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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청소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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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청소년운동 | 꿈틀대는 꿈 2006/07/29 12:11
http://blog.naver.com/emptyyoon/20026658638
블링크 : 두발자유 좋아해, 청소년인권 할래 | 공감 1공감하기
진보적_청소년운동-emptyyoon.hwp

소책자용- 일단 대충 완성인데

여기 뒤에 자료 별첨할 거랑 좀 더 모아봐야.


 

※ 이 글은 제가 약 1년 동안 아수나로[ASUNARO]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면서 듣고 읽고 경험하면서 배운 것을 짧게나마 정리한 것입니다. 이 글의 주요 요지는 전국중고등학생연합 활동을 했던 이민승 씨가 쓰신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등장과 몰락 - 2000~2001년 서울중고등학생연합을 중심으로」(통칭 학연소사)의 것을 많이 빌려왔습니다. 각주로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도 학연소사의 내용을 받아온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제가 속해 있는 청소년인권활동가 네트워크의 청소년인권운동사 연구팀(고근예, 유윤종, 전누리)에서 수집한 자료들에도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목차

1. 진보적 청소년운동이란

2. 한국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사회적 배경

3.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의제
4.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방법론에 대해

5. 맺음말

 

 

1. 진보적 청소년운동이란


  청소년운동이란 기본적으로 중고등학생, 또는 탈학교 청소년들 등 ‘청소년’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운동, 또는 청소년이 하는 사회운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청소년운동이라는 개념 안에는 서로 다른 여러 흐름들이 뒤섞여 있다. 가장 흔히 통용되는 개념으로는 청소년들의 사회운동(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 청소년의 시민사회단체 활동 참여, 더 넓게는 금연캠페인이나 청소년선도 캠페인 등도 포함시킬 수 있다.)이 있고, 그 외 청소년선도운동 ― 즉 금연, 금주 교육이나 “유해환경(불량식품이나 유흥주점 등)으로부터의 보호”, 그리고 청소년들의 주체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변혁운동이 혼재해있는 것이다.

청소년선도와 대립되는 진보적 청소년운동

  우리는 이 중 마지막 것을 “진보적 청소년운동”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청소년선도가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청소년을 보호하고 훈육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이자 변혁의 주체로 바라본다. 또한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에 대한 사회 구조적 억압에 저항한다. 이 두 가지 점에서 이 운동은 진보적․변혁적 성격을 띠며 청소년을 선도하고 훈육하는 종류의 운동과는 대립된다. 예컨대 여성에게도 투표권이나 재산권이 주어진 것과 같이, 기본적 권리의 주체가 확장되고 사회가 다양한 존재를 관용하는 것, 소외되어 있던 집단의 주체화 정도가 증진되는 것을 사회 진보의 한 지표로 볼 때 기성세대의 보호․훈육․선도의 관점에서 벗어나 청소년도 권리의 주체임을 주장하는 운동은 충분히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진보적 청소년운동과 청소년선도의 두 가지 다른 관점이 한 단체 안에 혼재해 있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일부 지역의 YMCA 같은 곳에서는 청소년인권센터를 운영, 진보적 청소년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청소년 금주․금연 운동과 같은 선도의 성격을 띤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이런 기묘한 결합은, 단체의 특성(YMCA의 경우 종교단체)이나 상황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1920년대 우민화교육․식민지교육을 철폐할 것을 주장한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최초의 것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이후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미군정에 대항한 학원민주화 운동이나 6월 민주화 항쟁, 전교조의 참교육 운동 등과 결합하며 그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다른 민주화 운동과 분리되어 독립적 영역이 된 것은 소위 민주화 이후의 일이다. 이런 독립의 과정 속에서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정부와 학교당국의 탄압, 내신경쟁강화 등의 영향으로 80년대와 90년대 사이에 한 차례 단절을 겪게 되는데, 이 단절을 근거로 80년대나 그 이전의 것을 “중고등학생운동”으로, 90년대 이후 최우주 씨 사건과 학생복지회로부터 등장한 움직임을 “청소년운동”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 구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진보적 청소년운동과 ‘청소년의 사회운동’

  ‘청소년의 사회운동’은 청소년을 변혁의 주체로 보는 관점에 기초하므로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이자 변혁의 주체로 이해하는 진보적 청소년운동과도 일맥상통하며, 결국 둘은 닮은꼴이다. 하지만 앞에서 우리가 다룰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범위는 청소년들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의제로 설정하는 운동으로 제한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사회운동’과 교집합을 이룬다. ‘청소년의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은 고등학생들이 부정투표무효를 외치며 4.19 시위에 동참한 것이나, 청소년이 하는 중고등학교 학생회 운동 등을 모두 포괄한다. 그런데 4.19 시위와 같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논할 진보적 청소년운동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비(非)청소년이 청소년과 관련된 운동을 지원하거나 돕는 것 등도 포함한다. ‘청소년의 사회운동’이 운동을 ‘누가 하는가?’에 기준을 둔 개념이라면,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누가?’보다는 어떤 주장을 갖고 어떤 운동을 하는가에 더 큰 초점을 맞춘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일 어떤 형태의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사회 체제의 변화를 지향한다면, 그것은 사회 체제를 변화시켜야 청소년들이 온전한 권리의 주체로 인정받고 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궁극적으로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그 출발은 청소년 자신의 권리문제일지 몰라도 일정한 발전단계에서는 결국 청소년 이슈라는 좁은 범위를 벗어나 다른 사회변혁 운동과 맞물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청소년의 사회운동과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종종 함께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나 6월 항쟁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구별이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정부가 간혹 내세우는 “청소년 사회 참여 증진”과 같은 표어의 성격을 비판하거나 할 때 쓸모가 있을 것이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의제나 이슈에 관해서는 3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나, 여기에서 그 범위를 대강 이야기하자면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이슈는 초중고등학교 교육의 문제, 그리고 청소년보호법의 적용을 받는 청소년들의 문제로 한정된다. 초중고등학교를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 것에는 아마 큰 이의가 없을 것이다. 한국 교육의 억압적인 구조, 경쟁적인 교육 환경 등은 청소년이 온전한 권리의 주체가 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심각하게 저해하며 이는 청소년 대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청소년보호법을 또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청소년보호법이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법이며 그 안에는 청소년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몇몇 조항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소년노동문제 등을 다룰 때는 청소년보호법이라는 기준이 유효하지 않을 수 있으며,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초등학교의 포함 여부, 유치원의 문제 등이 있기 때문에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범위를 설정하는 데는 상황에 따른 유연성이 필요하다.

 

 

 

2. 한국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사회적 배경


  현재 한국의 학교나 국가, 사회는 청소년에게 여러 억압을 가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교육체제는 학생들을 경쟁으로 내몰며, 경쟁에서 낙오한 학생들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있으며, 체벌, 두발규제 등 다양한 폭력도 존속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사회적으로 당하는 여러 차별 또한 청소년을 체제에 동원하고, 체제에 순응하도록 훈육할 미성숙한 대상으로 보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데 기인한다.


근대 공교육의 성격

  이런 현실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적인 근대 공교육의 기원을 짚어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왜냐하면 청소년이나 아동이라는 개념이 독립적으로 발생한 것이 바로 근대의 공교육 도입, 미성년자 보호 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간단히 말하면, 청소년들을 잘 관리하고 잘 길러내야 기존 사회체제가 유지되고 국가가 잘 돌아간다. 그것이 사회가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이유이다.

  근대에 서유럽에서부터 시작된 국가 공교육은 본래 ‘국민’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며, ‘민주주의’나 ‘인권’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민족주의, 국민들을 통합하기 위한 공통된 언어(표준국어),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초적인 교육, 규율을 잘 지키는 것 등을 교육시킨다는 의미이다. 이는 근대 국민국가가 국민의 국가에 대한 충성과 헌신,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도 얽혀 있었다. 자본주의가 심화 발전하면서 더 이상 자본가들은 자본주의 체제 외부(예 : 농촌)로부터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없었으며, 새로운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게 되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에는 좀 더 생산성 높은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훈련된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동 노동시간 제한, 여성보호와 같은 법과 함께 근대적 공교육이 도입되었다. 근대적 공교육은 시간관념이 명확하고 규율을 잘 지키며 상명하복하는 노동자를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읽기쓰기, 산수 등을 가르쳤다. 기계 다루는 것과 지시 내용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런 능력들이 필요했다.(기계 돌리는 설명서라도 읽을 수 있어야 일 시켜먹지.) 물론 공교육의 확대에는 교육의 권리를 얻고자 했던 수많은 민중들의 요구와 저항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부르주아계급이나 국가의 이해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며, 결국 공교육의 내용 편성에는 그런 이해관계가 반영되었다.

  따라서 학교는 그 출현부터 전적으로 학생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내면화한 ‘주체적인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학교는 자본주의에 순응적이고 충량한 인간형을 만들어내려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학교에서 강조되는 규율과 규정의 준수, 시간표에 따르는 규칙적인 활동, 애국조례 등은 민주시민의 자질 이전에 근대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의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 공교육은 경쟁과 같은 방식으로 청소년들을 자본주의로 편입시키고 체제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며, 때로는 전근대적인 수단(예 : 체벌)을 차용하여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려 들기도 한다.

  근대적 공교육 안에 있는 이와 같은 전근대적 요소들은, 자본주의의 심화와 근대화의 진행에 따라 자연스레 약화되기도 한다. 이는 학내에서의 성차별이나 체벌, 수직적 관계 등의 요소들이 자본주의의 학교에 필수적인 기제가 아니게 됨에 따라(혹은 사회 전반의 성숙에 따라) 쇠퇴하는 것으로, 교육현장과 사회의 괴리가 지나치게 커지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상황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은 제국주의 시대와 세계대전 이후에 본격적인 근대화에 돌입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식민지 전쟁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군부독재와 압축적 근대화를 경험했다. 한국과 같은 식민지 후발 자본주의 국가는 식민지 경험에 의해 한층 강화된 민족주의와 근대화론이 만연하기 쉽다. 거기에 한국전쟁과 휴전상황이 더해지면서 사회 분위기는 더욱 군사적․권위적으로 변해갔다. 뿌리 깊은 유교사상도 한 몫 했음은 물론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 청소년들이 받아야 했던 교육은 황국신민화교육이었다. 제복(교복), 두발규제와 더불어 “황국신민의 서사” 암송을 강요하는 등의 억압은 청소년들을 국가주의․군사제국주의 아래 복속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으며, 우민화 교육으로 제대로 된 주체적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일제의 여러 문화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과 비판,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사람들은 전란에 휩싸였고 반공이데올로기 속에 사회는 더욱 경직되어 갔다. 그 후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에 포함되어 있던 억압의 일부를 차용하거나 더욱 공고히 하여 교육을 군사문화와 국가주의로 물들였다. 계속된 두발규제, 국민교육헌장, 교련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일제시대에 이어 광복 후에도 말 잘 듣는 군인, 또는 순종적인 ‘근로자’를 만들기 위한 여러 억압들이 청소년들의 삶을 짓눌렀다.

  박정희 이후 들어선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자동차, 전기 전자 등 노동집약적이며 기술집약적인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전두환 정권은 졸업정원제 등을 이용, 고급 노동력 시장을 구축하고자 했다. 결국 대학교육은 기술 이전의 교육장으로 변모했으며 생존의 방편을 위한 대학진학 욕구가 점점 확산되었다. 그렇게 1980년 이후 고등학생들은 이전보다 훨씬 심화된 극도의 성적경쟁을 강요받게 되었으며, 내신성적 제도는 고등학생으로 하여금 대학진학에 혼신의 힘을 다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의식성장의 길을 차단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 청소년들을 심한 성적경쟁으로 내몰았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바로 한국 청소년들이 다른 근대화된 나라들에 비해 더 극단적이고 강한 억압을 겪는 원인이다. 그러나 한국 청소년들이 다소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 근본 문제는 한국만의 것이 아니며 보편적인 것이다.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경쟁’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교육체제는 인간을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학벌과 같은 장치를 이용하여 청소년을 편의에 따라 줄 세운다. 이 안에서 청소년은 합당한 권리를 지닌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경쟁과 그에 대한 순응을 요구 당하며, 사회는 청소년을 교육을 선택하는 자기 삶의 주체가 아닌 훈육되고 선별되는 객체로 대우한다. 경쟁은 자본주의가 청소년들을 동원하고 체제에 순응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인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은 ‘능력에 따른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만큼 불이익을 받는 것이, 승리한 사람들은 그만큼의 이익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해하게 된다. 경쟁 장치는 자본주의 계급재생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며, 효과적으로 체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해낸다. 다른 억압들은 체제에 청소년들을 더 직접적으로 순응시키고 통제하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동원되는 것이다.


  요컨대, 대한민국 학교는 자본주의 공교육의 일반적 성질과 대한민국의 역사적 특수성이 결합하여 비상식적인 수준의 억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의 도입으로 무분별한 경쟁논리가 강화되고, 지역․학교에 따라 청소년들의 계급적 격차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문제, 가령 고교등급화나 자립형사립고와 같이 자본주의가 심화․발전되면서 체제의 이해와 직접 관련하여 생기는 문제는 교육의 근대적 억압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반면 두발규제, 너무나 성차별, 체벌, 각종 규제 등 학교 전반에 남아있는 전근대적 요소들은 교육의 전근대적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양 억압은 때로는 충돌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소위 잘사는 집 청소년들, 성적 좋은 청소년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의 경우 두발규제나 체벌, 학생들의 자치활동에 대한 제한이 약한 편인데, 그것은 근대적 억압이 전근대적 억압과 충돌하여 우위를 점한 결과다. 다수가 기득권층으로 편입될 그들에게 전근대적 억압은 필수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건전한’ 성장에 방해가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많은 경우, 이 양 억압은 서로 결합하여 학생들을 억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목적으로 대우받기를 바라게 된다. 곧 학생들의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 자유에 대한 갈망, 사회적․공공적 보장에 대한 요청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촉발되는 사회적 배경이다.

 

 

 

3.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의제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설정해온 의제는 다양하다. 사회적 소수집단들이 대개 그렇듯 청소년이 직면하는 억압도 한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주로 제기되어온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의제들은 교육과 인권 분야 걸쳐 있다. 그리고 2006년 5월말부터 벌어진 칠레 고등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에서 나온 다양한 요구 중에 “대중교통 요금 무료화”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더욱 성장하게 되면 훨씬 다양한 의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무엇을 문제로 삼고 무엇을 주장해왔는지 그 간략한 역사를 살펴본다.


1990년대 초반까지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의제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청소년들은 식민지우민화 노예교육 중지, 한국 학생들을 위한 교육 실시, 직원회에 학생대표 참가, 사회과학연구 활성화 등을 주장했다. 미군정 하에서는 민족자주교육 쟁취를 위한 대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의 연대투쟁이 있었다. 학생들이 내세운 주장은 “일제 잔재 척결”, “민족자주교육 쟁취”, “학원민주화”를 비롯하여 학내비리 척결 등도 포함하고 있었다. 사실 그땐 항일독립운동․민족자주운동․민주화운동과 교육운동이 분리되어 인식되지 않았기에 이후 중고등학생들이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면서 간간이 “학교민주화”나 학내비리 문제가 곁들여지는 방식으로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명맥은 이어져 왔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청소년들의 조직과 행동은 비록 체계적이지는 못했지만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흐름을 지속시켰다. 요컨대 당시 진보적 청소년운동이라 할 만한 운동의 의제는 주로 학교민주화, 민족자주교육, 학내비리 척결이었으며 이 또한 다른 거대사회담론과 뭉뚱그려져 있었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독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1980년대에 입시경쟁교육이 강화됨에 따라 강제야간자율학습, 강제보충수업 등이 일상적으로 시행되었다.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증가했으며 학교의 통제도 강해졌다. 이에 1980년대 초반부터 교사들과 중고등학생들의 저항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두발자유화, 입시경쟁교육 철폐 등을 주장했다. 징계․삼청교육대 등 숱한 탄압에도 소모임 형태로 살아남았던 중고등학생 운동 세력은 1980년대 중반에 들어 조금 더 활발하게 학내비리 척결, 두발규제철폐, 강제보충수업철폐투쟁(보철투), 입시경쟁 반대 등으로 집단행동에 나섰다.

  중고등학생들은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겪으면서 “대통령부터 반장까지 직선제로!” 구호를 외치며 학생회 직선제에 좀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는 학생회를 통해 학생 대중조직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연합(서고련)이 명동성당에서 노태우 당선 반대 농성을 벌이는 등 청소년들은 민주화운동에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에도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노동해방”, “조국통일” 구호와 입시교육 철폐, 학교민주화 등의 구호가 뒤섞여 있는 등 1980년대의 민주화․노동운동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이진 못했으나 내부적으로는 정치투쟁을 중시한 쪽과 교육문제에 집중한 쪽이 나뉘어 있었으며, 실제로도 두 세력의 활동 영역에는 약간의 차별화가 보인다.

  1989년부터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전교조와 함께 참교육 운동을 펼치는 형태를 띤다. 의제로는 살인적 입시경쟁교육 척결, 참교육 실현, 해직교사 복직, 징계철회와 사학비리, 학생자치 보장 등이 거론되었으며, 학생회 직선제 문제가 나오기도 했다. 학생들의 투쟁도 격렬했다. 투신과 점거농성, 수업거부, 시험거부, 방학거부 등이 광주, 서울, 나주, 부산 등지에서 계속되었다.

  참교육 운동 이후 1990년대 초반은, 참교육 운동을 수행했던 청소년들이 학교 밖에 지역기반 조직을 만드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주로 문화활동을 통해 청소년대중에게 접근했던 당시의 청소년단체들에는 “참배움일꾼청소년회”(참일청), “청소년회 샘”, “푸른 벗”, “희망” 등이 있는데, 이 단체들은 주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1990년대 초반의 단체들은 문화분반 운영, 수련회 등으로 청소년들을 끌어들여 교육하고 운동을 벌이는 방식으로 청소년들의 운동을 지속해갔다. 그 이슈는 때로는 수입개방반대였고 때로는 보충수업, 자율학습 철폐나 사학비리 고발이었다. 1990년대 초반에도 강경대 열사, 김철수 열사 사건 등으로 1000여 명의 청소년들이 집회에 모이기도 했는데 이 또한 참일청 등에서 조직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1994년 공안정국에서 정부가 ‘샘 사건’을 터뜨리면서 크게 위축되고 약화되어갔다.


청소년인권운동

  한 차례 단절을 겪은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인권”의 언어로 “최우주 씨 사건”을 통해 부활했다. 춘천고등학교 최우주 씨는 학교의 강제자율학습, 강제보충수업에 대해 청와대, 교육부, 강원도교육청 등에 민원을 제출했다는 글을 하이텔 게시판에 올렸다. 본래 헌법소원을 내려다 절차상의 문제로 민원을 제기하게 되었다고 밝힌 최우주 씨는 ‘학교가 학생의 기본권을 짓밟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습의 자유, 신체의 자유, 여가권 등이 이슈가 된 이 사건은 이후 두발자유화, 학생 대표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 등의 의제를 만들어낸 ‘학생복지회’와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을 전후하여 분출된 다양한 청소년들의 목소리와 직접 행동은, 주로 인권의 언어를 통해 이슈를 제기했다. 두발자유, NEIS 반대, 강의석 씨에 의해 촉발된 미션스쿨 종교자유, 강제야자폐지, 청소년의 노동에서의 권리(아르바이트와 현장실습) 등은 모두 인권의 측면에서 주장되었다. 사학비리와 사학법개정 문제도 계속 제기되고 있는 등, 모든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현재 인권운동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인권운동이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주요한 부분임은 분명하다.

  청소년인권운동은 ‘인권’이라는 보편적 원칙에서 청소년도 결코 예외가 아니며, 청소년이 성인과 다르지 않은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의 주체임을 주장한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기존의 민주화운동으로부터 갈라져 나오면서 인권운동의 형태를 취한 것은 자연스럽다. 이는 1990년대 초반부터 인권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 신사회운동들이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독립해가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방법론에 대해


4.1. 대중운동지향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수단적으로 대중운동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은 어느 정도 명확하다. 비단 진보적 청소년운동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진보적 운동들 대부분이 수단적인 면에서 궁극적으로 대중운동을 지향한다. 잘못된 사회체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다수 민중의 저항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전형적으로 수적으로는 소수가 아니지만 권력 관계상 소수에 처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 연대하고 집단적 조직을 이루어 권력의 평형을 맞추려 해야 한다. 이는 마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권력의 평형을 맞추려 하며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청소년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일터로 집중되듯이 ‘학교’라는 공간으로 다수가 집중되는 상황에 처해있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방법론에서 노동운동의 방법론과 유사한 부분을 상당수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사점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역사 속에서의 몇몇 사례들을 통해 대중운동을 지향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광주학생항일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발단은 전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괴롭힌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이전부터 광주지역에서는 동맹휴학과 같은 형태로 식민지 우민화 차별 교육에 저항하는 운동이 계속 벌어져 왔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펼쳐나가도록 조직했던 것이 ‘독서회’였다. 독서회의 전신은 마르크스주의 성향을 띤 비밀 지하조직인 ‘성진회’였다. 장재성 씨 등이 주도했던 성진회는 한 차례 해산하여 각 학교에서 조직 활동을 벌이다가 각 학교별 기반을 갖춘 뒤 독서회의 형태로 다시 통합했던 것이다. 모임의 회원들은 각 학교, 각 학년, 각 반별로 단위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소녀회’도 상당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적 기반과 투쟁 경험이 있었기에 광주의 활동가들은 1929년 11월 3일에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의 패싸움 형태로 터져 나온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발 빠르게 대처하여 2차시위를 각 학교별로 계획하고 이후의 백지동맹 등의 장기적인 행동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꾸준한 싸움 덕에 결국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는 학생들의 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었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주목할 점 중 하나는, 신간회를 비롯한 다른 항일단체들이 학생들의 운동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다른 사회운동과 유리되어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운동과 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참교육 운동

  1989년에는 전교조가 결성되면서 1년 동안 전국적으로 총 46만 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참교육 운동에 나서는 놀라운 운동이 일어난다. 1990년의 18세 미만 인구가 1400명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 중고등학생의 약 1/10 정도는 투쟁에 나섰다는 소리다. 이처럼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교조 교사들의 양심적인 외침과 요구가 청소년들의 요구와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했다. 비인간적 교육 속에서 최소한의 권리조차 누릴 수 없었던 청소년들은 그런 현실을 바꾸고자 끊임없이 싸워왔으며, 그 싸움은 전교조 창립을 계기로 더욱 격렬해졌다. 전교조 교사와 학생들의 유대로 운동은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갈 수 있었고, 학생들은 전교조 교사가 우리 이야기를 대신해주고 희생당한다는 생각에 참교육 운동에 한층 더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참교육 운동 때 보여준 학생들의 동원력과 조직력은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학생들의 저항의 구심점은 1987년 6월 항쟁의 흐름 속에 조직되어 온 소모임, 동아리, 학생회 등이었다. 청소년들은 1987년을 전후하여 교육 문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쳐왔고, 특히 1987년 6월항쟁을 경험하면서 학내에 적극적으로 소모임과 조직 건설을 시도했다. 그들은 학내의 대중적 조직 기반이 필요함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동아리나 소모임 등에서 학생들은 사회비판적 의식을 키워가고 있었고, 또 그런 조직들의 자주적 학생회 투쟁으로 세워진 직선제 학생회에 적극적이고 의식 있는 학생들이 진출하면서 학생회 조직은 운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모임들은 전교조 출범 등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자, 그동안 축적된 역량들을 모두 드러내가면서 유인물을 만들고, 다른 학우들을 조직하며 행동을 주도하는 등의 역할을 참교육 운동에서 해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학교와 정부의 탄압으로 학내에서의 이런 모임들이 많이 약화되자, 1989년의 참교육 운동을 경험했던 청소년들은 학교 밖에 청소년단체를 만들어서 청소년 대중 속으로 침투해가는 운동을 펼쳤다. ‘청소년회 샘’ 같은 경우는 1994년에 공안사건으로 파괴당하기 직전에는 거의 200여 명의 청소년들이 수련회나 문화 분반 활동 등을 통해 참여했다. 그 청소년들은 샘에서의 대화나 경험에서부터 사회 및 학교의 문제에 눈을 뜨고 유인물을 돌리는 등의 활동을 하여 학교 안에 문제를 일으켰다. 이런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샘의 상근자들이 가서 학교와 담판을 지어서 징계를 철회시킨 적도 있었다. 이는 학내의 활동이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고 사라져 갈 때 어떤 식으로 활동을 지속시킬 수 있는지 한 방법을 보여준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

  ‘학생인권과 교육개혁을 위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중고등학생복지회’의 일부 멤버들이 대중조직 건설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제기하면서 2000년도에 만든 단체이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무엇보다 2000년의 두발자유운동(일명 노컷운동)으로 유명하다. 당시 노컷운동은 웹연대 with의 인터넷 서명운동을 통해 불붙었으나, 그 불을 더욱 번지게 한 것은 바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오프라인 활동 ― 거리선전․서명운동․집회․인권선언 등이었다. 이 두발자유운동은 2000년 여름부터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으며, 당시 ‘준비위원회’의 (준)을 붙이고 있던 전국중고등학생연합(준)도 광주, 목포, 부산 등 각 지역에 지부를 설립하며 양적으로 크게 팽창하였다.

  그러나 두발자유화운동은 양적 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의 기만적인 ‘학교별 합의’ 지침에 일반 청소년들이 넘어가면서 그 불꽃이 꺼지게 된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을 비롯하여 다른 단체들도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2000년 두발자유운동은 각 학교에서 각개격파당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각 학교별 지회전이란 형태를 통해 대중조직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초기 대중조직 전략은 ‘형식적 대중조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즉,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을 대중조직으로 먼저 설정한 뒤 학생회․동아리․단체의 규합을 유도한 것이다. 청소년들의 지지를 통해서 대중조직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 아닌, 대중조직이 먼저 설정된 후에 거기에의 결합을 요구하는 방식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이 학생회 조직에 집착한 것도 문제를 낳았다. 사실 학생회장단 모임은 상당수가 엘리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따라서 학생회 조직을 규합하려 한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학내 지지기반이 많이 부족했고, 또 여러 대중조직 전략의 오류와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지부 및 지회에 대한 관리 소홀로 좌절을 겪게 된다. 그리고 학내에서 싸울 힘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후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본격적인 지회 전술은 2001년 봄 활성화 되어 서울지역의 경우 최소 파악된 것만 10여 개 이상의 지회가 활동했다. 그러나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조직관리 능력 미숙으로 자신의 조직 규모에 대한 파악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생적으로 각 학교에서 생겨난 모임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그 모임들이 학교의 탄압으로 해체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중앙은 지회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학교의 탄압은 너무도 강했다. 활동을 원하는 회원들이 계속 가입하면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덩치는 빠르게 커졌지만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이 덩치를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장기적으로는 대중조직 건설에 실패했던 것이다.


  앞서의 사례들을 통해 살필 수 있는 것은, 간략하게 축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학교를 거점으로 하는 학내의 대중적 조직을 건설하여 지속시켜야 한다.(소모임활동, 혹은 지회전) 탈학교청소년의 경우도 일터나 청소년문화의 집 등의 거점이 가능할 것이다.

② 이러한 기반이 없을 때는 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또 그 계기를 촉발시키는 것은 학교 밖에서의 활동(참일청, 샘, 그리고 전국중고등학생연합 등)이다.

③ 대중조직 건설은 차근차근 이루어져야 한다. 거품만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각 학교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저항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지원하는 데 세심한 주의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여러 인프라 면에서 따져보면 이제 막 시작하는 걸음마 운동이다. 기존에 활동하던 청소년들이 성장해서 성인이 되면서 조직이 흔들리는 등의 청소년운동 특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재학 중일 때 아래 학년과 잘 접촉해서 조직에 끌어들이라는 것 외에는) 획기적인 답이 제시되지도 못하고 있으며, 또 정말로 대중조직 건설이란 것도 밑바닥에서부터 해나가는 길고 힘든 작업이다. 그러나 그런 긴 작업과 시행착오의 역사가 선행되지 않으면 어떠한 운동도 발전하지 못한다. 과거의 여러 사회운동들도 그런 시행착오와 패배의 역사를 겪으면서 발전해왔음을 주지하며 인내심을 갖고 대중운동 건설에 임해야 할 것이다.


4.2. 경계해야 할 방식

  현재의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경계해야 할 것에는 ① 피터팬주의 ② 비정치성이나 정치적 중립의 환상 ③ 온라인 만능주의 ④ 정부나 국가에 대한 의존 등이 있다.

  피터팬주의는 청소년이 아닌 비청소년들의 개입을 극도로 꺼리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진보적 청소년운동을 공격하는 데 국가나 보수적 세력들이 ‘성인들의 조종’이라는 식의 비난을 일삼아 온 데서도 비롯되며, 또 청소년들이 성인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 하는 과민한 반응에서도 비롯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안정적인 조직과 활동가의 부재를 낳았으며 운동의 발전을 막는 요인이 되었다. 활동가가 청소년에서 나이를 먹어 자연스레 비청소년이 되면, 설령 활동할 의지가 있다고 해도 청소년운동에서 소외되면서 운동의 경험이 축적되는 것을 가로막았다. 청소년운동에서 청소년이 가장 중요한 주체가 되어야 함은 사실이나, 비청소년들도 거기에 얼마든지 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장애인인권운동을 장애인만 하는 것이 아니듯이. 비청소년들이 청소년운동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지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고민해야 하며, 그들의 운동 경험들을 전달할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비정치성이나 정치적 중립의 환상은 기존의 정치나 기성운동에 대해 꺼리는 감정 등에서 비롯된다. 이는 다분히 청소년들을 기존의 운동으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오랜 책략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비정치성 주장은, 청소년운동이 기존의 어떤 이념이나 운동과 무관한 ‘순수한’ 운동이거나 또는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 운동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운동에 제약을 만들 뿐이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다른 운동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전략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도 있지만, 사실 비정치성을 내세우는 단체는 활동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단체는 어떤 활동에 정치적인 색깔이나 기존 단체, 정당, 이념 등이 관련되어 있으면 그런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 따라서 오히려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자신의 대의에 일치하는 것에는 거리낌 없이 동의해야 한다. 마치 ‘학생인권법안’이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에게서 발의되었다고 해서 이를 지지하는 것을 꺼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민주노동당이 학생인권법안을 발의했기에 다른 정당보다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만능주의는 청소년들의 오프라인 조직이 필요 없으며, 편리한 온라인에서의 활동만으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에서의 활동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단적으로 이야기해서 온라인 서명 1만 명과 교육부 앞에 피켓들고 진을 친 500명의 청소년 중에서 더 강한 압박감을 느끼게 하고 실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후자이다. 중고등학생복지회가 온라인을 기반으로 삼은 것은 억압적인 학교 현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회한 것에 불과했다. 온라인은 비록 자유로운 활동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지만, 그만큼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크지 못하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온라인 만능주의는 현실세계에서의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한 청소년들에게서 드문드문 엿보이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제 행동의 중요성을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정부나 국가에 의존하는 것은, 직접 청소년들을 조직화하고 세력화해서 스스로 권리를 찾게 하지 않고 국가나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무엇을 해달라고 별다른 행동 없이 ‘청원’하는 형태의 운동을 의미한다. 이는 관변단체의 성격을 띤 곳에서 자주 보이는 것으로, 오히려 청소년들의 진보적인 요구를 달래서 체제 안으로 흡수하려고 한다. 이는 인권이 결국 자신이 쟁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며, 국가의 요식적인 행정 또는 입법 활동에 의존하게 만들어 운동의 목표 달성을 더디게 만든다.

  이상과 같은 여러 문제들은 지금까지 진보적 청소년운동에서 나타난 몇 가지 문제들에 불과하다. 앞으로 계속 운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더 다양한 문제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으며, 그러한 문제점들이나 시행착오를 얼마나 빨리 인식하고 해결하느냐에 따라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발전이 좌우될 것이다.



5. 맺음말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앞으로 계속 발전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발전을 위해서 계속 이슈를 만들고 행동을 벌여야 한다. 질적 발전과 양적 발전이 병행되기 위해서, 연구 및 정리와 행동을 통한 선동 또한 병행되어야 한다.

  대중적 투쟁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기를 앉아서 기다렸다가는 낭패를 보게 된다. 활동가들은 결정적인 기회나 대중의 의식 전환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만들고, 또 그때가 왔을 때 벌일 효과적인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연대하고 저항하면서 운동 기반을 조금씩이라도 만들어가야 한다. 행동이 행동을 낳는다. 그리고 그런 꾸준한 노력이야말로 길을 준비하는 일이다.

  주지할 것은,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내에서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고, 학내의 인권침해 사례를 모으고 비판할 학내 모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학교는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이자 청소년들의 생활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청소년인권문제의 많은 부분이 학교에 집중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탈학교 청소년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학교의 중요도는 퇴색되지 않는다.

  학내 모임은 학교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당분간 다소는 비밀스럽게 행동할 필요도 있다. 학내에서 관심 있는 친구들을 유도하고, 동아리 등에 스며들어 그들의 주장(학교 측의 활동 제한이나 각종 검열)을 옹호하여야 한다. 각종 전단지나 간행물을 학생 사회에서 유포시키고, 자주 모임과 토론회를 열어 결속을 다져야 한다. 그리고 지회-모임의 지속을 위해서 학생회나 동아리에 적극 참여하여 선후배 사이의 교류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학생회에 진출해서 학생회를 진보적인 성격으로 만들어 학교에 저항하고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일 것이다.

  덧붙여서 학교 밖에는 이러한 학교별 모임을 지원하고, 구성할 지역별 조직, 전국적 규모의 조직이 필요하다. 특히 이 단위에서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목소리를 낼 간행물 발간이 매우 중요하며, 학교별 모임의 토론회에 발제자나 연사를 보내줄 필요도 있다. 또한 회원들의 학교별 모임 건설에 도움을 주고, 같은 학교 회원이나 주변 학교 회원 혹은 모임에 연결고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은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학교와 사회의 탄압은 계속되고 있으며, 대중조직 건설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언제 달성될지 불분명하기만 하다. 두발자유운동도 7년째이지만 아직 두발자유를 이루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우리는 계속해서 길을 준비해갈 것이고, 끈기를 갖고 청소년의 인권이 보장되고 청소년들이 권리의 주체이자 사회 변혁의 주체로 나설 수 있을 때까지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더 행복하고 가치있게 살 수 있는 사회, 인간이 수단인 동시에 목적으로도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를 인간이 소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억압이 있는 한 저항도 있을 수밖에 없다.  (기왕 저항하는 것, 조직적으로 꾸준히 해서 목적 달성 가능성도 높여줘야 할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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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기업가 루이 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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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기업가 루이 르노 | 낙서장 2006/02/16 01:01
http://blog.naver.com/uu7982/30001863775
프랑스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기업가 루이 르노 

 

1. 머리말 

 르노 (Renault)라는 이름은 얼마 전부터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수년 전에 파산한 삼성자동차 사를 인수하여 한국에 진출하였기 때문이다.1) 현재 르노 사는 푸조-시트로엔 (PSA Peugeot Citro&euml;n) 사와 더불어 프랑스의 양대 자동차 사의 하나로서 세계 자동차 산업을 이끌어 가고 있는데 삼성자동차를 인수하기 직전에는 경영위기에 빠졌던 일본의 닛산에 투자하여 성공을 거두었다.2)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르노-닛산은 세계 자동차 시장의 10 퍼센트에 가까운 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며 2010년경에는 미국의 제네랄 모터스 (General Motors) 사나 포드 (Ford) 사의 수준으로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르노 자동차 회사의 역사는 크게 나누자면 두 시기로 나뉜다. 전반은 1898년 루이 르노가 비양쿠르 (Billancourt)3)의 작은 작업장에서 처음 자동차를 만든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그가 사망한 1944년에 걸치는 시기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탱크를 비롯한 많은 군수물자를 생산하여 프랑스의 승리에 기여한 공을 세웠던 루이 르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는 대독협력분자로 몰려 투옥되어 한달 만에 숨졌다. 다음해 프랑스 정부는 르노 사를 국유화하였다. 이로써 르노 자동차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르노 자동차 사는 프랑스의 대표적 국영기업(r&eacute;gie)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르노를 대독협력분자(collaborateur) 다른 말로 하자면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의 사유재산인 비양쿠르 공장을 몰수한 프랑스 임시정부의 인사들은 새로운 기업으로부터 르노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아온 르노라는 상표의 이름을 포기하고 어떻게 자동차를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반역자’ 르노의 이름을 새로운 회사명 &lt;R&eacute;gie Nationale des Usines Renault&gt; 에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을 창건하였던 루이 르노는 다른 프랑스 기업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르노는 프랑스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이는 기업가로서의 그의 삶이 20세기 전반의 역사와 너무나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를 다룬 전기가 여러 권 나왔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비극과 치욕으로 끝난 이 산업 영웅의 드라마틱한 생애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산업사의 관점에서 르노를 보려고 한다.4) 따라서 이 글은 기존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기업가로서의 루이 르노의 삶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르노가 프랑스 자동차 산업 뿐 아니라 20세기 전반 프랑스 경제와 사회에서 차지한 큰 비중을 고려해 본다면 이 짧은 소개의 글이 프랑스 자동차 산업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2. 출신배경과 기업의 창설 

 1871년 파리에서 태어난 루이 르노는 그의 경쟁자였던 앙드레 시트로엔 (Andr&eacute; Citro&euml;n)과는 달리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유태인인 앙드레 시트로엔은 프랑스의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명문대학인 에콜 폴리테크닉을 나왔다.5) 르노는 대학을 들어가는 대신 17세에 설계기사로 들로네-벨빌이라는 작은 자동차 회사에 입사하였다. 아마 이쯤 되면 루이 르노가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나 자수성가한 인물이라고 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이다. 르노는 프랑스의 부유한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알프레드 르노는 직물 상인이었을 뿐 아니라 단추 공장을 경영하는 기업가이기도 하였다. 집에는 하녀뿐 아니라 요리사와 마부 -- 오늘날 같으면 전용 운전기사 -- 가 있을 정도였으며 집도 굉장히 큰 집이었다. 땅과 건물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에 르노가 자동차 공장을 세우게 되는 센 강변의 비양쿠르에도 과수원과 채원 그리고 별장이 있었다. 이러한 파리의 탄탄한 부르주아 가문에서 4남 1여의 막내로 태어난 르노는 어릴 때부터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기계를 뜯어보고, 조립하고 자신이 직접 무엇을 만들어 보는 것을 취미로 하였던 그는 학교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기계 중에서 최근에 등장한 자동차는 특히 그의 관심을 끌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디옹-부통(Dion-Bouton) 사에서 만든 삼륜차를 사서 분해와 조립을 거듭하였다. 자신이 구입했던 자동차의 결점을 알아낸 그는 그보다 더 나은 자동차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곧 디옹-부통 사의 엔진을 장착한 소형자동차를 만들었다. 그가 21세 때의 일이었다. 자신이 만든 것과 같은 차를 사려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그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만들었다. 이것이 자동차가 처음으로 선을 보인 지 십여 년 뒤인 1898년의 일로서 르노 자동차 회사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었다.6) 르노가 공장을 세우는 데 필요한 돈은 그의 가족들이 대어주었다. 두 형들이 각각 3만 프랑씩을 출자하였던 것이다. 물론 손재주가 있는 루이 르노는 한푼도 대지 않고 노동을 제공하는 것으로 출자를 대신하였다. &lt;르노 형제 회사&gt; Renault Fr&egrave;res 라는 이름의 회사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자동차 회사라고 해서 오늘날의 자동차 회사를 머리에 떠올리면 곤란하다. 당시의 자동차 공업은 이제 막 출범한 상태였다. 컨베이어 벨트라는 것도 없었고 공장의 규모도 수공업 작업장과 유사한 것이 당시의 자동차 공장이었다. 르노 공장의 경우도 그 면적이 300 평방미터 정도에 불과하고 직원은 여섯 명이었다. 직원들도 르노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로서 르노와는 상하관계라기보다는 동료라고 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실제로 그 직원 가운데 한 사람은 르노의 군대 친구였다. 
 르노 자동차는 금방 유명해졌다. 1900년에는 직원수가 100 명을 상회하고 공장도 제법 크게 확장되었다. 르노는 왜 급속히 성공하였을까? 샤도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하나는 르노가 가진 발명의 재간이다. 특히 중요한 발명은 새로운 동력전달 방식이었다. 이전의 자동차들은 자전거처럼 체인을 통해 동력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기어 달린 자전거를 타본 사람은 이러한 방식의 동력전달 체계가 얼마나 불편한지 짐작할 것이다. 더욱이 자동차에는 엔진이 달려 있어 그 속도를 마음대로 줄이지 못한다. 르노는 이러한 단점을 기어가 맞물려 동력을 전달하는 “직접전동 방식” (prise directe)으로 해결하였다. 동력전달 방식에서의 이러한 획기적인 발명은 이후 지금까지 모든 자동차들이 채택하는 전동방식이 되었다. 당시에도 이 방식은 높이 평가되어 많은 자동차 제작자들이 이 방식을 그대로 도입하였다. 특허사용료도 지불하지 않고 직접전동 방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르노는 이러한 특허침해행위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였다. 판매액의 1 퍼센트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번 돈이 자그만치 350만 프랑이었다.7) 이러한 향상된 성능을 가진 자동차를 갖고 르노와 그의 형 마르셀은 용감하게 직접 자동차 경주에 뛰어들었다. 오늘날과 같은 자동차전용 경주장을 여러 바퀴 도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자동차를 최고속력으로 몰고 가는 것이 당시의 경주방식이었다. 1900년 당시 자동차의 최고속도는 이미 시속 100 킬로미터에 달해 있었다. 속도에 비해 안전장치는 부실하였다. 아직도 자동차를 위한 도로 -- 아스팔트로 포장한 도로 -- 는 출현하지 않아 마차들이 붐비는 도로를 달려야 하였으며 운전자는 먼지를 뒤집어써야 하였다. 고장과 사고가 빈발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동차를 직접 운전한 르노 형제는 여러 경주에서 승리하였다. 파리에서 툴루즈, 파리에서 베를린 심지어는 파리에서 비엔나까지 가는 코스였다. 1903년 파리-마드리드까지의 경주에서는 그의 형이자 중요한 동업자였던 마르셀이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 자동차 경주들에서 르노의 조그만 자동차가 연이어 우승함으로써 르노 자동차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당시의 자동차 경주에 대중들은 열광하였으며 언론도 크게 다뤘다. 르노 자동차는 자동차 경주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짜 광고를 한 것이다. 또 하나의 성공요인은 자동차 판매의 개념 자체를 바꾼 것이었다. 당시에는 자동차 사가 차대(車臺)만을 팔고 고객은 차체를 제작해주는 작업장 -- 수공업적 성격의 작업장 --을 찾아가 자기 주머니 사정과 취향에 맞게 차체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르노는 엔진을 직접 만들고 차체 부품들도 만들었다. 르노 사는 차대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점차 차체를 포함한 완성된 자동차를 팔기 시작하였다. 
 르노 자동차는 큰 인기를 누렸다. 영국과 미국, 독일 등 여러 나라에 수출도 하였다. 1909년 당시 런던의 택시는 절반 가량이 르노 차였다. (파리의 택시는 2/3) 1914년에는 런던에 르노 지사가 설립되었는데 여기서는 자동차 판매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특허침해를 감시하였다. 그리고 일차대전 직전에는 러시아에도 진출하여 모스크바와 여러 곳에 자동차 공장을 세웠다. 샤도 교수에 따르면 이 시기에 르노 자동차의 평균 수익은 20 퍼센트에 달했다고 한다.8) 이렇게 해서 번 돈을 르노는 기계설비와 공장건물에 투자하였다. 세계대전 직전에 르노 사는 유럽 제일의 자동차 제작사가 되었다. 이미 1908년에 유일하게 남은 그의 형 페르낭은 건강상의 이유로 손을 떼게 되었다. 루이 르노는 이제 유일한 회사의 주인이 되었으며 회사의 이름도 &lt;르노 형제 회사&gt;에서 &lt;루이 르노 자동차 제작사&gt; Automobiles Renault, Louis Renault constructeur 로 바뀌었다. 

 3. 미국과 전쟁의 충격 
  
 20세기초에 미국은 새로운 생산조직과 생산방식을 발전시켰다. 바로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프랑스 자동차 업계도 이러한 미국식 생산방식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루이 르노도 미국의 새로운 생산방식을 조사하기 위해 직접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포드와 테일러를 만났다. 미국식 생산방식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던 그는 귀국한 후 그의 공장에 미국식 생산방식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하는 일관공정과 대량생산의 포드주의보다는 ‘노동의 과학적 조직’을 통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려는 테일러리즘을 채택하였다. 포드식으로 공장을 재편하는 것은 엄청난 설비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이 적게 드는 테일러주의에 기울었던 것이다.9) 테일러주의에서는 노동생산성을 올리기 위해서는 작업도구 즉 공작기계에 대한 투자를 해야 하고 또 노동자들의 표준작업시간을 정하고 작업리듬을 그에 따르게 만드는 소위 ‘시간측정’ (chronom&eacute;trage)를 역설하였다. 르노는 무엇보다 후자에 끌렸다. 그는 시간측정을 공장에 크게 확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노동의 리듬을 강화하고 노동자들의 작업을 면밀히 감시하는 이 체제에 대해 노동자들이 반발하였다. 1913년 초의 파업은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크로노메트라지의 폐지를 요구하며 4주 동안이나 파업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루이 르노는 그 요구를 거부하고 공장폐쇄를 단행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을 개별적으로 심사하여 선별고용하였다. 비양쿠르 공장에서 파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테일러주의는 이제 르노 공장의 조직원리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10) 
 르노는 포드의 방식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생산비를 줄이기 위해 주요한 부품과 소재를 만드는 공장을 합병하거나 직접 세우는 쪽을 택했다.(수직적 계열화) 그리고 생산품목의 다양화를 선택하였다. 르노의 경쟁자가 되는 시트로엔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단일한 품종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포드식 방식을 충실히 따랐다.11) 르노 사는 이전부터 생산해온 택시나 트럭은 말할 것도 없고 버스, 청소차 그리고 심지어는 항공기와 선박 부품도 생산하였다. 이러한 전략이 더 나은 전략이었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당장은 르노 사를 곤경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이전에 르노는 수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기업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1913년에는 프랑스 자동차공업 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이러한 자리로 인해 그는 정부 인사들과 빈번한 접촉을 하게 되었다. 밀랑과 브리앙 그리고 알베르 토마 같은 인물들이 그러한 사람들이다. 특히 알베르 토마는 사회주의 지도자로서 노동문제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토마는 전쟁이 일어나자 군수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르노는 산업계의 대표로서 군수물자 생산에 협력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르노의 비양쿠르 공장 역시 군수공장으로 전환되었다. 무엇보다 긴박하게 요구된 것은 포탄 생산이었다. 르노 사는 이 시기에 프랑스 제일의 포탄생산 공장이 되었다. 포탄 외에도 르노 사가 생산한 군수물자로는 트럭, 대포, 비행기 엔진과 비행기 동체, 탱크 그리고 소총 등이 있었다. 특히 항공기 엔진은 전후에도 르노의 주력 생산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은 항공기 -- 물론 전투용 비행기 -- 의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시기이다. 르노 사는 비양쿠르 공장에 항공기 생산 작업장을 설치하였다. 
 르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의 구원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만든 탱크 때문이다. 물론 르노가 처음으로 탱크를 제작한 것은 아니다. 생-샤몽 사와 쉬네데르 사가 프랑스 군의 요구에 따라 만든 탱크는 너무 느리고 무거워 적의 참호를 돌파할 수 없었다. 르노는 그 대안으로 기동력이 양호한 경형 탱크를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1917년의 FT 탱크였다. 이 탱크로 인해 프랑스 군은 1918년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전쟁을 승리로 몰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12) 

4. 전간기 르노의 사업 

 르노는 전쟁 이전부터 생산비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써 수직적 통합을 추진해왔다. 부품 생산을 하청업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가능한 한 피하고 직접 생산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물론 르노 혼자서 부품공장을 세우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기업들을 끌어들인 경우가 많았다. 자동차용 전기부품 생산을 위한 회사 (SEV)를 파나르, 베를리에 등 다른 자동차 기업들과 함께 설립한 것이나 철강제품의 공급 확보를 위해 다른 철강재 소비자들과 함께 로렌 지방에 제강소 (UCPMI)를 설립한 것이 그런 예가 된다. 
 그리고 대공황 직전에 미국을 다시 방문한 르노는 초현대식 공장을 세울 결심을 하였다. 비양쿠르에 인접한 세갱 섬에 1억 프랑의 돈을 투자하여 공장을 건립하였다. 이 공장은 이제 원자재를 제외한 자동차 부품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과감하게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르노는 다양한 차종 생산을 고집하였다. 이것이 시트로엔과 그의 주요한 차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르노는 6 CV 짜리 소형차도 생산하였지만 6기통 40 CV 의 고급 승용차도 생산하였다.13) 그러나 전간기 동안에 출시된 르노 사의 다양한 자동차들은 혁신적인 것은 드물었고 대부분 이전의 모델들을 조금씩 개량한 것이었다. 이는 르노가 제1차대전 이전에 74 건의 특허를 얻었던 것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따라서 댕글리가 이 시기의 르노가 기술적인 면에서 보수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르노는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는 달리 자동차만을 생산한 회사는 아니었다. 르노는 1925-1943년간에 총 256건의 특허를 획득하였는데 이는 자동차 기술이라기보다는 비행기 제작, 기관차 제작, 탱크, 특수강 등 주로 다른 분야에서의 특허였다.14) 
 르노가 대공황기에 확장한 사업 가운데 하나는 유명한 비행기 제작사인 코드롱 (Caudron) 사를 인수한 것이다. 당시에 비행기는 일반인들로부터 대단히 큰 관심을 끌고 있었다. 코드롱 사는 초기의 비행기 제작자 가운데 한 사람인 코드롱 형제가 설립한 것으로 제1차대전기에 크게 성장한 회사였지만 당시에 자금난과 경영부실 그리고 노후설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비행기 엔진을 제작해 왔던 르노는 개인적으로 비행기를 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회사의 자동차 선전에 이 항공기 제작사의 이미지가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속도와 모험의 이미지 -- 시트로엔의 경우 아프리카, 중앙아시아로 대규모 탐사여행을 기획하여 프랑스인들의 환호를 받았었다 --를 르노 사 제품에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공기 산업에 이렇게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결과적으로는 완전 실패였다. 생각처럼 민간수요가 많지 않았고 국가의 전투기 구매사업도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15) 
 대공황은 프랑스 자동차 산업에 큰 시련과 변화를 가져왔다. 수요는 격감하고 해외수출도 어려워졌다. 많은 소규모 자동차 회사들이 이 시기에 사라지거나 변신을 강요당했다. 프랑스에서 3대 자동차 회사가 정립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대공황기였다. 그리고 3대 자동차 회사의 하나로서 르노 사를 앞섰던 시트로엔 사는 경제여건이 악화되어 가는 데도 불구하고 공장을 새로 짓고 광고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바람에 그만 파산하였다. 르노 사의 경우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위기에 몰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르노 사의 재무상태가 양호하였기 때문이다. 르노는 신규투자를 은행가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르노 사의 자본금에서 이 시기에 은행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3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르노 사는 르노가 대부분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투자자금은 모두 르노의 개인재산에서 나왔다. 대부분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던 르노는 주식을 시장에 유통시키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주식가격의 폭락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르노 사는 재무구조가 탄탄한 대신 혹독한 노동쟁의를 겪어야만 하였다. 대공황기에 르노 공장은 1936년과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노사분규를 겪었다. 이 파업들은 프랑스 노사관계의 발전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띠기 때문에 좀 자세히 살펴보자. 1936년의 파업은 5월 12, 13일 르아브르와 툴루즈 등에서 시작되었는데 14일에는 파리 지역에서도 파업이 일어났다. 르노의 비양쿠르 공장에서도 5월 27일부터 파업이 시작되어 공장 전체로 확산되었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의 산정방식 개선, 위생 및 안전설비 확보 등 통상적인 요구를 제시하였다. 르노 사측에서는 신속하게 그 요구를 수용하였다. 사측에서는 또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내쫓기 위해 공권력의 개입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상황을 악화시킬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도 자체적으로 규율을 유지하여 기계나 건물을 파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점거한 비양쿠르 공장은 살벌한 분위기보다는 마치 축제를 여는 듯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가족들을 공장으로 초청하기도 하고 노래소리가 울려퍼지고 연극이 공연되기도 하였다. 그 사이사이에 공산당 지도자들의 연설이 있었다. 공산당 (PCF)과 노동총동맹 (CGT) -- 비교적 온건한 노동총동맹과 혁명적인 독립노동총동맹 (CGTU)은 연초에 통합을 선언하였다 -- 의 인사들은 르노 공장이 갖는 중요성을 감안해 르노 공장의 파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개입하였다. 이 시기의 사정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16) 파업이 전국에 걸쳐 걷잡을 수 없게 확대되어 나가자 재계의 지도자들은 노동계와의 협상을 모색하였다. 노동총동맹 측에서도 자신들이 통제하기 힘든 파업의 물결을 잠재우기 위해 해결책을 인민전선 정부에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상관저인 마티뇽 관에서 노동총동맹과 프랑스 자본가들의 조직인 프랑스생산연합 (CGPF) 간의 협상이 시작되어 타결을 보았다. 이것이 유명한 마티뇽 협정으로서 그 내용은 노동조합의 자유를 보장하는 단체협약 체결을 기업에서 승인하며, 기업이 파업 때문에 노동자를 징계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그리고 임금인상을 약속하였다. (7퍼센트에서 15 퍼센트 사이) 반면 노동계는 노조활동을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것과 10인 이상의 모든 작업장에서 노동자 대표 (d&eacute;l&eacute;gu&eacute;)를 선출하라는 기업가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또 공장점거를 종식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협정체결은 좌파진영과 노동자들에게 노동자들의 대승리로 여겨졌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인민전선 정부라는 친노동자적 좌파정부를 가졌을 뿐 아니라 전국적 파업운동을 통해 자본가들로부터 양보를 얻어내었다. 르노의 노동자들은 축제와 같은 파업을 13일까지 계속하였다. 그날 르노의 노동자들은 경영진이 포진한 건물 앞을 의기양양하게 행진하였다. 르노 노동자들은 -- 물론 프랑스 노동자 전체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 곧 레옹 블룸 정부가 의회에 제출하는 주 40 시간 노동제와 2주간의 유급휴가제를 선물로 받게 된다. 
 그런데 르노 공장의 노동자들이 마티뇽 협정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13일까지 파업을 계속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샤도 교수는 6월 2일 르노 사의 양보에 의해 노동자들의 요구가 수용되었지만 4일부터 다시 파업이 재개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6월 4일부터 13일까지의 파업에서 문제가 된 것은 노동자 대표제였다고 한다.17) 재계와 정부, 그리고 노동총동맹의 온건파들 (레옹 주오 서기장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은 노동자 대표를 오늘날의 고충처리위원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노동자들의 불만사항을 사측에 제시하고 노동법 규정의 준수여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반면 공산당 계열 인사들은 고용 문제에서 고용주가 협의해야만 하는 영국식 작업장 대표 (shop steward)로 생각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협상은 이번에는 르노 사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파리 지역의 금속노조 연맹과 파리 지역 기업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비양쿠르 공장의 사태는 르노 사를 넘어서 프랑스 전체 노사관계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12일 협상은 공산당 측의 패배로 끝났다. 정부도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노동총동맹의 온건파들도 과격파들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당 활동가들은 이제 노동자 대표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공장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1938년 11월의 파업은 36년의 파업과는 다른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36년의 파업은 인민전선과 노동자들의 승리라는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치 축제처럼 진행되었던 것이었다면 1938년 파업은 인민전선 정부와 그 정책이 흔들리는 가운데 일어났다. 36년과는 달리 프랑스의 기업가들도 호락호락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11월의 파업은 40시간 노동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주지하다시피 40시간 노동제는 인민전선 정부의 주요한 치적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경제상황의 악화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40시간 노동제를 그대로 시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특히 히틀러의 야심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에 군비생산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처지였다. 군수부문을 제외하면 다른 부문에서는 노동력을 구하기 힘들어 설비를 놀리는 형편이었다. 기업가들의 압력을 받은 달라디에 정부는 초과근무가 가능하도록 40시간 노동제와 연관된 시행령을 제정하였다. 이 시행령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다섯 시간의 초과근무를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초과근무 수당은 일반 임금보다 높다) 이렇게 되면 토요일에도 근무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40시간 노동을 중요한 투쟁의 성과로 생각하였던 노동총동맹총과 공산당이 장악하였던 금속연맹 인사들에게 이 시행령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공산당은 파업으로 맞섰다. 11월 21일부터 여러 곳에서 일어난 파업은 공산당의 지시로 시작된 것이다. 르노 공장은 다시 이번 파업 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공산당과 금속연맹의 지도부는 22일 비양쿠르 공장 문 앞에 위치한 쥘 게드 -- 프랑스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 --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이날 우연하게 두 명의 노동자 대표가 해고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날의 집회는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24일 르노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공장점거를 수반한 파업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공권력이 가만있지 않았다. 무려 4천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파업을 진압하였다. 루이 르노는 즉각적인 공격을 반대했지만 경찰에서는 이번 공장점거 사태의 불법성과 그것이 내포한 중요성 -- 만일 이번 점거사태가 방치된다면 파리 주변 지역 일대에 공장점거 파업이 들불처럼 퍼져나갈 것이라는 주장 -- 을 지적하며 강제진압 작전을 시행하였다. 그 다음에는 우리 나라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들이다. 경찰은 건물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향해 최류탄을 쏘아대며 공격하고 노동자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주위의 이용가능한 물건들을 던지거나 휘두르며 저항하였다. 이 전쟁 아닌 전쟁의 결과는 우리가 자주 목도한 것과 매한가지였다. 붙잡힌 노동자들은 경찰서로 연행되고 공권력에 대한 집단적 무장반란의 죄로 기소되었다. (이들은 며칠에서 수개월간의 구류에 처해졌다) 
 다음날 르노 사측에서는 공장폐쇄를 단행하고 노동자들을 심사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노동자들은 재고용에서 제외할 것을 선언하였다. 실제로 20 퍼센트 정도의 노동자들은 다시 고용되지 못했는데 이들은 모두 공산당 계열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당국에 의해 “주모자”로 처벌을 받았던 300 명 가까운 수의 노동자들은 다음에 3월에는 상원의 발의로 사면되었으나 르노 사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르노 사가 이들의 고용을 거부하였던 것은 물론이지만 주변 공장에서도 이들의 블랙 리스트가 나돌아 이들의 취업을 거부하였다. 
 이 파업의 실패는 결국 공산당과 노동운동의 패배라고 할 수 있다. 노동총동맹은 르노 사와 정부의 조처에 항의하여 즉각 총파업을 벌일 것을 지시하였으나 파업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 패배에 대해 몇 년 후에 복수를 하게 된다. 바로 루이 르노에게. 
 
 5.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점령기의 르노 

 1939년 9월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독일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1940년 6월에 전쟁이 끝나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르노는 프랑스가 독일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후 조국의 방어를 위해 협력하지 않고 오히려 독일 점령군에 협력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그는 이러한 죄 때문에 투옥되고 기업까지 빼앗기게 되었던 것인데 과연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프랑스의 구원자 역할을 하였던 루이 르노는 이 새로운 전쟁에서는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전쟁이 시작되자 르노의 공장도 군수생산을 위한 공장으로 전환되었다. 공장에는 전선으로 보내지는 대신 산업현장에 동원된 노동자들이 수천 명 배치되었으며 군수부에서 파견된 감독관이 상주하였다. 그런데 군수부 장관과 르노는 비양쿠르 공장의 역할에 대해 의견이 충돌하였다. 기업가 출신으로 군수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던 라울 도트리(Raoul Dautry)는 르노 공장이 승용차 생산은 중단하고 탱크를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르노는 탱크보다는 트럭과 승용차를 생산하고 탱크는 다른 기업이 만들기를 원했다. 그의 경험으로는 전쟁이 끝나면 탱크 생산 설비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희망은 군수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르노가 군수부의 요청에 적극 호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후에는 르노 개인에게 크게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군수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화가 난 르노는 “국방이라고? 난 몰라. 내가 원하는 것은 돈이 되는 프리마카트르나 쥐바카트르야”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18) 심지어 르노는 자기 회사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르노는 정부의 요청대로 군수품 생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전황이 악화되었다. 
 1940년 5월에 들어서는 독일군의 침공이 본격화된다. 전황은 파국적인 양상으로 치달아갔다. 프랑스는 북부와 동부 전선에서 패배하여 공업지역을 넘겨주어야 하였다. 그 결과 전쟁수행을 위한 물자생산 능력의 태반을 급속히 상실하였다. 다급한 처지에 몰렸던 당시의 수상 폴 레이노는 르노의 도움을 구했다. 미국에 가서 군수품 생산을 위한 도움을 얻어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르노는 건강이 무척 나빴고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느낀 듯하다. 4월 9일에는 아주 구체적인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장 모네를 단장으로 한 군수물자 구매단이 미국에 파견되어 있었는데 또 르노를 미국으로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준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은 물론이다. 건강이 나쁜 르노가 왜 이런 제안에 응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6월 5일 뉴욕에 도착하여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측 인사들을 만나 협조를 당부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6월 17일 파리가 점령당해 패배하였다.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하고 정전협상을 제안했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루이 르노의 임무는 어처구니없이 끝나 버렸다.19) 
 1940년 7월부터 비양쿠르 공장은 다시 문을 열었다. 비시 정부도 파리의 실업자들을 생각해서 공장 문을 여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독일군 당국이 르노 공장을 그대로 놔둘리 만무하였다. 이들은 말로는 르노 공장이 민수용 생산만 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곧 군용트럭의 부품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프랑스 군으로부터 노획한 고장난 탱크의 수리를 요구하였다. 독일 당국의 문서는 몇몇 증인들의 증언과는 반대로 르노가 분명히 독일 당국의 요구를 거부했음을 밝히고 있다.20) 독일 점령당국은 르노에게 최후통첩을 하였다. 명령하는 수리작업을 이행하고 사보타지가 있는 경우 르노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르노는 독일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독일이 요청하는 탱크수리를 해주고 군용트럭을 생산하였다. 일반용 승용차 생산은 할 수 없었는데 이는 시트로엔이나 푸조 사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연합국이 보기에 르노의 비양쿠르 공장은 제3제국의 주요 군수시설의 하나였다. 그래서 1942년 1월에 영국 공군은 비양쿠르 공장의 폭격을 결정하였다. 1942년 3월 3일 밤에 비양쿠르 공장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있었다.21) 영국의 폭격기가 무려 230 여대가 몰려와 폭격을 하였던 것이다. 독일을 위해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모든 프랑스의 공장들은 공습의 대상이 된다는 구실을 영국은 내세웠다. 5백명 정도가 사망하였을 뿐 아니라 생산시설이 큰 타격을 입었다. 다음 해에도 르노 사의 르망 공장 -- 순전히 군수공장이었다 -- 도 표적이 되었으며 비양쿠르 공장은 세 차례에 걸쳐 다시 폭격을 당했다.22) 르노 사의 경영진들은 폭격을 받은 후에도 공장을 복구하고 생산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1944년 여름에 공장 문을 닫게 된 것은 이러한 폭격 때문이 아니었다. 에너지와 원자재 및 노동력 부족 때문이었다. 1944년 7월 23일 문을 닫았던 비양쿠르 공장은 독일군이 철수한 후에야 다시 공장문을 열게 된다. 

6. 르노의 최후와 르노 자동차사의 변화 

 독일군이 퇴각한 후 프랑스에서는 여러 레지스탕스 조직들에 의한 숙청활동이 펼쳐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재판을 거치지 않고 약식처형이 자행되는가 하면 완장을 두른 자들에 의한 약탈행각 또한 빈번하게 일어났다. 대독협력분자에 대한 처리도 엄격한 법적 절차를 따라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독일에 협력한 -- 아니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 기업가들에 대한 숙청작업에서는 공산당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되었다. 드골 측도 기업가들에 대한 공산당의 처리방침을 받아들였다. 
 르노를 직접 고발은 사람은 르노 드 탕플러리라는 77세의 늙은이였다. 이 사람은 르노와 개인적인 안면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서 르노가 공장이 폭격을 당한 후 5억 프랑의 보상금을 받았으며 독일의 주문을 통해 2억 프랑을 벌었다는 소문을 알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23) 르노는 1944년 9월 18일 법원에 출두하여 심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독일에 협력함으로써 국가의 안보에 타격을 가했다는 주장을 단호하게 부인하였다. 자신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독일을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생산을 늦추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진술이 끝난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공산당 언론 -- 공산당 기관지 &#43092;뤼마니테&#43093; -- 은 르노가 체포되지 않고 도주했다고 떠들어댔다. 
 공산당 언론들은 르노의 문제를 독일에 협력한 기업가들 처리의 시금석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르노는 프랑스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르노를 심판하지 못하면 레지스탕스의 혁명적 이념은 공허한 것이 된다! 공산당의 압력 하에 결국 사법부도 굴복하였다. 9월 22일 르노는 2차 심문을 받은 후 투옥되었다. 2차 심문에서 르노의 변호인은 1940년에 르노 공장의 수익은 6,200 만 프랑이었다가 정전협정이 맺어진 후인 1941년은 1,800 만 프랑으로 줄어들고 다음해에는 수익이 거의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24) 르노가 독일 당국에 협력함으로써 큰 이익을 취했다는 주장을 수치로 논박한 것이다. 그러나 예심판사는 르노의 투옥을 명령하였다. 그는 파리 인근의 프렌 감옥에 수감되었다. 10월 10일에는 건강 때문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뇌출혈이 일어났으며 상태는 하루하루 악화되어 갔다. 혼수상태, 극심한 통증, 경련이 반복되었으며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10월 24일 르노는 운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주말이면 늘 가서 쉬던 센 강변의 에르크빌(Herqueville) 마을 교회 묘지에 묻혔다. 묘비명에는 “루이 르노, 1877-1944”란 말 외에는 아무런 말도 적혀 있지 않았다.25) 
 르노가 감방으로 간 직후 이제 르노 공장의 처리가 남게 되었다. 일단 국유화의 원칙이 정해졌다. 레지스탕스 운동으로부터 나온 프랑스 임시정부는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대규모 국유화이다. 국가의 기간산업과 공공서비스 부문에 속한 기업들을 다수 국유화하였다. 이는 프랑스 경제의 관건이 되는 부문에 대한 사적 지배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26) 한편 독일에 협력한 일부 기업들에 대해서는 징벌적 차원에서 국유화를 단행하였다. 항공기 엔진을 제작하는 &lt;그놈 에 론&gt; Gnome et Rh&ocirc;ne 과 자동차 사로는 르노 사와 베를리에 사가 그 대상이 되었다. 앞의 경우와는 달리 이 기업의 주주들에게는 아무런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르노 사의 경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르노 사를 국유화할 때 법적인 형식이 문제가 되었다. 징발의 형식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몰수의 형식을 취할 것인가? 징발의 경우는 아무리 당시가 전시라 하더라도 소유주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 그 액수가 엄청날 것임은 자명하였다. 반면 몰수는 재판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아직 재판은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이다. 더욱이 재판이 시작되면 법적으로는 르노가 유리하다.27)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압류였다. 정부는 10월 4일 피에르 르포쇠 (Pierre Lefaucheux)를 공장의 임시관리인으로 임명하였다.28) 
 1945년 1월 15일 정부령에 의해 르노 공장은 정식으로 국영 기업이 되었다. 정부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르노는 전쟁 전과 전쟁 동안 그리고 독일 점령기에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독일을 위해 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조국의 배반자이다. 조국의 배반자에 대한 징벌은 죽음과 재산몰수이다. 이제 르노가 죽었으니 그 재산을 몰수하자. 이리하여 1945년 초 국영기업 르노 (RNUR)가 탄생한 것이다.29) 
 프랑스 최대의 기업 르노를 몰수한 프랑스 정부는 르노의 가족에게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정식 재판 없이 한 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프랑스에서는 통했는지 몰라도 르노가 기계를 사기 위해 은행계좌를 갖고 있었던 미국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미국 뉴욕주 법원은 재판절차 없는 몰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영기업 르노 사에게 르노 개인의 계좌를 넘겨주지 않았던 것이다.30) 르노의 유족들 -- 르노의 부인 크리스티안과 아들 장 루이 -- 은 법적인 수단을 통하여 기업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불가능하였다. 르노 유족에게도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르노가 제1차대전기에 얻은 이익에 대한 세금이 아직 미납되어 있었고 또 르노가 독일점령기에 획득한 부당이득에 대한 엄청난 세금을 납부해야 하였다. 그 벌금이 무려 16억 프랑을 넘었다. 그리하여 유족과 르노 사(RNUR)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전 르노의 자동차 회사 (SAUR)에 속했던 국내외의 모든 자산을 국영기업 르노 사(RNUR)에게로 이전하는 것에 유족이 반대하지 않기로 한 대신 국영기업 르노 사가 르노 개인의 부당이득에 대한 벌금과 전시의 수익에 대한 세금 그리고 루이 르노의 개인 채무의 절반을 떠맡는다는 것이었다.31) 이 타협으로써 르노 공장에 대한 유족들의 법적 싸움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국영기업이 되고 난 후 르노 사는 어떻게 경영되었던가? 이는 루이 르노의 생애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문제이지만 산업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문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간략히 살펴보자. 

 7. 르노 이후의 르노 사 

 르노 사의 경영을 맡은 르포쇠는 예전의 르노 공장을 ‘감옥’이라고 비난하면서 르노 사를 혁신하려고 하였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와 노동조합과의 관계가 달라졌다. 노동자들에게는 사실상의 종신고용이 보장되었다. 이 때문에 르노 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손자까지 삼대가 함께 근무하는 경우가 생겨날 정도였다.32) 노동자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도 개선되었다. 갖가지 명목의 수당이 신설되었을 뿐 아니라 휴일에도 임금을 지급하기 시작하였으며 (1955년) 월급제도 확대되었다.(1959년) 또 임금을 물가지수에 연동시켜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보장하였다. 휴가도 프랑스 최고수준을 달렸다. 1955년에는 유급휴가가 연 3주로 늘어났으며 다시 몇 년 뒤인 1962년에는 4주로 연장되었다. 노동시간도 축소되었다. 노사 관계도 개선되었다. 노동자 대표들은 인사관리에서 중요한 협력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르노의 경영진은 르노 공장의 노동조합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노조와 교섭하였다. 그리하여 1955년 노조와의 협약이 최초로 체결되었는데 이 협약에서는 2년간 임금을 인상하며 유급휴가를 3주로 늘리는 대신 노동조합들도 파업에 호소하기 전에 화해를 위한 모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무가 규정되었다.33) 이러한 노조와의 협력관계를 설정함으로써 르노 사는 노사분규를 피하고 기업의 안정적 경영을 위한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르노 사에는 노동총동맹 (CGT) 뿐 아니라 좀더 온건한 민주노총 (CFDT)이나 노동자의 힘 (FO) 같은 노동조합이 있었으나 친공산당 계열의 노동총동맹이 압도적인 우위를 누렸다. 노동조합은 ‘기업위원회’ (CE)를 통해 노동자들의 생활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70년대에 이 조직은 임금총액의 2 퍼센트에 달하는 예산을 운용하였으며 직원도 600 명이나 되었다.34) 노동총동맹은 자신들의 활동가들을 이 자리에 배치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해고된 노동자들도 기업위원회의 직원으로 채용되어 버젓이 르노 공장을 드나들 수 있었다. 르노의 비양쿠르 공장은 노동총동맹의 아성이 되었던 것이다. 
 르노 사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복지에서 기수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르노 사에서 노동자들에게 부여한 혜택은 국가에 의해 제도화되거나 다른 기업들에서도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르노 사 방식의 노사관계는 경영이 순조로운 한에 있어서만 유지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었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까지는 국내외의 시장이 꾸준히 확대되어 더 많은 생산을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영광의 30년’ 동안 이러한 노사간의 타협체제는 잘 굴러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 오일 쇼크로 시작된 경제적 위기와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강력한 도전으로 경영환경이 급속히 악화되었다.35)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말부터 르노 사도 적자를 모면하지 못했다.36) 오랫동안 해고와는 거리가 멀었던 르노 사도 구조조정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인력과잉이 무려 2만 명에 달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제 구조조정의 시간이 도래하였던 것이다. 1985년에는 노조활동가들에 대한 해고가 있었으며 파업과 폭력사태가 뒤따랐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저항은 대세를 바꾸지 못했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 구조조정은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인력감축을 비롯한 구조조정의 결과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이 몇 년 내에 크게 향상되었다. 10년 내에 원가도 절반이나 하락하였다.37) 그리고 1987년부터는 재무상태도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모두 사회당 정부 하에서 시작되었다. 1982년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법 개정을 주도하였던 사회당 정부도 경제환경의 변화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우파 정부는 르노 사의 민영화를 추진하였다. 국가가 대주주의 지위를 유지하였지만 주식의 상당 부분이 일반에 매각되었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르노 자동차 사의 법적 지위도 바뀌게 되었다. 국영공장 르노 (RNUR)로부터 이제 그냥 주식회사 르노 (SAUR)로 바뀌었던 것이다.38) 비슷한 시기에 르노 사에 또 하나의 중요한 -- 상징적인 -- 변화가 있었다. 바로 비양쿠르 공장의 폐쇄이다. 물론 노동조합의 반대투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992년 3월 31일 프랑스 자동차 산업의 성지이자 프랑스 노동운동의 성지이기도 한 비양쿠르 공장이 문을 닫았던 것이다. 그 대신 여러 곳에 최첨단 공장들이 들어섰다.39) 이 역시 산업의 현대화를 위한 불가결한 조처였던 것이다. 

8. 맺음말 

 앞에서 보았듯이 루이 르노는 성공한 기업가였다. 그는 오로지 기계에 대한 열정과 재능으로 프랑스의 최대 자동차 회사의 하나를 키워냈다. 그의 기업은 대공황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의 주요한 경쟁자였던 앙드레 시트로엔과는 달랐다. 시트로엔은 대공황 속에서 파산하여 기업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르노 역시 대독협력분자로 몰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시트로엔은 파산한 후 얼마 있지 않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유수한 기업을 키워내고 많은 재산을 모은 성공한 기업가였지만 말년의 삶이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행불행은 우리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루이 르노라는 인물에 의해 세계적인 자동차 제작사가 하나 만들어졌으며 이 기업은 그가 사라진 이후에도 프랑스의 경제를 떠받치는 주요 기업의 하나로 남았다는 것이다. 루이 르노가 사라진 뒤에도 르노 자동차는 국영기업이라는 독특한 지위를 기반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국영기업 르노의 경영상의 여러 특징들과 그 성과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흥미로운 연구과제로 남아있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루이 르노라는 개인이 없었더라면 르노 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 이는 마치 정주영이 없었더라면 현대 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며 이병철이 없었더라면 삼성반도체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르노는 공산당과 노동운동 진영으로부터 노동자의 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로 인하여 많은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삶을 영위하고 프랑스가 그 산업적 역량을 자랑할 수 있는 대기업이 하나 만들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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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도요타 정리해고 투쟁

필리핀 도요타, 233명 해고, 25명 형사고소
[도요타반대세계공동행동](1) - 도요타 반대 세계공동행동 전개
필리핀도요타노조지원모임 
세계 다국적기업의 대표격인 도요타에 반대하는 운동이 국제금속노련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도요타반대 세계공동행동은 지난 6월말부터 시작되었다. 이번 공동행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필리핀 도요타노조는 일본대사관과 도요타영업소에 대한 항의행동을 통해 도요타기업의 부당노동행위를 규탄하였다. 또한 남아프리카의 도요타공장과 브라질 상파울로에 있는 두 곳의 도요타공장이 1시간 파업을 벌였고, 그외 각국의 노동조합이 도요타 기업에 항의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등 다국적기업 도요타 반대 세계공동행동의 연대가 시작되었다.

7월19일 열린 필리핀도요타노조 지원 북관동결의대회

도요타 본사가 있는 일본에서는 6.16일 도요타 도쿄본사 항의 행동을 시작으로, 필리핀 도요타노조를 초청하여 아이치본사, 카나카와, 아이치, 오오사카, 기타관동, 도쿄 지역에서 연이은 항의집회를 실시하였다.

7월 19일 열린 '세계는 도요타의 부당노동행위를 규탄한다. 필리핀도요타 노조지원 도쿄집회'에는 1백여 명이 참가하여 도요타노조의 현지 투쟁을 소개하는 영상과 함께 세계공동행동의 동참과 확대를 결의하였다.

에도 필리핀 도요타노조 위원장

에도 필리핀 도요타노조 위원장은 필리핀 도요타노조가 설립되기까지의 과정과 승인선거를 둘러싼 회사측의 탄압을 생생하게 보고하였고, 다국적기업 도요타와 싸우고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과 함께 일본,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 국 노동자의 연대를 호소하였다.

필리핀도요타노조 지원 도쿄결의대회

'필리핀 도요타노조를 지원하는 모임'의 야마기와 대표는 "세계를 대표하는 다국적 기업 도요타의 부당노동행위를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된다"라며 필리핀 도요타노조와의 연대 및 전 세계 도요타 반대행동의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편 호주제조노조(AMWU)는 최근 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도요타노조에게 미화 1500 달러를 투쟁기금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자리에 참여한 캐나다 자동차노조(CAW)와 CWA노조, 뉴질랜드 EPMU노조도 각각 미화 1500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도요타반대 세계 노동자 공동행동 성명서
세계의 모든 노동자 시민에게 호소한다!
도요타 반대 세계 공동행동의 더 넓은 확대를!

ILO권고와 필리핀 법(최고재판결)을 존중하고 해고자 136명의 원직복귀와 단체교섭의 개시를!

필리핀 도요타의 단체교섭거부, 233명의 해고, 25명의 형사고소

1988년 필리핀 도요타가 설립되어, 2000년 3월 필리핀 도요타노조(TMPCWA)는 필리핀 도요타 노동자의 3번째의 도전끝에 처음으로 단체교섭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필리핀 도요타측는 단체교섭을 거부하고, TMPCWA의 단체교섭권을 박탈하기 위해 노동고용성에 고소했다. 그리고, 필리핀 도요타측은 2001년 3월 노동고용성의 공청회에 참가한 조합원 233명을 '결근'하였다는 이유로 해고하여, 64명을 정직처분했다. 이 해고와 정직처분에 대항하여 TMPCWA는 파업을 시작했고, 이에 대하여 필리핀 도요타 측은 조합원 25명을 '[눈을 치켜들었다' 등의 이유로 형사고소 하여, 필리핀 정부에게 "파업을 해결하지 않으면, 자본을 전부 거두어들이겠다"라고 위협하여 파업중지명령을 내리게 했다.

최고재판결도 ILO권고도 무시하는 토요타와 필리핀 정부

2003년 9월 필리핀 최고재판소는 TMPCWA의 단체교섭권을 확인하는 판결을 내렸으나, 필리핀 도요타 측은 이것도 무시했다. 2003년 11월 국제노동기관(ILO)은 단체교섭개시, 피해고자의 원직복귀, 형사기소의 취하를 필리핀 정부에 권고하였으나, 필리핀 정부와 도요타는 이것도 무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6년 동안 한번도 필리핀 도요타 노조와 단체교섭을 행하지 않은 채, 올해 2월에는 필리핀 법 절차를 무시한 채 새로운 승인투표(CE)를 강행하였고, 4월에 당사자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불공정한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어용노조의 승리를 선언, TMPCWA로부터는 단체교섭권을 박탈했다.

투쟁의 연대는 세계로, 도요타 반대 세계 공동행동에

올해로 TMPCWA의 투쟁은 7년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TMPCWA는 형사기소를 당한 25명 중 18명이, 피해고자 233명 중 136명이 현재 노조원으로 남아 있고, 공장 안에도 200명을 넘는 조합원이 회사측, 어용노조와 싸우고 있다. 이 6년이 넘는 불굴의 투쟁이, 필리핀 최고재판결정과 ILO권고를 받아내었고, 2004년 이래 ILO총회 의 압력활동을 통하여 각 국의 많은 노조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2005년 8월 이후 국제금속노련(IMF)이 필리핀 도요타 측과 일본 및 필리핀에서 교섭을 개시하였고, 올해 3월 세계 6곳의 도요타공장 노동조합을 마닐라에 집결시켜 회의를 하였다. 하지만, 필리핀 도요타 측의 불성실한 자세로 교섭이 결렬되어, IMF는 5월 오슬로 세계집행위원회에서 토요타에 대한 세계 공동행동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도요타 반대 세계 공동행동의 제1차 행동이 6월 말에서 7월에 걸쳐서 IMF의 전면적 지원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의 반대 토요타 캠페인 제1차행동

필리핀 현지에서는TMPCWA와 그 지원자에 의해 일본 대사관과 도요타 영업소에 대한 항의 행동이, 일본에서는 6월에 노동조합, 시민에 의한 도요타 동경본사 항의 행동이 이루어졌고, 계속하여 7월에는 필리핀 도요타 노조의 에도 쿠베로 위원장, 웨네시트 알헬 부위원장과 일본 전국의 노동자 시민에 의한 토요타의 아이치현 도요타시 본사에 대한 항의 행동이 이루어졌고, 이후 전국 5곳에서 필리핀 토요타 노조를 지원, 격려하는 연속 집회가 일어났다.

그리고, IMF 산하의 남아프리카와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 타이, 영국 등의 각국 도요타 공장에서는 브라질에서의 제한 파업을 포함하여 경영진에 대한 건의 행동, 도요타에의 항의 행동이 행해졌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AMWU의 대회에서는 영국 AMICUS, 캐나다 자동자 노동조합, 뉴질랜드 EPMU 등과 IMF 본부로부터 마렌터키 서기장, 필리핀의 MPCWA 빌지리오 코란덕 집행위원, 또한, 이 대회에 참가한 구 영국연방제국노조 등이 TMPCWA에 대한, 정신적, 물질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 노조와 IMF-JC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으나, 도요타에 대한 세계 캠페인은 확실하게 그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 투쟁의 연대는 더욱 더 크게 크게 퍼질 것이다!

2006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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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노> 포항건설 르뽀

   

아무 일 없다는 듯 공장은 돌아갔다
<르뽀> 건설노동자 하중근씨 마지막 숨결, 포항을 가다

경북 포항에 도착한 것은 4일 새벽 2시께. 처음 찾은 곳은 동국대학교 병원 영안실이었다. 건설노동자 하중근 조합원의 빈소부터 찾았다. 손에 들고 있던 취재수첩 때문인지, 사진기자의 사진기 때문인지 보는 눈이 일단 곱지 않다.

불볕더위가 식은 새벽, 영안실 주변에는 중년을 넘기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서울에서 온 기잔데요, 빈소 지키고 계신가봐요.” “기자…, 말해도, 그대로 쓰지도 않을 꺼면서 묻지도 마소.” 냉담했다.

병원 주변에는 열사를 추모하는 검은색 플래카드가 병원 주변을 싸고 있었다. 억울한 죽음, 힘겨운 삶의 궤적을 쫓아가 보자.

▲ 7천여명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총 결의대회’를 마치고 포스코 공장 쪽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멀리 돌아 결국 그 자리로


포항 시내에서 형산교를 넘어 20여분 들어가면 대보면 대보리, 하중근 조합원의 고향이 나온다. 영일만을 끼고 불뚝 나온 호미곶에서 하중근씨는 태어났다. 7남매의 막내, 철들기 전, 아직은 사탕과 딱지가 인생의 전부인 나이에 고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어선 300척 정도가 드나드는 어촌 마을에, 가정의 형편이 어땠을 지는 길게 말할 일이 아니다.

하중근 조합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원양어선을 탔다. 30대 초반까지 그는 사모아며, 남태평양으로 참치를 잡으러 다녔다. 그러나 뭍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 돈이 쥐어있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고향 동기들은 “배 타도, 타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뭍에서 그가 택할 길은 많지 않았다.

다단계 일도 하고, 아주 잠시지만 식당을 차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 고향에서 작은 어선을 탔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2톤짜리 배를 몰며 문어 통발 어업을 하기도 했다. 멀리 돌아갔지만 결국 그 자리로 돌아왔다.

1997년부터 포스코 공장에서 건설 노동자로, 제관 노동자로 일했다. 술을 좋아했고, 사람도 좋아했다고 한다. 의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집은 없었다. 포항 해도동의 한 여관에서 달셋방 살이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영안실에 누워있다.

▲ 하중근 조합원의 빈소가 마련된 포항 동국대학교 병원 영안실. 하 조합원의 ‘공식적인’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장례일정도 잡지 못한 상태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달셋방이 마지막 거처


7월13일 포항 건설노동자 2,500여명이 포스코 본사를 점거하고 들어갈 때, 하중근 조합원도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저녁 무렵 그는 볼 일이 있다며 나왔다. 16일 공권력 투입 항의집회에 참석했다.

경찰은 경고방송 없이 소화기를 뿌리며 갑자기 집회 참가자들 사이로 밀고 들어왔다. 그는 첫 번째 구타를 당하며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부검을 참관했던 한 의사는 “손에 상처가 없는 것으로 볼 때, 저항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왼쪽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고 양쪽 팔에 멍이 들었다. 오른쪽 뒤통수를 (경찰 방패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것에 찍혔다. 왼쪽 뒤통수 아래쪽은 (소화기 또는 그에 준하는 것이로 보이는) 둥글고 무거운 것에 충격을 받아 10cm의 골절이 생겼다. 그 충격으로 머리 반대편 오른편 이마 쪽 두개골이 골절됐고, 뇌출혈이 있었다. 이 손상은 하 조합원을 뇌사상태에 이르게 했다. 17일을 병원 영안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버텼지만 결국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포항지역건설노조는 임금 15% 인상과 주5일제 근무제 시행을 내걸고 지난 7월1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토요일의 유급 휴일화가 핵심 쟁점이었다. 단체협상 상대인 전문건설협회 쪽에선 난색을 표했다.

포스코의 건설 도급액은 IMF 환란 이후에 계속 낮아져 왔다. 포스코 건설현장의 발주액을 설계가와 비교하면 98년 이전에는 95%, 2004년에는 78%, 2006년에는 73%로 계속 낮아져 왔다. 포스코 건설 노동자들의 일당은 다른 플랜트 건설 현장보다 30% 낮은 9만7천원이다. 토요일 유급휴일 비용은 포스코의 계산 속에는 들어있지 않다.

포항 건설 노동자들의 평균 나이는 50대 초반이다. 제관, 보온, 전기 등 각 분야별로 전문적인 기술이 있어야 플랜트 건설현장에서 일할 수 있다. 포스코를 세워 올린 노동자들은 계속 늙어가지만, 젊은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고 있다. 한 건설노동자의 말처럼,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일”, “골병드는 일”을 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은 이곳을 찾지 않는다. 공장은 매일 돌아가고, 철은 모든 곳에 필요하지만, 노동자들은 공사기간에만 필요하다. 그나마, 일급이 올라가긴 커녕 몇 년동안 계속 쪼그라들었다. 노조가 나서서 임단협을 하고, 싸우지만 다단계 하도급의 건설산업 구조 속에선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

7월13일 결국은 노동자들이 포스코 본사를 찾았다. 전문건설협회와 말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도급액의 목줄을 쥐고 있는 ‘본사’를 찾은 것이다. 그 곳에서도 노동자들은 집회대오를 해산시키려는 경찰의 강제진압에 밀려 포스코 본사건물로 밀려 들어갔다. 졸지에 '남의 회사'를 '무단 점거한 집단'이 돼 버렸다.

▲ 형산강 로터리에서 형산교를 넘으면 포스코 공장이다. 노동자들은 포스코 공장까지 진출할 수 없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포스코 직원들하고) 같이 할라 그러면 되나”


4일은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있던 날. 오전나절에 대보면, 고 하중근 조합원의 고향 쪽을 가 보았다. 영일만을 끼고 작은 어촌 마을들이 줄지어 있었다. 다시 형산강 로타리로 나오는 길. 임곡 마을의 할머니 한 분을 차에 태웠다. 시내에 볼일 보러 가시는 길. 가는 길에 내려달라신다.

“요즘 포항이 시끄럽네요.”

“사람도 죽었고, 해결이 안됐으니 한참 더 하겠지. 그래도 같이 할라고 하면 되나. 포스코 본 직원들은 토요일에 놀아도 일급을 주는데, 노가다 하는 사람들, 일당발이들은 안 준다고 데모하는 거 아이가. (포스코 직원과는 다른 노가다인데) 같이 할라고(대우 해 달라고) 하면 되나. 토요일에 놀면서 일급 달라고 하는 거 아이가.”

“할머니, 이쪽 바다 사람들이 옛날에 원양어선 많이 탔나요?”

“많이 탔지. 먼저 간 우리 남편도 한참 타고 다녔다. 야문 사람은 돈 좀 벌고 그런다. 선장이 일 하라고 많이 압박하는 모양인데, 요즘 젊은 애들은 안 탈라고 한다. 그 말 들을려고 하나.”

“마을에 젊은 사람이 좀 있나요?”

“몇 명 없지. 남의 배 타는 애들 좀 있는데. 못 살고, 못 배워서 남의 배 타지. 자기 배 끌고 다니는 사람은 다 40이 넘었지.”

“한 2톤짜리 배 굴리면 먹고 살만 한가요?”

“야문 사람이야 돈도 모으고 하는데, 노는 날이 많아서 못 쓴다. 놀면 촌에선 맨날 화투치고, 노름하면서 다 까묵고. 아이고 젊은 사람들은 아예 배 탈 생각도 하지 말아야.”

“문어 통발이 잘 되나요.”

“옛날에는 저쪽(포스코 앞쪽 바다)에서 아나고(붕장어) 잡으면 됐고, 그럼 문어도 올라왔는데. 문어 통발만 할라면 요즘은 저쪽 구룡포 넘어가야 된다. 포스코 앞으로 가면 벌금이 꽤 나온다. 옛날처럼은 못 벌지.”

“포스코 쪽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도 동네에 좀 있나요.”

“정직원은 없고. 거기엔 못 들어가고. 협력업체에 노가다 하러 댕기는 사람들은 좀 있지. 그것도 일이 들쭉날쭉해서 돈 잘 안된다. 매달 월급 나오는 게 제일이라. 하다 놀면 다 까묵는다. 이 사람들 데모하는 게 토요일에 놀라면서 월급 달라고 하는 건데. 그게 되나. 어디.”

▲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노동자들의 포스코 진입을 막았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하다 놀면서 까먹게 된다”


7천명의 노동자가 동국대학교 병원 앞에 모였다. 숨쉬기도 어렵게 더운 날. 줄지어 앉은 노동자들은 땡볕을 그대로 받고 있었다. 이들은 오늘 갈 곳, 아니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결의 발언을 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포스코 공장 쪽으로 향하던 시위대열은 형산강 로타리에서 경찰에 막혔다. 하중근 조합원이 사망한지 불과 3일. 경찰도 이날 거친 대응을 자제했다. 시위대는 몸으로 경찰의 방패를 밀었다.

다 큰 남자들의 몸싸움 과정에서 산발적인 충돌도 발생했고, 부상 당하고, 혼절해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경찰은 물대포를 쏘았고, 시위대는 우직하게 경찰 병력을 어깨로 밀고 앞으로 나갔다.

로타리 초입에서 형산교 앞까지, 불과 100미터 정도의 경찰을 밀어내는데, 꼬박 3시간 30분이 걸렸다. 35도 가까운 무더운 날씨. 시위대도 경찰도 탈진해 실려 가는 사람이 속출했다.

시위대에 끌려나온 ‘어린 경찰’들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쓰러져 누었다. 땀범벅이 돼, 탈진한 경찰에게 중년을 넘긴 건설노동자들은 물을 마시게 하고, 진압복을 벗겨 주며 달랬다.

하루 종일 시달림 받은 어린 경찰은 “놔, 이 ○○놈들아”하며, 아버지 뻘 되는 노동자들에게 욕지기를 했다. 욕먹은 노동자는 다시 멱살을 잡고, 사람들이 와서 뜯어 말렸다. 한 늙은 노동자는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인데”라며, 계속 경찰들의 땀을 닦아 주었다. 이 '어린 경찰들' 중 몇몇은 지난 7월16일 살인에 가담했다.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들이 쉴 사이도 없이, 병원과 집회 현장을 오고갔다. 실려 간 사람만 120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그 난리를 쳤지만 결국 형산교 초입에서 노동자들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경찰 병력은 여전히 다리 앞을 막고 있었고, 그 뒤로는 경찰버스가 통행을 막고 있었다. 그 뒤로 경찰이 배치돼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포스코 공장으로 갈 수 없다.

공장 안에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노동자들은 밤이 될 때까지 형산교 앞을 떠나지 못하고 집회를 계속했다.

▲ 호미곶 쪽에서 바라본 바다. 영일만 너머 포스코의 공장 굴뚝이 보인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포스코 굴뚝이 들어서기 전에도, 그 후에도 가난했다. 하중근 조합원은 이 바다와 공장 굴뚝 언저리에서 가난하게 살았고, 비참하게 죽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공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


임곡 할머니의 말처럼. 토요일에 쉬면서 돈 받는 것, 주5일제 시행이 감히 꿈꾸면 안 되는 일일까. 7월13일 성난 노동자들이 포스코 본사로 쳐들어갔을 때, 경찰은 신속히도 공권력을 투입했다. 하루에 100억원의 손실이 난다면서 신문과 방송은 국가 기간산업의 위기를 걱정했다.

날카로운 방패로 사람을 치면 죽는다. 둥글고 무거운 것으로 사람 머리를 후려치면 죽는다. 지난 7월16일 형산강 넘어 포스코 본사를 바라보며 집회를 열던 노동자들에게 국가 공권력은 무엇을 한 것일까.

호미곶 쪽에서 바라본 바다. 영일만 너머 포스코의 공장 굴뚝이 보인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젊어선 원양어선을 탔고, 나이 들어선 조그만 배로 통발 어업을 하며 살아간다. 포스코 협력업체에서 일하며 벌이는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붕장어가 많이 잡히는 영일만 북쪽 편은 포스코가 들어서면서 어업이 금지된 지역. 호미곶 사람들은 포스코 굴뚝이 들어서기 전에도, 그 후에도 가난했다. 고인이 된 하중근 조합원도 나서 죽을 때까지 가난했다. 짐작컨대, 생에 단 하루도 토요일을 유급휴일로 살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힘겨웠던 인생, 명복이라도 후하게 받을 권리가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용상 기자  ysjung@labortoday.co.kr
2006-08-07 오후 12:19:30  입력  / 2006-08-07 오후 12:25:01 수정(1차)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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