 도덕적인 분노에서 기인했을 뿐 냉철한 과학적인 분석은 결여된 것”이라는 비판이 정말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만델] 왜 소련 관료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닌가?


글쓴이 : 참이슬

Why The Soviet Bureaucracy is not a New Ruling Class?

(왜 소련 관료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닌가?)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

번역 : 참이슬


※ 이 글은 1979년 미국의 권위있는 맑스주의 저널『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31권에 만델(Mandel)이 기고한 글 「왜 소련 관료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닌가?」(Why The Soviet Bureaucracy is not a New Ruling Class?)를 번역한 것으로 카피레프트 규약 2.0에 따릅니다.(원문은 www.ernestmandel.org에서 접속할 수 있음.) 자유로운 이용은 환영하지만 영리 목적의 개작은 불허합니다.


폴 스위지(Paul Sweezy)는 마침내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운명에 관한 맑스주의 전통 - 그가 인정하였듯, 대체로 트로츠키주의에 의해 대표되는 - 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시작했다. 진실로, 그는 여전히 그러한 (트로츠키주의의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운명에 대한) 해석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1978년 10월호에 게재된 첫 코멘트는 잠정적인 것이다. 그들이 제기한 주요 도전에 대해 답변함으로써 우리는 국제 노동운동의 미래를 위한 핵심 이슈들로 남아 있는 것들과 관련 건설적인 논쟁을 (『먼슬리 리뷰』 편집자 폴 스위지와 독자들 모두와 함께) 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스위지는 우리에게 (1939년 트로츠키(Trotsky)의 분석 이후 40년만에) 소련의 운명과 (소련의) 관료제의 본성에 대한 문제가 아직도 확립되지 않았다는 논제를 반복하기 위해 과제를 부여했다. 스위지가 문제 제기한 바에 따르면, 트로츠키는 그의 단기간의 전망에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만델(Mandel)이 그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 스케일을 깨닫지 않은 채 단지 트로츠키를 반복함으로써 이론(소련의 관료제에 관한)의 신뢰성을 침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위지가 실수한 것처럼 보이는 점은 트로츠키가 제기한 문제들에 포함된 것은 시간 스케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동시대 세계 발전의 기본적인 경향에 관한 것임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이는 스위지가 인용한 트로츠키의 논문 「전쟁 속의 소련」(The USSR in War)으로부터 두 문단을 재생해 보면 명확해 진다 :


그러나, 만약 현재의 전쟁이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쇠퇴를 자극할 것임을 인정한다면, 또다른 대안이 남게 된다 : 독점 자본주의의 한층 더 깊은 쇠퇴, 국가와 전체주의 체제에 의한 모든 잔여 민주주의 체제의 교체가 더 심하게 융합되는 것 등이다. 사회의 지도력을 자신의 손에 쥐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무능은 이러한 조건 하에서 보나파르트주의(대중 선동주의) 파시스트 관료제로부터 새로운 착취 계급의 성장을 유도한다.


그리고 또한 :


한편으로 10월 혁명의 모든 가능성들이 현재의 전쟁 동안에, 또는 그 이후 즉각적으로, 임의의 선진국에서 지속되는 것을 찾는 데 실패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느 곳이든 모든 전선들에서 후퇴한다면 - 우리는 의심할 바 없이 현재의 획기적인 사건과 그것의 추동력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수정해야만 한다. 그러한 경우 소련이나 스탈린주의 깡패 집단(gang)에 대해 전형적인 딱지붙이기가 아닌, 수세기가 아니라면 앞으로 수십년 간 세계의 역사적인 전망을 재평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사회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의 획기적인 시대나, 또는 한편으로 전체주의 관료제가 쇠퇴하는 사회의 새 시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스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이나 또는 그 직후 어느 선진국에서도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승리는 없었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사실이다. 그러나 스위지는 트로츠키에 의해 제시된 질문의 두 번째 부분을 잊고 있다 : 그곳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쇠퇴”가 존재하는가? 숫자에서? 기법에서? 조직의 단계나 전투성에서? 어느 누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역주 : ‘68혁명을 가리킨다) 공장을 점거한 파업 참가자들의 수가 그 이전 1936년 6월(역주 : 1936년 여름 파시스트의 제3공화국 전복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공산당, 사회당, 급진당의 인민전선 구성을 가리킨다)에 기록된 수보다 3배에 달하는 것을 본 이후 그러한 논제(프롤레타리아트의 쇠퇴)를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1969년 가을 이탈리아에서(역주 : ‘68혁명의 열기가 그 다음해 이탈리아에 전달된 것을 가리킨다) 1920년 11월의 유명한 파업 물결보다 8배나 달하는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한 것을 본 이후에는? 1976년 첫 6개월동안 스페인에서(역주 :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한 이후 스페인의 노동자들이 펼친 파업을 가리킨다) 1936년 혁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역주 : 1936년 스페인 사회당과 공화주의자들이 총선거에 승리하고 집권한 후 노동자들이 사회 혁명을 위해 파업 등 여러 투쟁에 나섰던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봉기를 두려워 한 가톨릭 교회와 군부, 왕당파 등 보수 세력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프랑코 장군을 지도자로 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결과가 4년에 걸친 참혹한 ‘스페인 내전’이다)보다 3배 이상의 파업 참가자들이 나타난 것을 본 다음에는? 게다가 이는 영국, 일본, 보다 작은 유럽국가들(역주 :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3국을 가리키는 말인 듯), 포르투갈 등 지난 ’60년대에 2차대전 이전의 가장 높은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나타난 곳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느 곳이든 모든 전선들에서 후퇴” 했는가? 1939~1940년 간 존속했던 잔여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는 모두가 전체주의 체제에 의해 교체되었는가? 다시 말하지만, 명백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1939년 논제의 용어를 여전히 고집하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반복주의나 “수령”(the master)에 대한 과장된 존경 때문이 아니다. 우리들은 지난 40년간 발생한 있는 그대로의 대차대조표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참으로, 세속적인 추세에 대한 문제는 트로츠키가 1939년 논문에서 제기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그 시간 스케일은 명백히 틀렸다. 그리고 이 때문에, 왜 역사에 의해 그 문제가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는지를 엄밀히 설명해 주는 “중간” 변수는 사라졌다. 2차 대전 동안과 그 직후 세계 혁명의 봉기가 있었다. 노동계급 투쟁의 더욱 심화된 침체가 아닌 고조가 있었다. 그러나 혁명의 패배 이후 20여년 간에 걸쳐 노동계급의 평균 의식에 관한 영향들 때문에, 이러한 봉기는 단지 국지적이었고 그런 까닭에 주로 전통적인 노동 관료제 또는 그들로부터 기원한 정치세력(영국 노동당,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공산당, 티토주의, 모택동주의 등등)에 연관될 수 있었다.


몇몇 반(半) 식민지 국가들에서 이는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가로막지 못했다. 심지어 시작에서부터 관료적으로 왜곡(유고슬라비아, 중국, 베트남 등)되었을지라도 그러했다. 반면에 부르주아지(bourgeoisie)들이 훨씬 더 강력하고 그러므로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더 높은 단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과 지도력이 필요한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 사회 내부에서 새롭고 중요한 개혁을 얻지 못하고 부르주아지가 독재의 개막에 호소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경우 대중 투쟁의 반자본주의적인 잠재력의 거세가 유도된다.


여기에서 상세히 논할 수 없는 이유들에 의해(역주 : 만델이 2차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지속되었던 경제 호황을 설명한 ‘장기파동’(long wave) 이론에 의해 제시되는 이유들인 듯 싶다),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가속화된 경제 성장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성장을 유도했다. 이것은 차례로 서방에서 새로운 혁명 잠재력의 기초를 놓았는데, 1968년 5월의 폭발은 그것의 최초의 표현이었다. 다시 말해, “모든 전선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후퇴”가 아니라 봉기가 있었는데, 자본주의를 타도하기에는 불충분했지만 “사회가 전체주의적 관료제로 퇴보”하는 미끄럼을 타는 것을 막는데는 충분했다. 그러나 전후 자본주의의 “팽창의 장기파동” 이후, 1960년대 후반의 전환은 트로츠키의 용어들을 다시 바꾸어 말한 뿌리깊고 장기적인 위기의 새 시대가 냉혹하게 개막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의 관련 속에서 단지 역사적인 전망의 첫 스케치인 트로츠키의 1939년 논문을 더해보자. 더욱 체계적인 문서 - 그의 진정한 정치적 유서인 - 제4인터내셔널 비상총회 선언문(1940년 5월)에서, 트로츠키는 훨씬 더 현실적인 방법으로 시간 스케일의 문제를 제시했다.


제국주의에 복무하는 두 개의 인터내셔널이 있고, 진정한 혁명 인자들이 매우 작은 소수파를 구성하는 동안, 이 시대에 혁명은 또 다시 배반당할 것인가? ... 이러한 질문에 올바르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정확하게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이러저러한 봉기는 혁명 지도력의 미성숙에 의해 아마도 그리고 확실하게 패배로 끝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단일한 봉기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전체적으로 혁명적인 사건에 대한 문제다.


수십년이 아니라면, 전쟁, 봉기, 짧은 휴전의 막간, 새로운 전쟁들, 새로운 봉기들[이 이어지는]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젊은 혁명적인 정당은 이러한 전망에 기반해야만 한다. 역사는 그 자신을 검증하기 위해, 경험을 축적하기 위해, 성숙하기 위해 충분한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제4인터내셔널 문서들』(Documents of the Fourth International), pp.345-346)


그러한 견지에서 스위지가 트로츠키의 논제에 대해 반대한 전후의 시간 스케일은 트로츠키가 더욱 체계적이고 덜 선동적인 문제의 형성에서 파악한 바로 그 시간 스케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소련 관료제의 계급 본성과 함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일어나야만 하는지 질문할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동시대 혁명적인 맑스주의인 “트로츠키주의” 등의 역사적 진수에 있어야 한다. 트로츠키주의가 지지하는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은 기회 그 자체가 나타나는 어느 곳에서든 권력을 잡아야 한다. 제국주의의 시대에 기회는 더욱 발전한 나라들에서 혁명이 발생하기 이전에 덜 발전한 나라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권력을 잡는 것(그리고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억제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회주의의 건설에 불충분한 오직 하나의 필요 조건일 뿐이다. 이러한 과정(사회주의로의 이행 과정)은 오직 국제적인 규모에서만 성공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 (물론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자본가로부터 권력을 탈취한 곳 어디서든지 시작될 수 있다)


소련 관료제의 승리인 스탈린주의는 세계 혁명의 부분적인 패배의 결과물이다. 세계 혁명은 선진국으로 파급되지 못했다. 그러나 소련은 자본주의가 복원될 수 있었던 시점에서 패배하지도 않았다.(제국주의자들은 1918~1921년의 내전 간섭과 1941~1944년 독소전쟁을 통해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1948~1951년 사이에도 덜 직접적이었지만 다시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원을 시도했다.) 소련의 최후 운명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국제적인 투쟁의 결과에 종속될 것이다. 만약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정적으로 패배한다면, 소련의 관료는 지배 계급이 될 것이다(새로운 지배 계급이냐 자본주의 지배계급이냐는 다른 질문이다). 반면에, 만약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거나 동유럽에서 정치혁명이 성공한다면, 관료들이 지배계급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전에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관료들의 통치를 패배시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또는 동유럽에서 정치혁명이 성공한다면”을 강조한다. 스위지의 다른 논증 - 스탈린주의 국가들의 노동계급은 비록 마지못해서이긴 하지만 체제를 용납한다 - 은 그가 전부 언급하지 않은 극적인 사건들 - 1953년 동독에서의 노동자 봉기,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 그리고 폴란드 노동자의 반복적인 대중 봉기 - 과 모순된다. 실로 트로츠키와 제4인터내셔널에 의해 약 45년 전에 제출된 정치혁명이라는 “추상적인” 생각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들에 의해 진정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제공하고 있지 아니한가?




소련의 관료제가 새로운 지배 계급이라는 가정은 지난 50년 간 소련 사회와 경제의 실제 발전과 모순에 대한 진지한 분석에 부합하지 않는다.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그러한 가정은 그 나라에서 새로운 착취적인 생산 양식이 출현했음을 함축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상 최초로 그들의 일반적인 행위와 (물론 그러한 행위를 지령하는) 사적 이익이 존재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의 내적 논리와 필요에 상반되어 움직이는 “지배계급”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소련 경제의 가장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계획의 수요를 조정하는 것과 (“절대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경제 성장을 관료제의 물질적인 자기 이익에 최고도로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관료제 하에서 소련에 도입된 모든 연속적인 경제개혁들은 - 스탈린에 의해 재도입된 기업에 기반한 비용 산정(khozrazhot)에서부터 흐루시초프의 소브나르코즈(sovnarkhoz) 실험, 전체적인 경제 행위의 지시자로서 이윤의 활용을 계획한 리베르만(Liberman) 방식, 코시긴이 한 그러한 행위를 측정하는 “혼합 지시자”(mixed indicators)의 도입 - 그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성공을 지속하지는 못했다. 시스템의 논리에 상반되게 행동하는 관료제의 기생적인 본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명백한 역설(paradox)을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회적 계획은 오직 연합된 생산자들에 의한 경영 하에서 공장을 공장과, 마을을 마을과, 지부를 지부와, 지역을 지역과 경쟁시켜 분리되고 동떨어진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닌 “사회적 배당금”(social dividend)으로 물질적인 이득을 얻도록 할 때만이 순조롭게 기능할 수 있음을 덧붙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정확하게 (역주 : 소련 등 구 사회주의권의) 관료제 - 그러한 특수한 이득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 가 새로운 지배계급이거나 판매와 재생산의 새로운 생산 양식을 움직이지 않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사회내의 암(cancer)임을 함축한다. 관료제 경영은 오직 낭비만을 증가시키는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화된 자산에 기반한 계획 경제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것 또한 가로막는다. 그리고 이러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 자체로 지배계급으로서의 관료제의 특성 및 절대로 구체적으로 기술될 수 없는 “운동 법칙”을 가진 새로운 “착취적인 생산 양식”(exploitative mode of production)으로서의 소련과 양립 불가능하다.


두 번째 국면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역사상 최초로 사회 경제 시스템 그 자체의 운영을 통해 자기 자신을 영속시키는 능력이 없는 지배계급에 직면하게 된다. 관료들에게는 그들 자신이 관료로 계속 남을 수 있다는 어떠한 보장도 없다. 심지어 관료의 자식들이 계속 관료로 남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우리는 소련의 수직적인 사회 유동성 - 스탈린 치하에서 주요한 사회 안전밸브들 중 하나 - 이 지난 수십년동안 중대하게 감소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장로정치”(gerontocracy)는 소련 사회 전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관료들의 “종신재직권(tenure)의 안정성”은 의심할 바 없이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오직 사회적 긴장을 늘리는 것을 유도할 뿐이며(예를 들면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자 하는 압력과 같은), 권좌와 특권의 영속을 보장하지 못하는 관료들의 무력함이라는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더욱이 이러한 지위들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기능들과 결합되어 지속되고 정치적 결정들(예를 들어 저명한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와 같은)에 의존할 뿐 사회적 생산의 특수한 역할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속성을 추구하는 관료제의 압력은 특정한 공장이나 기업이나 트러스트(trust)들과 연관되어 있다.(예를 들어 법적인 의미에서 사적 재산권을 복원하기 전에 경제적인 의미에서 사적 재산권을 복원하려는 것과 같은) 이 사실에서 공장이나 지부 수준에서 양적으로 더 높은 자율성을 얻기 위한 관료제의 넓은 층위에서의 일치된 압력이 유래한다. (예를 들어 중앙 계획의 철의 구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이로부터 뇌물(bribe), 독직(corruption), “회색” 과 검은 시장 운영(암시장 거래), 외환 및 금의 축적 등을 통해 사적 자본을 축적하려는 관료들의 성향이 유래한다. 또한 서방 은행들에 계좌를 개설하는 것을 포함하여(특히 “인민 민주주의 국가”에서 두드러진다) 서방의 맞수들과의 “공존”이 증대하는 추세가 유래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새로운 지배계급” -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적 재산에 기반한 훌륭한 자본주의 지배계급인 - 의 출현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과정이 결실을 맺을 수 있기 전에 두 개의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 극복되어야만 한다. 하나는 노동계급의 저항인데, 이는 현재의 구조(사실, 아마도 평가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것) - 안정된 일자리의 보장, 일할 수 있는 권리의 보장, 완전 고용의 보장, 그리고 이로부터 유도되는 서방보다 훨씬 덜 바쁜 노동 강도 등 -를 제일로 평가하기에 그러한 (자본주의로의) 복원 과정에서 감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른 하나는 국가 기구의 핵심 부문의 저항(티토가 유고슬라비아의 “억만장자”들을 1970년대 초반 자본주의로의 “복원”이라는 위험이 현실화 될 때 탄압했던 방식을 보라)이다. 따라서 새로운 지배계급이 존재하고 통치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나라들에서 생기는 진정한 사회 투쟁을 잘못 읽는 것이다. 이는 그 결과가 여전히 열려 있는 투쟁을 과거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가정한다.


세 번째 국면에서 우리는 또한 역사상 최초로 그것에 대한 “타도”가 기본적인 경제 구조를 손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는 “생산양식”의 대표자인 “지배계급”과 직면하게 된다. 잘 알려진 『자본』제3권의 일절에서 맑스는 각각의 생산양식은 사회적 잉여 생산물을 전유하는 특수한 형태에 의해 특징지워진다고 서술했다. 이제 소련에서 사회적 잉여 생산물은 이중적인 형태로 전유된다. 하나는 사용 가치의 형태인데, 이는 그것(사회적 잉여 생산물)의 주요 부문이 부가된 장비와 원자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상품의 형태인데, 이는 그것의 보조 부문이 특권적인 수입을 얻는 관료들이 구입하는 사치품(과 특별 서비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료 독재의 타도 이후에 소련 노동자들이 생산 수단을 상품으로 확실하게 전환(이는 자본주의의 복원을 의미한다!)시키지 않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이중적인 사회적 잉여 생산물의 전유가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상품의 양상으로서의 소비재의 본성을 급격하게 억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소련에서의 새로운 혁명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허용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대한 억제나 중앙 계획, 대외 무역의 국가 독점 등 또한 그러한 혁명(우리가 정치 혁명이라 부르기를 좋아하는)을 통해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러한 모든 변수들을 취합한다면, 경제구조가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계속 유지된다는 점을 명확하게 얻게 될 것이다.


진실로, 시스템 운영 방식에서 급격한 변화가 존재할 것이다. 생산자 대중들은 무엇이 생산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산되었는지에 관한 결정권을 얻을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은 급격히 감소할 것이다. 관료제의 경영 실패로 인해 초래되는 거대한 자원과 재화의 낭비는 중단될 것이다. 노동 조직과 그것의 위계적인 구조는 급격히 분해 수리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 스케치 된 구조 그 자체들 - 사회적 잉여 생산물 전유의 특수한 형태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채로 유지될 것이다.


네 번째 국면에서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서의 관료제의 존재라는 가설은 역사상 최초로 실제로 통치하기 전에는 계급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지배계급”과 직면하게 된다는 결론을 유도한다. 관료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스위지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새로운 착취 계급은 혁명 그 자체가 창조한 조건들로부터 발달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로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이다. 위계적인 계급들은 생산 과정으로부터 나온 특수한 관계(“생산 관계”(relations of production))와 연계된 인간 존재의 집단들이다. 사회적인 변환은 그것들(생산관계)을 변환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변환은 무에서부터(ex nihilo) 생산관계를 창조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소련에서의 “새로운 착취 계급”이라는 일치된 이론은 노동계급(노동관료나 노동귀족)과 인텔리겐차(프티 부르주아와 더 높은 상태의 기능인들)가 그들이 “권력을 잡기”전에, 예를 들어 “혁명” 전에 잠재적으로 새로운 지배 계급이었다고 가정할 때만이 명확해진다. [1] 그러나 전 세계를 통틀어 동시대 계급투쟁의 모든 국면을 실질적으로 포함하며 맑스주의 이론의 모든 구성 요소들을 수정하는, 가공할만한 결과가 그러한 가정으로부터 제기된다. 그러한 가정없이는, “역사적 과정으로부터” 떠오른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모순된다. 결국 관료가 권력을 잡는데,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사회 계층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가?




소련의 관료제(서방의 노동조합 관료제와 같은)가 노동계급과의 탯줄을 끊지 않았고, 그들의 특수한 이익과 정치적인 결정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특별한 기생관계라는 구조 속에서 보여질 수 있다는 생각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계급투쟁이 자본 대 노동이라는 양극 대결 과정으로 지속된다는 결론을 유도한다. (전반적으로 “자본의 노동 부관(副官)”에 의해 운영되는 관료제와 함께)


소련의 관료제가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생각과 집권하고 있지 않은 공산당들이 - 최소한 그들의 중앙 기구들이 연관되는 한 - 잠재적인 새로운 착취 계급의 핵심으로 보여질 수 있다는 회피할 수 없는 결론은 전체적인 20세기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함축한다. 이제 계급투쟁은 3극 대결이 된다. “자본 대 노동 대 잠재적인 새로운 착취 계급”이라는.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분석을 수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 우리가 가진 증거에 연관되는 한, 그 자체로 이미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불가능한 임무인) 그것은 거대하고 중대한 규모의 정치적 함축을 가진다. 그렇게 되면 두 가지 악 사이에서의 선택만을 남겨두게 되는데, 그 두 가지 악들은 모두가 “새로운 착취계급”이라는 이론에 대한 일치된 옹호들을 해방을 향한 국제 노동계급의 투쟁과 정면으로 대항하게끔 만드는 결론들을 유도한다. 또한 새로운 “착취계급”을 우겨대며 말하는 것을 바라보는 오직 두 가지 가능한 방법들만이 존재한다. 두 가지 다, 전반적으로 그리고 필수적으로, 예를 들어, 부르주아지 혁명 이전과 도중에 부르주아지가 반-봉건적인 귀족정체(aristocracy)를 대했던 것과 같은 관계를 부르주아지를 상대로 가지며 자본가 계급과 비교하여 진보적이다. 그러한 가설은 물론 그것의 착취적인 속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완벽히 부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부르주아지와 “잠재적인 새로운 계급” 사이의 모든 직접적인 투쟁에서, 누구든지 『공산당선언』이 그렸던 혁명적인 부르주아지와 같은 “새로운 계급”에 대해 “비판적 지지”와 똑같은 종류의 행위를 할 수밖에 없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면 누구든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노동계급의 반 관료 투쟁을 반동적인 부르주아지에 대한 “진보적인” 관료제의 승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한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 쟁취라는 생각은 최소한 미심쩍게 된다. 당연하다 :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와 비교하여 진보적인, 사회주의나 또는 새로운 계급 시스템의 확립을 유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승리한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관료혁명”으로 다시 기술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줄잡아 말해도 맑스와 맑스주의자들이 한결같이 제기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직접적인 이행이라는 생각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유토피아적인 개념상의 오류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새로운 지배계급”이 자본주의와 비교해서 진보적이라면, 맑스가 생각했던 것과는 상반되게, 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그것의 진보적인 잠재력을 소진하지 않은 계급사회와 계급 사회의 철폐 없이도 새롭고 중대한 생산력의 발달 - 결국은 “사회적 개인”(social individual)의 폭 넓은 발전[예를 들어 인간의 자유와 같은]을 유도하는 것 - 이 여전히 가능함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단지 도덕적인 선택일 뿐 야만주의와 인간 문명의 몰락을 막기 위한 역사적인 필연은 아니게 될 것이다.


따라서, 관료제를 새로운 착취자, 흡혈귀, 노동계급과 인간 자유의 치명적인 적들 등으로 매도하는 것 -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자기 선언적인 맑스주의자의 소련 관료제에 대한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비난은 99% 이상의 실제 동기가 냉정한 과학적인 분석보다 이해할 수 있는 도덕적인 분개에서 유래했다 - 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의 모든 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변명자가 되지 않는다면, 역사적으로 그러한 관료제를 정당화하는 것에 의해 역설적으로 논의를 종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전적인 맑스주의의 개념 구조에서, 계급들 - 지배 계급을 포함한 - 은 최소한 그들이 존재했던 바로 그 시간 동안 역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사회 조직의 필수 기구들이다. 만약 소련 관료제가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면,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비교해서 진보적이라면, 소련 사회에서 최소한 일시적으로나마 필수적이고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결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긴 우회 이후에, 누구든 그가 시작한 곳에서 끝나게 된다. 맞다. 굴라그(Gulag, 구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는 좋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노동 코드는 불쾌하다, 그러나 거기에 다른 선택이 있는가? 아무튼, 러시아는 산업화되고 현대화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누구든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다. 누구든 야만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퇴보를 극복할 수 있었단 말이다. 어제 “우리”는 “야만적인 수단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을 불렀다. 오늘 “우리”는 “야만적인 수단에 의한” 자본주의의 진보에서 새로운 계급 사회 건설을 불렀다. 그러나 오늘도 어제와 같이 “우리”는 “객관적으로” 관료제 - 그 모든 전제적인 범죄들에도 불구하고 - 가 “역사적인 필연”이라고 인정해야만 한다. 기타 등등 싫증이 나도록 지겨운 결론들.


그러한 함정은 맑스주의자(예를 들어 트로츠키주의자)의 소련 역사와 관료제의 역할에 대한 해석에 의해 쉽게 회피된다. 러시아, 중국과 같은 나라들의 발전에 진보적인 모든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산물이다. 반동적인 모든 것은 관료제 통치의 산물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을 제외한 어떠한 논리적 연관 관계도 없다. 이는 관료제가 계급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본체에 기생하는 암임을 함축한다. 소련 사회는 새로운 전제적인 생산 양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의 이행기에 있는 사회로서 사회주의로의 길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타도해야만 하는 관료제의 독재에 의해 진보적인 발전이 멈춰졌다.(수렁에 빠져 꼼짝 못하고, 동결되었다)


그러나 만약 새로운 착취계급으로서의 관료제를 부르주아지와 비교하여 진보적인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심각한 결론을 유도한다면, 관료제를 자본가에 비교하여 반동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10배는 더 나쁜 함축을 가진다. “새로운 계급” 또는 잠재적으로 “새로운 계급”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에 직면했을 때 누구든지 전자에 대항하여 후자를 비판적으로 지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부르주아지 사회가 - 최소한 예견할 수 있는 미래에 -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관료적인” 혁명을 유도해왔고 유도한다면, 만약 여러 나라들이 (몹시 관료화된)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새로운 전제적인 계급사회로 자본주의를 대체했다면, 명백하게 맑스와 고전 적인 맑스주의자들의 역사적인 예상과 전망은 기본적으로 틀렸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부르주아지 사회 그 자체와, 부르주아지 사회 내적 모순의 본성과 특히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본성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분석은 기본적으로 틀렸음이 명백해진다.


맑스의 사회주의 개념 - 1920년대 후반까지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공유한 - 은 노동계급의 특수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심리적인 특성들로부터 발달한 연합된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사회(a free society of associated producers)인데,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에서 스케치되었고 그 주제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후속 저작들에서 더욱 정제되었다.


만약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 또는, 대신에, 보다 - 새로운 계급 사회를 유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노동계급이 보편적인 인간 해방의 과정을 유도하는 대신에 그러한 새로운 “착취 지배계급”을 배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현대 노동계급이 혁명적이고 해방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분석은 출발에서부터 완벽하게 잘못되었는가? 적지 않은 이론가들이 그러한 방향으로 멀리 떠나버렸는데, 바란(Baran)과 스위지(Sweezy)의『독점자본』(Monopoly Capital) 맨 마지막 장은 그러한 길을 따르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근래에, 동독의 재야(在野) 공산주의자 루돌프 바흐로(Rudolf Bahro)는 다른 점에서 인상적인 그의 책 『대안』(The Alternative) -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The Revolution Betrayed) 이래 스탈린주의 관료제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로부터 나온 가장 철저한 맑스주의자의 비판 -을 한층 더 노골적인 말과 이러한 부류의 종합적인 판단으로 더럽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연스럽게 오직 부르주아지의 삶의 방식, 최소한 그에 더 가까운 프티 부르주아지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투쟁한다.” 누구든 예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물론 이러한 판단에 열광적인 동의를 표시했다.


그렇게 노동계급 - 소련의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서방의 노동계급도 - 에 대한 고전적인 맑스주의 분석을 기각하는 것이 사회주의와 무계급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함축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더 길게 말을 늘어놓지 말자.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체하는 “혁명 주체”의 대용품 - 제3세계 농민들, 혁명적인 학생들, 인텔리겐치아, 또는 심지어 주변화 된 빈민들 - 을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은 맑스가 사회주의 운동을 위해 성취한 가장 주된 진보가 무엇인지 고려하는 데 실패했다. 사회의 본성을 창조하는 것은 최소한 사회적 본성, 경제력, 사회-경제적 잠재력, 그리고 “혁명적 주체”의 물질적인 이익과 관련되며, 도덕적인 분개나 인간 집단의 현존 질서에 대한 개인적인 반항의 정도와 연관되지 않는다. 어떻게 위에서 언급했던 사회 계급들이 현대 노동계급보다 더 높은 정도로 진정한 무계급 사회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사회적 조건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 아무도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바흐로(Bahro)가 그의 분석과 기술로부터 올바로 면제한, 초기 단계의 배고픈 반란은 고려하지 않고)의 150년간에 걸친 계급투쟁이 “자연스럽게 오직 부르주아지의 삶의 방식 또는 프티 부르주아지의 삶의 방식- 을 받아들이기 위한 경향”의 공식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 진실인가?


눈이 휘둥그래지는 상상력의 용량, 혁신의 날짜 세기, 불평등한 영웅주의의 장들과 나란히 서있는 단조로운 “순응주의”의 장들에서 그렇게 공인되지 않는 일반화를 만드는 풍부하고, 다양하고, 정열적인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에 어찌 눈이 멀지 않겠는가! 파리코뮨의 노동자들, 1917~21년 러시아의 혁명적인 노동자들, 1918~23년 독일, 1936~37년 스페인, 1941~45년 유고슬라비아, 1956년 10월~11월 헝가리, 1959~65년 쿠바, 1968년 5월 프랑스, 1968~69년 프라하, 1969년 가을 이탈리아, 1975년 포르투갈, 1979년 이란, 이들이 단지 “자연스럽게 부르주아지의 생활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는가? 그리고 또다시. 1975~76년 스페인 - 역사상 최초로 우리는 변하지 않은 파시스트 억압 기구의 면전에서 전형적인 “부르주아지 생활 스타일의 욕구”를 위한 몇몇 정치적이고 지역적인 파업이 정치범의 옹호와 석방을 이끌어냈음을 목격했다 - 의 노동자들은 바흐로의 훈계에 따라 행동했는가? 이러한 사건들은 손쉽게 생각나는 사례들이다. 누구든지 이 리스트에 다른 수많은 사건들을 - 예를 들면 미국 노동계급의 역사로부터 상당수 - 추가할 수 있다.


지난 세기 이래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한 실제 장면에 직면하여, 압도적인 역사적 증거에 직면하여, 제기되는 문제 “왜 서방에는 승리한 사회주의 혁명이 없었는가?”는 역사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다시 구성되어야만 한다. “사회주의의 길에 따라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주기적인 자연스러운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승리의 가능성을 명백히 확인하는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왜 그곳에서는 아직도 승리가 없는가?” 그러면 답변은 주체적인 요소의 역할, 혁명적인 지도력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 고르지 않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의 발전, 사회민주주의의자에 의해 처음으로 행해진 고의적인 제동(1918~1919년 독일), 스탈린주의 정당에 의해 그 다음에 행해진 제동(1936~37년 스페인) 등 거사의 어려움이라는 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세계 사회주의를 위한 주체와 객체의 전제조건들의 진정한 역사적 변증법은 객관적이고 유물론적으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회에 의한 의식적인 거사만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 현대 프롤레타리아트 이외에 부르주아지 사회에서 이러한 종류의 힘을 가진 자는 없다.


맑스주의자는 종교 신도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잠재력에 관한 우리의 신념은 비합리적인 신앙이나 스콜라주의적인 삼단논법이 아니라 과학적 분석과 역사적 기록에 대한 주의 깊은 고찰에 근거한다. 단지 조롱이 아니라 만약 압도적인 역사의 증거가 맑스의 가정들이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음을 보여준다면, de omnibus dubitandum(모든 것은 의심해 보아야 한다)를 가장 좋아하는 모토로 삼았던 맑스의 진실된 정신에 따라 누구든 진실을 기술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태까지 역사에 의해 제시된 증거만으로는 어떠한 성급한 일반화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오늘날 뿌리 깊고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위기에 있는 것은 맑스주의가 아니라 서방의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독재다. 만약 간단한 합리화를 다시 시도하는 것이나 역사 진행 과정의 상대적인 지체, 잘못된 정치지도자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 피로와 사기 저하에 대한 실망 등을 회피하기를 원한다면, 균형 감각을 지키면서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반세기가 아니라 앞으로 수십년동안 어떻게 싸울 것인지를 기다리고 지켜보자. 그리고 때 이른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거나 야만주의가 비상하기 전에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주의의 승리로 끝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수동적으로만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우리는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그러나 철저히, 되돌아 왔다. 그렇다. 소련 관료제가 새로운 지배계급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세계 혁명의 미래와 인간성의 미래에 대한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 문제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사회주의 잠재력 정도, 사회주의의 가능성, 과학적 사회주의와 같은 문제들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맑스의 분석과 “맑스주의 체계”의 핵심에 있다. 그리고 맑스주의 체계가 이전에 그랬던 것과 달리 더 이상 굳건하게 근거하지 않는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각주들


[1] 관료제의 권력 장악은 간단히 “혁명 그 자체에 의해 창조된 조건들로부터 발전되지” 않았다. 이는 소련에서 1920년대에 발생했던 구체적인 정치 투쟁에 근거하기를 회피하는 진술이다! 관료제는 정치적인 반혁명의 승리(프랑스 혁명 동안 선행했던 테르미도르 반동(the Thermidor Reaction)과 같은 고전적인 “혁명 내부의 반혁명”)로부터 발전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스위지는 일찍이 1923년 - 아마도 2년은 족히 때가 늦었던 - 부터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노동계급의 정치적 권리 증진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던 좌익반대파(the Left Opposition)를 언급하지 않는 심각한 불공평을 저질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