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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노> 포항건설 르뽀

   

아무 일 없다는 듯 공장은 돌아갔다
<르뽀> 건설노동자 하중근씨 마지막 숨결, 포항을 가다

경북 포항에 도착한 것은 4일 새벽 2시께. 처음 찾은 곳은 동국대학교 병원 영안실이었다. 건설노동자 하중근 조합원의 빈소부터 찾았다. 손에 들고 있던 취재수첩 때문인지, 사진기자의 사진기 때문인지 보는 눈이 일단 곱지 않다.

불볕더위가 식은 새벽, 영안실 주변에는 중년을 넘기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서울에서 온 기잔데요, 빈소 지키고 계신가봐요.” “기자…, 말해도, 그대로 쓰지도 않을 꺼면서 묻지도 마소.” 냉담했다.

병원 주변에는 열사를 추모하는 검은색 플래카드가 병원 주변을 싸고 있었다. 억울한 죽음, 힘겨운 삶의 궤적을 쫓아가 보자.

▲ 7천여명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총 결의대회’를 마치고 포스코 공장 쪽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멀리 돌아 결국 그 자리로


포항 시내에서 형산교를 넘어 20여분 들어가면 대보면 대보리, 하중근 조합원의 고향이 나온다. 영일만을 끼고 불뚝 나온 호미곶에서 하중근씨는 태어났다. 7남매의 막내, 철들기 전, 아직은 사탕과 딱지가 인생의 전부인 나이에 고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어선 300척 정도가 드나드는 어촌 마을에, 가정의 형편이 어땠을 지는 길게 말할 일이 아니다.

하중근 조합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원양어선을 탔다. 30대 초반까지 그는 사모아며, 남태평양으로 참치를 잡으러 다녔다. 그러나 뭍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 돈이 쥐어있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고향 동기들은 “배 타도, 타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뭍에서 그가 택할 길은 많지 않았다.

다단계 일도 하고, 아주 잠시지만 식당을 차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 고향에서 작은 어선을 탔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2톤짜리 배를 몰며 문어 통발 어업을 하기도 했다. 멀리 돌아갔지만 결국 그 자리로 돌아왔다.

1997년부터 포스코 공장에서 건설 노동자로, 제관 노동자로 일했다. 술을 좋아했고, 사람도 좋아했다고 한다. 의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집은 없었다. 포항 해도동의 한 여관에서 달셋방 살이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영안실에 누워있다.

▲ 하중근 조합원의 빈소가 마련된 포항 동국대학교 병원 영안실. 하 조합원의 ‘공식적인’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장례일정도 잡지 못한 상태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달셋방이 마지막 거처


7월13일 포항 건설노동자 2,500여명이 포스코 본사를 점거하고 들어갈 때, 하중근 조합원도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저녁 무렵 그는 볼 일이 있다며 나왔다. 16일 공권력 투입 항의집회에 참석했다.

경찰은 경고방송 없이 소화기를 뿌리며 갑자기 집회 참가자들 사이로 밀고 들어왔다. 그는 첫 번째 구타를 당하며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부검을 참관했던 한 의사는 “손에 상처가 없는 것으로 볼 때, 저항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왼쪽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고 양쪽 팔에 멍이 들었다. 오른쪽 뒤통수를 (경찰 방패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것에 찍혔다. 왼쪽 뒤통수 아래쪽은 (소화기 또는 그에 준하는 것이로 보이는) 둥글고 무거운 것에 충격을 받아 10cm의 골절이 생겼다. 그 충격으로 머리 반대편 오른편 이마 쪽 두개골이 골절됐고, 뇌출혈이 있었다. 이 손상은 하 조합원을 뇌사상태에 이르게 했다. 17일을 병원 영안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버텼지만 결국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포항지역건설노조는 임금 15% 인상과 주5일제 근무제 시행을 내걸고 지난 7월1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토요일의 유급 휴일화가 핵심 쟁점이었다. 단체협상 상대인 전문건설협회 쪽에선 난색을 표했다.

포스코의 건설 도급액은 IMF 환란 이후에 계속 낮아져 왔다. 포스코 건설현장의 발주액을 설계가와 비교하면 98년 이전에는 95%, 2004년에는 78%, 2006년에는 73%로 계속 낮아져 왔다. 포스코 건설 노동자들의 일당은 다른 플랜트 건설 현장보다 30% 낮은 9만7천원이다. 토요일 유급휴일 비용은 포스코의 계산 속에는 들어있지 않다.

포항 건설 노동자들의 평균 나이는 50대 초반이다. 제관, 보온, 전기 등 각 분야별로 전문적인 기술이 있어야 플랜트 건설현장에서 일할 수 있다. 포스코를 세워 올린 노동자들은 계속 늙어가지만, 젊은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고 있다. 한 건설노동자의 말처럼,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일”, “골병드는 일”을 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은 이곳을 찾지 않는다. 공장은 매일 돌아가고, 철은 모든 곳에 필요하지만, 노동자들은 공사기간에만 필요하다. 그나마, 일급이 올라가긴 커녕 몇 년동안 계속 쪼그라들었다. 노조가 나서서 임단협을 하고, 싸우지만 다단계 하도급의 건설산업 구조 속에선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

7월13일 결국은 노동자들이 포스코 본사를 찾았다. 전문건설협회와 말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도급액의 목줄을 쥐고 있는 ‘본사’를 찾은 것이다. 그 곳에서도 노동자들은 집회대오를 해산시키려는 경찰의 강제진압에 밀려 포스코 본사건물로 밀려 들어갔다. 졸지에 '남의 회사'를 '무단 점거한 집단'이 돼 버렸다.

▲ 형산강 로터리에서 형산교를 넘으면 포스코 공장이다. 노동자들은 포스코 공장까지 진출할 수 없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포스코 직원들하고) 같이 할라 그러면 되나”


4일은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있던 날. 오전나절에 대보면, 고 하중근 조합원의 고향 쪽을 가 보았다. 영일만을 끼고 작은 어촌 마을들이 줄지어 있었다. 다시 형산강 로타리로 나오는 길. 임곡 마을의 할머니 한 분을 차에 태웠다. 시내에 볼일 보러 가시는 길. 가는 길에 내려달라신다.

“요즘 포항이 시끄럽네요.”

“사람도 죽었고, 해결이 안됐으니 한참 더 하겠지. 그래도 같이 할라고 하면 되나. 포스코 본 직원들은 토요일에 놀아도 일급을 주는데, 노가다 하는 사람들, 일당발이들은 안 준다고 데모하는 거 아이가. (포스코 직원과는 다른 노가다인데) 같이 할라고(대우 해 달라고) 하면 되나. 토요일에 놀면서 일급 달라고 하는 거 아이가.”

“할머니, 이쪽 바다 사람들이 옛날에 원양어선 많이 탔나요?”

“많이 탔지. 먼저 간 우리 남편도 한참 타고 다녔다. 야문 사람은 돈 좀 벌고 그런다. 선장이 일 하라고 많이 압박하는 모양인데, 요즘 젊은 애들은 안 탈라고 한다. 그 말 들을려고 하나.”

“마을에 젊은 사람이 좀 있나요?”

“몇 명 없지. 남의 배 타는 애들 좀 있는데. 못 살고, 못 배워서 남의 배 타지. 자기 배 끌고 다니는 사람은 다 40이 넘었지.”

“한 2톤짜리 배 굴리면 먹고 살만 한가요?”

“야문 사람이야 돈도 모으고 하는데, 노는 날이 많아서 못 쓴다. 놀면 촌에선 맨날 화투치고, 노름하면서 다 까묵고. 아이고 젊은 사람들은 아예 배 탈 생각도 하지 말아야.”

“문어 통발이 잘 되나요.”

“옛날에는 저쪽(포스코 앞쪽 바다)에서 아나고(붕장어) 잡으면 됐고, 그럼 문어도 올라왔는데. 문어 통발만 할라면 요즘은 저쪽 구룡포 넘어가야 된다. 포스코 앞으로 가면 벌금이 꽤 나온다. 옛날처럼은 못 벌지.”

“포스코 쪽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도 동네에 좀 있나요.”

“정직원은 없고. 거기엔 못 들어가고. 협력업체에 노가다 하러 댕기는 사람들은 좀 있지. 그것도 일이 들쭉날쭉해서 돈 잘 안된다. 매달 월급 나오는 게 제일이라. 하다 놀면 다 까묵는다. 이 사람들 데모하는 게 토요일에 놀라면서 월급 달라고 하는 건데. 그게 되나. 어디.”

▲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노동자들의 포스코 진입을 막았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하다 놀면서 까먹게 된다”


7천명의 노동자가 동국대학교 병원 앞에 모였다. 숨쉬기도 어렵게 더운 날. 줄지어 앉은 노동자들은 땡볕을 그대로 받고 있었다. 이들은 오늘 갈 곳, 아니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결의 발언을 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포스코 공장 쪽으로 향하던 시위대열은 형산강 로타리에서 경찰에 막혔다. 하중근 조합원이 사망한지 불과 3일. 경찰도 이날 거친 대응을 자제했다. 시위대는 몸으로 경찰의 방패를 밀었다.

다 큰 남자들의 몸싸움 과정에서 산발적인 충돌도 발생했고, 부상 당하고, 혼절해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경찰은 물대포를 쏘았고, 시위대는 우직하게 경찰 병력을 어깨로 밀고 앞으로 나갔다.

로타리 초입에서 형산교 앞까지, 불과 100미터 정도의 경찰을 밀어내는데, 꼬박 3시간 30분이 걸렸다. 35도 가까운 무더운 날씨. 시위대도 경찰도 탈진해 실려 가는 사람이 속출했다.

시위대에 끌려나온 ‘어린 경찰’들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쓰러져 누었다. 땀범벅이 돼, 탈진한 경찰에게 중년을 넘긴 건설노동자들은 물을 마시게 하고, 진압복을 벗겨 주며 달랬다.

하루 종일 시달림 받은 어린 경찰은 “놔, 이 ○○놈들아”하며, 아버지 뻘 되는 노동자들에게 욕지기를 했다. 욕먹은 노동자는 다시 멱살을 잡고, 사람들이 와서 뜯어 말렸다. 한 늙은 노동자는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인데”라며, 계속 경찰들의 땀을 닦아 주었다. 이 '어린 경찰들' 중 몇몇은 지난 7월16일 살인에 가담했다.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들이 쉴 사이도 없이, 병원과 집회 현장을 오고갔다. 실려 간 사람만 120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그 난리를 쳤지만 결국 형산교 초입에서 노동자들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경찰 병력은 여전히 다리 앞을 막고 있었고, 그 뒤로는 경찰버스가 통행을 막고 있었다. 그 뒤로 경찰이 배치돼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포스코 공장으로 갈 수 없다.

공장 안에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노동자들은 밤이 될 때까지 형산교 앞을 떠나지 못하고 집회를 계속했다.

▲ 호미곶 쪽에서 바라본 바다. 영일만 너머 포스코의 공장 굴뚝이 보인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포스코 굴뚝이 들어서기 전에도, 그 후에도 가난했다. 하중근 조합원은 이 바다와 공장 굴뚝 언저리에서 가난하게 살았고, 비참하게 죽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공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


임곡 할머니의 말처럼. 토요일에 쉬면서 돈 받는 것, 주5일제 시행이 감히 꿈꾸면 안 되는 일일까. 7월13일 성난 노동자들이 포스코 본사로 쳐들어갔을 때, 경찰은 신속히도 공권력을 투입했다. 하루에 100억원의 손실이 난다면서 신문과 방송은 국가 기간산업의 위기를 걱정했다.

날카로운 방패로 사람을 치면 죽는다. 둥글고 무거운 것으로 사람 머리를 후려치면 죽는다. 지난 7월16일 형산강 넘어 포스코 본사를 바라보며 집회를 열던 노동자들에게 국가 공권력은 무엇을 한 것일까.

호미곶 쪽에서 바라본 바다. 영일만 너머 포스코의 공장 굴뚝이 보인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젊어선 원양어선을 탔고, 나이 들어선 조그만 배로 통발 어업을 하며 살아간다. 포스코 협력업체에서 일하며 벌이는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붕장어가 많이 잡히는 영일만 북쪽 편은 포스코가 들어서면서 어업이 금지된 지역. 호미곶 사람들은 포스코 굴뚝이 들어서기 전에도, 그 후에도 가난했다. 고인이 된 하중근 조합원도 나서 죽을 때까지 가난했다. 짐작컨대, 생에 단 하루도 토요일을 유급휴일로 살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힘겨웠던 인생, 명복이라도 후하게 받을 권리가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용상 기자  ysjung@labortoday.co.kr
2006-08-07 오후 12:19:30  입력  / 2006-08-07 오후 12:25:01 수정(1차)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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