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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지지 선언' 권용목의 굴절된 삶

'정몽준 지지 선언' 권용목의 굴절된 삶
[심층추적] 노동운동가가 재벌지지자로 변모하기까지
텍스트만보기   박수원(pswcomm) 기자   
1987년

▲ 29세의 청년 권용목은 한국노동운동의 살아있는 신화였다.
현대엔진에는 80년대 초반부터 고적답사반이라는 소모임이 있었다. 조립공장을 중심으로 대여섯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울산에서 가까운 경주 등 인근의 고적들을 답사하면서 노동의 찌든 때를 벗기고 단합을 도모하는 일종의 취미서클이었다. 그 고적답사반의 중심에는 권용목이 있었다.

87년 7월 5일 회사의 감시를 피해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울산 옥교동에 있는 한 디스코텍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100여명의 노동자들이 디스코텍에 모이자 홀 중앙에 '경축 현대엔진(주) 노동조합 결성대회'라는 글씨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대엔진 노조위원장에는 만29세의 청년 권용목씨가 선출됐다.

노조 결성대회를 무사히 마친 권용목씨는 점심시간이 되자 연단에 올라가 노동자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서 보고대회를 진행했다. 키165cm, 몸무게 57kg의 왜소한 체구의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권용목의 입에서는 장쾌한 열변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된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상여금 차등제가 없어지고 공해수당을 받게 된다는 기대를 가져도 좋습니다.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한국노동운동의 전환점으로 기록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현대엔진노조를 시작으로 현대미포 조선소에 노조가 생기고, 이어서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정공에 노동조합이 잇달아 결성됐다. 그리고 마침내 8월 8일 현대그룹노조 협의회가 결성됐다.

87년 8월 18일 4만여명이 넘는 현대노동자들이 중공업 운동장에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어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인정', '임금인상 즉각실시', '휴업철회'를 요구하며 남목 고개 마루를 넘어 공설운동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 앞에는 4500명의 중무장한 경찰들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날 폭력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손에 든 각목과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돌멩이를 노조대표들에게 반납했다. 그 노동자들을 지도한 사람은 바로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권용목 의장이었다. 그리고 정부에 노조인정을 약속 받게 된다. 현대그룹 노동운동의 살아있는 신화 권용목. 그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몸으로 쓴 장본인이었다.

노동자들의 열기도 뜨거웠지만 현대그룹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89년 1월 현대중공업 노조의 장기파업 128일을 넘기고 있었다. 1월 8일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현대중전기 노조대의원 대회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새벽 2시 30분쯤 복면을 쓴 사람들이 나타나 각목, 야구방망이, 곡괭이 자루 등으로 대의원들을 무차별 폭행했다. 그리고 새벽 5시쯤에는 권용목씨 등 4명이 잠을 자고 있는 현대 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 사무실에 야구방망이와 각목을 든 20여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누가 권용목이냐'고 물어가며 구타했다.

당시 현대그룹노조협의회는 "이 사건은 현대그룹의 조직적 음모에 의한 테러"라며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회장의 연루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당시 보수당인 신민주공화당조차 "경영주가 정당한 노동운동을 탄압한 표본적 사례"라며 "이 사건의 배후를 비롯, 전모를 철저히 파헤쳐 관련자를 형사처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정몽준 회장은 사건이 발생하기 이틀 전인 1월 6일 항공편으로 울산에 내려와 중역비상대책회의를 열고 조업정상화를 촉구하는 등 3박4일간 울산에 머무르다 1월 9일 서울로 올라간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테러사건에는 정몽준 회장이 지원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조기축구회 전·현직 간부들가 연루돼 있음이 확인됐다. 깡패들에게 구타를 당한 권용목 의장은 당시 팔에 깁스를 하고 집회에 참석해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회장은 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2000년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권용목씨가 3년 만에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다.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물러난 직후인 97년 그는 환기통 청소업을 했지만 IMF 여파로 망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몇 개월을 떠돌다가 다시 사업을 한다고 캄보디아에 나가 있다가 그 사업도 여의치 않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게 1999년 9월 무렵이었다.

당시 국민회의는 신당 창당 준비와 함께 2000년 4.13 총선을 대비해 각계각층의 인사들 영입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여권의 신당 추진위원으로 영입됐다. 지금 민주당 노무현 후보 비서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계륜 의원이 그를 신당으로 끌고 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새천년민주당은 '동진 정책'의 일환으로 권용목씨를 울산 중구 조직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생각과 권용목씨의 '희망사항'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민주당은 울산 동구 출마를 권유했지만 권씨의 생각은 달랐다. 권용목씨는 결국 지구당 창당대회를 연기하고 조직책을 반납했다. 그는 출마를 꺼리는 이유에 대해 “민주노동당 후보가 지역구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울산인데 내가 출마하면 과거 노동계 동지들과 경쟁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권용목씨는 민주노총이 만든 민주노동당에 가지 않고 신당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엄청나게 세상이 변하고 있다. 지금 한 명 당선시키고, 8년 뒤에 10명 당선시켜서 뭘 할 수 있겠냐. 민주당 김말룡 의원을 보면 노동자를 위해서 헌신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구조가 그랬기 때문이다. 집권여당에 들어가서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권용목씨는 민주당이 전국구를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녹치 않았다. 민주당 비례대표 몫으로 노동계의 자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에게 자리가 돌아가는 정도였다.

비례대표를 약속 받았다고 생각하고 민주당에 입당한 배석범 민주노총 전 부위원장과 권용목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은 결국 비례대표를 배정 받지 못했다.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을 것"이라는 노동계의 비아냥거림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비례대표가 좌절된 이후 권용목씨는 또 떠도는 신세가 됐다.

2002년

▲ 국민통합21 노동특위 발대식에 참석한 권용목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모습을 감췄던 권용목씨는 2002년 2월 3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 나타났다. 민주당에서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였던 이인제 후보는 이날 386출신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 지역·노동 운동 인사, 청년·경제인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시대개혁연대' 창립총회를 진행했다.

권용목씨는 새시대개혁연대 대표로 행사에 참석했다. 권용목씨는 인사말을 통해 "우리의 지도자 이인제 고문님과 함께 모든 것을 내바쳐 함께 할 것"이라며 "이제는 길거리의 투쟁이 아니라 내가 서있는 분야에서 참여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2002년 11월 12일 국민통합21 노동특위 발대식장에 그는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행사장에는 이런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국민가치 실현을 위한 새로운 노동문화, 국민통합21 노동특위가 열어갑니다."

권용목씨는 이 자리에서 만난 <오마이뉴스>기자에게 "2년간 러시아에 있었다"며 "1700ha 땅에 약용식물을 재배하려고 한다"고 자신의 근황을 밝혔다. 권용목씨는 국민통합21 노동특위의 정책위원을 맡았다. 그는 단상 위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한 시대을 접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옛날에 '자본론'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100여 년 전에 씌여진 책이었음에도 책 속에 묘사된 방직공 노동자의 모습은 당시와 다를 바 없었다. 산업시대의 요구는 값싼 제품을 많이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지식기반사회로 변했다. 생산력의 확대는 새로운 가치를 요구하고 있다. 좋은 물건, 편리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대립과 갈등으로 만들 수는 없다. 자발적 참여와 창조적 생각이 있어야 한다. 또한 동북아 경제변화에도 대처해야 한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모습을 보라. 우리도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남북으로 동서로 노사로 대립하고 있다. 통합은 시대적 소명이다. 그것을 누가 해줄 수 있나? 바로 그 얘기를 하려고 한다. 남북과 동서, 노사의 막힌 곳을 뚫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번 대선은 향후 5년을 좌우한다. 국민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 정몽준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자."

▲ 권용목씨는 과거 자신과 '적'이었던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지지자'가 됐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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