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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21
    현자 비정규 현장위원 인터뷰
    바람돌이
  2. 2006/08/08
    <매노> 포항건설 르뽀
    바람돌이

현자 비정규 현장위원 인터뷰

『인터뷰』
파업투쟁의 중심에 서있는 현장위원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현장위원


현대차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을 유심히 지켜보면, 전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파업지침이 일괄적으로 내려질 때도 있지만, 각 사업부별로 다른 것과 파업현장에서 일군의 무리들이 수시로 이야기를 하다가 조합원들 사이로 흩어지는 모습이다.

변화된 모습의 중심에는 현장위원이 있다. 비정규직노조는 올해 들어 기존의 소위원을 현장위원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이들의 주체적 활동에 주목해왔다. 이들은 조합원들과 수시로 대화하면서 그를 바탕으로 각 사업부에 맞는 전술을 논의하며, 비정규직노조의 결정사항을 조합원에게 전달하고 토론하고 있다. 이들의 주체적 활동이 강화되면서 비정규직노조 임원들과 각 사업부 대표들이 ‘현장위원의 등쌀에 못살겠다’는 행복한 투정(?)을 부리고 있는 모습이 종종 발견된다.

1, 2, 3, 시트 사업부의 현장위원을 만나 그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현장위원들은 현장에서 수시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있다.



“차근차근 밟아가서 현장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1공장 사업부 현장위원 최상아

최상아 1공장 현장위원은 비정규직노조 결성초기부터 결합해 활동을 해오고 있다. 첫눈에도 보기 좋은 인상을 가진 그는 수줍은지 짤막하게 이야기해 인터뷰가 쉽지 않았지만, 짧은 말속에 조합원에 대한 믿음이 묻어나왔다.

가입 초기부터 활동했으면 사측의 탄압과 회유에 힘들었겠다는 말에 그는 “세상을 바꾸려면 협박정도는 넘어서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짧게 이야기한다. 그는 “노조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어 가입당시부터 소위원을 했다”고 한다.

올해 투쟁의 특징에 대해 물어보자 비교적 길게 대답을 한다. 그는 “작년의 경우 불법파견의 문제로 투쟁을 일정중심으로 진행한 반면, 올해는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간담회를 비롯해 조합원과 수많은 대화를 통해 단체교섭의 중요성을 알려냈다. 작년 투쟁으로 서른명이 넘는 조합원이 징계를 당하면서 나서면 다친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지노위에 조정신청에서 쟁의권 획득까지 모든 과정을 (조합원에게) 보고하고, 징계자들이 복직과 징계도 약화되면서 현장에 힘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어떻게 투쟁이 진행돼야 될 것이냐는 물음에 “결론은 조합원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냐”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조합원들이 파업을 더 해야 한다며 성화다”
2공장 현장위원 노덕우

노덕우 2공장 현장위원은 비정규직노조를 인터넷을 통해 자기 발로 걸어들어 왔고, 올해 총대를 메고자(?) 비정규직노조 현장위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비정규직의 파업으로 현장이 멈춰서는 것을 보며 “우리가 파업해서 라인이 섰다는 자체가 마음이 뿌듯하고 할 수 있다는 긍지가 생긴다”고 했다.

2공장은 가장 늦게 파업에 돌입했는데 그는“우리는 현장을 먼저 구성하고자 했다. 현장위원들은 조합원과 간담회과 개별면담을 통해 의견을 묻고 조직을 해왔다. 개별교섭을 하면서 업체장들이 ‘바지사장이라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을 현장에 전달했고, 그들을 믿고 일해 온 조합원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현장위원이 출투를 시작하고 조합원들도 참여를 하며 쟁의권을 확보해왔다. 몸으로 부딪쳐 깨지더라도 우리가 한다는 조합원의 의지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며 그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2공장은 올해 처음으로 파업을 들어갔는데, (지금까지) 몸싸움자체를 한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대체인력 싸움에서 대가리가 깨져가면서도 조합원의 생각이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전술적으로 시기조정을 하려해도 조합원들이 더해야 한다며 성화다. 조합원의 생각을 받아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다”고 자신감있게 말했다.


“정규직조차 우리의 생존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3공장 교섭위원 정윤석

3공장은 신차투입으로 7월 1일 108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계약해지를 당했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지만, 40명 정도가 남아 농성투쟁을 시작했다. 현재 12명은 일하던 업체로 복귀했고, 나머지 농성자들의 복직도 조만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정윤석 3공장 현장위원은 그 과정을 이야기하며 “농성이 시작되고 전술변화에 대한 논의가 한참 진행될 때 25명 복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내부적으로 논의해 한명이라도 살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해서 그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정규직 대의원회에서 알아보니 12명의 공정만 있다는 것이다. 재논의가 3일 동안 격렬하게 진행됐고, 농성투쟁이 무너질 위기까지 갔었다. 우리는 아무런 요구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받아야 하는 것밖에 안 됐다. 우리와 한마디 없이 진행한 것이 많다. 작년 정규직이 비정규직노조 집단가입을 시킬 때 고용보장을 이야기했는데, 해고자들 대부분이 열성조합원이었다. 힘이 없어서 하청관리자도 무시하는데, 정규직대의원들도 우리의 생존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정규직 활동가에 대한 생각을 털어놨다.

하지만 그는 “3공장 안에서만 싸우면 농성투쟁이 고립된다고 생각했다. 대시민 선전전과 삼보일배 등도 구상했지만, 복귀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해 공장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2공장에 선전전도 가고, 타공장 투쟁에 꾸준히 결합했다. 타공장 사람들이 열심히 싸우는 모습에 ‘쟤네들이 정리해고된 애들이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성과를 많이 본 것 같다.
그리고 농성장에서는 파업 장소에 우리가 많이 불려 다닐 줄 알았다. 그런데 너무 잘 싸우더라. 20명이 150명의 관리자들과 대치하는데, 주눅 들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든 되겠구나는 생각을 했다. 3공장도 라인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해, 적은 인원이만 25일 거점사수투쟁을 진행했다. 사측이 방심했는지 관리자가 100명도 안되었고, 40분 라인이 멈췄고 120분 동안 가다서다를 반복했다"며 그간의 투쟁을 설명했다.


"원청의 불법대체인력 투입, 이해할 수 없다“
시트사업부 현장위원 이상완

시트 2부는 대체인력저지 투쟁에서 주·야간 함께 모여서 진행하면서 탄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초기에는 A조만 조직돼 있었다. B조는 파업과정에서 조직됐지만, 짧은 시간에 전조합원이 파업에 돌입했다.

이상완 시트사업부 현장위원은 B조에 속해있다. 그 과정에 대해 그는 “작년 단체가입을 했었지만, 원청에서 폐업하면서 업체를 두 개로 가르고, 탈퇴하지 않으면 자르겠다고 협박을 해왔다. B조는 겁을 먹고 하나둘씩 탈퇴하면서 무너졌다. 그런데 A조가 쟁의권을 획득하고 투쟁이 이어지면서, A조가 ‘우리를 대신해 싸울 수 없는 것이고 우리 권리를 찾자는 것인데 함께 해야 한다’고 의기투합해 6월 말에 단체가입을 했다. 그래도 파업은 어렵지 않느냐 했는데, 열외 한명 없이 파업에 돌입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합법파업임에도 원청에서 불법대체인력을 투입해 현장을 막고 있다. 몸싸움 없이 하고 싶은데, 대체인력을 뽑아내야하니까 몸싸움이 일어나고 있다. (사측의 이런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원청은 많은 인원이 카메라까지 들이대고 있지만, 우리는 맞을 뿐 아무것도 없다”며 현대차 사측에 대한 분노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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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노> 포항건설 르뽀

   

아무 일 없다는 듯 공장은 돌아갔다
<르뽀> 건설노동자 하중근씨 마지막 숨결, 포항을 가다

경북 포항에 도착한 것은 4일 새벽 2시께. 처음 찾은 곳은 동국대학교 병원 영안실이었다. 건설노동자 하중근 조합원의 빈소부터 찾았다. 손에 들고 있던 취재수첩 때문인지, 사진기자의 사진기 때문인지 보는 눈이 일단 곱지 않다.

불볕더위가 식은 새벽, 영안실 주변에는 중년을 넘기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서울에서 온 기잔데요, 빈소 지키고 계신가봐요.” “기자…, 말해도, 그대로 쓰지도 않을 꺼면서 묻지도 마소.” 냉담했다.

병원 주변에는 열사를 추모하는 검은색 플래카드가 병원 주변을 싸고 있었다. 억울한 죽음, 힘겨운 삶의 궤적을 쫓아가 보자.

▲ 7천여명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총 결의대회’를 마치고 포스코 공장 쪽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멀리 돌아 결국 그 자리로


포항 시내에서 형산교를 넘어 20여분 들어가면 대보면 대보리, 하중근 조합원의 고향이 나온다. 영일만을 끼고 불뚝 나온 호미곶에서 하중근씨는 태어났다. 7남매의 막내, 철들기 전, 아직은 사탕과 딱지가 인생의 전부인 나이에 고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어선 300척 정도가 드나드는 어촌 마을에, 가정의 형편이 어땠을 지는 길게 말할 일이 아니다.

하중근 조합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원양어선을 탔다. 30대 초반까지 그는 사모아며, 남태평양으로 참치를 잡으러 다녔다. 그러나 뭍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 돈이 쥐어있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고향 동기들은 “배 타도, 타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뭍에서 그가 택할 길은 많지 않았다.

다단계 일도 하고, 아주 잠시지만 식당을 차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 고향에서 작은 어선을 탔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2톤짜리 배를 몰며 문어 통발 어업을 하기도 했다. 멀리 돌아갔지만 결국 그 자리로 돌아왔다.

1997년부터 포스코 공장에서 건설 노동자로, 제관 노동자로 일했다. 술을 좋아했고, 사람도 좋아했다고 한다. 의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집은 없었다. 포항 해도동의 한 여관에서 달셋방 살이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영안실에 누워있다.

▲ 하중근 조합원의 빈소가 마련된 포항 동국대학교 병원 영안실. 하 조합원의 ‘공식적인’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장례일정도 잡지 못한 상태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달셋방이 마지막 거처


7월13일 포항 건설노동자 2,500여명이 포스코 본사를 점거하고 들어갈 때, 하중근 조합원도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저녁 무렵 그는 볼 일이 있다며 나왔다. 16일 공권력 투입 항의집회에 참석했다.

경찰은 경고방송 없이 소화기를 뿌리며 갑자기 집회 참가자들 사이로 밀고 들어왔다. 그는 첫 번째 구타를 당하며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부검을 참관했던 한 의사는 “손에 상처가 없는 것으로 볼 때, 저항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왼쪽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고 양쪽 팔에 멍이 들었다. 오른쪽 뒤통수를 (경찰 방패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것에 찍혔다. 왼쪽 뒤통수 아래쪽은 (소화기 또는 그에 준하는 것이로 보이는) 둥글고 무거운 것에 충격을 받아 10cm의 골절이 생겼다. 그 충격으로 머리 반대편 오른편 이마 쪽 두개골이 골절됐고, 뇌출혈이 있었다. 이 손상은 하 조합원을 뇌사상태에 이르게 했다. 17일을 병원 영안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버텼지만 결국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포항지역건설노조는 임금 15% 인상과 주5일제 근무제 시행을 내걸고 지난 7월1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토요일의 유급 휴일화가 핵심 쟁점이었다. 단체협상 상대인 전문건설협회 쪽에선 난색을 표했다.

포스코의 건설 도급액은 IMF 환란 이후에 계속 낮아져 왔다. 포스코 건설현장의 발주액을 설계가와 비교하면 98년 이전에는 95%, 2004년에는 78%, 2006년에는 73%로 계속 낮아져 왔다. 포스코 건설 노동자들의 일당은 다른 플랜트 건설 현장보다 30% 낮은 9만7천원이다. 토요일 유급휴일 비용은 포스코의 계산 속에는 들어있지 않다.

포항 건설 노동자들의 평균 나이는 50대 초반이다. 제관, 보온, 전기 등 각 분야별로 전문적인 기술이 있어야 플랜트 건설현장에서 일할 수 있다. 포스코를 세워 올린 노동자들은 계속 늙어가지만, 젊은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고 있다. 한 건설노동자의 말처럼,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일”, “골병드는 일”을 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은 이곳을 찾지 않는다. 공장은 매일 돌아가고, 철은 모든 곳에 필요하지만, 노동자들은 공사기간에만 필요하다. 그나마, 일급이 올라가긴 커녕 몇 년동안 계속 쪼그라들었다. 노조가 나서서 임단협을 하고, 싸우지만 다단계 하도급의 건설산업 구조 속에선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

7월13일 결국은 노동자들이 포스코 본사를 찾았다. 전문건설협회와 말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도급액의 목줄을 쥐고 있는 ‘본사’를 찾은 것이다. 그 곳에서도 노동자들은 집회대오를 해산시키려는 경찰의 강제진압에 밀려 포스코 본사건물로 밀려 들어갔다. 졸지에 '남의 회사'를 '무단 점거한 집단'이 돼 버렸다.

▲ 형산강 로터리에서 형산교를 넘으면 포스코 공장이다. 노동자들은 포스코 공장까지 진출할 수 없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포스코 직원들하고) 같이 할라 그러면 되나”


4일은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있던 날. 오전나절에 대보면, 고 하중근 조합원의 고향 쪽을 가 보았다. 영일만을 끼고 작은 어촌 마을들이 줄지어 있었다. 다시 형산강 로타리로 나오는 길. 임곡 마을의 할머니 한 분을 차에 태웠다. 시내에 볼일 보러 가시는 길. 가는 길에 내려달라신다.

“요즘 포항이 시끄럽네요.”

“사람도 죽었고, 해결이 안됐으니 한참 더 하겠지. 그래도 같이 할라고 하면 되나. 포스코 본 직원들은 토요일에 놀아도 일급을 주는데, 노가다 하는 사람들, 일당발이들은 안 준다고 데모하는 거 아이가. (포스코 직원과는 다른 노가다인데) 같이 할라고(대우 해 달라고) 하면 되나. 토요일에 놀면서 일급 달라고 하는 거 아이가.”

“할머니, 이쪽 바다 사람들이 옛날에 원양어선 많이 탔나요?”

“많이 탔지. 먼저 간 우리 남편도 한참 타고 다녔다. 야문 사람은 돈 좀 벌고 그런다. 선장이 일 하라고 많이 압박하는 모양인데, 요즘 젊은 애들은 안 탈라고 한다. 그 말 들을려고 하나.”

“마을에 젊은 사람이 좀 있나요?”

“몇 명 없지. 남의 배 타는 애들 좀 있는데. 못 살고, 못 배워서 남의 배 타지. 자기 배 끌고 다니는 사람은 다 40이 넘었지.”

“한 2톤짜리 배 굴리면 먹고 살만 한가요?”

“야문 사람이야 돈도 모으고 하는데, 노는 날이 많아서 못 쓴다. 놀면 촌에선 맨날 화투치고, 노름하면서 다 까묵고. 아이고 젊은 사람들은 아예 배 탈 생각도 하지 말아야.”

“문어 통발이 잘 되나요.”

“옛날에는 저쪽(포스코 앞쪽 바다)에서 아나고(붕장어) 잡으면 됐고, 그럼 문어도 올라왔는데. 문어 통발만 할라면 요즘은 저쪽 구룡포 넘어가야 된다. 포스코 앞으로 가면 벌금이 꽤 나온다. 옛날처럼은 못 벌지.”

“포스코 쪽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도 동네에 좀 있나요.”

“정직원은 없고. 거기엔 못 들어가고. 협력업체에 노가다 하러 댕기는 사람들은 좀 있지. 그것도 일이 들쭉날쭉해서 돈 잘 안된다. 매달 월급 나오는 게 제일이라. 하다 놀면 다 까묵는다. 이 사람들 데모하는 게 토요일에 놀라면서 월급 달라고 하는 건데. 그게 되나. 어디.”

▲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노동자들의 포스코 진입을 막았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하다 놀면서 까먹게 된다”


7천명의 노동자가 동국대학교 병원 앞에 모였다. 숨쉬기도 어렵게 더운 날. 줄지어 앉은 노동자들은 땡볕을 그대로 받고 있었다. 이들은 오늘 갈 곳, 아니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결의 발언을 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포스코 공장 쪽으로 향하던 시위대열은 형산강 로타리에서 경찰에 막혔다. 하중근 조합원이 사망한지 불과 3일. 경찰도 이날 거친 대응을 자제했다. 시위대는 몸으로 경찰의 방패를 밀었다.

다 큰 남자들의 몸싸움 과정에서 산발적인 충돌도 발생했고, 부상 당하고, 혼절해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경찰은 물대포를 쏘았고, 시위대는 우직하게 경찰 병력을 어깨로 밀고 앞으로 나갔다.

로타리 초입에서 형산교 앞까지, 불과 100미터 정도의 경찰을 밀어내는데, 꼬박 3시간 30분이 걸렸다. 35도 가까운 무더운 날씨. 시위대도 경찰도 탈진해 실려 가는 사람이 속출했다.

시위대에 끌려나온 ‘어린 경찰’들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쓰러져 누었다. 땀범벅이 돼, 탈진한 경찰에게 중년을 넘긴 건설노동자들은 물을 마시게 하고, 진압복을 벗겨 주며 달랬다.

하루 종일 시달림 받은 어린 경찰은 “놔, 이 ○○놈들아”하며, 아버지 뻘 되는 노동자들에게 욕지기를 했다. 욕먹은 노동자는 다시 멱살을 잡고, 사람들이 와서 뜯어 말렸다. 한 늙은 노동자는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인데”라며, 계속 경찰들의 땀을 닦아 주었다. 이 '어린 경찰들' 중 몇몇은 지난 7월16일 살인에 가담했다.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들이 쉴 사이도 없이, 병원과 집회 현장을 오고갔다. 실려 간 사람만 120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그 난리를 쳤지만 결국 형산교 초입에서 노동자들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경찰 병력은 여전히 다리 앞을 막고 있었고, 그 뒤로는 경찰버스가 통행을 막고 있었다. 그 뒤로 경찰이 배치돼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포스코 공장으로 갈 수 없다.

공장 안에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노동자들은 밤이 될 때까지 형산교 앞을 떠나지 못하고 집회를 계속했다.

▲ 호미곶 쪽에서 바라본 바다. 영일만 너머 포스코의 공장 굴뚝이 보인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포스코 굴뚝이 들어서기 전에도, 그 후에도 가난했다. 하중근 조합원은 이 바다와 공장 굴뚝 언저리에서 가난하게 살았고, 비참하게 죽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공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


임곡 할머니의 말처럼. 토요일에 쉬면서 돈 받는 것, 주5일제 시행이 감히 꿈꾸면 안 되는 일일까. 7월13일 성난 노동자들이 포스코 본사로 쳐들어갔을 때, 경찰은 신속히도 공권력을 투입했다. 하루에 100억원의 손실이 난다면서 신문과 방송은 국가 기간산업의 위기를 걱정했다.

날카로운 방패로 사람을 치면 죽는다. 둥글고 무거운 것으로 사람 머리를 후려치면 죽는다. 지난 7월16일 형산강 넘어 포스코 본사를 바라보며 집회를 열던 노동자들에게 국가 공권력은 무엇을 한 것일까.

호미곶 쪽에서 바라본 바다. 영일만 너머 포스코의 공장 굴뚝이 보인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젊어선 원양어선을 탔고, 나이 들어선 조그만 배로 통발 어업을 하며 살아간다. 포스코 협력업체에서 일하며 벌이는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붕장어가 많이 잡히는 영일만 북쪽 편은 포스코가 들어서면서 어업이 금지된 지역. 호미곶 사람들은 포스코 굴뚝이 들어서기 전에도, 그 후에도 가난했다. 고인이 된 하중근 조합원도 나서 죽을 때까지 가난했다. 짐작컨대, 생에 단 하루도 토요일을 유급휴일로 살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힘겨웠던 인생, 명복이라도 후하게 받을 권리가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용상 기자  ysjung@labortoday.co.kr
2006-08-07 오후 12:19:30  입력  / 2006-08-07 오후 12:25:01 수정(1차)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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