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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02
    노사협조로 점철된 대우차노조 06임단투(노정협)
    바람돌이
  2. 2006/09/29
    '투쟁'과 '실리' 조합원들의 선택은
    바람돌이
  3. 2006/08/08
    프랑스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기업가 루이 르노
    바람돌이
  4. 2006/08/08
    필리핀 도요타 정리해고 투쟁
    바람돌이

노사협조로 점철된 대우차노조 06임단투(노정협)

노사협조로 점철된 대우차노조 06임단투


2001년 2월 19일은 175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노동자들이 일시에 정리해고 되면서 부평역 앞을 치열한 가두전투의 상징으로 만든 시발점이었다. 같은 해 4월 10일은 백주대낮에 웃통 벗은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공권력의 방패와 곤봉에 사정없이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며 피튀기는 살육의 날이었다.

2002년부터 단계적으로 복직되기 시작한 정리해고자들은 5년이 지난 올해 1600명이 복직되었다. 어찌됐든 ‘복직’이라고 언론에서는 ‘노사화합’의 성과라 호도하고, 집행부에서는 마치 그것이 그 동안의 자신들의 투쟁의 성과인냥 치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가?

GM자본은 부도위기에 처한 대우자동차를 분할인수하여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는 ‘인천대우’와 ‘GM대우’ 두 개의 법인이 공존하고 있었다. 법인이 통합될 때까지 노조는 식물노조 상태로 있을 것을 전제로 하는 ‘조건부 법인통합’으로 인해 GM자본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이후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삶도 말이 아니었다. 임금은 동결되고 주간1교대로 그나마 동결된 임금마저 야간과 특근수당이 배제된 반값으로 하락했다. 각종 수당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터무니없이 낮아졌으며 복지후생은 그림의 떡이었다.

게다가 더 서러운 것은 마치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분할하듯, ‘인천대우’와 ‘GM대우’ 소속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이었다. 연구소, 수출과 출고 관련 사업부와 정비, 그리고 창원과 군산 등은 ‘GM대우’로 소속되고 그 외 부평공장의 조립, 도장, 차체, 프레스만이 ‘인천대우’로 소속되어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작업복도 달랐고 대우도 달랐다. 당시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선봉에 서서 전투적인 가두투쟁을 벌이고 끝까지 공장점거를 사수하며 자본과 정권의 폭력에 맞선 경험이 있는 핵심 노동자들을 따로 관리하며 현장탄압과 감시에 익숙하게 만들고 숨죽이고 사는데 익숙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두 개의 법인으로 족쇄를 채우고, 인수의 전제조건이었던 무쟁의 선언으로 발목 잡히고, 현장탄압과 감시에 숨통이 막히고, 결국 눈과 귀까지 닫고 살아오면서 현장조직력은 박살났고, 매일같이 회사가 어렵다는 앓는 소리에 또 다시 해고될지 모르는 두려움만 쌓여갔다.

그러나 올해 두개의 법인이 ‘GM대우’ 하나의 법인으로 통합되었다. 무쟁의라는 식물노조는 다시 투쟁의 함성을 지를 수 있게 되었고, 마침 임금협상 뿐 아니라 단체협상도 걸려있는 올해, 드디어 뭔가 좀 될 줄 알았다. 더군다나 작년부터 적자에 허덕인다던 GM대우가 흑자로 선회했다. 그런데 결과는 영 딴판이다.

휴가직전 타결이라는 꼼수에 조합원들이 던진 것은, 분노! 그리고 부결!!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어…


지난 5월 19일 상견례를 시작으로 대우자동차의 임/단투가 시작되었다. 핵심요구안은 임금관련 120,350원(기본급대비 8.55%)인상과 고용안정 관련 ‘협의가 아닌 합의’로 할 것 등을 포함하여 인수과정에서 강탈당한 단체협약 원상회복 등이다. 또한 26개의 별도요구안에는 주간연속 2교대제, 비정규직 관련, 창원지부 부당징계 해고자, 각종 수당 그리고 1600명에 달하는 정리해고 복직자 관련 4대요구안 등이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성과없이 교섭횟수는 늘어났고 현장은 출투와 철야농성 외에 2달 반이라는 시간동안 ‘전간부 출근투쟁과 12일 4시간 부분파업 및 잔업거부, 14일 4시간 부분파업, 18~19일 2시간, 4시간 부분파업 및 파상파업’이 중앙쟁대위 지침인데 그마저도 부분파업은 다 진행되지 못했다.

이윽고 7월 13일 16차 교섭에서 사측이 제시안 ‘전향적인 안’을 던졌다는 얘기와 함께 여름 휴가를 앞두고 24일 잠정합의안이 발표되었다.

잠정합의안 내용은 임금은 호봉승급분 제하면 56,000원 인상(기본급 대비 3.98%인상) 그리고 단협개정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던 고용관련 핵심 조항인 12조) 회사의 합병, 양도, 이전 등 관련하여 노조에 90일 전에 통보하는 것은 명시했으나 협의를 합의를 따내지 못했고, 13조) 외주 및 용역전환, 사내하청, 외주화, 모듈화 등 관련사항도 협의를 합의로 따내지 못했다. 그 외 1600여명의 정리해고자의 4대 요구안은 아무런 진척도 없었으며 작년에 특별노사협의회에서 어느 정도 합의봤던 ‘해고기간의 근속 인정’만이 명시되었을 뿐이다. 또한 비정규직 관련 요구안은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

이런 걸레같은 안을 받아 들고 와서 잠정합의안을 확대간부회의를 통한다는 규약도 어긴채 이성재 집행부는 교섭대표 만장일치로 도출된 안이라며 현장에 선전하며 가결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집행부 현장조직인 ‘현장에서 희망을’을 제외하고는 전 현장조직이 조합원들에게 부결을 호소하는 선전선동을 시작했다. 정원투와 민노회는 독자중식집회와 노숙투쟁을 전개하며 투쟁을 전개했다.

노조 집행부는 잠정합의안이 도출되고 이틀 뒤인 26일 찬반투표, 28일 특근을 잡아놓았을 만큼 가결을 확신했지만 반대 52.2%로 잠정합의안은 보기좋게 부결됐다. 집행부가 바보라고 믿었던 조합원들에게 뒤통수에 짱돌을 맞은 셈이었다.

휴가로 열흘이라는 시간을 날리고 창원공장이 공사로 일주일을 더 쉬면서 아무런 투쟁 지침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집행부는 투쟁의지는 커녕 재교섭 의지도 없었다. 2주일이 지나서야 온 사측의 ‘일주일만 더 시간을 달라’는 요구에 집행부는 ‘그러자’며 또 일주일을 시간끌었다. 근 1달이 다되어가는 시간 동안 내려진 투쟁지침이라고는 전간부 주야 출투 및 철야농성, 그리고 한술 더 떠 교섭 재개되는 24일부터 이전 투쟁수위로 환원한다.(중앙쟁대위 지침 6호)는 내용이 전부였다.

그렇게 교섭에만 목매달다가 2차 잠정합의안이 8월 25일 도출됐다. 투쟁없는 잠정합의안이 어떤 성과가 있겠는가. 교섭위원들끼리 수정한 재교섭 9대 요구안에는 해고자 문제, 비정규직 문제, 고용 문제 등 돈 몇 푼보다 진정 쟁취되어야할 계급적 요구는 뒤로 한 채, 임금과 각종 수당 관련한 요구로만 한정하여 52.2%에서 단 가결에 필요한 단 4%만을 위한 재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결과 도출된 2차 잠정합의안이 1차 잠정합의안과 다른 점이라면 고작 호봉승급분을 제외하고 5,000원 더 인상된 임금인상액이 전부다.

현장에서는 “2차 부결투쟁을 들어가야 한다, 이성재를 끌어내려야 한다, 우릴 갖고 놀아도 이렇게 갖고 놀수는 없다…”(정원투 게시판 중) 등 분노로 들끓고 있다.

8월 25일 제2차 잠정합의안이 도출되었고 28~29일 찬반투표에서 60.9%로 겨우 가결되었다.

노동자보다 사용자를 더 걱정하는 GM대우노조 이성재 집행부!


5년이라는 세월동안 열악한 임금과 고용불안, 억눌린 현장 속에서 살아온 조합원들에게 올해 투쟁은 분명 큰 의미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합법적인 쟁의권 확보와 74.2%라는 조합원들의 압도적인 찬반투표 가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되는 투쟁양상은 전간부 출투와 철야농성이 전부였다. 토고 전 관람으로 대체된 임단투 전진대회를 시작으로 4달이 다 되어가는 교섭 기간 동안 파업지침은 전면총파업도 아닌 3~4번에 걸친 ‘4시간 부분파업과 파상파업’이 전부였다. 파업투쟁이 말 그대로 투쟁이 아니라 사용자들을 위한 ‘솜방망이’가 된 것이다.

중앙쟁대위 지침 3호 - 06임단투가 끝날 때까지 파상파업권은 위원장에게 위임한다.
중앙쟁대위 지침 5호 - 21일 교섭에서 수용할 수 없는 안이 나올 시 총파업을 포함한 일체의 투쟁에 대해 위원장에게 위임한다.


전 조합원이 참여하여 파업투쟁을 진행하는 노동자계급의 일반적 상식이 대우자동차노동조합에게는 파상파업이라는 비상식적인 전술로 탈바꿈되었다. 파상파업은 말 그래도 어느 현장은 파업에 들어가고 어느 현장은 파업에 들어가지 않는 등 따로 놀게 된다. 현장 대의원들의 현장 장악력에 따라 힘 되는 곳은 돌입하고 부족한 곳은 안되고, 결국 집행부는 역으로 ‘파업지침을 때렸는데 왜 참여하지 않느냐’며 책임을 전가한다. 아예 신차출시를 위해 윈스톰을 생산하는 조립2라인은 파상파업에서도 제외했다. 그러면서 부평역 지하상가 번영회, 부평 재래시장 번영회 임원진들과 만나서 ‘대우자동차 노조는 투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경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며 신차홍보와 판매에 협조를 구하고 돌아다녔다. 이게 노조 지도부의 모습인가, GM대우 경영진의 모습인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해도 한참을 못하고 있다.

참여율 저조한 출투와 철야농성으로 일관하고 신차출시는 해야 되니까 그곳은 파업 안하고, 그 외에는 대의원들이 알아서 파상파업 진행하라고 하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사측에 압박이되는 투쟁으로 발화될 수 있겠는가? 이 지침이 정녕 노동자들을 위한 것인가, GM자본을 위한 것인가? 가히 조합원들을 농락하는 수준이 환상적이다. 그리고는 투쟁을 조직하지 않고는 참여율 저조하다고 현장활동가들과 조합원들에게 ‘난 열심히 교섭할 때 너희들은 뭐했냐’며 생떼를 피우는 모습이 여느 노사협조주의자들과 판박이다.

교섭이 투쟁인가? 노조 지도부는 교섭하는 사람, 조합원은 지침만 내리면 따라 투쟁하는 바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난 5년간 무너진 현장권력에 기생해 GM자본에 구걸하는 어용, 노사협조주의자 이성재! 세분화된 근태코드와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팀제 및 현장통제에 신음하는 조합원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파업투쟁에 동참할 수 있도록 제대로 싸우고 조직하고 만들지는 않고 입으로만 투쟁하고 있는 노사협조주의자, 이성재!

그러면서 제대로 투쟁하라고 비판하고 선전하면서 압박하는 현장활동에 대해서는 위원장이라는 권위를 이용해 통제하고 공격한다. 자본에 대한 공격보다 훨씬 공격적이다.

06임단협 요구안 이외의 문구를 담고, 현장조직의 명칭이 들어가있는 현수막을 출근투쟁에 내거는 것은 … 정원투에서 조끼 이외의 단체복을 착용하고 정원투 회의를 통해 철야 농성 텐트를 설치한다는 결정을 하는 것은 … 조합원들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분열시키며 … 집단이기적인 발상이고 중앙쟁대위 행동지침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입니다.
(각 현장조직과 정원투에 보낸 중앙쟁대위 행동지침 준수 권고문(7.14) 중)


이성재위원장은 정리해고 복직자들의 조직인 정원투와 사사건건 마찰하고 대립하였다. 정원투가 기존의 현장조직을 대신하여 집행부의 협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정원투는 이성재집행부의 생각과 다르게 사조직이 아니다. 정원투는 대우차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한 살아 있는 역사이다. 정원투는 더 이상 대우자동차에 더 나아가 이 사회 전체에 정리해고가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대우자동차 전체 조합원의 투쟁의 구심이다. 이러한 정원투에 대한 집행부의 노골적인 도발은 집행부가 얼마나 현장으로부터 멀리 있고, 자본의 친위조직인지를 잘보여준다.

현장활동가들의 한계와 과제

이성재의 노사협조주의를 넘어선 노골적인 어용화는 사실 예견된 일이었다. 작년부터 시작됐던 GM대우 창원비정규직지회의 투쟁에 이성재 집행부는 연대투쟁을 커녕 이들의 투쟁을 공장을 볼모로 떼쓰는 막무가내식 투쟁으로 왜곡, 폄하하며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 것도 지원해줄 수 없다고 협박하는 한편, 투쟁의 주체들을 제외한 채 독단적으로 합의해 투쟁을 마무리시키키도 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 마치 예전의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을 자신이 다 한 것인 마냥 선전하면서 힘차게 연대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한 것이 무엇인가? 성명서 발표 외에 아무 것도 없다.

현재 상황 임단투 2차 투표가 마무리되었다. 28~29일에 걸친 찬반투표에서 60.9%의 찬성률로 겨우 가결되었다.

그러나 제 현장조직과 활동가들은 2차 투표에서는 가결될 것으로 생각하면서 임단투 마무리 이전에 사실상 20대 임원선거를 위한 체제로 전환했다. 게다가 대우차의 대표적인 민주파 현장조직이라고 하는 민노회 내부의 활동가들은 연대연합 선거로 선거주의에 매몰되었다. 이성재 집행부를 반대한다는 것은 이성재 집행부가 아닌 여러 현장조직 간의 무원칙한 연합이 아니라 이성재 집행부가 보인 노사협조주의에 대한 분명한 반대와 비정규직 투쟁을 탄압한 반노동자 집행부에 대한 전선을 분명히 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민노회는 임단투 전이나 임단투 기간이나 노사협조주의 집행부에 대한 제대로 된 반대전선을 치지 못했다. 오직 정원투 내에서 민노회의 개별회원들이 중심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또한 임단투 기간 중 가장 부각됐던 정원투의 4대 요구안인 “정리해고 복직자 해고기간 근속수당 지급! 퇴직금 재정산! 국민연금, 삼신생명 해고기간 회사 부담금 개인별 지급! 투쟁중 부상자는 산재에 준하는 조치 및 보상!”은 조합원들 전체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정원투 내부의 요구에 그친 한계가 있다. 제대로 된 노조라면 투쟁의 선봉에서 싸우다가 해고되고 압류되고 부상당한 모든 동지들의 원상회복을 쟁취해야 함이 당연 옳다. 그러나 1600명이라는 많은 노동자가 복직된 지금 그러한 요구를 어용집행부에게 강제시켜내고 복직자를 포함한 모든 조합원들이 함께 원상회복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06임단투 투쟁과 함께 맞물리는 정원투의 원칙적인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를 중점에 두고 가지 못한 한계도 있다. 이는 물론 투쟁해야하는 대우자동차 비정규직 주체의 문제도 있다. 그러나 지난 GM대우창원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의 투쟁에 창원까지 내려와 함께 연대투쟁했던 만큼, 이번 임단투 속에서도 비정규직의 문제는 이미 전 자본에 대한 전투적인 계급적 투쟁의 문제임을, 대우자동차에도 1000명이나 되는 비정규직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잠정합의안에는 그 어떤 비정규직 관련한 합의사항도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비판하며 관료적인 산별노조를 타격하는 근거로 삼았어야 했다.

이제 임단협투쟁이 마무리되고 노조 20대 임원선거가 남아있다. 임원선거에 임하는 우리 선진활동가들은 분명히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여 ‘선거를 위한 선거’가 아니라 ‘투쟁하기 위한 선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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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과 '실리' 조합원들의 선택은

'투쟁'과 '실리' 조합원들의 선택은
대우차노조 20대 임원선거 전망…3년간 누가 GM대우차의 미래를 보장할까?
 
대우차노조의 미래를 3년간 책임질 20대 대우차노조 위원장 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29일 치러지는 20대 임원선거에는 10여개 현장조직이 각각 연합해 모두 4팀이 출마,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으나 당락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20대 임원의 경우 산별전환 임기와 맞추기 위해 2년 임기를 3년2개월로 연장했기 때문에 지난 어느 선거보다 9,100여명의 조합원 표심이 신중해 질 수밖에 없다.

대우차는 1998년 이후 부도와 대규모 정리해고, 해외매각 등을 거친 뒤 지난해 인천대우차와 GM대우의 법인통합이 됐다. 따라서 차기 20대 집행부는 해외자본인 GM대우와 함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 안정적 성장과 함께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을 담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에 20대 임원선거에 출마한 4개 후보 모두 '고용안정'을 제1의 공약으로 제출했다. 공약과 관련해서는 크게 변별력을 지니지 않고 있다. 하지만 4팀 모두 위원장 후보자들이 역대 집행부에서 임원 또는 집행간부를 맡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당시 활동의 평가 역시도 조합원들의 주요한 판단근거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기호 1번 후보조는 현장조직 ‘현장희망’, ‘한길’이 연합해 출마했으며 이성재 위원장 후보는 현 위원장이다. 현장조직 ‘민주노동자회’, ‘자주노동자회’ 연합후보인 기호2번 김일한 위원장 후보 역시 17대 대우차 정리해고투쟁 당시 집행부 출신이다. 또 단일후보를 낸 기호 3번 ‘자주민주투쟁위원회’ 장순길 위원장 후보는 18대 집행부 당시 조직실장을 역임했으며 ‘전진하는노동자회’, ‘실천하는노동자회’ 연합후보인 기호4번 이남묵 위원장 후보는 16대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4개 후보조 모두가 조합원들에게 집행력에 대한 평가를 검증받았다.

이들은 이러한 집행력을 바탕으로 산별노조 전환이라는 과도기 속에서 대우차노조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을 보장하고 GM대우차의 장밋빛 미래를 그릴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조합원들은 어느 후보조를 선택할까.

기호1번 이성재 후보조는 지난 19대 임원선거에서 1차 투표 당시 23.7%로 결선투표에 진출, 2차 투표에서 50.6%를 얻어 당선됐다. 당시 현장조직 중 큰 영향력이 지니지 못한 '대민실노' '희망찾기' '통노회'가 연합해 출마해 당선 가능성이 적었음에도 ‘협상과 투쟁’이라는 이미지가 조합원들에게 각인돼 당선됐다. 그러나 올해 임단협 잠정합의안 1차 투표에서 52.2%로 잠정합의안이 부결된 데다 집행과정에서 노사화합, 노사상생의 이미지로 최근 비판적 평가를 받고 있다.

기호 2번 김일한 후보조는 지난 19대 집행부 1차 투표에서 출마해 20.1%를 득표, 3위에 그쳤다. 김 위원장 후보가 활동하고 있는 ‘민주노동자회’는 대우차 현장조직 중 가장 전투적 성향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실제로 17대 집행 당시 '정리해고투쟁위원회' 활동 등을 해 왔다. 따라서 GM대우로의 법인 통합이 완성된 지금, 조합원들이 전투적 성향의 집행부를 선택할 지는 미지수다.

기호 3번 장순길 위원장 후보조의 선거대책본부장은 이보운 18대 노조 위원장이 맡고 있으며 19대 임원 선거 당시 ‘자주민주투쟁위원회’ 소속 정연호 후보조가 출마해 12.3%를 득표했다. 장 위원장 후보는 기호 1번과 4번이 실리적 조합활동을, 기호 2번이 전투적 조합활동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과 달리, 중도적 합리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 러닝메이트 후보들이 창원과 군산 현장조직을 포함하고 있어 각 공장의 의견수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기호 4번 이남묵 후보조는 지난 19대 임원선거 1차 투표에서 이성재 후보조에 0.1%로 뒤진 23.6%를 얻어 2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했으나 47.5%로 낙선했다. 대우차 현장조직 중 가장 높은 조직률을 보이고 있는 ‘전진하는노동자회’ 소속으로 안정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기호 2번 김일한 후보조보다는 기호2번 이성재 후보조와 같은 합리적, 실리적 평가를 받고 있다.

대우차노조 관계자들은 이번 선거가 지난 역대 선거보다도 당락을 예측하기가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17대 선거의 경우 해외매각과 정리해고 투쟁이라는 조합원들의 생존문제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투쟁적 집행부가 선택된 반면, 18, 19대는 GM대우로의 인수과정에서 합리적 지도부를 선택하려는 경향이 보였지만 이제 법인통합이 완성된 이후 9,100여명의 조합원들이 '투쟁'과 '실리'에서 무엇을 선택할 지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마영선 기자  leftsun@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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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기업가 루이 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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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기업가 루이 르노 | 낙서장 2006/02/16 01:01
http://blog.naver.com/uu7982/30001863775
프랑스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기업가 루이 르노 

 

1. 머리말 

 르노 (Renault)라는 이름은 얼마 전부터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수년 전에 파산한 삼성자동차 사를 인수하여 한국에 진출하였기 때문이다.1) 현재 르노 사는 푸조-시트로엔 (PSA Peugeot Citro&euml;n) 사와 더불어 프랑스의 양대 자동차 사의 하나로서 세계 자동차 산업을 이끌어 가고 있는데 삼성자동차를 인수하기 직전에는 경영위기에 빠졌던 일본의 닛산에 투자하여 성공을 거두었다.2)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르노-닛산은 세계 자동차 시장의 10 퍼센트에 가까운 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며 2010년경에는 미국의 제네랄 모터스 (General Motors) 사나 포드 (Ford) 사의 수준으로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르노 자동차 회사의 역사는 크게 나누자면 두 시기로 나뉜다. 전반은 1898년 루이 르노가 비양쿠르 (Billancourt)3)의 작은 작업장에서 처음 자동차를 만든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그가 사망한 1944년에 걸치는 시기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탱크를 비롯한 많은 군수물자를 생산하여 프랑스의 승리에 기여한 공을 세웠던 루이 르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는 대독협력분자로 몰려 투옥되어 한달 만에 숨졌다. 다음해 프랑스 정부는 르노 사를 국유화하였다. 이로써 르노 자동차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르노 자동차 사는 프랑스의 대표적 국영기업(r&eacute;gie)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르노를 대독협력분자(collaborateur) 다른 말로 하자면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의 사유재산인 비양쿠르 공장을 몰수한 프랑스 임시정부의 인사들은 새로운 기업으로부터 르노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아온 르노라는 상표의 이름을 포기하고 어떻게 자동차를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반역자’ 르노의 이름을 새로운 회사명 &lt;R&eacute;gie Nationale des Usines Renault&gt; 에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을 창건하였던 루이 르노는 다른 프랑스 기업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르노는 프랑스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이는 기업가로서의 그의 삶이 20세기 전반의 역사와 너무나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를 다룬 전기가 여러 권 나왔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비극과 치욕으로 끝난 이 산업 영웅의 드라마틱한 생애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산업사의 관점에서 르노를 보려고 한다.4) 따라서 이 글은 기존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기업가로서의 루이 르노의 삶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르노가 프랑스 자동차 산업 뿐 아니라 20세기 전반 프랑스 경제와 사회에서 차지한 큰 비중을 고려해 본다면 이 짧은 소개의 글이 프랑스 자동차 산업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2. 출신배경과 기업의 창설 

 1871년 파리에서 태어난 루이 르노는 그의 경쟁자였던 앙드레 시트로엔 (Andr&eacute; Citro&euml;n)과는 달리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유태인인 앙드레 시트로엔은 프랑스의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명문대학인 에콜 폴리테크닉을 나왔다.5) 르노는 대학을 들어가는 대신 17세에 설계기사로 들로네-벨빌이라는 작은 자동차 회사에 입사하였다. 아마 이쯤 되면 루이 르노가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나 자수성가한 인물이라고 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이다. 르노는 프랑스의 부유한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알프레드 르노는 직물 상인이었을 뿐 아니라 단추 공장을 경영하는 기업가이기도 하였다. 집에는 하녀뿐 아니라 요리사와 마부 -- 오늘날 같으면 전용 운전기사 -- 가 있을 정도였으며 집도 굉장히 큰 집이었다. 땅과 건물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에 르노가 자동차 공장을 세우게 되는 센 강변의 비양쿠르에도 과수원과 채원 그리고 별장이 있었다. 이러한 파리의 탄탄한 부르주아 가문에서 4남 1여의 막내로 태어난 르노는 어릴 때부터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기계를 뜯어보고, 조립하고 자신이 직접 무엇을 만들어 보는 것을 취미로 하였던 그는 학교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기계 중에서 최근에 등장한 자동차는 특히 그의 관심을 끌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디옹-부통(Dion-Bouton) 사에서 만든 삼륜차를 사서 분해와 조립을 거듭하였다. 자신이 구입했던 자동차의 결점을 알아낸 그는 그보다 더 나은 자동차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곧 디옹-부통 사의 엔진을 장착한 소형자동차를 만들었다. 그가 21세 때의 일이었다. 자신이 만든 것과 같은 차를 사려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그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만들었다. 이것이 자동차가 처음으로 선을 보인 지 십여 년 뒤인 1898년의 일로서 르노 자동차 회사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었다.6) 르노가 공장을 세우는 데 필요한 돈은 그의 가족들이 대어주었다. 두 형들이 각각 3만 프랑씩을 출자하였던 것이다. 물론 손재주가 있는 루이 르노는 한푼도 대지 않고 노동을 제공하는 것으로 출자를 대신하였다. &lt;르노 형제 회사&gt; Renault Fr&egrave;res 라는 이름의 회사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자동차 회사라고 해서 오늘날의 자동차 회사를 머리에 떠올리면 곤란하다. 당시의 자동차 공업은 이제 막 출범한 상태였다. 컨베이어 벨트라는 것도 없었고 공장의 규모도 수공업 작업장과 유사한 것이 당시의 자동차 공장이었다. 르노 공장의 경우도 그 면적이 300 평방미터 정도에 불과하고 직원은 여섯 명이었다. 직원들도 르노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로서 르노와는 상하관계라기보다는 동료라고 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실제로 그 직원 가운데 한 사람은 르노의 군대 친구였다. 
 르노 자동차는 금방 유명해졌다. 1900년에는 직원수가 100 명을 상회하고 공장도 제법 크게 확장되었다. 르노는 왜 급속히 성공하였을까? 샤도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하나는 르노가 가진 발명의 재간이다. 특히 중요한 발명은 새로운 동력전달 방식이었다. 이전의 자동차들은 자전거처럼 체인을 통해 동력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기어 달린 자전거를 타본 사람은 이러한 방식의 동력전달 체계가 얼마나 불편한지 짐작할 것이다. 더욱이 자동차에는 엔진이 달려 있어 그 속도를 마음대로 줄이지 못한다. 르노는 이러한 단점을 기어가 맞물려 동력을 전달하는 “직접전동 방식” (prise directe)으로 해결하였다. 동력전달 방식에서의 이러한 획기적인 발명은 이후 지금까지 모든 자동차들이 채택하는 전동방식이 되었다. 당시에도 이 방식은 높이 평가되어 많은 자동차 제작자들이 이 방식을 그대로 도입하였다. 특허사용료도 지불하지 않고 직접전동 방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르노는 이러한 특허침해행위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였다. 판매액의 1 퍼센트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번 돈이 자그만치 350만 프랑이었다.7) 이러한 향상된 성능을 가진 자동차를 갖고 르노와 그의 형 마르셀은 용감하게 직접 자동차 경주에 뛰어들었다. 오늘날과 같은 자동차전용 경주장을 여러 바퀴 도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자동차를 최고속력으로 몰고 가는 것이 당시의 경주방식이었다. 1900년 당시 자동차의 최고속도는 이미 시속 100 킬로미터에 달해 있었다. 속도에 비해 안전장치는 부실하였다. 아직도 자동차를 위한 도로 -- 아스팔트로 포장한 도로 -- 는 출현하지 않아 마차들이 붐비는 도로를 달려야 하였으며 운전자는 먼지를 뒤집어써야 하였다. 고장과 사고가 빈발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동차를 직접 운전한 르노 형제는 여러 경주에서 승리하였다. 파리에서 툴루즈, 파리에서 베를린 심지어는 파리에서 비엔나까지 가는 코스였다. 1903년 파리-마드리드까지의 경주에서는 그의 형이자 중요한 동업자였던 마르셀이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 자동차 경주들에서 르노의 조그만 자동차가 연이어 우승함으로써 르노 자동차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당시의 자동차 경주에 대중들은 열광하였으며 언론도 크게 다뤘다. 르노 자동차는 자동차 경주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짜 광고를 한 것이다. 또 하나의 성공요인은 자동차 판매의 개념 자체를 바꾼 것이었다. 당시에는 자동차 사가 차대(車臺)만을 팔고 고객은 차체를 제작해주는 작업장 -- 수공업적 성격의 작업장 --을 찾아가 자기 주머니 사정과 취향에 맞게 차체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르노는 엔진을 직접 만들고 차체 부품들도 만들었다. 르노 사는 차대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점차 차체를 포함한 완성된 자동차를 팔기 시작하였다. 
 르노 자동차는 큰 인기를 누렸다. 영국과 미국, 독일 등 여러 나라에 수출도 하였다. 1909년 당시 런던의 택시는 절반 가량이 르노 차였다. (파리의 택시는 2/3) 1914년에는 런던에 르노 지사가 설립되었는데 여기서는 자동차 판매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특허침해를 감시하였다. 그리고 일차대전 직전에는 러시아에도 진출하여 모스크바와 여러 곳에 자동차 공장을 세웠다. 샤도 교수에 따르면 이 시기에 르노 자동차의 평균 수익은 20 퍼센트에 달했다고 한다.8) 이렇게 해서 번 돈을 르노는 기계설비와 공장건물에 투자하였다. 세계대전 직전에 르노 사는 유럽 제일의 자동차 제작사가 되었다. 이미 1908년에 유일하게 남은 그의 형 페르낭은 건강상의 이유로 손을 떼게 되었다. 루이 르노는 이제 유일한 회사의 주인이 되었으며 회사의 이름도 &lt;르노 형제 회사&gt;에서 &lt;루이 르노 자동차 제작사&gt; Automobiles Renault, Louis Renault constructeur 로 바뀌었다. 

 3. 미국과 전쟁의 충격 
  
 20세기초에 미국은 새로운 생산조직과 생산방식을 발전시켰다. 바로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프랑스 자동차 업계도 이러한 미국식 생산방식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루이 르노도 미국의 새로운 생산방식을 조사하기 위해 직접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포드와 테일러를 만났다. 미국식 생산방식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던 그는 귀국한 후 그의 공장에 미국식 생산방식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하는 일관공정과 대량생산의 포드주의보다는 ‘노동의 과학적 조직’을 통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려는 테일러리즘을 채택하였다. 포드식으로 공장을 재편하는 것은 엄청난 설비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이 적게 드는 테일러주의에 기울었던 것이다.9) 테일러주의에서는 노동생산성을 올리기 위해서는 작업도구 즉 공작기계에 대한 투자를 해야 하고 또 노동자들의 표준작업시간을 정하고 작업리듬을 그에 따르게 만드는 소위 ‘시간측정’ (chronom&eacute;trage)를 역설하였다. 르노는 무엇보다 후자에 끌렸다. 그는 시간측정을 공장에 크게 확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노동의 리듬을 강화하고 노동자들의 작업을 면밀히 감시하는 이 체제에 대해 노동자들이 반발하였다. 1913년 초의 파업은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크로노메트라지의 폐지를 요구하며 4주 동안이나 파업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루이 르노는 그 요구를 거부하고 공장폐쇄를 단행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을 개별적으로 심사하여 선별고용하였다. 비양쿠르 공장에서 파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테일러주의는 이제 르노 공장의 조직원리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10) 
 르노는 포드의 방식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생산비를 줄이기 위해 주요한 부품과 소재를 만드는 공장을 합병하거나 직접 세우는 쪽을 택했다.(수직적 계열화) 그리고 생산품목의 다양화를 선택하였다. 르노의 경쟁자가 되는 시트로엔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단일한 품종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포드식 방식을 충실히 따랐다.11) 르노 사는 이전부터 생산해온 택시나 트럭은 말할 것도 없고 버스, 청소차 그리고 심지어는 항공기와 선박 부품도 생산하였다. 이러한 전략이 더 나은 전략이었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당장은 르노 사를 곤경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이전에 르노는 수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기업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1913년에는 프랑스 자동차공업 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이러한 자리로 인해 그는 정부 인사들과 빈번한 접촉을 하게 되었다. 밀랑과 브리앙 그리고 알베르 토마 같은 인물들이 그러한 사람들이다. 특히 알베르 토마는 사회주의 지도자로서 노동문제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토마는 전쟁이 일어나자 군수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르노는 산업계의 대표로서 군수물자 생산에 협력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르노의 비양쿠르 공장 역시 군수공장으로 전환되었다. 무엇보다 긴박하게 요구된 것은 포탄 생산이었다. 르노 사는 이 시기에 프랑스 제일의 포탄생산 공장이 되었다. 포탄 외에도 르노 사가 생산한 군수물자로는 트럭, 대포, 비행기 엔진과 비행기 동체, 탱크 그리고 소총 등이 있었다. 특히 항공기 엔진은 전후에도 르노의 주력 생산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은 항공기 -- 물론 전투용 비행기 -- 의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시기이다. 르노 사는 비양쿠르 공장에 항공기 생산 작업장을 설치하였다. 
 르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의 구원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만든 탱크 때문이다. 물론 르노가 처음으로 탱크를 제작한 것은 아니다. 생-샤몽 사와 쉬네데르 사가 프랑스 군의 요구에 따라 만든 탱크는 너무 느리고 무거워 적의 참호를 돌파할 수 없었다. 르노는 그 대안으로 기동력이 양호한 경형 탱크를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1917년의 FT 탱크였다. 이 탱크로 인해 프랑스 군은 1918년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전쟁을 승리로 몰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12) 

4. 전간기 르노의 사업 

 르노는 전쟁 이전부터 생산비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써 수직적 통합을 추진해왔다. 부품 생산을 하청업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가능한 한 피하고 직접 생산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물론 르노 혼자서 부품공장을 세우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기업들을 끌어들인 경우가 많았다. 자동차용 전기부품 생산을 위한 회사 (SEV)를 파나르, 베를리에 등 다른 자동차 기업들과 함께 설립한 것이나 철강제품의 공급 확보를 위해 다른 철강재 소비자들과 함께 로렌 지방에 제강소 (UCPMI)를 설립한 것이 그런 예가 된다. 
 그리고 대공황 직전에 미국을 다시 방문한 르노는 초현대식 공장을 세울 결심을 하였다. 비양쿠르에 인접한 세갱 섬에 1억 프랑의 돈을 투자하여 공장을 건립하였다. 이 공장은 이제 원자재를 제외한 자동차 부품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과감하게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르노는 다양한 차종 생산을 고집하였다. 이것이 시트로엔과 그의 주요한 차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르노는 6 CV 짜리 소형차도 생산하였지만 6기통 40 CV 의 고급 승용차도 생산하였다.13) 그러나 전간기 동안에 출시된 르노 사의 다양한 자동차들은 혁신적인 것은 드물었고 대부분 이전의 모델들을 조금씩 개량한 것이었다. 이는 르노가 제1차대전 이전에 74 건의 특허를 얻었던 것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따라서 댕글리가 이 시기의 르노가 기술적인 면에서 보수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르노는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는 달리 자동차만을 생산한 회사는 아니었다. 르노는 1925-1943년간에 총 256건의 특허를 획득하였는데 이는 자동차 기술이라기보다는 비행기 제작, 기관차 제작, 탱크, 특수강 등 주로 다른 분야에서의 특허였다.14) 
 르노가 대공황기에 확장한 사업 가운데 하나는 유명한 비행기 제작사인 코드롱 (Caudron) 사를 인수한 것이다. 당시에 비행기는 일반인들로부터 대단히 큰 관심을 끌고 있었다. 코드롱 사는 초기의 비행기 제작자 가운데 한 사람인 코드롱 형제가 설립한 것으로 제1차대전기에 크게 성장한 회사였지만 당시에 자금난과 경영부실 그리고 노후설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비행기 엔진을 제작해 왔던 르노는 개인적으로 비행기를 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회사의 자동차 선전에 이 항공기 제작사의 이미지가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속도와 모험의 이미지 -- 시트로엔의 경우 아프리카, 중앙아시아로 대규모 탐사여행을 기획하여 프랑스인들의 환호를 받았었다 --를 르노 사 제품에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공기 산업에 이렇게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결과적으로는 완전 실패였다. 생각처럼 민간수요가 많지 않았고 국가의 전투기 구매사업도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15) 
 대공황은 프랑스 자동차 산업에 큰 시련과 변화를 가져왔다. 수요는 격감하고 해외수출도 어려워졌다. 많은 소규모 자동차 회사들이 이 시기에 사라지거나 변신을 강요당했다. 프랑스에서 3대 자동차 회사가 정립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대공황기였다. 그리고 3대 자동차 회사의 하나로서 르노 사를 앞섰던 시트로엔 사는 경제여건이 악화되어 가는 데도 불구하고 공장을 새로 짓고 광고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바람에 그만 파산하였다. 르노 사의 경우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위기에 몰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르노 사의 재무상태가 양호하였기 때문이다. 르노는 신규투자를 은행가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르노 사의 자본금에서 이 시기에 은행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3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르노 사는 르노가 대부분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투자자금은 모두 르노의 개인재산에서 나왔다. 대부분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던 르노는 주식을 시장에 유통시키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주식가격의 폭락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르노 사는 재무구조가 탄탄한 대신 혹독한 노동쟁의를 겪어야만 하였다. 대공황기에 르노 공장은 1936년과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노사분규를 겪었다. 이 파업들은 프랑스 노사관계의 발전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띠기 때문에 좀 자세히 살펴보자. 1936년의 파업은 5월 12, 13일 르아브르와 툴루즈 등에서 시작되었는데 14일에는 파리 지역에서도 파업이 일어났다. 르노의 비양쿠르 공장에서도 5월 27일부터 파업이 시작되어 공장 전체로 확산되었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의 산정방식 개선, 위생 및 안전설비 확보 등 통상적인 요구를 제시하였다. 르노 사측에서는 신속하게 그 요구를 수용하였다. 사측에서는 또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내쫓기 위해 공권력의 개입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상황을 악화시킬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도 자체적으로 규율을 유지하여 기계나 건물을 파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점거한 비양쿠르 공장은 살벌한 분위기보다는 마치 축제를 여는 듯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가족들을 공장으로 초청하기도 하고 노래소리가 울려퍼지고 연극이 공연되기도 하였다. 그 사이사이에 공산당 지도자들의 연설이 있었다. 공산당 (PCF)과 노동총동맹 (CGT) -- 비교적 온건한 노동총동맹과 혁명적인 독립노동총동맹 (CGTU)은 연초에 통합을 선언하였다 -- 의 인사들은 르노 공장이 갖는 중요성을 감안해 르노 공장의 파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개입하였다. 이 시기의 사정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16) 파업이 전국에 걸쳐 걷잡을 수 없게 확대되어 나가자 재계의 지도자들은 노동계와의 협상을 모색하였다. 노동총동맹 측에서도 자신들이 통제하기 힘든 파업의 물결을 잠재우기 위해 해결책을 인민전선 정부에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상관저인 마티뇽 관에서 노동총동맹과 프랑스 자본가들의 조직인 프랑스생산연합 (CGPF) 간의 협상이 시작되어 타결을 보았다. 이것이 유명한 마티뇽 협정으로서 그 내용은 노동조합의 자유를 보장하는 단체협약 체결을 기업에서 승인하며, 기업이 파업 때문에 노동자를 징계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그리고 임금인상을 약속하였다. (7퍼센트에서 15 퍼센트 사이) 반면 노동계는 노조활동을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것과 10인 이상의 모든 작업장에서 노동자 대표 (d&eacute;l&eacute;gu&eacute;)를 선출하라는 기업가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또 공장점거를 종식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협정체결은 좌파진영과 노동자들에게 노동자들의 대승리로 여겨졌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인민전선 정부라는 친노동자적 좌파정부를 가졌을 뿐 아니라 전국적 파업운동을 통해 자본가들로부터 양보를 얻어내었다. 르노의 노동자들은 축제와 같은 파업을 13일까지 계속하였다. 그날 르노의 노동자들은 경영진이 포진한 건물 앞을 의기양양하게 행진하였다. 르노 노동자들은 -- 물론 프랑스 노동자 전체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 곧 레옹 블룸 정부가 의회에 제출하는 주 40 시간 노동제와 2주간의 유급휴가제를 선물로 받게 된다. 
 그런데 르노 공장의 노동자들이 마티뇽 협정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13일까지 파업을 계속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샤도 교수는 6월 2일 르노 사의 양보에 의해 노동자들의 요구가 수용되었지만 4일부터 다시 파업이 재개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6월 4일부터 13일까지의 파업에서 문제가 된 것은 노동자 대표제였다고 한다.17) 재계와 정부, 그리고 노동총동맹의 온건파들 (레옹 주오 서기장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은 노동자 대표를 오늘날의 고충처리위원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노동자들의 불만사항을 사측에 제시하고 노동법 규정의 준수여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반면 공산당 계열 인사들은 고용 문제에서 고용주가 협의해야만 하는 영국식 작업장 대표 (shop steward)로 생각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협상은 이번에는 르노 사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파리 지역의 금속노조 연맹과 파리 지역 기업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비양쿠르 공장의 사태는 르노 사를 넘어서 프랑스 전체 노사관계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12일 협상은 공산당 측의 패배로 끝났다. 정부도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노동총동맹의 온건파들도 과격파들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당 활동가들은 이제 노동자 대표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공장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1938년 11월의 파업은 36년의 파업과는 다른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36년의 파업은 인민전선과 노동자들의 승리라는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치 축제처럼 진행되었던 것이었다면 1938년 파업은 인민전선 정부와 그 정책이 흔들리는 가운데 일어났다. 36년과는 달리 프랑스의 기업가들도 호락호락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11월의 파업은 40시간 노동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주지하다시피 40시간 노동제는 인민전선 정부의 주요한 치적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경제상황의 악화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40시간 노동제를 그대로 시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특히 히틀러의 야심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에 군비생산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처지였다. 군수부문을 제외하면 다른 부문에서는 노동력을 구하기 힘들어 설비를 놀리는 형편이었다. 기업가들의 압력을 받은 달라디에 정부는 초과근무가 가능하도록 40시간 노동제와 연관된 시행령을 제정하였다. 이 시행령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다섯 시간의 초과근무를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초과근무 수당은 일반 임금보다 높다) 이렇게 되면 토요일에도 근무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40시간 노동을 중요한 투쟁의 성과로 생각하였던 노동총동맹총과 공산당이 장악하였던 금속연맹 인사들에게 이 시행령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공산당은 파업으로 맞섰다. 11월 21일부터 여러 곳에서 일어난 파업은 공산당의 지시로 시작된 것이다. 르노 공장은 다시 이번 파업 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공산당과 금속연맹의 지도부는 22일 비양쿠르 공장 문 앞에 위치한 쥘 게드 -- 프랑스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 --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이날 우연하게 두 명의 노동자 대표가 해고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날의 집회는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24일 르노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공장점거를 수반한 파업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공권력이 가만있지 않았다. 무려 4천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파업을 진압하였다. 루이 르노는 즉각적인 공격을 반대했지만 경찰에서는 이번 공장점거 사태의 불법성과 그것이 내포한 중요성 -- 만일 이번 점거사태가 방치된다면 파리 주변 지역 일대에 공장점거 파업이 들불처럼 퍼져나갈 것이라는 주장 -- 을 지적하며 강제진압 작전을 시행하였다. 그 다음에는 우리 나라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들이다. 경찰은 건물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향해 최류탄을 쏘아대며 공격하고 노동자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주위의 이용가능한 물건들을 던지거나 휘두르며 저항하였다. 이 전쟁 아닌 전쟁의 결과는 우리가 자주 목도한 것과 매한가지였다. 붙잡힌 노동자들은 경찰서로 연행되고 공권력에 대한 집단적 무장반란의 죄로 기소되었다. (이들은 며칠에서 수개월간의 구류에 처해졌다) 
 다음날 르노 사측에서는 공장폐쇄를 단행하고 노동자들을 심사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노동자들은 재고용에서 제외할 것을 선언하였다. 실제로 20 퍼센트 정도의 노동자들은 다시 고용되지 못했는데 이들은 모두 공산당 계열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당국에 의해 “주모자”로 처벌을 받았던 300 명 가까운 수의 노동자들은 다음에 3월에는 상원의 발의로 사면되었으나 르노 사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르노 사가 이들의 고용을 거부하였던 것은 물론이지만 주변 공장에서도 이들의 블랙 리스트가 나돌아 이들의 취업을 거부하였다. 
 이 파업의 실패는 결국 공산당과 노동운동의 패배라고 할 수 있다. 노동총동맹은 르노 사와 정부의 조처에 항의하여 즉각 총파업을 벌일 것을 지시하였으나 파업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 패배에 대해 몇 년 후에 복수를 하게 된다. 바로 루이 르노에게. 
 
 5.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점령기의 르노 

 1939년 9월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독일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1940년 6월에 전쟁이 끝나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르노는 프랑스가 독일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후 조국의 방어를 위해 협력하지 않고 오히려 독일 점령군에 협력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그는 이러한 죄 때문에 투옥되고 기업까지 빼앗기게 되었던 것인데 과연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프랑스의 구원자 역할을 하였던 루이 르노는 이 새로운 전쟁에서는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전쟁이 시작되자 르노의 공장도 군수생산을 위한 공장으로 전환되었다. 공장에는 전선으로 보내지는 대신 산업현장에 동원된 노동자들이 수천 명 배치되었으며 군수부에서 파견된 감독관이 상주하였다. 그런데 군수부 장관과 르노는 비양쿠르 공장의 역할에 대해 의견이 충돌하였다. 기업가 출신으로 군수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던 라울 도트리(Raoul Dautry)는 르노 공장이 승용차 생산은 중단하고 탱크를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르노는 탱크보다는 트럭과 승용차를 생산하고 탱크는 다른 기업이 만들기를 원했다. 그의 경험으로는 전쟁이 끝나면 탱크 생산 설비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희망은 군수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르노가 군수부의 요청에 적극 호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후에는 르노 개인에게 크게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군수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화가 난 르노는 “국방이라고? 난 몰라. 내가 원하는 것은 돈이 되는 프리마카트르나 쥐바카트르야”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18) 심지어 르노는 자기 회사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르노는 정부의 요청대로 군수품 생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전황이 악화되었다. 
 1940년 5월에 들어서는 독일군의 침공이 본격화된다. 전황은 파국적인 양상으로 치달아갔다. 프랑스는 북부와 동부 전선에서 패배하여 공업지역을 넘겨주어야 하였다. 그 결과 전쟁수행을 위한 물자생산 능력의 태반을 급속히 상실하였다. 다급한 처지에 몰렸던 당시의 수상 폴 레이노는 르노의 도움을 구했다. 미국에 가서 군수품 생산을 위한 도움을 얻어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르노는 건강이 무척 나빴고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느낀 듯하다. 4월 9일에는 아주 구체적인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장 모네를 단장으로 한 군수물자 구매단이 미국에 파견되어 있었는데 또 르노를 미국으로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준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은 물론이다. 건강이 나쁜 르노가 왜 이런 제안에 응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6월 5일 뉴욕에 도착하여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측 인사들을 만나 협조를 당부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6월 17일 파리가 점령당해 패배하였다.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하고 정전협상을 제안했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루이 르노의 임무는 어처구니없이 끝나 버렸다.19) 
 1940년 7월부터 비양쿠르 공장은 다시 문을 열었다. 비시 정부도 파리의 실업자들을 생각해서 공장 문을 여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독일군 당국이 르노 공장을 그대로 놔둘리 만무하였다. 이들은 말로는 르노 공장이 민수용 생산만 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곧 군용트럭의 부품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프랑스 군으로부터 노획한 고장난 탱크의 수리를 요구하였다. 독일 당국의 문서는 몇몇 증인들의 증언과는 반대로 르노가 분명히 독일 당국의 요구를 거부했음을 밝히고 있다.20) 독일 점령당국은 르노에게 최후통첩을 하였다. 명령하는 수리작업을 이행하고 사보타지가 있는 경우 르노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르노는 독일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독일이 요청하는 탱크수리를 해주고 군용트럭을 생산하였다. 일반용 승용차 생산은 할 수 없었는데 이는 시트로엔이나 푸조 사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연합국이 보기에 르노의 비양쿠르 공장은 제3제국의 주요 군수시설의 하나였다. 그래서 1942년 1월에 영국 공군은 비양쿠르 공장의 폭격을 결정하였다. 1942년 3월 3일 밤에 비양쿠르 공장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있었다.21) 영국의 폭격기가 무려 230 여대가 몰려와 폭격을 하였던 것이다. 독일을 위해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모든 프랑스의 공장들은 공습의 대상이 된다는 구실을 영국은 내세웠다. 5백명 정도가 사망하였을 뿐 아니라 생산시설이 큰 타격을 입었다. 다음 해에도 르노 사의 르망 공장 -- 순전히 군수공장이었다 -- 도 표적이 되었으며 비양쿠르 공장은 세 차례에 걸쳐 다시 폭격을 당했다.22) 르노 사의 경영진들은 폭격을 받은 후에도 공장을 복구하고 생산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1944년 여름에 공장 문을 닫게 된 것은 이러한 폭격 때문이 아니었다. 에너지와 원자재 및 노동력 부족 때문이었다. 1944년 7월 23일 문을 닫았던 비양쿠르 공장은 독일군이 철수한 후에야 다시 공장문을 열게 된다. 

6. 르노의 최후와 르노 자동차사의 변화 

 독일군이 퇴각한 후 프랑스에서는 여러 레지스탕스 조직들에 의한 숙청활동이 펼쳐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재판을 거치지 않고 약식처형이 자행되는가 하면 완장을 두른 자들에 의한 약탈행각 또한 빈번하게 일어났다. 대독협력분자에 대한 처리도 엄격한 법적 절차를 따라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독일에 협력한 -- 아니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 기업가들에 대한 숙청작업에서는 공산당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되었다. 드골 측도 기업가들에 대한 공산당의 처리방침을 받아들였다. 
 르노를 직접 고발은 사람은 르노 드 탕플러리라는 77세의 늙은이였다. 이 사람은 르노와 개인적인 안면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서 르노가 공장이 폭격을 당한 후 5억 프랑의 보상금을 받았으며 독일의 주문을 통해 2억 프랑을 벌었다는 소문을 알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23) 르노는 1944년 9월 18일 법원에 출두하여 심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독일에 협력함으로써 국가의 안보에 타격을 가했다는 주장을 단호하게 부인하였다. 자신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독일을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생산을 늦추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진술이 끝난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공산당 언론 -- 공산당 기관지 &#43092;뤼마니테&#43093; -- 은 르노가 체포되지 않고 도주했다고 떠들어댔다. 
 공산당 언론들은 르노의 문제를 독일에 협력한 기업가들 처리의 시금석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르노는 프랑스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르노를 심판하지 못하면 레지스탕스의 혁명적 이념은 공허한 것이 된다! 공산당의 압력 하에 결국 사법부도 굴복하였다. 9월 22일 르노는 2차 심문을 받은 후 투옥되었다. 2차 심문에서 르노의 변호인은 1940년에 르노 공장의 수익은 6,200 만 프랑이었다가 정전협정이 맺어진 후인 1941년은 1,800 만 프랑으로 줄어들고 다음해에는 수익이 거의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24) 르노가 독일 당국에 협력함으로써 큰 이익을 취했다는 주장을 수치로 논박한 것이다. 그러나 예심판사는 르노의 투옥을 명령하였다. 그는 파리 인근의 프렌 감옥에 수감되었다. 10월 10일에는 건강 때문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뇌출혈이 일어났으며 상태는 하루하루 악화되어 갔다. 혼수상태, 극심한 통증, 경련이 반복되었으며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10월 24일 르노는 운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주말이면 늘 가서 쉬던 센 강변의 에르크빌(Herqueville) 마을 교회 묘지에 묻혔다. 묘비명에는 “루이 르노, 1877-1944”란 말 외에는 아무런 말도 적혀 있지 않았다.25) 
 르노가 감방으로 간 직후 이제 르노 공장의 처리가 남게 되었다. 일단 국유화의 원칙이 정해졌다. 레지스탕스 운동으로부터 나온 프랑스 임시정부는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대규모 국유화이다. 국가의 기간산업과 공공서비스 부문에 속한 기업들을 다수 국유화하였다. 이는 프랑스 경제의 관건이 되는 부문에 대한 사적 지배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26) 한편 독일에 협력한 일부 기업들에 대해서는 징벌적 차원에서 국유화를 단행하였다. 항공기 엔진을 제작하는 &lt;그놈 에 론&gt; Gnome et Rh&ocirc;ne 과 자동차 사로는 르노 사와 베를리에 사가 그 대상이 되었다. 앞의 경우와는 달리 이 기업의 주주들에게는 아무런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르노 사의 경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르노 사를 국유화할 때 법적인 형식이 문제가 되었다. 징발의 형식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몰수의 형식을 취할 것인가? 징발의 경우는 아무리 당시가 전시라 하더라도 소유주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 그 액수가 엄청날 것임은 자명하였다. 반면 몰수는 재판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아직 재판은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이다. 더욱이 재판이 시작되면 법적으로는 르노가 유리하다.27)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압류였다. 정부는 10월 4일 피에르 르포쇠 (Pierre Lefaucheux)를 공장의 임시관리인으로 임명하였다.28) 
 1945년 1월 15일 정부령에 의해 르노 공장은 정식으로 국영 기업이 되었다. 정부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르노는 전쟁 전과 전쟁 동안 그리고 독일 점령기에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독일을 위해 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조국의 배반자이다. 조국의 배반자에 대한 징벌은 죽음과 재산몰수이다. 이제 르노가 죽었으니 그 재산을 몰수하자. 이리하여 1945년 초 국영기업 르노 (RNUR)가 탄생한 것이다.29) 
 프랑스 최대의 기업 르노를 몰수한 프랑스 정부는 르노의 가족에게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정식 재판 없이 한 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프랑스에서는 통했는지 몰라도 르노가 기계를 사기 위해 은행계좌를 갖고 있었던 미국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미국 뉴욕주 법원은 재판절차 없는 몰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영기업 르노 사에게 르노 개인의 계좌를 넘겨주지 않았던 것이다.30) 르노의 유족들 -- 르노의 부인 크리스티안과 아들 장 루이 -- 은 법적인 수단을 통하여 기업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불가능하였다. 르노 유족에게도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르노가 제1차대전기에 얻은 이익에 대한 세금이 아직 미납되어 있었고 또 르노가 독일점령기에 획득한 부당이득에 대한 엄청난 세금을 납부해야 하였다. 그 벌금이 무려 16억 프랑을 넘었다. 그리하여 유족과 르노 사(RNUR)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전 르노의 자동차 회사 (SAUR)에 속했던 국내외의 모든 자산을 국영기업 르노 사(RNUR)에게로 이전하는 것에 유족이 반대하지 않기로 한 대신 국영기업 르노 사가 르노 개인의 부당이득에 대한 벌금과 전시의 수익에 대한 세금 그리고 루이 르노의 개인 채무의 절반을 떠맡는다는 것이었다.31) 이 타협으로써 르노 공장에 대한 유족들의 법적 싸움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국영기업이 되고 난 후 르노 사는 어떻게 경영되었던가? 이는 루이 르노의 생애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문제이지만 산업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문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간략히 살펴보자. 

 7. 르노 이후의 르노 사 

 르노 사의 경영을 맡은 르포쇠는 예전의 르노 공장을 ‘감옥’이라고 비난하면서 르노 사를 혁신하려고 하였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와 노동조합과의 관계가 달라졌다. 노동자들에게는 사실상의 종신고용이 보장되었다. 이 때문에 르노 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손자까지 삼대가 함께 근무하는 경우가 생겨날 정도였다.32) 노동자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도 개선되었다. 갖가지 명목의 수당이 신설되었을 뿐 아니라 휴일에도 임금을 지급하기 시작하였으며 (1955년) 월급제도 확대되었다.(1959년) 또 임금을 물가지수에 연동시켜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보장하였다. 휴가도 프랑스 최고수준을 달렸다. 1955년에는 유급휴가가 연 3주로 늘어났으며 다시 몇 년 뒤인 1962년에는 4주로 연장되었다. 노동시간도 축소되었다. 노사 관계도 개선되었다. 노동자 대표들은 인사관리에서 중요한 협력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르노의 경영진은 르노 공장의 노동조합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노조와 교섭하였다. 그리하여 1955년 노조와의 협약이 최초로 체결되었는데 이 협약에서는 2년간 임금을 인상하며 유급휴가를 3주로 늘리는 대신 노동조합들도 파업에 호소하기 전에 화해를 위한 모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무가 규정되었다.33) 이러한 노조와의 협력관계를 설정함으로써 르노 사는 노사분규를 피하고 기업의 안정적 경영을 위한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르노 사에는 노동총동맹 (CGT) 뿐 아니라 좀더 온건한 민주노총 (CFDT)이나 노동자의 힘 (FO) 같은 노동조합이 있었으나 친공산당 계열의 노동총동맹이 압도적인 우위를 누렸다. 노동조합은 ‘기업위원회’ (CE)를 통해 노동자들의 생활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70년대에 이 조직은 임금총액의 2 퍼센트에 달하는 예산을 운용하였으며 직원도 600 명이나 되었다.34) 노동총동맹은 자신들의 활동가들을 이 자리에 배치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해고된 노동자들도 기업위원회의 직원으로 채용되어 버젓이 르노 공장을 드나들 수 있었다. 르노의 비양쿠르 공장은 노동총동맹의 아성이 되었던 것이다. 
 르노 사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복지에서 기수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르노 사에서 노동자들에게 부여한 혜택은 국가에 의해 제도화되거나 다른 기업들에서도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르노 사 방식의 노사관계는 경영이 순조로운 한에 있어서만 유지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었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까지는 국내외의 시장이 꾸준히 확대되어 더 많은 생산을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영광의 30년’ 동안 이러한 노사간의 타협체제는 잘 굴러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 오일 쇼크로 시작된 경제적 위기와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강력한 도전으로 경영환경이 급속히 악화되었다.35)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말부터 르노 사도 적자를 모면하지 못했다.36) 오랫동안 해고와는 거리가 멀었던 르노 사도 구조조정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인력과잉이 무려 2만 명에 달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제 구조조정의 시간이 도래하였던 것이다. 1985년에는 노조활동가들에 대한 해고가 있었으며 파업과 폭력사태가 뒤따랐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저항은 대세를 바꾸지 못했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 구조조정은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인력감축을 비롯한 구조조정의 결과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이 몇 년 내에 크게 향상되었다. 10년 내에 원가도 절반이나 하락하였다.37) 그리고 1987년부터는 재무상태도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모두 사회당 정부 하에서 시작되었다. 1982년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법 개정을 주도하였던 사회당 정부도 경제환경의 변화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우파 정부는 르노 사의 민영화를 추진하였다. 국가가 대주주의 지위를 유지하였지만 주식의 상당 부분이 일반에 매각되었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르노 자동차 사의 법적 지위도 바뀌게 되었다. 국영공장 르노 (RNUR)로부터 이제 그냥 주식회사 르노 (SAUR)로 바뀌었던 것이다.38) 비슷한 시기에 르노 사에 또 하나의 중요한 -- 상징적인 -- 변화가 있었다. 바로 비양쿠르 공장의 폐쇄이다. 물론 노동조합의 반대투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992년 3월 31일 프랑스 자동차 산업의 성지이자 프랑스 노동운동의 성지이기도 한 비양쿠르 공장이 문을 닫았던 것이다. 그 대신 여러 곳에 최첨단 공장들이 들어섰다.39) 이 역시 산업의 현대화를 위한 불가결한 조처였던 것이다. 

8. 맺음말 

 앞에서 보았듯이 루이 르노는 성공한 기업가였다. 그는 오로지 기계에 대한 열정과 재능으로 프랑스의 최대 자동차 회사의 하나를 키워냈다. 그의 기업은 대공황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의 주요한 경쟁자였던 앙드레 시트로엔과는 달랐다. 시트로엔은 대공황 속에서 파산하여 기업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르노 역시 대독협력분자로 몰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시트로엔은 파산한 후 얼마 있지 않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유수한 기업을 키워내고 많은 재산을 모은 성공한 기업가였지만 말년의 삶이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행불행은 우리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루이 르노라는 인물에 의해 세계적인 자동차 제작사가 하나 만들어졌으며 이 기업은 그가 사라진 이후에도 프랑스의 경제를 떠받치는 주요 기업의 하나로 남았다는 것이다. 루이 르노가 사라진 뒤에도 르노 자동차는 국영기업이라는 독특한 지위를 기반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국영기업 르노의 경영상의 여러 특징들과 그 성과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흥미로운 연구과제로 남아있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루이 르노라는 개인이 없었더라면 르노 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 이는 마치 정주영이 없었더라면 현대 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며 이병철이 없었더라면 삼성반도체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르노는 공산당과 노동운동 진영으로부터 노동자의 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로 인하여 많은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삶을 영위하고 프랑스가 그 산업적 역량을 자랑할 수 있는 대기업이 하나 만들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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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도요타 정리해고 투쟁

필리핀 도요타, 233명 해고, 25명 형사고소
[도요타반대세계공동행동](1) - 도요타 반대 세계공동행동 전개
필리핀도요타노조지원모임 
세계 다국적기업의 대표격인 도요타에 반대하는 운동이 국제금속노련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도요타반대 세계공동행동은 지난 6월말부터 시작되었다. 이번 공동행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필리핀 도요타노조는 일본대사관과 도요타영업소에 대한 항의행동을 통해 도요타기업의 부당노동행위를 규탄하였다. 또한 남아프리카의 도요타공장과 브라질 상파울로에 있는 두 곳의 도요타공장이 1시간 파업을 벌였고, 그외 각국의 노동조합이 도요타 기업에 항의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등 다국적기업 도요타 반대 세계공동행동의 연대가 시작되었다.

7월19일 열린 필리핀도요타노조 지원 북관동결의대회

도요타 본사가 있는 일본에서는 6.16일 도요타 도쿄본사 항의 행동을 시작으로, 필리핀 도요타노조를 초청하여 아이치본사, 카나카와, 아이치, 오오사카, 기타관동, 도쿄 지역에서 연이은 항의집회를 실시하였다.

7월 19일 열린 '세계는 도요타의 부당노동행위를 규탄한다. 필리핀도요타 노조지원 도쿄집회'에는 1백여 명이 참가하여 도요타노조의 현지 투쟁을 소개하는 영상과 함께 세계공동행동의 동참과 확대를 결의하였다.

에도 필리핀 도요타노조 위원장

에도 필리핀 도요타노조 위원장은 필리핀 도요타노조가 설립되기까지의 과정과 승인선거를 둘러싼 회사측의 탄압을 생생하게 보고하였고, 다국적기업 도요타와 싸우고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과 함께 일본,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 국 노동자의 연대를 호소하였다.

필리핀도요타노조 지원 도쿄결의대회

'필리핀 도요타노조를 지원하는 모임'의 야마기와 대표는 "세계를 대표하는 다국적 기업 도요타의 부당노동행위를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된다"라며 필리핀 도요타노조와의 연대 및 전 세계 도요타 반대행동의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편 호주제조노조(AMWU)는 최근 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도요타노조에게 미화 1500 달러를 투쟁기금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자리에 참여한 캐나다 자동차노조(CAW)와 CWA노조, 뉴질랜드 EPMU노조도 각각 미화 1500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도요타반대 세계 노동자 공동행동 성명서
세계의 모든 노동자 시민에게 호소한다!
도요타 반대 세계 공동행동의 더 넓은 확대를!

ILO권고와 필리핀 법(최고재판결)을 존중하고 해고자 136명의 원직복귀와 단체교섭의 개시를!

필리핀 도요타의 단체교섭거부, 233명의 해고, 25명의 형사고소

1988년 필리핀 도요타가 설립되어, 2000년 3월 필리핀 도요타노조(TMPCWA)는 필리핀 도요타 노동자의 3번째의 도전끝에 처음으로 단체교섭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필리핀 도요타측는 단체교섭을 거부하고, TMPCWA의 단체교섭권을 박탈하기 위해 노동고용성에 고소했다. 그리고, 필리핀 도요타측은 2001년 3월 노동고용성의 공청회에 참가한 조합원 233명을 '결근'하였다는 이유로 해고하여, 64명을 정직처분했다. 이 해고와 정직처분에 대항하여 TMPCWA는 파업을 시작했고, 이에 대하여 필리핀 도요타 측은 조합원 25명을 '[눈을 치켜들었다' 등의 이유로 형사고소 하여, 필리핀 정부에게 "파업을 해결하지 않으면, 자본을 전부 거두어들이겠다"라고 위협하여 파업중지명령을 내리게 했다.

최고재판결도 ILO권고도 무시하는 토요타와 필리핀 정부

2003년 9월 필리핀 최고재판소는 TMPCWA의 단체교섭권을 확인하는 판결을 내렸으나, 필리핀 도요타 측은 이것도 무시했다. 2003년 11월 국제노동기관(ILO)은 단체교섭개시, 피해고자의 원직복귀, 형사기소의 취하를 필리핀 정부에 권고하였으나, 필리핀 정부와 도요타는 이것도 무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6년 동안 한번도 필리핀 도요타 노조와 단체교섭을 행하지 않은 채, 올해 2월에는 필리핀 법 절차를 무시한 채 새로운 승인투표(CE)를 강행하였고, 4월에 당사자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불공정한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어용노조의 승리를 선언, TMPCWA로부터는 단체교섭권을 박탈했다.

투쟁의 연대는 세계로, 도요타 반대 세계 공동행동에

올해로 TMPCWA의 투쟁은 7년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TMPCWA는 형사기소를 당한 25명 중 18명이, 피해고자 233명 중 136명이 현재 노조원으로 남아 있고, 공장 안에도 200명을 넘는 조합원이 회사측, 어용노조와 싸우고 있다. 이 6년이 넘는 불굴의 투쟁이, 필리핀 최고재판결정과 ILO권고를 받아내었고, 2004년 이래 ILO총회 의 압력활동을 통하여 각 국의 많은 노조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2005년 8월 이후 국제금속노련(IMF)이 필리핀 도요타 측과 일본 및 필리핀에서 교섭을 개시하였고, 올해 3월 세계 6곳의 도요타공장 노동조합을 마닐라에 집결시켜 회의를 하였다. 하지만, 필리핀 도요타 측의 불성실한 자세로 교섭이 결렬되어, IMF는 5월 오슬로 세계집행위원회에서 토요타에 대한 세계 공동행동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도요타 반대 세계 공동행동의 제1차 행동이 6월 말에서 7월에 걸쳐서 IMF의 전면적 지원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의 반대 토요타 캠페인 제1차행동

필리핀 현지에서는TMPCWA와 그 지원자에 의해 일본 대사관과 도요타 영업소에 대한 항의 행동이, 일본에서는 6월에 노동조합, 시민에 의한 도요타 동경본사 항의 행동이 이루어졌고, 계속하여 7월에는 필리핀 도요타 노조의 에도 쿠베로 위원장, 웨네시트 알헬 부위원장과 일본 전국의 노동자 시민에 의한 토요타의 아이치현 도요타시 본사에 대한 항의 행동이 이루어졌고, 이후 전국 5곳에서 필리핀 토요타 노조를 지원, 격려하는 연속 집회가 일어났다.

그리고, IMF 산하의 남아프리카와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 타이, 영국 등의 각국 도요타 공장에서는 브라질에서의 제한 파업을 포함하여 경영진에 대한 건의 행동, 도요타에의 항의 행동이 행해졌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AMWU의 대회에서는 영국 AMICUS, 캐나다 자동자 노동조합, 뉴질랜드 EPMU 등과 IMF 본부로부터 마렌터키 서기장, 필리핀의 MPCWA 빌지리오 코란덕 집행위원, 또한, 이 대회에 참가한 구 영국연방제국노조 등이 TMPCWA에 대한, 정신적, 물질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 노조와 IMF-JC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으나, 도요타에 대한 세계 캠페인은 확실하게 그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 투쟁의 연대는 더욱 더 크게 크게 퍼질 것이다!

2006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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