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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민주노동당 자게]왜 소련 관료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닌가?(만델)
소련사구체 2006-08-17 22:10:39, 조회:11, 추천:2
만델이 제시한 소련 관료가 자본가가 아닌 이유
글쓴이 : 참이슬
저명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제4인터내셔널(FI) 지도자였던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이 1979년 미국의 권위있는 맑스주의 저널『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31권에 기고한 글 「왜 소련 관료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닌가?」(Why The Soviet Bureaucracy is not a New Ruling Class?)을 소개하면서 간단한 요약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소련을 관료들이 지배계급인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손쉽게 알 수 있도록 요점만을 간추려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만델은 역시 저명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이자 『먼슬리 리뷰』편집자였던 폴 스위지(Paul Sweezy)와 지상 논쟁을 하면서 소련 관료가 왜 지배계급이 아닌지를 논증했습니다. 본디 지배계급은 자신이 지배하는 사회구성체가 계속 유지되도록 노력함으로써 기득권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급적 피지배계급을 더 가혹하게 착취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소련 관료들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있었던 소련이 계속 유지되도록 노력하기보다 이에 저해되는 행위를 벌여왔습니다. 소련 관료들은 경제 운용의 비효율성과 낭비를 늘리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 자본가들이 보다 더 생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죠. 이는 경제가 효율적으로 운용되어 사회적 잉여 생산물(social surplus product)이 늘어나도 이를 모두 자기들이 갈취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또한 소련 관료들은 자신의 지위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굳이 스탈린 시대의 ‘피의 숙청’까지 들먹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련 관료들이 그 자식 대까지 자신의 지위를 유지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죠. 무엇보다도 소련 체제에서는 다량의 재산을 축적하거나 유산을 상속하기가 어려웠으니까요. 부정부패를 통해 한 몫 잡으려는 경향이 관료들 사이에서 번지긴 했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복원의 위협을 높이는 요인이 될지언정, 소련 관료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근거로 활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련의 관료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관점은 자본주의에서의 계급투쟁을 ‘노동 대 자본’의 양극 구도가 아니라 ‘노동 대 자본 대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3극 구도로 전망해야 함을 함축합니다. 더불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이행”이라는 맑스주의의 전망이 “자본주의에서 ‘관료계급’이 지배하는 새로운 계급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사실’에 의해 부정됨을 의미하지요. 문제는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 주장하는 이들(SWP 및 그 산하 ‘런던연합’을 포함한 유사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이에 포함됨)이 이런 맑스주의 전망과 모순되는 논증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소련 관료들과 같은 ‘새로운 지배계급’이 자본가보다 더 나쁘다는 판단이 설 경우, 자본가계급과 관료계급 사이의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계급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결론까지 유도될 수 있습니다.(그래서 ‘런던연합’이 2004년 4월 ‘노무현 살리기’를 위한 시위에 적극 나섰던 걸까요? ^^)
만델은 소련의 관료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주장은 도덕적인 분노에서 기인했을 뿐 냉철한 과학적인 분석은 결여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소련 관료들은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정말 나쁜 존재인데, ‘사회주의자’의 눈으로 가장 나쁜 존재는 자본가계급이니까 소련 관료들도 자본가와 다를 바 없는 지배계급이라 간주하는 격이라 할까요? 열정은 과잉이지만 합리적이고 냉정한 분석은 모자란 ‘런던연합’의 행태를 보면 “소련의 관료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주장은 도덕적인 분노에서 기인했을 뿐 냉철한 과학적인 분석은 결여된 것”이라는 비판이 정말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만델] 왜 소련 관료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닌가?
글쓴이 : 참이슬
Why The Soviet Bureaucracy is not a New Ruling Class?
(왜 소련 관료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닌가?)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
번역 : 참이슬
※ 이 글은 1979년 미국의 권위있는 맑스주의 저널『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31권에 만델(Mandel)이 기고한 글 「왜 소련 관료제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아닌가?」(Why The Soviet Bureaucracy is not a New Ruling Class?)를 번역한 것으로 카피레프트 규약 2.0에 따릅니다.(원문은 www.ernestmandel.org에서 접속할 수 있음.) 자유로운 이용은 환영하지만 영리 목적의 개작은 불허합니다.
폴 스위지(Paul Sweezy)는 마침내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운명에 관한 맑스주의 전통 - 그가 인정하였듯, 대체로 트로츠키주의에 의해 대표되는 - 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시작했다. 진실로, 그는 여전히 그러한 (트로츠키주의의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운명에 대한) 해석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1978년 10월호에 게재된 첫 코멘트는 잠정적인 것이다. 그들이 제기한 주요 도전에 대해 답변함으로써 우리는 국제 노동운동의 미래를 위한 핵심 이슈들로 남아 있는 것들과 관련 건설적인 논쟁을 (『먼슬리 리뷰』 편집자 폴 스위지와 독자들 모두와 함께) 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스위지는 우리에게 (1939년 트로츠키(Trotsky)의 분석 이후 40년만에) 소련의 운명과 (소련의) 관료제의 본성에 대한 문제가 아직도 확립되지 않았다는 논제를 반복하기 위해 과제를 부여했다. 스위지가 문제 제기한 바에 따르면, 트로츠키는 그의 단기간의 전망에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만델(Mandel)이 그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 스케일을 깨닫지 않은 채 단지 트로츠키를 반복함으로써 이론(소련의 관료제에 관한)의 신뢰성을 침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위지가 실수한 것처럼 보이는 점은 트로츠키가 제기한 문제들에 포함된 것은 시간 스케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동시대 세계 발전의 기본적인 경향에 관한 것임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이는 스위지가 인용한 트로츠키의 논문 「전쟁 속의 소련」(The USSR in War)으로부터 두 문단을 재생해 보면 명확해 진다 :
그러나, 만약 현재의 전쟁이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쇠퇴를 자극할 것임을 인정한다면, 또다른 대안이 남게 된다 : 독점 자본주의의 한층 더 깊은 쇠퇴, 국가와 전체주의 체제에 의한 모든 잔여 민주주의 체제의 교체가 더 심하게 융합되는 것 등이다. 사회의 지도력을 자신의 손에 쥐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무능은 이러한 조건 하에서 보나파르트주의(대중 선동주의) 파시스트 관료제로부터 새로운 착취 계급의 성장을 유도한다.
그리고 또한 :
한편으로 10월 혁명의 모든 가능성들이 현재의 전쟁 동안에, 또는 그 이후 즉각적으로, 임의의 선진국에서 지속되는 것을 찾는 데 실패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느 곳이든 모든 전선들에서 후퇴한다면 - 우리는 의심할 바 없이 현재의 획기적인 사건과 그것의 추동력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수정해야만 한다. 그러한 경우 소련이나 스탈린주의 깡패 집단(gang)에 대해 전형적인 딱지붙이기가 아닌, 수세기가 아니라면 앞으로 수십년 간 세계의 역사적인 전망을 재평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사회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의 획기적인 시대나, 또는 한편으로 전체주의 관료제가 쇠퇴하는 사회의 새 시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스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이나 또는 그 직후 어느 선진국에서도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승리는 없었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사실이다. 그러나 스위지는 트로츠키에 의해 제시된 질문의 두 번째 부분을 잊고 있다 : 그곳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쇠퇴”가 존재하는가? 숫자에서? 기법에서? 조직의 단계나 전투성에서? 어느 누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역주 : ‘68혁명을 가리킨다) 공장을 점거한 파업 참가자들의 수가 그 이전 1936년 6월(역주 : 1936년 여름 파시스트의 제3공화국 전복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공산당, 사회당, 급진당의 인민전선 구성을 가리킨다)에 기록된 수보다 3배에 달하는 것을 본 이후 그러한 논제(프롤레타리아트의 쇠퇴)를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1969년 가을 이탈리아에서(역주 : ‘68혁명의 열기가 그 다음해 이탈리아에 전달된 것을 가리킨다) 1920년 11월의 유명한 파업 물결보다 8배나 달하는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한 것을 본 이후에는? 1976년 첫 6개월동안 스페인에서(역주 :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한 이후 스페인의 노동자들이 펼친 파업을 가리킨다) 1936년 혁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역주 : 1936년 스페인 사회당과 공화주의자들이 총선거에 승리하고 집권한 후 노동자들이 사회 혁명을 위해 파업 등 여러 투쟁에 나섰던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봉기를 두려워 한 가톨릭 교회와 군부, 왕당파 등 보수 세력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프랑코 장군을 지도자로 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결과가 4년에 걸친 참혹한 ‘스페인 내전’이다)보다 3배 이상의 파업 참가자들이 나타난 것을 본 다음에는? 게다가 이는 영국, 일본, 보다 작은 유럽국가들(역주 :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3국을 가리키는 말인 듯), 포르투갈 등 지난 ’60년대에 2차대전 이전의 가장 높은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나타난 곳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느 곳이든 모든 전선들에서 후퇴” 했는가? 1939~1940년 간 존속했던 잔여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는 모두가 전체주의 체제에 의해 교체되었는가? 다시 말하지만, 명백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1939년 논제의 용어를 여전히 고집하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반복주의나 “수령”(the master)에 대한 과장된 존경 때문이 아니다. 우리들은 지난 40년간 발생한 있는 그대로의 대차대조표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참으로, 세속적인 추세에 대한 문제는 트로츠키가 1939년 논문에서 제기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그 시간 스케일은 명백히 틀렸다. 그리고 이 때문에, 왜 역사에 의해 그 문제가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는지를 엄밀히 설명해 주는 “중간” 변수는 사라졌다. 2차 대전 동안과 그 직후 세계 혁명의 봉기가 있었다. 노동계급 투쟁의 더욱 심화된 침체가 아닌 고조가 있었다. 그러나 혁명의 패배 이후 20여년 간에 걸쳐 노동계급의 평균 의식에 관한 영향들 때문에, 이러한 봉기는 단지 국지적이었고 그런 까닭에 주로 전통적인 노동 관료제 또는 그들로부터 기원한 정치세력(영국 노동당,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공산당, 티토주의, 모택동주의 등등)에 연관될 수 있었다.
몇몇 반(半) 식민지 국가들에서 이는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가로막지 못했다. 심지어 시작에서부터 관료적으로 왜곡(유고슬라비아, 중국, 베트남 등)되었을지라도 그러했다. 반면에 부르주아지(bourgeoisie)들이 훨씬 더 강력하고 그러므로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더 높은 단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과 지도력이 필요한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 사회 내부에서 새롭고 중요한 개혁을 얻지 못하고 부르주아지가 독재의 개막에 호소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경우 대중 투쟁의 반자본주의적인 잠재력의 거세가 유도된다.
여기에서 상세히 논할 수 없는 이유들에 의해(역주 : 만델이 2차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지속되었던 경제 호황을 설명한 ‘장기파동’(long wave) 이론에 의해 제시되는 이유들인 듯 싶다),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가속화된 경제 성장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성장을 유도했다. 이것은 차례로 서방에서 새로운 혁명 잠재력의 기초를 놓았는데, 1968년 5월의 폭발은 그것의 최초의 표현이었다. 다시 말해, “모든 전선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후퇴”가 아니라 봉기가 있었는데, 자본주의를 타도하기에는 불충분했지만 “사회가 전체주의적 관료제로 퇴보”하는 미끄럼을 타는 것을 막는데는 충분했다. 그러나 전후 자본주의의 “팽창의 장기파동” 이후, 1960년대 후반의 전환은 트로츠키의 용어들을 다시 바꾸어 말한 뿌리깊고 장기적인 위기의 새 시대가 냉혹하게 개막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의 관련 속에서 단지 역사적인 전망의 첫 스케치인 트로츠키의 1939년 논문을 더해보자. 더욱 체계적인 문서 - 그의 진정한 정치적 유서인 - 제4인터내셔널 비상총회 선언문(1940년 5월)에서, 트로츠키는 훨씬 더 현실적인 방법으로 시간 스케일의 문제를 제시했다.
제국주의에 복무하는 두 개의 인터내셔널이 있고, 진정한 혁명 인자들이 매우 작은 소수파를 구성하는 동안, 이 시대에 혁명은 또 다시 배반당할 것인가? ... 이러한 질문에 올바르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정확하게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이러저러한 봉기는 혁명 지도력의 미성숙에 의해 아마도 그리고 확실하게 패배로 끝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단일한 봉기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전체적으로 혁명적인 사건에 대한 문제다.
수십년이 아니라면, 전쟁, 봉기, 짧은 휴전의 막간, 새로운 전쟁들, 새로운 봉기들[이 이어지는]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젊은 혁명적인 정당은 이러한 전망에 기반해야만 한다. 역사는 그 자신을 검증하기 위해, 경험을 축적하기 위해, 성숙하기 위해 충분한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제4인터내셔널 문서들』(Documents of the Fourth International), pp.345-346)
그러한 견지에서 스위지가 트로츠키의 논제에 대해 반대한 전후의 시간 스케일은 트로츠키가 더욱 체계적이고 덜 선동적인 문제의 형성에서 파악한 바로 그 시간 스케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소련 관료제의 계급 본성과 함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일어나야만 하는지 질문할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동시대 혁명적인 맑스주의인 “트로츠키주의” 등의 역사적 진수에 있어야 한다. 트로츠키주의가 지지하는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은 기회 그 자체가 나타나는 어느 곳에서든 권력을 잡아야 한다. 제국주의의 시대에 기회는 더욱 발전한 나라들에서 혁명이 발생하기 이전에 덜 발전한 나라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권력을 잡는 것(그리고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억제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회주의의 건설에 불충분한 오직 하나의 필요 조건일 뿐이다. 이러한 과정(사회주의로의 이행 과정)은 오직 국제적인 규모에서만 성공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 (물론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자본가로부터 권력을 탈취한 곳 어디서든지 시작될 수 있다)
소련 관료제의 승리인 스탈린주의는 세계 혁명의 부분적인 패배의 결과물이다. 세계 혁명은 선진국으로 파급되지 못했다. 그러나 소련은 자본주의가 복원될 수 있었던 시점에서 패배하지도 않았다.(제국주의자들은 1918~1921년의 내전 간섭과 1941~1944년 독소전쟁을 통해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1948~1951년 사이에도 덜 직접적이었지만 다시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복원을 시도했다.) 소련의 최후 운명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국제적인 투쟁의 결과에 종속될 것이다. 만약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정적으로 패배한다면, 소련의 관료는 지배 계급이 될 것이다(새로운 지배 계급이냐 자본주의 지배계급이냐는 다른 질문이다). 반면에, 만약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거나 동유럽에서 정치혁명이 성공한다면, 관료들이 지배계급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전에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관료들의 통치를 패배시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또는 동유럽에서 정치혁명이 성공한다면”을 강조한다. 스위지의 다른 논증 - 스탈린주의 국가들의 노동계급은 비록 마지못해서이긴 하지만 체제를 용납한다 - 은 그가 전부 언급하지 않은 극적인 사건들 - 1953년 동독에서의 노동자 봉기,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 그리고 폴란드 노동자의 반복적인 대중 봉기 - 과 모순된다. 실로 트로츠키와 제4인터내셔널에 의해 약 45년 전에 제출된 정치혁명이라는 “추상적인” 생각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들에 의해 진정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제공하고 있지 아니한가?
Ⅱ
소련의 관료제가 새로운 지배 계급이라는 가정은 지난 50년 간 소련 사회와 경제의 실제 발전과 모순에 대한 진지한 분석에 부합하지 않는다.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그러한 가정은 그 나라에서 새로운 착취적인 생산 양식이 출현했음을 함축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상 최초로 그들의 일반적인 행위와 (물론 그러한 행위를 지령하는) 사적 이익이 존재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의 내적 논리와 필요에 상반되어 움직이는 “지배계급”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소련 경제의 가장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계획의 수요를 조정하는 것과 (“절대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경제 성장을 관료제의 물질적인 자기 이익에 최고도로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관료제 하에서 소련에 도입된 모든 연속적인 경제개혁들은 - 스탈린에 의해 재도입된 기업에 기반한 비용 산정(khozrazhot)에서부터 흐루시초프의 소브나르코즈(sovnarkhoz) 실험, 전체적인 경제 행위의 지시자로서 이윤의 활용을 계획한 리베르만(Liberman) 방식, 코시긴이 한 그러한 행위를 측정하는 “혼합 지시자”(mixed indicators)의 도입 - 그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성공을 지속하지는 못했다. 시스템의 논리에 상반되게 행동하는 관료제의 기생적인 본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명백한 역설(paradox)을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회적 계획은 오직 연합된 생산자들에 의한 경영 하에서 공장을 공장과, 마을을 마을과, 지부를 지부와, 지역을 지역과 경쟁시켜 분리되고 동떨어진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닌 “사회적 배당금”(social dividend)으로 물질적인 이득을 얻도록 할 때만이 순조롭게 기능할 수 있음을 덧붙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정확하게 (역주 : 소련 등 구 사회주의권의) 관료제 - 그러한 특수한 이득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 가 새로운 지배계급이거나 판매와 재생산의 새로운 생산 양식을 움직이지 않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사회내의 암(cancer)임을 함축한다. 관료제 경영은 오직 낭비만을 증가시키는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화된 자산에 기반한 계획 경제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것 또한 가로막는다. 그리고 이러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 자체로 지배계급으로서의 관료제의 특성 및 절대로 구체적으로 기술될 수 없는 “운동 법칙”을 가진 새로운 “착취적인 생산 양식”(exploitative mode of production)으로서의 소련과 양립 불가능하다.
두 번째 국면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역사상 최초로 사회 경제 시스템 그 자체의 운영을 통해 자기 자신을 영속시키는 능력이 없는 지배계급에 직면하게 된다. 관료들에게는 그들 자신이 관료로 계속 남을 수 있다는 어떠한 보장도 없다. 심지어 관료의 자식들이 계속 관료로 남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우리는 소련의 수직적인 사회 유동성 - 스탈린 치하에서 주요한 사회 안전밸브들 중 하나 - 이 지난 수십년동안 중대하게 감소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장로정치”(gerontocracy)는 소련 사회 전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관료들의 “종신재직권(tenure)의 안정성”은 의심할 바 없이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오직 사회적 긴장을 늘리는 것을 유도할 뿐이며(예를 들면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자 하는 압력과 같은), 권좌와 특권의 영속을 보장하지 못하는 관료들의 무력함이라는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더욱이 이러한 지위들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기능들과 결합되어 지속되고 정치적 결정들(예를 들어 저명한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와 같은)에 의존할 뿐 사회적 생산의 특수한 역할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속성을 추구하는 관료제의 압력은 특정한 공장이나 기업이나 트러스트(trust)들과 연관되어 있다.(예를 들어 법적인 의미에서 사적 재산권을 복원하기 전에 경제적인 의미에서 사적 재산권을 복원하려는 것과 같은) 이 사실에서 공장이나 지부 수준에서 양적으로 더 높은 자율성을 얻기 위한 관료제의 넓은 층위에서의 일치된 압력이 유래한다. (예를 들어 중앙 계획의 철의 구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이로부터 뇌물(bribe), 독직(corruption), “회색” 과 검은 시장 운영(암시장 거래), 외환 및 금의 축적 등을 통해 사적 자본을 축적하려는 관료들의 성향이 유래한다. 또한 서방 은행들에 계좌를 개설하는 것을 포함하여(특히 “인민 민주주의 국가”에서 두드러진다) 서방의 맞수들과의 “공존”이 증대하는 추세가 유래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새로운 지배계급” -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적 재산에 기반한 훌륭한 자본주의 지배계급인 - 의 출현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과정이 결실을 맺을 수 있기 전에 두 개의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 극복되어야만 한다. 하나는 노동계급의 저항인데, 이는 현재의 구조(사실, 아마도 평가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것) - 안정된 일자리의 보장, 일할 수 있는 권리의 보장, 완전 고용의 보장, 그리고 이로부터 유도되는 서방보다 훨씬 덜 바쁜 노동 강도 등 -를 제일로 평가하기에 그러한 (자본주의로의) 복원 과정에서 감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른 하나는 국가 기구의 핵심 부문의 저항(티토가 유고슬라비아의 “억만장자”들을 1970년대 초반 자본주의로의 “복원”이라는 위험이 현실화 될 때 탄압했던 방식을 보라)이다. 따라서 새로운 지배계급이 존재하고 통치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나라들에서 생기는 진정한 사회 투쟁을 잘못 읽는 것이다. 이는 그 결과가 여전히 열려 있는 투쟁을 과거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가정한다.
세 번째 국면에서 우리는 또한 역사상 최초로 그것에 대한 “타도”가 기본적인 경제 구조를 손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는 “생산양식”의 대표자인 “지배계급”과 직면하게 된다. 잘 알려진 『자본』제3권의 일절에서 맑스는 각각의 생산양식은 사회적 잉여 생산물을 전유하는 특수한 형태에 의해 특징지워진다고 서술했다. 이제 소련에서 사회적 잉여 생산물은 이중적인 형태로 전유된다. 하나는 사용 가치의 형태인데, 이는 그것(사회적 잉여 생산물)의 주요 부문이 부가된 장비와 원자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상품의 형태인데, 이는 그것의 보조 부문이 특권적인 수입을 얻는 관료들이 구입하는 사치품(과 특별 서비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료 독재의 타도 이후에 소련 노동자들이 생산 수단을 상품으로 확실하게 전환(이는 자본주의의 복원을 의미한다!)시키지 않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이중적인 사회적 잉여 생산물의 전유가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상품의 양상으로서의 소비재의 본성을 급격하게 억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소련에서의 새로운 혁명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허용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대한 억제나 중앙 계획, 대외 무역의 국가 독점 등 또한 그러한 혁명(우리가 정치 혁명이라 부르기를 좋아하는)을 통해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러한 모든 변수들을 취합한다면, 경제구조가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계속 유지된다는 점을 명확하게 얻게 될 것이다.
진실로, 시스템 운영 방식에서 급격한 변화가 존재할 것이다. 생산자 대중들은 무엇이 생산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산되었는지에 관한 결정권을 얻을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은 급격히 감소할 것이다. 관료제의 경영 실패로 인해 초래되는 거대한 자원과 재화의 낭비는 중단될 것이다. 노동 조직과 그것의 위계적인 구조는 급격히 분해 수리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 스케치 된 구조 그 자체들 - 사회적 잉여 생산물 전유의 특수한 형태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채로 유지될 것이다.
네 번째 국면에서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서의 관료제의 존재라는 가설은 역사상 최초로 실제로 통치하기 전에는 계급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지배계급”과 직면하게 된다는 결론을 유도한다. 관료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스위지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새로운 착취 계급은 혁명 그 자체가 창조한 조건들로부터 발달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로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이다. 위계적인 계급들은 생산 과정으로부터 나온 특수한 관계(“생산 관계”(relations of production))와 연계된 인간 존재의 집단들이다. 사회적인 변환은 그것들(생산관계)을 변환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변환은 무에서부터(ex nihilo) 생산관계를 창조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소련에서의 “새로운 착취 계급”이라는 일치된 이론은 노동계급(노동관료나 노동귀족)과 인텔리겐차(프티 부르주아와 더 높은 상태의 기능인들)가 그들이 “권력을 잡기”전에, 예를 들어 “혁명” 전에 잠재적으로 새로운 지배 계급이었다고 가정할 때만이 명확해진다. [1] 그러나 전 세계를 통틀어 동시대 계급투쟁의 모든 국면을 실질적으로 포함하며 맑스주의 이론의 모든 구성 요소들을 수정하는, 가공할만한 결과가 그러한 가정으로부터 제기된다. 그러한 가정없이는, “역사적 과정으로부터” 떠오른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모순된다. 결국 관료가 권력을 잡는데,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사회 계층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가?
Ⅲ
소련의 관료제(서방의 노동조합 관료제와 같은)가 노동계급과의 탯줄을 끊지 않았고, 그들의 특수한 이익과 정치적인 결정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특별한 기생관계라는 구조 속에서 보여질 수 있다는 생각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계급투쟁이 자본 대 노동이라는 양극 대결 과정으로 지속된다는 결론을 유도한다. (전반적으로 “자본의 노동 부관(副官)”에 의해 운영되는 관료제와 함께)
소련의 관료제가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생각과 집권하고 있지 않은 공산당들이 - 최소한 그들의 중앙 기구들이 연관되는 한 - 잠재적인 새로운 착취 계급의 핵심으로 보여질 수 있다는 회피할 수 없는 결론은 전체적인 20세기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함축한다. 이제 계급투쟁은 3극 대결이 된다. “자본 대 노동 대 잠재적인 새로운 착취 계급”이라는.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분석을 수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 우리가 가진 증거에 연관되는 한, 그 자체로 이미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불가능한 임무인) 그것은 거대하고 중대한 규모의 정치적 함축을 가진다. 그렇게 되면 두 가지 악 사이에서의 선택만을 남겨두게 되는데, 그 두 가지 악들은 모두가 “새로운 착취계급”이라는 이론에 대한 일치된 옹호들을 해방을 향한 국제 노동계급의 투쟁과 정면으로 대항하게끔 만드는 결론들을 유도한다. 또한 새로운 “착취계급”을 우겨대며 말하는 것을 바라보는 오직 두 가지 가능한 방법들만이 존재한다. 두 가지 다, 전반적으로 그리고 필수적으로, 예를 들어, 부르주아지 혁명 이전과 도중에 부르주아지가 반-봉건적인 귀족정체(aristocracy)를 대했던 것과 같은 관계를 부르주아지를 상대로 가지며 자본가 계급과 비교하여 진보적이다. 그러한 가설은 물론 그것의 착취적인 속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완벽히 부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부르주아지와 “잠재적인 새로운 계급” 사이의 모든 직접적인 투쟁에서, 누구든지 『공산당선언』이 그렸던 혁명적인 부르주아지와 같은 “새로운 계급”에 대해 “비판적 지지”와 똑같은 종류의 행위를 할 수밖에 없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면 누구든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노동계급의 반 관료 투쟁을 반동적인 부르주아지에 대한 “진보적인” 관료제의 승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한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 쟁취라는 생각은 최소한 미심쩍게 된다. 당연하다 :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와 비교하여 진보적인, 사회주의나 또는 새로운 계급 시스템의 확립을 유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승리한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관료혁명”으로 다시 기술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줄잡아 말해도 맑스와 맑스주의자들이 한결같이 제기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직접적인 이행이라는 생각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유토피아적인 개념상의 오류가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새로운 지배계급”이 자본주의와 비교해서 진보적이라면, 맑스가 생각했던 것과는 상반되게, 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그것의 진보적인 잠재력을 소진하지 않은 계급사회와 계급 사회의 철폐 없이도 새롭고 중대한 생산력의 발달 - 결국은 “사회적 개인”(social individual)의 폭 넓은 발전[예를 들어 인간의 자유와 같은]을 유도하는 것 - 이 여전히 가능함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단지 도덕적인 선택일 뿐 야만주의와 인간 문명의 몰락을 막기 위한 역사적인 필연은 아니게 될 것이다.
따라서, 관료제를 새로운 착취자, 흡혈귀, 노동계급과 인간 자유의 치명적인 적들 등으로 매도하는 것 -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자기 선언적인 맑스주의자의 소련 관료제에 대한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는 비난은 99% 이상의 실제 동기가 냉정한 과학적인 분석보다 이해할 수 있는 도덕적인 분개에서 유래했다 - 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의 모든 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변명자가 되지 않는다면, 역사적으로 그러한 관료제를 정당화하는 것에 의해 역설적으로 논의를 종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전적인 맑스주의의 개념 구조에서, 계급들 - 지배 계급을 포함한 - 은 최소한 그들이 존재했던 바로 그 시간 동안 역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사회 조직의 필수 기구들이다. 만약 소련 관료제가 새로운 지배계급이라면,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비교해서 진보적이라면, 소련 사회에서 최소한 일시적으로나마 필수적이고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결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긴 우회 이후에, 누구든 그가 시작한 곳에서 끝나게 된다. 맞다. 굴라그(Gulag, 구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는 좋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노동 코드는 불쾌하다, 그러나 거기에 다른 선택이 있는가? 아무튼, 러시아는 산업화되고 현대화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누구든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다. 누구든 야만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퇴보를 극복할 수 있었단 말이다. 어제 “우리”는 “야만적인 수단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을 불렀다. 오늘 “우리”는 “야만적인 수단에 의한” 자본주의의 진보에서 새로운 계급 사회 건설을 불렀다. 그러나 오늘도 어제와 같이 “우리”는 “객관적으로” 관료제 - 그 모든 전제적인 범죄들에도 불구하고 - 가 “역사적인 필연”이라고 인정해야만 한다. 기타 등등 싫증이 나도록 지겨운 결론들.
그러한 함정은 맑스주의자(예를 들어 트로츠키주의자)의 소련 역사와 관료제의 역할에 대한 해석에 의해 쉽게 회피된다. 러시아, 중국과 같은 나라들의 발전에 진보적인 모든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산물이다. 반동적인 모든 것은 관료제 통치의 산물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을 제외한 어떠한 논리적 연관 관계도 없다. 이는 관료제가 계급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본체에 기생하는 암임을 함축한다. 소련 사회는 새로운 전제적인 생산 양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의 이행기에 있는 사회로서 사회주의로의 길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타도해야만 하는 관료제의 독재에 의해 진보적인 발전이 멈춰졌다.(수렁에 빠져 꼼짝 못하고, 동결되었다)
그러나 만약 새로운 착취계급으로서의 관료제를 부르주아지와 비교하여 진보적인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심각한 결론을 유도한다면, 관료제를 자본가에 비교하여 반동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10배는 더 나쁜 함축을 가진다. “새로운 계급” 또는 잠재적으로 “새로운 계급”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에 직면했을 때 누구든지 전자에 대항하여 후자를 비판적으로 지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Ⅳ
만약 부르주아지 사회가 - 최소한 예견할 수 있는 미래에 -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관료적인” 혁명을 유도해왔고 유도한다면, 만약 여러 나라들이 (몹시 관료화된)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새로운 전제적인 계급사회로 자본주의를 대체했다면, 명백하게 맑스와 고전 적인 맑스주의자들의 역사적인 예상과 전망은 기본적으로 틀렸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부르주아지 사회 그 자체와, 부르주아지 사회 내적 모순의 본성과 특히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본성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분석은 기본적으로 틀렸음이 명백해진다.
맑스의 사회주의 개념 - 1920년대 후반까지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공유한 - 은 노동계급의 특수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심리적인 특성들로부터 발달한 연합된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사회(a free society of associated producers)인데,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에서 스케치되었고 그 주제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후속 저작들에서 더욱 정제되었다.
만약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 또는, 대신에, 보다 - 새로운 계급 사회를 유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노동계급이 보편적인 인간 해방의 과정을 유도하는 대신에 그러한 새로운 “착취 지배계급”을 배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현대 노동계급이 혁명적이고 해방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분석은 출발에서부터 완벽하게 잘못되었는가? 적지 않은 이론가들이 그러한 방향으로 멀리 떠나버렸는데, 바란(Baran)과 스위지(Sweezy)의『독점자본』(Monopoly Capital) 맨 마지막 장은 그러한 길을 따르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근래에, 동독의 재야(在野) 공산주의자 루돌프 바흐로(Rudolf Bahro)는 다른 점에서 인상적인 그의 책 『대안』(The Alternative) -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The Revolution Betrayed) 이래 스탈린주의 관료제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로부터 나온 가장 철저한 맑스주의자의 비판 -을 한층 더 노골적인 말과 이러한 부류의 종합적인 판단으로 더럽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연스럽게 오직 부르주아지의 삶의 방식, 최소한 그에 더 가까운 프티 부르주아지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투쟁한다.” 누구든 예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물론 이러한 판단에 열광적인 동의를 표시했다.
그렇게 노동계급 - 소련의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서방의 노동계급도 - 에 대한 고전적인 맑스주의 분석을 기각하는 것이 사회주의와 무계급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함축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더 길게 말을 늘어놓지 말자.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체하는 “혁명 주체”의 대용품 - 제3세계 농민들, 혁명적인 학생들, 인텔리겐치아, 또는 심지어 주변화 된 빈민들 - 을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은 맑스가 사회주의 운동을 위해 성취한 가장 주된 진보가 무엇인지 고려하는 데 실패했다. 사회의 본성을 창조하는 것은 최소한 사회적 본성, 경제력, 사회-경제적 잠재력, 그리고 “혁명적 주체”의 물질적인 이익과 관련되며, 도덕적인 분개나 인간 집단의 현존 질서에 대한 개인적인 반항의 정도와 연관되지 않는다. 어떻게 위에서 언급했던 사회 계급들이 현대 노동계급보다 더 높은 정도로 진정한 무계급 사회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사회적 조건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 아무도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바흐로(Bahro)가 그의 분석과 기술로부터 올바로 면제한, 초기 단계의 배고픈 반란은 고려하지 않고)의 150년간에 걸친 계급투쟁이 “자연스럽게 오직 부르주아지의 삶의 방식 또는 프티 부르주아지의 삶의 방식- 을 받아들이기 위한 경향”의 공식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 진실인가?
눈이 휘둥그래지는 상상력의 용량, 혁신의 날짜 세기, 불평등한 영웅주의의 장들과 나란히 서있는 단조로운 “순응주의”의 장들에서 그렇게 공인되지 않는 일반화를 만드는 풍부하고, 다양하고, 정열적인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에 어찌 눈이 멀지 않겠는가! 파리코뮨의 노동자들, 1917~21년 러시아의 혁명적인 노동자들, 1918~23년 독일, 1936~37년 스페인, 1941~45년 유고슬라비아, 1956년 10월~11월 헝가리, 1959~65년 쿠바, 1968년 5월 프랑스, 1968~69년 프라하, 1969년 가을 이탈리아, 1975년 포르투갈, 1979년 이란, 이들이 단지 “자연스럽게 부르주아지의 생활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는가? 그리고 또다시. 1975~76년 스페인 - 역사상 최초로 우리는 변하지 않은 파시스트 억압 기구의 면전에서 전형적인 “부르주아지 생활 스타일의 욕구”를 위한 몇몇 정치적이고 지역적인 파업이 정치범의 옹호와 석방을 이끌어냈음을 목격했다 - 의 노동자들은 바흐로의 훈계에 따라 행동했는가? 이러한 사건들은 손쉽게 생각나는 사례들이다. 누구든지 이 리스트에 다른 수많은 사건들을 - 예를 들면 미국 노동계급의 역사로부터 상당수 - 추가할 수 있다.
지난 세기 이래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한 실제 장면에 직면하여, 압도적인 역사적 증거에 직면하여, 제기되는 문제 “왜 서방에는 승리한 사회주의 혁명이 없었는가?”는 역사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다시 구성되어야만 한다. “사회주의의 길에 따라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주기적인 자연스러운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승리의 가능성을 명백히 확인하는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왜 그곳에서는 아직도 승리가 없는가?” 그러면 답변은 주체적인 요소의 역할, 혁명적인 지도력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 고르지 않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의 발전, 사회민주주의의자에 의해 처음으로 행해진 고의적인 제동(1918~1919년 독일), 스탈린주의 정당에 의해 그 다음에 행해진 제동(1936~37년 스페인) 등 거사의 어려움이라는 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세계 사회주의를 위한 주체와 객체의 전제조건들의 진정한 역사적 변증법은 객관적이고 유물론적으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회에 의한 의식적인 거사만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 현대 프롤레타리아트 이외에 부르주아지 사회에서 이러한 종류의 힘을 가진 자는 없다.
맑스주의자는 종교 신도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잠재력에 관한 우리의 신념은 비합리적인 신앙이나 스콜라주의적인 삼단논법이 아니라 과학적 분석과 역사적 기록에 대한 주의 깊은 고찰에 근거한다. 단지 조롱이 아니라 만약 압도적인 역사의 증거가 맑스의 가정들이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음을 보여준다면, de omnibus dubitandum(모든 것은 의심해 보아야 한다)를 가장 좋아하는 모토로 삼았던 맑스의 진실된 정신에 따라 누구든 진실을 기술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태까지 역사에 의해 제시된 증거만으로는 어떠한 성급한 일반화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오늘날 뿌리 깊고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위기에 있는 것은 맑스주의가 아니라 서방의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독재다. 만약 간단한 합리화를 다시 시도하는 것이나 역사 진행 과정의 상대적인 지체, 잘못된 정치지도자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 피로와 사기 저하에 대한 실망 등을 회피하기를 원한다면, 균형 감각을 지키면서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반세기가 아니라 앞으로 수십년동안 어떻게 싸울 것인지를 기다리고 지켜보자. 그리고 때 이른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거나 야만주의가 비상하기 전에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주의의 승리로 끝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수동적으로만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우리는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그러나 철저히, 되돌아 왔다. 그렇다. 소련 관료제가 새로운 지배계급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세계 혁명의 미래와 인간성의 미래에 대한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 문제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사회주의 잠재력 정도, 사회주의의 가능성, 과학적 사회주의와 같은 문제들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맑스의 분석과 “맑스주의 체계”의 핵심에 있다. 그리고 맑스주의 체계가 이전에 그랬던 것과 달리 더 이상 굳건하게 근거하지 않는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각주들
[1] 관료제의 권력 장악은 간단히 “혁명 그 자체에 의해 창조된 조건들로부터 발전되지” 않았다. 이는 소련에서 1920년대에 발생했던 구체적인 정치 투쟁에 근거하기를 회피하는 진술이다! 관료제는 정치적인 반혁명의 승리(프랑스 혁명 동안 선행했던 테르미도르 반동(the Thermidor Reaction)과 같은 고전적인 “혁명 내부의 반혁명”)로부터 발전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스위지는 일찍이 1923년 - 아마도 2년은 족히 때가 늦었던 - 부터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노동계급의 정치적 권리 증진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던 좌익반대파(the Left Opposition)를 언급하지 않는 심각한 불공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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