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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02
    <시>벽돌과 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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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10/02
    '정몽준 지지 선언' 권용목의 굴절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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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uot;유전무죄 무전유죄&quot; 사실로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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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8/09
    진보적 청소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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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벽돌과 황금

벽돌과 황금

벽돌이 벽돌일 때는
노동자의 일당, 일용할 양식이 된다

그러나 그 벽돌이 집이 되어
부동산 문서 속에 들어가면
황금 찬란한 억대 궁전이 된다

놀부나라 강남은
여기서 얼마나 먼지
요새는 제비도 찾아가지 않는다

노동자의 손을 떠난 벽돌이
누우런 황금으로 변한 날
벽돌은 마술의 꿈을 꾼다
나는 저 밤하늘을 나는
한 마리 아름다운 궁전이 되고 싶다고!

그날밤 강남의 놀부는
벽돌로 쌓은 그 무덤 속에 누워서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꿈꾸고 있다

(문병란 / 1935년 전남 화순 출생. 40여년 문단 활동. 시집으로 『죽순 밭에서』, 『땅의 연가』, 『무등산』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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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지지 선언' 권용목의 굴절된 삶

'정몽준 지지 선언' 권용목의 굴절된 삶
[심층추적] 노동운동가가 재벌지지자로 변모하기까지
텍스트만보기   박수원(pswcomm) 기자   
1987년

▲ 29세의 청년 권용목은 한국노동운동의 살아있는 신화였다.
현대엔진에는 80년대 초반부터 고적답사반이라는 소모임이 있었다. 조립공장을 중심으로 대여섯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울산에서 가까운 경주 등 인근의 고적들을 답사하면서 노동의 찌든 때를 벗기고 단합을 도모하는 일종의 취미서클이었다. 그 고적답사반의 중심에는 권용목이 있었다.

87년 7월 5일 회사의 감시를 피해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울산 옥교동에 있는 한 디스코텍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100여명의 노동자들이 디스코텍에 모이자 홀 중앙에 '경축 현대엔진(주) 노동조합 결성대회'라는 글씨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대엔진 노조위원장에는 만29세의 청년 권용목씨가 선출됐다.

노조 결성대회를 무사히 마친 권용목씨는 점심시간이 되자 연단에 올라가 노동자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서 보고대회를 진행했다. 키165cm, 몸무게 57kg의 왜소한 체구의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권용목의 입에서는 장쾌한 열변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된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상여금 차등제가 없어지고 공해수당을 받게 된다는 기대를 가져도 좋습니다.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한국노동운동의 전환점으로 기록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현대엔진노조를 시작으로 현대미포 조선소에 노조가 생기고, 이어서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정공에 노동조합이 잇달아 결성됐다. 그리고 마침내 8월 8일 현대그룹노조 협의회가 결성됐다.

87년 8월 18일 4만여명이 넘는 현대노동자들이 중공업 운동장에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어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인정', '임금인상 즉각실시', '휴업철회'를 요구하며 남목 고개 마루를 넘어 공설운동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 앞에는 4500명의 중무장한 경찰들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날 폭력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손에 든 각목과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돌멩이를 노조대표들에게 반납했다. 그 노동자들을 지도한 사람은 바로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권용목 의장이었다. 그리고 정부에 노조인정을 약속 받게 된다. 현대그룹 노동운동의 살아있는 신화 권용목. 그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몸으로 쓴 장본인이었다.

노동자들의 열기도 뜨거웠지만 현대그룹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89년 1월 현대중공업 노조의 장기파업 128일을 넘기고 있었다. 1월 8일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현대중전기 노조대의원 대회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새벽 2시 30분쯤 복면을 쓴 사람들이 나타나 각목, 야구방망이, 곡괭이 자루 등으로 대의원들을 무차별 폭행했다. 그리고 새벽 5시쯤에는 권용목씨 등 4명이 잠을 자고 있는 현대 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 사무실에 야구방망이와 각목을 든 20여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누가 권용목이냐'고 물어가며 구타했다.

당시 현대그룹노조협의회는 "이 사건은 현대그룹의 조직적 음모에 의한 테러"라며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회장의 연루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당시 보수당인 신민주공화당조차 "경영주가 정당한 노동운동을 탄압한 표본적 사례"라며 "이 사건의 배후를 비롯, 전모를 철저히 파헤쳐 관련자를 형사처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정몽준 회장은 사건이 발생하기 이틀 전인 1월 6일 항공편으로 울산에 내려와 중역비상대책회의를 열고 조업정상화를 촉구하는 등 3박4일간 울산에 머무르다 1월 9일 서울로 올라간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테러사건에는 정몽준 회장이 지원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조기축구회 전·현직 간부들가 연루돼 있음이 확인됐다. 깡패들에게 구타를 당한 권용목 의장은 당시 팔에 깁스를 하고 집회에 참석해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회장은 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2000년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권용목씨가 3년 만에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다.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물러난 직후인 97년 그는 환기통 청소업을 했지만 IMF 여파로 망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몇 개월을 떠돌다가 다시 사업을 한다고 캄보디아에 나가 있다가 그 사업도 여의치 않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게 1999년 9월 무렵이었다.

당시 국민회의는 신당 창당 준비와 함께 2000년 4.13 총선을 대비해 각계각층의 인사들 영입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여권의 신당 추진위원으로 영입됐다. 지금 민주당 노무현 후보 비서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계륜 의원이 그를 신당으로 끌고 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새천년민주당은 '동진 정책'의 일환으로 권용목씨를 울산 중구 조직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생각과 권용목씨의 '희망사항'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민주당은 울산 동구 출마를 권유했지만 권씨의 생각은 달랐다. 권용목씨는 결국 지구당 창당대회를 연기하고 조직책을 반납했다. 그는 출마를 꺼리는 이유에 대해 “민주노동당 후보가 지역구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울산인데 내가 출마하면 과거 노동계 동지들과 경쟁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권용목씨는 민주노총이 만든 민주노동당에 가지 않고 신당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엄청나게 세상이 변하고 있다. 지금 한 명 당선시키고, 8년 뒤에 10명 당선시켜서 뭘 할 수 있겠냐. 민주당 김말룡 의원을 보면 노동자를 위해서 헌신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구조가 그랬기 때문이다. 집권여당에 들어가서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권용목씨는 민주당이 전국구를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녹치 않았다. 민주당 비례대표 몫으로 노동계의 자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에게 자리가 돌아가는 정도였다.

비례대표를 약속 받았다고 생각하고 민주당에 입당한 배석범 민주노총 전 부위원장과 권용목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은 결국 비례대표를 배정 받지 못했다.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을 것"이라는 노동계의 비아냥거림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비례대표가 좌절된 이후 권용목씨는 또 떠도는 신세가 됐다.

2002년

▲ 국민통합21 노동특위 발대식에 참석한 권용목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모습을 감췄던 권용목씨는 2002년 2월 3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 나타났다. 민주당에서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였던 이인제 후보는 이날 386출신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 지역·노동 운동 인사, 청년·경제인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시대개혁연대' 창립총회를 진행했다.

권용목씨는 새시대개혁연대 대표로 행사에 참석했다. 권용목씨는 인사말을 통해 "우리의 지도자 이인제 고문님과 함께 모든 것을 내바쳐 함께 할 것"이라며 "이제는 길거리의 투쟁이 아니라 내가 서있는 분야에서 참여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2002년 11월 12일 국민통합21 노동특위 발대식장에 그는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행사장에는 이런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국민가치 실현을 위한 새로운 노동문화, 국민통합21 노동특위가 열어갑니다."

권용목씨는 이 자리에서 만난 <오마이뉴스>기자에게 "2년간 러시아에 있었다"며 "1700ha 땅에 약용식물을 재배하려고 한다"고 자신의 근황을 밝혔다. 권용목씨는 국민통합21 노동특위의 정책위원을 맡았다. 그는 단상 위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한 시대을 접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옛날에 '자본론'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100여 년 전에 씌여진 책이었음에도 책 속에 묘사된 방직공 노동자의 모습은 당시와 다를 바 없었다. 산업시대의 요구는 값싼 제품을 많이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지식기반사회로 변했다. 생산력의 확대는 새로운 가치를 요구하고 있다. 좋은 물건, 편리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대립과 갈등으로 만들 수는 없다. 자발적 참여와 창조적 생각이 있어야 한다. 또한 동북아 경제변화에도 대처해야 한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모습을 보라. 우리도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남북으로 동서로 노사로 대립하고 있다. 통합은 시대적 소명이다. 그것을 누가 해줄 수 있나? 바로 그 얘기를 하려고 한다. 남북과 동서, 노사의 막힌 곳을 뚫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번 대선은 향후 5년을 좌우한다. 국민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 정몽준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자."

▲ 권용목씨는 과거 자신과 '적'이었던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지지자'가 됐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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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유전무죄 무전유죄&quot; 사실로 입증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실로 입증
기업인이나 정치인 횡령은 집행유예, 돈없고 빽없는 일반인 횡령은 징역형
고재만 기자, gojm0725@naver.com  
 
"돈이 없는 것은 더이상 죄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사실과 다른것 같다"

그동안 말로만 돌았던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사실로 입증돼 파장을 불러 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그동안 구설수에 오르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것을 처음으로 정확한 숫치와 근거를 바탕으로 한 조사 결과를 발표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노 의원은 16일(수) "기업체 대표이사와 배달원 횡령사건을 비교분석한 자료를 통해 기업체 대표들의 “횡령액은 717배나 많은데 실형을 사는 비율은 10.4%p나 더 낮다며, 이와 같은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 의원은 이 자료에서 “2002.1월~2005.8월 서울중앙지법의 횡령사건(형법 355조1항 업무상횡령 및 특정경제가중처벌법 3조1항 횡령) 판결문 461건을 정밀 분석한 결과, 배달원과 종업원 34명의 평균 횡령액은 636만원이고 실형을 산 사람은 15명(44.1%)에 이르는 반면, 기업체 대표이사급 83명의 평균 횡령액은 46억원에 달하는데도 실형을 산 사람은 28명(33.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노 의원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기업체 대표이사의 평균 횡령액이 배달원·종업원보다 717배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실형을 산 사람의 비율은 10.4%p나 더 낮은 셈이다.

노 의원은 또 “징역형을 선고받더라도, 기업체 전현직 대표이사들은 집행유예로 풀러나는 비율이 59.4%(69명 중 41명)에 이르러, 배달원·종업원의 37.5%(24명 중 9명)보다 21.9%p나 더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노 의원은 “비디오방에서 일하는 강씨는 21만원 및 카메라폰 1대(시가40만원 짜리를 중고업자에 1만원에 매도)를 생활비 및 유흥비로 소비한 죄로 징역 8개월에 처해졌고, 중국집 배달원 정씨는 음식대금 773,550원을 생활비로 소비한 죄로 징역 10개월에 처해 지는 등 무전유죄의 대표적 사례"라고 주장했다.

노 의원은 반면 “공적자금 수천억원이 투입된 현대전자산업(현 하이닉스반도체)으로부터 227억원을 횡령한 김영환 대표이사 및 146억원을 횡령한 김주용 대표이사는 기업의 관행, 故 정몽헌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 등의 이유로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고, 회사정리절차에 있던 한신공영을 인수해 340억원을 횡령한 최용선 대표이사는 실형전과(實刑前科)가 없고 범행을 자백했다는 등의 이유로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며 법원의 판결에 강한 불만을 나타 내기도 했다.

노 의원은 또 “크게 횡령한 사회고위층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소액을 횡령한 힘없는 서민들은 실형을 사는 사법현실 앞에서 서민들은 절망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밖에도 노의원은 “횡령죄를 범한 종업원·배달원 34명 중 사회봉사·보호관찰 처분을 받은 사람은 8명으로 23.5%에 이르는 반면, 기업체 전현직 대표이사는 83명 중 4.8%인 4명만 사회봉사·보호관찰 처분을 받아, 그 차이가 18.7%p에 이르렀다”고 밝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사실임이 입증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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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당수 박헌영 (1)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당수 박헌영 (1)
『이정 박헌영 일대기』 / 임경석 / 역사비평사 / 2004


10여년의 '고투' 끝에 되살려낸 박헌영의 삶과 죽음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가수 김정구가 부른 '눈물젖은 두만강'이다. 박헌영의 친아들 원경 스님에 따르면 이 노랫말의 지은이는 가수 김정구의 친형 김용환이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정신병자 흉내를 내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1928년 8월 부인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했다. 김용환은 신문에 대문짝하게 보도된 박헌영의 탈출 소식을 두만강변에서 접하고 이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이정 박헌영 일대기』는 남북한 모두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았던' 박헌영의 삶과 죽음을 '지구 위에 산재하는 모든 자료를 수집하겠다'는 각오로 작업한 10여년의 '고투' 끝에 연보 형태로 완성한 역작이다. 임경석은 말한다.

"1994~1996년 2년 간의 모스크바 체류 동안 나는 기대 이상의 행운을 맛보았다. 문서보관소의 문서철 속에서 60~70년 전에 작성된 박헌영 관계 각종 기록의 원본들을 목도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전율을 느꼈다. 내가 느낀 생생함이란, 그 감격이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박헌영뿐만이 아니었다. 분단체제하에서 남한에서는 '빨갱이'란 이유로, 북한에서는 '종파분자'라는 이유로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사람들의 혁명운동 족적이 생생하게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자료들은 운동 전개과정의 굽이굽이에 얽힌 그들의 고뇌와 격정, 생각과 숨결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책은 박헌영에 대한 "섣부른 평가"를 자제하고 있다. 임경석은 박헌영에 대한 역사 평가를 "훗날 다시 쓰게 될 '박헌영 평전'"으로 조심스레 미룬다. 우리 또한 '평가'에 앞서 우선 이 책을 따라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 당수 박헌영의 행적을 쫓아가 보자.


상해, 첫번째 구속,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의 짧은 기자생활

박헌영은 1900년 5월 28일 충남 예산에서 농민 박현주와 그의 둘째 부인 이학규의 사이에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고 대흥보통학교를 나온 후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소설 『상록수』를 지은 심훈이 경성고보 동창이다.

1920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박헌영은 그해 11월 상해로 망명,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했다. 21년 3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비서가 됐고 5월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에 입당했다. 고려공산당이 운영하는 사회주의연구소에서 활동하던 박헌영은 이 시기에 상해로 유학온 주세죽과 결혼했다. 21년 8월 북경에서 고려공청 중앙총국이 결성됐고 박헌영은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22년 3월 고려공청 제2차 중앙총국의 책임비서가 됐다.

22년 4월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은 비밀리에 조선으로 입국하려다가 중국 안동현의 한 음식점에서 신의주 경찰에게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1년 10개월을 복역했다. 24년 1월 출옥한 뒤 곧바로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은 2월 신흥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3월 고려공청 중앙총국 책임비서로 재선임됐다. 4월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했고 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됐다.

25년 4월 17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렸다. 박헌영은 화요회 야체이카(세포) 대표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했다. 다음날 박헌영과 주세죽의 살림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제1차 창립대표회가 열렸고 4월 21일 박헌영은 고려공청 책임비서에 선임됐다. 그해 5월 동아일보를 퇴사한 박헌영은 8월 한양청년연맹 집행위원을 맡았고,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조선일보에서는 논설위원 신일용의 필화사건으로 10월에 바로 해직됐다.


두번째 투옥, 소련으로의 탈출과 '국제선' 활동

25년 11월 국외로 발송한 고려공청의 비밀문건이 일본 경찰에 압수되면서 박헌영과 주세죽은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두번째 투옥된 박헌영은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박헌영의 진술이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추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어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8명의 경찰들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박헌영은 재판도중 자살 시도와 단식을 거듭하며 정신병자 흉내를 냈고 몇차례 병보석 신청 끝에 27년 11월 감옥문을 벗어났다.

28년 8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따돌리고 박헌영은 만삭인 주세죽과 함께 함흥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주세죽은 딸 비비안나를 해산했다. 11월 모스크바로 간 박헌영은 29년 1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고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국제레닌학교에서는 호치민 등 아시아의 젊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공부했다. 박헌영은 31년말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32년 1월 박헌영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사업을 위해 상해로 파견됐다. 상해에서 김단야와 함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기관지 『콤무니스트』를 발행했다. 이 잡지는 33년 7월까지 발간됐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비밀리에 국내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국내 공산주의운동에서 '국제선'으로 불렸던 그룹이 바로 이 조직이었다.


세번째 체포와 6년만의 출옥, 도피와 지하운동

33년 7월 박헌영은 상해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됐다. 박헌영은 심문과정에서 28년 8월 탈출 이후 약 5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필사의 위장진술에 나섰다. 다행히 박헌영의 해외활동에 대한 아무런 물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은 박헌영에게 징역 6년형을 선고했다.

34년 주세죽은 모스크바에서 김단야와 재혼했다. 37년 11월 김단야는 스탈린의 대숙청에 휩쓸려 소련비밀경찰에 체포돼 사형당했다. 38년 주세죽은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39년 9월 박헌영은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했다. 12월 이관술과 만나 경성콤그룹의 지도자가 됐다. 그리고 41년 2월까지 청주와 서울의 비밀 아지트에 기거하면서 지하운동을 벌였다. 이 기간에 박헌영은 아지트 키퍼였던 정순년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박헌영과 정순년 사이에 41년 3월 태어난 아들이 박병삼, 원경 스님이다.

41년 1월 경성콤그룹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체포됐다. 박헌영은 서울 아지트를 버리고 대구로 피신했다. 박헌영은 "행상인도 되어보고…약사나 심지어 점쟁이 노릇"까지 해가며 검거를 피해 계속 도피했다. 42년 12월 광주로 피신한 박헌영은 45년 8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김성삼이라는 가명을 쓰며 종연방직공장 변소 청소부와 벽돌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박헌영은 김삼룡의 처 이금순을 비롯해 전남 일원의 경성콤그룹 조직원들과 비밀활동을 계속 했고 서울주재 소련영사관과도 비밀교신을 주고받았다.

45년 8월 15일, 박헌영은 벽돌공장 감독에게 "장래를 위하여 서울로 가겠다"는 간단한 말을 남기고 광주를 떠났다.

(계속)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당수 박헌영 (2)
『이정 박헌영 일대기』 / 임경석 / 역사비평사 / 2004


해방조선, 조선공산당 총비서

1945년 8월 15일 서울 종로 네거리에 "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려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는 비라가 붙었다.

박헌영이 광주를 떠난 것은 8월 17일, 건국준비위원회 전남 대표단과 함께였다. 상경 도중 막 출옥한 김삼룡과 전주에서 합류했다. 18일 서울에 도착한 박헌영은 그날 저녁 이주상,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 경성콤그룹 멤버들과 만나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만들고 『해방일보』를 창간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에서 부영사 샤브신과도 회동했다. 이날 이후 46년 10월까지 박헌영과 샤브신은 거의 매일 한두차례씩 만났다.

8월 20일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날 회의에서 「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8월테제)이 채택됐다.

9월 6일 오후 4시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가 결성됐다. 며칠 후 9월 9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했으며 9월 11일 재건위원회를 기반으로 조선공산당이 재건됐다. 박헌영은 서열 1위의 중앙위원으로 '총비서'라는 직임을 가졌다. 김일성은 서열 2위의 중앙위원으로 지목됐다. 9월 20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8월테제」를 토대로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채택했다.

10월 8일 개성에서 박헌영은 김일성과 만났다. 이날 회동에서 '당 중앙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이냐, 북조선 분국을 설치할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박헌영은 일국일당 원칙을 강조하며 북조선 분국 설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논란 끝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치가 합의됐다.

10월 10일 오후 2시 안국동에서 조선공산당의 첫 기자회견이 열렸다. 27일 박헌영은 미 제24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회담을 가졌다. 이날 박헌영은 하지에게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이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10월 29일 박헌영은 이승만과 회담했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친일파 즉각 숙청에 반대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은 미룰 수 없는 문제라고 반박하고 인민공화국 해산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11월 5일~6일 이틀 동안 서울 중앙극장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보낸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의 축사는 김삼룡이 대독했다. 박헌영은 대회 명예의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대됐다.

11월 28일 박헌영은 소공동 공산당사에서 AP통신 등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했다. 이 자리에서 전평, 전농, 전청, 전부 등 대중조직체를 기초로 한 민족통일전선에 입각해 민족통일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또 민족반역자의 토지와 지주 일반의 토지를 구분해서 시점을 달리해 몰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11월 30일 중앙방송국 라디오방송을 통해 4대 정당의 정견을 차례로 발표하기로 한 일정에 따라 조선공산당 대표가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게 됐다. 이날 방송에는 조선공산당 대변인 정태식이 대신 출연했다.

12월 9일 전국농민조합총연맹, 12월 11일 조선청년총동맹, 12월 24일 전국부녀총동맹이 결성됐다.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12월 25일 평양으로 간 박헌영은 12월 31일 김일성과 함께 민정사령관 로마넨코와 회견했다. 로마넨코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해 하는 수 없이 절충안으로 5년간 후견제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46년 1월 2일 새벽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성명서를 발표했다.

1월 24일 서울 중앙방송국 라디오방송을 통해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명의로 「오늘 정세와 우리 민족의 살 길」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2월 15~16일 종로 YMCA 강당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한 박헌영은 해방 후 처음으로 공개된 군중집회에 모습을 드러내 조선공산당 총비서 자격으로 연설했다. 박헌영은 여운형, 허헌, 김원봉, 백남운과 함께 민전의 공동의장으로 선임됐다.

3월 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막됐다. 박헌영은 3월 22일 『해방일보』, 『자유신문』, 『조선인민보』, 『서울신문』 등에 미소공위에 의해 수립될 임시정부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박헌영은 4월 2일 밤 38선을 넘어 3일 오후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 소군정 인사 등과 회담하고 6일까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간부들과 회담한 후 평양을 떠났다.

4월 6일 미국 센프란시스코 방송은 미점령군 당국이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모색하는 중이라고 보도했다. 4월 7일 조선공산당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11일 박헌영은 미소공동위원회 대표 환영 시민대회에 참석해 1만5천여명의 청중 앞에서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연설했다.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식은 좌익과 우익이 각각 따로 개최했다. 우익은 대한노동총동맹 주최로 서울운동장 육상경기장에서, 좌익은 전평 주최로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각각 집회를 가졌다. 박헌영은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정판사 위조지폐사건과 체포령

5월 8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같은 날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이 위조지폐 사건 혐의로 미군정 경찰에게 체포됐다. 15일 미군정 경찰 제1관구 경찰청장 장택상은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과 중앙위원 겸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과 서무과장 송언필을 포함해 조선정판사에 근무하는 조선공산당원 14명이 위조지폐 발행에 연루됐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른바 위조지폐 사건과 조선공산당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5월 18일 미군 첩보기관 CIC 요원들이 조선공산당 당사와 해방일보 사무소를 수색했다. 27일 미군정청 적산관리과는 조선공산당에게 현재 입주해 있는 근택빌딩에서 40시간 내에 퇴거할 것을 명령했다. 5월 30일 조선공산당은 본부 사무실을 남대문 일화빌딩으로 옮겼다.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자 다음날 조선공산당은 남조선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24일 일제치하인 1925년부터 서울에 주재해왔던 소련영사관이 남한에서 철수할 뜻을 밝혔다. 27일 박헌영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했다. 4차 월북이었다. 7월 1일에는 조선공산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회견했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좌익 정당들의 통합 필요성을 주장했다.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통합해 노동당을 결성하는 '3당합당'이 여기서 비롯됐다. 박헌영은 7월 중순경 서울로 돌아왔다.

7월 26일 민전 의장단이 좌우합작 5대 원칙을 발표했다. 7월말 박헌영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다섯번째 회동을 가졌다. 9월 4일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9월 6일 미군정의 명령으로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3개 좌익 신문이 폐쇄됐다. 같은 날 밤 미군정 경찰에 의해 박헌영 등 공산당 지도자 체포령이 발령됐다. 다음 날 7일부터 10일까지 박헌영을 체포하기 위해 6천명의 경찰이 서울시내를 수색했다. 9월 8일 이주하가 체포됐다. 10일 이후 수사망은 서울 근교로 확대됐다.

남로당 부위원장

9월 6일 민전 의장단회의에서 대미협조노선 철폐를 재확인했다. 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종업원 7천명의 파업을 시발로 9월 총파업이 발발했다. 9월 29일 박헌영은 관에 담긴 채 산악을 헤매며 월북했다. 9월 30일 경찰과 우익단체가 서울 철도파업단을 습격해 유혈진압했다. 10월 1일 대구에서 민중항쟁이 발발했고 항쟁은 11월 중순까지 경남북, 충남북, 경기도 일대로 확산됐다.

10월 6일 박헌영은 평양에 도착했다. 월북 직후 평양에 대남사업 중앙연락소를 설치했다. 10월 하순 박헌영은 38선 이남인 개성에 잠입해 일주일간 머물면서 이승엽, 김삼룡 등과 접촉했다.

11월 23~24일 서울에서 남조선노동당 결성대회가 열렸다. 12월 10일 박헌영은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12월 12일 박헌영은 소련군 25군 정치사령관 스티코프, 김일성과 회견하고 남한 입법의원에 대한 태도와 남북 노동당의 단일 비합법 중앙기관 창설에 합의했다. 47년 1월 대남사업 해주연락소가 설치됐다.

47년 2월 27일 경무국장이 박헌영 체포 유공자에게 황금 120돈쭝을 수여하겠다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3월 21일 작성된 미군 정보문서는 지금 만일 총선거가 실시된다면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5월 21일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됐다.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여운형이 암살됐다. 10월 1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됐다. 12월 10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는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채택해 UN 감시하에 실시되는 남한 단독선거에 대해 반대할 것을 천명했다.

48년 2월 7일 UN 한국위원단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발발했다. 3월 12일 김구, 김규식, 홍명희 등이 '7인 성명'을 발표해 단독선거를 반대했다. 4월 3일 제주에서 4.3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4월 19~24일 평양에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렸다. 8월 21일 해주에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가 개막됐다. 박헌영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영등포구 선거구)으로 선출됐다. 8월 25일 박헌영은 남북조선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중앙위원 겸 제2비서로 선출됐고, 9월 2일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 참석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 한국전쟁

9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박헌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임됐다. 49년 3월 북한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박헌영은 수상 김일성, 부수상 홍명희 등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49년 9월경 박헌영은 평양에서 윤레나와 재혼했다. 박헌영과 윤레나 사이에 딸 나타샤와 아들 세르게이가 태어났다. 50년 5월 박헌영은 김일성 등과 함께 북경을 방문했다.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7월 2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미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0월초 박헌영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연전연패하는 인민군 내 총정치국을 창설하고 책임자가 됐다. 11월 26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UN 총회 의장과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성명을 보내 미군의 학살 만행을 UN이 중지시킬 책임이 있음을 촉구했다. 51년 5월 8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UN 총회 의장과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성명을 보내 미군이 조선에서 세균전 무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규탄했다.

52년 8월 3일 이승엽 등 12명의 남로당 출신 당간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 연루자로 지목돼 체포됐다. 10월 17일 박헌영은 조선정전협정 초안 등 3개 문건을 외무상 명의로 UN에 타전했다.

53년 3월 하순 박헌영은 체포됐다. 당내 종파를 조직하고 당 기밀을 미국에 누설했으며 한국전쟁 패배의 원인을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7월 2일 내각 부수상 허가이가 자살했다. 8월 5~9일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박헌영은 당에서 제명되고 재판에 회부됐다.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 의해 이승엽 등 12명에 대한 공판이 진행됐다. 53년말 주세죽이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55년 12월 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검찰소 검사총장 이송운은 박헌영을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 기도' 혐의로 기소했다.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에서 박헌영은 사형 및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1956년 7월 19일, 총살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이 1990년 러시아 여행중에 전직 북한 고위 관리 박길룡에게 들은 박헌영의 사망 경위는 이렇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동유럽과 소련을 순방중이던 김일성이 돌아와서 "그 이론가 어떻게 됐어?" 하면서 증거가 있건 없건 방학세에게 그날 안으로 박헌영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서둘러 처형을 지시한 까닭은 아마도 '8월 종파'와 박헌영 세력이 제휴할까 우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처형자들은 내무성 지하감옥에 수감중이던 박헌영을 끌어내어 어느 산중으로 데려갔다. 밤중에 허리까지 오는 잡풀 속을 헤치고 가면서 박헌영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달라"고 말했다. 처형 직전에 박헌영은 부인 윤레나와 어린 두 자식을 외국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방학세는 박헌영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두 번 방아쇠를 당겼다. 시체는 그 자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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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상 재해 + 통근재해 = 산업재해

<노동법 공방>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
“업무상 재해 + 통근재해 = 산업재해”
업무시작, 집 떠나면? 회사 와야?…출퇴근하다 발생한 사고, 산업재해인가
 
법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을, 사람들의 모든 행위를 법의 규율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만큼 법은, 문구로 정리된 것보다 더 많은 해석론을 낳기도 한다. 수많은 학설과 학설이 부딪히면서 새로운 통합 학설을 만들고, 그것이 또 사법부에 반영돼 법 해석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노동법 영역에서도 그렇다. <매일노동뉴스>는 매달 한 차례씩 각각 진행되는 한국노동연구원 노동법?법경제포럼과 서울대 노동법연구회 정기세미나에서 발표되는 논문들과 토론내용을 지상 중계하는 ‘노동법 공방’ 꼭지를 신설한다. <편집자주>


H사에 근무하는 노동자 김아무개씨. 평소 회사가 제공하는 통근버스를 이용해 출퇴근을 하던 김씨는, 어느 날 늦잠을 자 급히 택시로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경우, 김씨는 산재보상 혜택을 받을 수 있을까. 현행 판례를 엄격히 적용하자면 김씨는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왜, 그 이유는 뭘까.

산재보험제도는 사용자가 재해보상 책임을 담보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행위가 업무상 행위이고, 이 업무상 행위로 인해 발생된 재해에 해당하느냐 여부에 따라 산재보험제도의 적용이 결정된다.

여기서 질문. ‘업무상 행위로 인한 재해’라는 것은 무엇으로 판단하는 걸까.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서는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재해를 그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 번만 질문을 더 하자. ‘업무상의 사유’는 또 뭔가.

‘업무상의 사유’에 대해 학설과 판례는 △업무와 재해와의 ‘상당한 인과관계’를 근거로 △‘업무기인성’과 ‘업무수행성’을 판단의 중심에 놓고 △사용자의 지배?관리 하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재해인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사용자의 지배?관리 하에 있지 않은 여타의 행위는 ‘업무성’이 부인되고 업무상 사유에 해당하지 않게 돼 결과적으로 업무상 재해가 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 김씨의 경우를 보자. 이 경우를 산재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 고유의 사정과 판단으로 택시를 타고 출근한 것을 ‘사용자의 지배?관리 하에서 있었던 행위’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는 통근하는 행위 그 자체와 업무 간의 밀접불가분성은 인정하지만 사용자의 지배?관리라는 ‘업무상 사유’를 전제로 할 경우 사용자의 지배?관리 하로 ‘들어가기’ 위한 출근, 또는 지배?관리에서 ‘벗어나’ 주거지로 퇴근하는 행위는 업무상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통근행위 그 자체는 업무성이 없고 사용자의 재해예방의무가 미치지 않는 것이어서 통근재해는 업무상 재해가 아니며, 따라서 산재보상의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이 판례에서 확립돼 있다.

그런데 뭔가 석연찮다. 통근행위 자체가 업무성이 없다하더라도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근행위를 해야 하지 않은가. 재택근무자가 아닌 한 통근 없는 업무는 없다. 최소한 통근을 위한 시간에는 사적 용무를 볼 수 없으니까 사실상 업무에 전속돼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기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집을 떠나는 것이 곧바로 ‘(사실상의) 업무 시작’일 테고, 회사 입장에서는 공장(또는 사무실)에 들어오는 것이 그 시작일 테다. 그러면 그 중간지대를 어떻게 봐야 하나. <그림>

그렇기 때문에 통근재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학설은, 최소한 통근행위를 하는 도중에 발생한 재해에 대해서도 업무와의 연관성 내지 관련성은 업무수행의 경우에 준할 정도의 동등성이 인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노상헌 전남대 교수(법학)는 지난달 15일 열린 서울대 노동법연구회 정기세미나에서 ‘통근재해에 관한 판례법리와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에 대한 검토’ 논문을 발표했다. 노상헌 교수는 이 논문에서 통근재해를 ‘사용자의 지배?관리 아래’라는 ‘업무성’에 천착하고 있는 기존 판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사회보장적 관점에서 통근재해를 판단한 판례를 소재로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의 의미를 검토했다.

어떤 경우의 통근재해가 업무상 재해일까

노 교수에 따르면, 통근재해의 업무상 재해 여부를 따지는 판례 입장은 대체로 같다. 판례는 △사업주가 제공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경우 △사업주가 이에 준하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도록 하는 경우 △그 밖에 통근과정이 사업주의 지배?관리 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경우에 한하여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회사가 묵시적으로 이용하도록 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던 중 발생한 사고인 경우(대판 99다24744), 다른 출근방법과 다른 경로를 선택하리라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출근방법이 업무의 준비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경우(대판 2005두4458), 업무상 집결장소가 지정돼 있고 그 장소까지 가는데 다른 대체교통수단이 없는 경우(서울행판 2000구31409) 등이, 판례가 ‘업무성’을 인정하는 특별한 사정에 해당된다.

통근재해에 대한 법 규정은 산재보험법 시행규칙 제35조(작업시간외 사고)가 거의 유일한데, 이 조항에서는 근로자가 출퇴근하는 도중에 발생한 사고로 인해 사상한 경우로서 △사업주가 소속 근로자들의 출퇴근용으로 제공한 교통수단의 이용 중에 발생한 사고일 것 △사업주가 제공한 교통수단에 대한 관리?이용권이 근로자 측에 전담돼 있지 아니할 것 등의 요건을 충족할 때만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고 쓰고 있다. 다만, 이 경우도 업무와 사고 간에 상당인과관계가 없으면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노 교수는 “종래 대법원 판결은 산재보험법 시행규칙(제35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통근재해인정과 아무런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 교수는 “다만 하급심에서는 최근 들어 종래부터 일관되게 제시해 오던 법리를 유지하되 사회보장적 관점에서 그 적용범위를 넓히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2001년 12월13일에 선고된 서울행정법원의 판례(2001구29373)를 소개했다.

사건은 이렇다. 쓰레기처리 용역작업을 하는 청소차량운전사인 근로자 갑이 다음날 평상시보다 1시간 일찍 출근(오전 5시)하라는 비상지시를 듣지 못한 상태에서 술을 마셨고, 밤 10시께 귀가해서야 집 근처 사는 동료로부터 비상지시사항을 전달받았다. 이에 갑은 다음날 새벽 3시30분께 자신의 승용차로 회사로 가던 중 도로 빙판에 미끄러지면서 약 2m 높이 다리 밑으로 추락해 상병을 입었고 이를 이유로 산재 요양승인신청을 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에서는 갑의 사고인 통근 중 재해는 음주운전(운전 당시 혈중알콜농도 0.087%)이며, 업무와 무관해 사업주의 지배·관리하의 업무상 사유에 의한 재해라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불승인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행법은 음주운전이 통상 운전업무의 위험성과는 별개로 오로지 갑의 음주가 원인이 돼 교통사고가 발생한 것이라고 볼만한 뚜렷한 자료가 없고, 사용자의 비상지시사항 이행을 위해 사고 당일 평상시보다 일찍 출근하는 과정에서 교통여건상 자가용승용차를 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사고 당일의 출근과정이 사업주의 지배·관리 하에서 업무수행 중 그에 기인해 발생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에 대해 노상헌 교수는 “기존 판례의 판단 틀, 즉 출퇴근 중 ‘사업주의 지배?관리’라는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산재보험법 입법취지와 출퇴근이 갖는 사회적 의미, (통근재해를 공무상 재해로 인정받는) 공무원과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결론을 냈다는 점에서 특징”이라며 “이는 ‘사회보장적 관점’에서 산재보험의 보호범위를 확대하고자 하는 견해로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업무상 재해’ 아닌 ‘산재’로 인정할 수도”


다수의 학설은 통근행위가 업무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는 데 중점을 두고 통근재해를 업무상 재해로 포섭하려고 한다. 즉, 학설은 사용자의 직접적인 지배?관리 아래 있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산재보상의 ‘사회보장적’ 성격을 중시하고 도시화와 교통환경의 열악화에 따른 통근재해의 증가, 그리고 통근재해가 개인의 생활상의 위험을 넘는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례는 통근경로와 수단의 선택은 노동자 사적 영역에 속한다는 이유로 사용자의 지배·관리 아래 있었는지 여부에 따라 통근재해의 업무성을 달리 판단한다.

노상헌 교수는 “통근행위는 업무밀접성과 사적영역이 교착한다는 점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며 통근재해를 △기존 판례법리에 의해 인정되는 업무상 통근재해(즉 사용자의 지배·관리 아래에서의 통근재해) △사회보장의 관점에서 인정될 수 있는 통근재해 △생활상의 위험으로 노동자가 부담해야 할 통근재해 등 3가지 영역으로 나눴다. 이어 그는 “두 번째, 세 번째의 경우는 업무상 재해는 아니다 하더라도 업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통근행위에 대한 위험을 ‘업무상 재해’가 아닌 ‘산업재해’로 인정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부분과 노동자의 사적 영역에서 부담해야 할 부분으로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지적에는 이런 고민이 깔려있다. 학설에서 얘기하듯 통근재해를 업무상 재해로 포섭한다면, 바로 통근 중에 있는 노동자는 ‘업무수행 중’이라는 주장도 펼 수 있게 돼 △통근시간에 대한 사용자의 임금부담 의무 여부 △통근비용 사용자 부담 여부 △통근 중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의 업무수행 명령 가능 여부 등의 문제가 혼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산업재해에서 업무상 재해가 아닌 입법적으로 ‘통근재해’의 개념을 만들어 이를 산재보험법에서 보호하자”고 제안했다. 쉽게 말해 ‘업무상 재해 + 통근재해 = 산업재해’라는 개념을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이 제안에 대해서도 산재보험법에 포섭할 것이 아니라 특별법 형태로 제정하자는 반론을 펼 수도 있다. 기존의 업무상(이라고 인정되는) 통근재해를 제외한 통근재해, 즉 현재 보호받지 못하는 통근재해에 대한 새로운 사회보험을 만들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새로운 사회보험에는 사용자를 참여시킬 수 있는 근거가 미약하다”고 일축했다. 이어 “통근재해는 근로생활이 수반하는 사회적 위험이 현실화된 것이어서 사용자가 부담해야 할 책임이 분명히 존재한다”며 “또한 산재보험법에서 ‘업무상’의 개념은 책임을 사용자에게 귀속시키기 위한 근거가 아닌 산재보험의 보호범위를 획정하는 기준으로 역할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 재해보상보다 넓게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 가능한가

통근재해의 산재보험화는 곧잘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 주장과 동일시되기도 하는데, 사회보장화에 대해 사용자쪽은 현실적으로 ‘시기상조’라며 반대하고 있다. 사용자쪽은 통근재해를 산재보험으로 포괄하라는 노동계의 주장을 곧,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재정부담 문제 등을 감안하면서 사회보장제도로서 산재보험의 역할을 높이기 위해 업무상 재해 인정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는 것과, 중장기적으로 통근재해를 보상대상에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발표했지만 아직 ‘계획’일 뿐이다.

노상헌 교수는 일본의 사회보장화 논의를 토대로, ‘사회보장적 관점’은 산재보험의 보호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견해일 뿐 사용자쪽이 우려하는 ‘사회보장화’와는 관점을 달리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물론 일본에서의 논의도 ‘종결’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2가지 점에서는 성과가 있었다고 학계에서는 동의하고 있다.

우선은 산재보험이 사용자의 책임보험 성격이 있다는 것과 다른 사회보험급여와 생활보호보다도 산재보험급여의 수준은 높게 설정돼야 한다는 급여의 우위성을 분명히 확인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산재보험의 이 같은 기본 성격이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론에 부정적 견해를 보이게 했다는 것이 제2의 성과라는 것이다.

학계의 다수는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가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 등 다른 사회보험과의 관계에서 산재보험급여 수준의 하향화라고 이해하면서 반대했다. 또한 보험재정에서 사회보장화의 논리적 귀결인 국고부담의 확대는 사용자의 재정부담 책임을 모호하게 하는 것으로 안이하게 도입해서는 안 되고, 하물며 근로자의 보험료 부담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

노상헌 교수는 “통근재해의 산재보험화는 변화하는 사회·노동환경에 산재보험이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함이지, 이것이 사용자쪽이 주장하는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를 의미하는 것은 나리”라고 말했다. 사용자가 주장하는 전통적 의미의 업무상 개념에 통근행위가 포함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를 업무상 재해와 구별, 통근재해로 보호하는 것이지 이를 갖고 산재보험의 성격이 변질됐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가 사용자의 책임을 전환시키거나 희석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경계하는 일본의 다수학설의 태도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노 교수는 “근로기준법의 재해보상책임 담보라는 산재보험의 입법취지에 엄격하게 구속될 필요 없이 산재보험의 현대적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통근재해의 산재보험화를 위한 제도설계는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통근재해의 산재보험화가 결코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혹시 사용자 주장과 같이 통근재해의 산재보험화가 산재보험의 사회보장화를 의미한다하더라도 이를 이유로 국고부담을 확대하거나 근로자에게 일부 부담을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상자기사①> ‘산업재해’가 뭐지? 법전에도 없네
‘노동재해’라고도 불리는 ‘산업재해’(industrial accident)의 사전적 정의는 ‘노동과정에서 작업환경 또는 작업행동 등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하는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 피해’이다. 줄여서 ‘산재’라고도 한다. 그러면, 어떤 노동자가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을 앓게 됐을 때 그것이 산재인지 여부는 그 사고나 질병이 ‘업무’에서 기인하느냐를 따져 가리게 된다.


그런데 현행 노동법에는 ‘산재’에 대한 정의규정이 없다. 법상 ‘어떠어떠한 것이 산재다’라는 규정이 없는데 어떻게 산재인지를 따질 수 있는 걸까.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는 ‘산재’에 대한 정의규정 대신 ‘업무상의 재해’에 대한 규정을 적고 있다. 산재보험법(제4조)에는 ‘업무상의 재해’를 “업무상의 사유에 의한 근로자의 부상?질병?신체장해 또는 사망을 말한다”고 하면서 “업무상의 재해의 인정기준에 관하여는 노동부령으로 정한다”고 돼 있다.

<상자기사②> 업무상 재해이거나, 그에 준하거나
외국의 경우…통근재해의 산재인정에 적극적
외국의 사례를 보면 대부분 통근재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것으로 보고 이에 상응하는 적정한 보상을 실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병태 한양대 명예교수(법학)에 따르면, 서구의 경우 1920년대부터 출퇴근 중의 재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국제노동기구(ILO)는 1964년 업무상 재해급여 협약 및 권고(Employment Injury Benefits Convention)를 통해 출퇴근 중의 재해를 업무상 재해와 동일시하거나 동일하게 처리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독일, 프랑스 등 유럽대륙국가는 통근재해를 사회보장시스템에 포함해 보호하고 있고, 미국 등 영미법계는 형평의 원칙에 입각해 판례를 통해 보호하고 있다. 우리와 노동법 체계가 비슷한 일본의 경우에는 출퇴근 중의 재해를 노동기준법에서 특별히 보호통근제도로 보호하고 있다.


다만 이인재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에 따르면, 각 국별로 통근재해 비용부담 방식은 차이가 있다. 일본의 경우 통근재해 비용 일부를 노동자가 부담하고, 모든 기업에 일률적으로 1/1000의 보험료를 부과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각 개별 사업장의 보험료 산정 시 통근재해로 인한 재해빈도는 고려하지 않으며, 프랑스의 경우 일반적인 산재에 대한 보험료율과 통근재해에 대한 보험료율을 이원화해 모든 기업에 동일한 통근재해 보험료를 설정하고 있다.

<상자기사③> “통근 없으면 업무도, 재해도 없다”
출근 중 교통사고, 업무상 재해로 본 사례 - 서울행정법원
부산에 있는 D섬유회사 노동자 박아무개씨는 지난해 2월 어느 날, 야간 근무를 위해 동료 노동자인 정아무개씨를 태우고 출근하던 중 마주 오던 차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정씨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박씨는 경추 및 늑골 골절 등의 상해를 입었다. 그 뒤 박씨는 이 사고로 입은 상해가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요양을 신청했으나 근로복지공단은 불승인처분을 내렸다. 사고 차량이 회사가 제공한 출퇴근용 교통수단이 아닌 박씨 소유이고, 회사 쪽이 박씨의 출퇴근 수단, 방법 및 그 경로 선택에 대해 전혀 관계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재판장 박상훈 부장판사)은 지난 6월, 근로복지공단의 요양불승인처분 취소 판결을 내렸다. 이 사고로 인한 상병을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유는 이렇다.


법원은 2가지 사실에 주목했는데, 하나는 통근재해가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지 여부이고 또 하나는 설사 기존 판례에 의한다하더라도 이 사건의 출퇴근 과정이 사업주의 지배, 관리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이다.


먼저 통근재해가 업무상 재해인가, 하는 점부터 보자. 재판부는 “통근이 없으면 재해도 없다”는 명제를 제시하며 통근은 업무수행을 위한 필요불가결의 행위이고, 따라서 통근재해는 업무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실제 공무원에 대해서는 통근재해를 공무상 재해로 인정하고 있다.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제14조)에서는 공무원이 통상적인 경로와 방법에 의해 출퇴근하다가 발생한 사고로 부상 또는 사망한 경우에 이를 공무상 부상 또는 사망으로 보고 있다. 통근을 공무를 위한 준비행위 또는 연장행위라고 봐서 통근 중 발생한 재해 중 통상의 경로 또는 방법에 의한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이를 공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것이다. 재판부는 “사립학교 교원, 군인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한 규정을 두고 있는데, 사립학교 교원이 ‘근로자’임은 분명하고 헌법에서도 ‘공무원인 근로자’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근본적으로 공무원도 근로자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며 “따라서 일반 근로자의 경우에도 공무원이나 사립학교 교원 등과 마찬가지로 개념상 통근재해의 업무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통근재해를 업무상 재해로 보는 경우,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제14조)과의 법체계, 공무원과 일반 근로자의 형평 등을 고려, 적어도 노동자가 통상적인 경로와 방법에 의해 통근 중 발생한 사고로 인해 부상 또는 사망한 경우를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100% 사용자 부담인 산재보험과 달리 공무원연금은 공무원들의 기여분이 있다는 점을 들어 동등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재판부는 “기여분이 있지만 공무상 재해에 대한 비용은 국가 또는 지자체가 전적으로 부담하기 때문에 공무원의 기여금제도를 들어 양자의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봤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비용부담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해석’으로 통근재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기보다는 입법적 해결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제시된다. 예를 들어 근로복지공단은 2003년도 공무원을 제외한 통근 중 교통사고 피해자 3만9,431명에 대해 각종 급여명목으로 6,416억원이 지급됐는데, 이를 모두 산재보험에서 감당할 경우 재정에 큰 부담을 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판부는 “공단은 통근 중 교통사고로 상해를 입거나 사망한 근로자 모두를 산재보험금 산정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각종 구상권 행사 등을 통해 회수 가능한 금액 등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라며 “약 6,400억원의 재정적자 주장은 도저히 현실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하지만 산재보험법의 예방적 기능에 비춰 노동자의 통근과정이 사업주의 지배, 관리 아래 있는 경우에만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산재보험법의 목적(제1조)에서 재해예방을 등을 위한 사업을 시행한다는 부분은 그야말로 재해예방사업을 의미하기 때문에 통근재해를 업무상 재해에서 제외해야만 ‘예방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재판부는 같은 법 제4조 ‘업무상의 재해’ 정의에서도 사업주의 지배, 관리 아래 있는 경우에만 업무상 재해로 본다고 쓰고 있지 않은 점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이어 재판부는 “사용자가 제공한 안전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을 이용한 근로자의 교통사고는 사업주의 지배, 관리 아래 있는 경우로 봐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데 반해 불안전하고 불편한 대중교통이나 도보로 통근하는 근로자의 교통사고는 그렇지 않은 경우로 봐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바로 산재보상제를 사회보장적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산재보상제도는 무과실책임의 특수한 손해배상제도라는 성격 외에 근로자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보장적 성격도 갖고 있다”며 “사회보장적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일정한 범위의 통근재해를 산업재해의 하나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덧붙여 재판부는 기존의 판례에 의하더라도 이 사건 재해는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 근거는 이렇다. 박씨가 운전한 승용차가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이 승용차를 동료 직원들의 출퇴근용으로 제공한 것은 회사가 시행한 카풀권장책에 호응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통근버스 운행 중단으로 카풀 필요성을 절감한 회사가 카풀 참가 노동자들에게만 유류비를 지원하고 그와 더불어 카풀을 하는 노동자들을 같은 근무조에 편성함으로써 카풀을 실제 회사의 근로조건과 연계시켰기 때문에 박씨는 정해진 시간과 경로에 따라 동료 노동자들을 출퇴근시켜야 했다. 출퇴근 시간이나 경로 선택의 자율성이 박씨에게는 없었다.


따라서 재판부는 “원고(박씨)의 승용차는 적어도 출퇴근 시에는 사업주에 의해 근로자들의 출퇴근에 제공된 차량에 ‘준’하는 교통수단으로서 출퇴근 시 승용차에 대한 사용?관리권은 사업주인 회사에 속해 있었으므로 원고의 출퇴근이 사업주의 지배관리 아래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업무상 재해임을 인정했다.
 
이정희 기자  goforit@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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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청소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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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청소년운동 | 꿈틀대는 꿈 2006/07/29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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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책자용- 일단 대충 완성인데

여기 뒤에 자료 별첨할 거랑 좀 더 모아봐야.


 

※ 이 글은 제가 약 1년 동안 아수나로[ASUNARO]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면서 듣고 읽고 경험하면서 배운 것을 짧게나마 정리한 것입니다. 이 글의 주요 요지는 전국중고등학생연합 활동을 했던 이민승 씨가 쓰신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등장과 몰락 - 2000~2001년 서울중고등학생연합을 중심으로」(통칭 학연소사)의 것을 많이 빌려왔습니다. 각주로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도 학연소사의 내용을 받아온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제가 속해 있는 청소년인권활동가 네트워크의 청소년인권운동사 연구팀(고근예, 유윤종, 전누리)에서 수집한 자료들에도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목차

1. 진보적 청소년운동이란

2. 한국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사회적 배경

3.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의제
4.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방법론에 대해

5. 맺음말

 

 

1. 진보적 청소년운동이란


  청소년운동이란 기본적으로 중고등학생, 또는 탈학교 청소년들 등 ‘청소년’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운동, 또는 청소년이 하는 사회운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청소년운동이라는 개념 안에는 서로 다른 여러 흐름들이 뒤섞여 있다. 가장 흔히 통용되는 개념으로는 청소년들의 사회운동(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 청소년의 시민사회단체 활동 참여, 더 넓게는 금연캠페인이나 청소년선도 캠페인 등도 포함시킬 수 있다.)이 있고, 그 외 청소년선도운동 ― 즉 금연, 금주 교육이나 “유해환경(불량식품이나 유흥주점 등)으로부터의 보호”, 그리고 청소년들의 주체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변혁운동이 혼재해있는 것이다.

청소년선도와 대립되는 진보적 청소년운동

  우리는 이 중 마지막 것을 “진보적 청소년운동”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청소년선도가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청소년을 보호하고 훈육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이자 변혁의 주체로 바라본다. 또한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에 대한 사회 구조적 억압에 저항한다. 이 두 가지 점에서 이 운동은 진보적․변혁적 성격을 띠며 청소년을 선도하고 훈육하는 종류의 운동과는 대립된다. 예컨대 여성에게도 투표권이나 재산권이 주어진 것과 같이, 기본적 권리의 주체가 확장되고 사회가 다양한 존재를 관용하는 것, 소외되어 있던 집단의 주체화 정도가 증진되는 것을 사회 진보의 한 지표로 볼 때 기성세대의 보호․훈육․선도의 관점에서 벗어나 청소년도 권리의 주체임을 주장하는 운동은 충분히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진보적 청소년운동과 청소년선도의 두 가지 다른 관점이 한 단체 안에 혼재해 있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일부 지역의 YMCA 같은 곳에서는 청소년인권센터를 운영, 진보적 청소년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청소년 금주․금연 운동과 같은 선도의 성격을 띤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이런 기묘한 결합은, 단체의 특성(YMCA의 경우 종교단체)이나 상황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1920년대 우민화교육․식민지교육을 철폐할 것을 주장한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최초의 것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이후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미군정에 대항한 학원민주화 운동이나 6월 민주화 항쟁, 전교조의 참교육 운동 등과 결합하며 그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다른 민주화 운동과 분리되어 독립적 영역이 된 것은 소위 민주화 이후의 일이다. 이런 독립의 과정 속에서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정부와 학교당국의 탄압, 내신경쟁강화 등의 영향으로 80년대와 90년대 사이에 한 차례 단절을 겪게 되는데, 이 단절을 근거로 80년대나 그 이전의 것을 “중고등학생운동”으로, 90년대 이후 최우주 씨 사건과 학생복지회로부터 등장한 움직임을 “청소년운동”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 구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진보적 청소년운동과 ‘청소년의 사회운동’

  ‘청소년의 사회운동’은 청소년을 변혁의 주체로 보는 관점에 기초하므로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이자 변혁의 주체로 이해하는 진보적 청소년운동과도 일맥상통하며, 결국 둘은 닮은꼴이다. 하지만 앞에서 우리가 다룰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범위는 청소년들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의제로 설정하는 운동으로 제한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사회운동’과 교집합을 이룬다. ‘청소년의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은 고등학생들이 부정투표무효를 외치며 4.19 시위에 동참한 것이나, 청소년이 하는 중고등학교 학생회 운동 등을 모두 포괄한다. 그런데 4.19 시위와 같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논할 진보적 청소년운동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비(非)청소년이 청소년과 관련된 운동을 지원하거나 돕는 것 등도 포함한다. ‘청소년의 사회운동’이 운동을 ‘누가 하는가?’에 기준을 둔 개념이라면,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누가?’보다는 어떤 주장을 갖고 어떤 운동을 하는가에 더 큰 초점을 맞춘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일 어떤 형태의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사회 체제의 변화를 지향한다면, 그것은 사회 체제를 변화시켜야 청소년들이 온전한 권리의 주체로 인정받고 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궁극적으로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그 출발은 청소년 자신의 권리문제일지 몰라도 일정한 발전단계에서는 결국 청소년 이슈라는 좁은 범위를 벗어나 다른 사회변혁 운동과 맞물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청소년의 사회운동과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종종 함께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나 6월 항쟁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구별이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정부가 간혹 내세우는 “청소년 사회 참여 증진”과 같은 표어의 성격을 비판하거나 할 때 쓸모가 있을 것이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의제나 이슈에 관해서는 3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나, 여기에서 그 범위를 대강 이야기하자면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이슈는 초중고등학교 교육의 문제, 그리고 청소년보호법의 적용을 받는 청소년들의 문제로 한정된다. 초중고등학교를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 것에는 아마 큰 이의가 없을 것이다. 한국 교육의 억압적인 구조, 경쟁적인 교육 환경 등은 청소년이 온전한 권리의 주체가 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심각하게 저해하며 이는 청소년 대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청소년보호법을 또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청소년보호법이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법이며 그 안에는 청소년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몇몇 조항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소년노동문제 등을 다룰 때는 청소년보호법이라는 기준이 유효하지 않을 수 있으며,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초등학교의 포함 여부, 유치원의 문제 등이 있기 때문에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범위를 설정하는 데는 상황에 따른 유연성이 필요하다.

 

 

 

2. 한국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사회적 배경


  현재 한국의 학교나 국가, 사회는 청소년에게 여러 억압을 가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교육체제는 학생들을 경쟁으로 내몰며, 경쟁에서 낙오한 학생들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있으며, 체벌, 두발규제 등 다양한 폭력도 존속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사회적으로 당하는 여러 차별 또한 청소년을 체제에 동원하고, 체제에 순응하도록 훈육할 미성숙한 대상으로 보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데 기인한다.


근대 공교육의 성격

  이런 현실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적인 근대 공교육의 기원을 짚어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왜냐하면 청소년이나 아동이라는 개념이 독립적으로 발생한 것이 바로 근대의 공교육 도입, 미성년자 보호 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간단히 말하면, 청소년들을 잘 관리하고 잘 길러내야 기존 사회체제가 유지되고 국가가 잘 돌아간다. 그것이 사회가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이유이다.

  근대에 서유럽에서부터 시작된 국가 공교육은 본래 ‘국민’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며, ‘민주주의’나 ‘인권’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민족주의, 국민들을 통합하기 위한 공통된 언어(표준국어),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초적인 교육, 규율을 잘 지키는 것 등을 교육시킨다는 의미이다. 이는 근대 국민국가가 국민의 국가에 대한 충성과 헌신,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도 얽혀 있었다. 자본주의가 심화 발전하면서 더 이상 자본가들은 자본주의 체제 외부(예 : 농촌)로부터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없었으며, 새로운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게 되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에는 좀 더 생산성 높은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훈련된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동 노동시간 제한, 여성보호와 같은 법과 함께 근대적 공교육이 도입되었다. 근대적 공교육은 시간관념이 명확하고 규율을 잘 지키며 상명하복하는 노동자를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읽기쓰기, 산수 등을 가르쳤다. 기계 다루는 것과 지시 내용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런 능력들이 필요했다.(기계 돌리는 설명서라도 읽을 수 있어야 일 시켜먹지.) 물론 공교육의 확대에는 교육의 권리를 얻고자 했던 수많은 민중들의 요구와 저항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부르주아계급이나 국가의 이해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며, 결국 공교육의 내용 편성에는 그런 이해관계가 반영되었다.

  따라서 학교는 그 출현부터 전적으로 학생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내면화한 ‘주체적인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학교는 자본주의에 순응적이고 충량한 인간형을 만들어내려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학교에서 강조되는 규율과 규정의 준수, 시간표에 따르는 규칙적인 활동, 애국조례 등은 민주시민의 자질 이전에 근대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의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 공교육은 경쟁과 같은 방식으로 청소년들을 자본주의로 편입시키고 체제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며, 때로는 전근대적인 수단(예 : 체벌)을 차용하여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려 들기도 한다.

  근대적 공교육 안에 있는 이와 같은 전근대적 요소들은, 자본주의의 심화와 근대화의 진행에 따라 자연스레 약화되기도 한다. 이는 학내에서의 성차별이나 체벌, 수직적 관계 등의 요소들이 자본주의의 학교에 필수적인 기제가 아니게 됨에 따라(혹은 사회 전반의 성숙에 따라) 쇠퇴하는 것으로, 교육현장과 사회의 괴리가 지나치게 커지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상황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은 제국주의 시대와 세계대전 이후에 본격적인 근대화에 돌입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식민지 전쟁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군부독재와 압축적 근대화를 경험했다. 한국과 같은 식민지 후발 자본주의 국가는 식민지 경험에 의해 한층 강화된 민족주의와 근대화론이 만연하기 쉽다. 거기에 한국전쟁과 휴전상황이 더해지면서 사회 분위기는 더욱 군사적․권위적으로 변해갔다. 뿌리 깊은 유교사상도 한 몫 했음은 물론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 청소년들이 받아야 했던 교육은 황국신민화교육이었다. 제복(교복), 두발규제와 더불어 “황국신민의 서사” 암송을 강요하는 등의 억압은 청소년들을 국가주의․군사제국주의 아래 복속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으며, 우민화 교육으로 제대로 된 주체적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일제의 여러 문화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과 비판,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사람들은 전란에 휩싸였고 반공이데올로기 속에 사회는 더욱 경직되어 갔다. 그 후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에 포함되어 있던 억압의 일부를 차용하거나 더욱 공고히 하여 교육을 군사문화와 국가주의로 물들였다. 계속된 두발규제, 국민교육헌장, 교련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일제시대에 이어 광복 후에도 말 잘 듣는 군인, 또는 순종적인 ‘근로자’를 만들기 위한 여러 억압들이 청소년들의 삶을 짓눌렀다.

  박정희 이후 들어선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자동차, 전기 전자 등 노동집약적이며 기술집약적인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전두환 정권은 졸업정원제 등을 이용, 고급 노동력 시장을 구축하고자 했다. 결국 대학교육은 기술 이전의 교육장으로 변모했으며 생존의 방편을 위한 대학진학 욕구가 점점 확산되었다. 그렇게 1980년 이후 고등학생들은 이전보다 훨씬 심화된 극도의 성적경쟁을 강요받게 되었으며, 내신성적 제도는 고등학생으로 하여금 대학진학에 혼신의 힘을 다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의식성장의 길을 차단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 청소년들을 심한 성적경쟁으로 내몰았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바로 한국 청소년들이 다른 근대화된 나라들에 비해 더 극단적이고 강한 억압을 겪는 원인이다. 그러나 한국 청소년들이 다소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 근본 문제는 한국만의 것이 아니며 보편적인 것이다.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경쟁’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교육체제는 인간을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학벌과 같은 장치를 이용하여 청소년을 편의에 따라 줄 세운다. 이 안에서 청소년은 합당한 권리를 지닌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경쟁과 그에 대한 순응을 요구 당하며, 사회는 청소년을 교육을 선택하는 자기 삶의 주체가 아닌 훈육되고 선별되는 객체로 대우한다. 경쟁은 자본주의가 청소년들을 동원하고 체제에 순응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인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은 ‘능력에 따른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만큼 불이익을 받는 것이, 승리한 사람들은 그만큼의 이익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해하게 된다. 경쟁 장치는 자본주의 계급재생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며, 효과적으로 체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해낸다. 다른 억압들은 체제에 청소년들을 더 직접적으로 순응시키고 통제하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동원되는 것이다.


  요컨대, 대한민국 학교는 자본주의 공교육의 일반적 성질과 대한민국의 역사적 특수성이 결합하여 비상식적인 수준의 억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의 도입으로 무분별한 경쟁논리가 강화되고, 지역․학교에 따라 청소년들의 계급적 격차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문제, 가령 고교등급화나 자립형사립고와 같이 자본주의가 심화․발전되면서 체제의 이해와 직접 관련하여 생기는 문제는 교육의 근대적 억압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반면 두발규제, 너무나 성차별, 체벌, 각종 규제 등 학교 전반에 남아있는 전근대적 요소들은 교육의 전근대적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양 억압은 때로는 충돌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소위 잘사는 집 청소년들, 성적 좋은 청소년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의 경우 두발규제나 체벌, 학생들의 자치활동에 대한 제한이 약한 편인데, 그것은 근대적 억압이 전근대적 억압과 충돌하여 우위를 점한 결과다. 다수가 기득권층으로 편입될 그들에게 전근대적 억압은 필수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건전한’ 성장에 방해가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많은 경우, 이 양 억압은 서로 결합하여 학생들을 억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목적으로 대우받기를 바라게 된다. 곧 학생들의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 자유에 대한 갈망, 사회적․공공적 보장에 대한 요청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촉발되는 사회적 배경이다.

 

 

 

3.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의제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설정해온 의제는 다양하다. 사회적 소수집단들이 대개 그렇듯 청소년이 직면하는 억압도 한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주로 제기되어온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의제들은 교육과 인권 분야 걸쳐 있다. 그리고 2006년 5월말부터 벌어진 칠레 고등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에서 나온 다양한 요구 중에 “대중교통 요금 무료화”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더욱 성장하게 되면 훨씬 다양한 의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무엇을 문제로 삼고 무엇을 주장해왔는지 그 간략한 역사를 살펴본다.


1990년대 초반까지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의제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청소년들은 식민지우민화 노예교육 중지, 한국 학생들을 위한 교육 실시, 직원회에 학생대표 참가, 사회과학연구 활성화 등을 주장했다. 미군정 하에서는 민족자주교육 쟁취를 위한 대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의 연대투쟁이 있었다. 학생들이 내세운 주장은 “일제 잔재 척결”, “민족자주교육 쟁취”, “학원민주화”를 비롯하여 학내비리 척결 등도 포함하고 있었다. 사실 그땐 항일독립운동․민족자주운동․민주화운동과 교육운동이 분리되어 인식되지 않았기에 이후 중고등학생들이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면서 간간이 “학교민주화”나 학내비리 문제가 곁들여지는 방식으로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명맥은 이어져 왔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청소년들의 조직과 행동은 비록 체계적이지는 못했지만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흐름을 지속시켰다. 요컨대 당시 진보적 청소년운동이라 할 만한 운동의 의제는 주로 학교민주화, 민족자주교육, 학내비리 척결이었으며 이 또한 다른 거대사회담론과 뭉뚱그려져 있었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독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1980년대에 입시경쟁교육이 강화됨에 따라 강제야간자율학습, 강제보충수업 등이 일상적으로 시행되었다.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증가했으며 학교의 통제도 강해졌다. 이에 1980년대 초반부터 교사들과 중고등학생들의 저항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두발자유화, 입시경쟁교육 철폐 등을 주장했다. 징계․삼청교육대 등 숱한 탄압에도 소모임 형태로 살아남았던 중고등학생 운동 세력은 1980년대 중반에 들어 조금 더 활발하게 학내비리 척결, 두발규제철폐, 강제보충수업철폐투쟁(보철투), 입시경쟁 반대 등으로 집단행동에 나섰다.

  중고등학생들은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겪으면서 “대통령부터 반장까지 직선제로!” 구호를 외치며 학생회 직선제에 좀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는 학생회를 통해 학생 대중조직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연합(서고련)이 명동성당에서 노태우 당선 반대 농성을 벌이는 등 청소년들은 민주화운동에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에도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노동해방”, “조국통일” 구호와 입시교육 철폐, 학교민주화 등의 구호가 뒤섞여 있는 등 1980년대의 민주화․노동운동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이진 못했으나 내부적으로는 정치투쟁을 중시한 쪽과 교육문제에 집중한 쪽이 나뉘어 있었으며, 실제로도 두 세력의 활동 영역에는 약간의 차별화가 보인다.

  1989년부터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전교조와 함께 참교육 운동을 펼치는 형태를 띤다. 의제로는 살인적 입시경쟁교육 척결, 참교육 실현, 해직교사 복직, 징계철회와 사학비리, 학생자치 보장 등이 거론되었으며, 학생회 직선제 문제가 나오기도 했다. 학생들의 투쟁도 격렬했다. 투신과 점거농성, 수업거부, 시험거부, 방학거부 등이 광주, 서울, 나주, 부산 등지에서 계속되었다.

  참교육 운동 이후 1990년대 초반은, 참교육 운동을 수행했던 청소년들이 학교 밖에 지역기반 조직을 만드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주로 문화활동을 통해 청소년대중에게 접근했던 당시의 청소년단체들에는 “참배움일꾼청소년회”(참일청), “청소년회 샘”, “푸른 벗”, “희망” 등이 있는데, 이 단체들은 주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1990년대 초반의 단체들은 문화분반 운영, 수련회 등으로 청소년들을 끌어들여 교육하고 운동을 벌이는 방식으로 청소년들의 운동을 지속해갔다. 그 이슈는 때로는 수입개방반대였고 때로는 보충수업, 자율학습 철폐나 사학비리 고발이었다. 1990년대 초반에도 강경대 열사, 김철수 열사 사건 등으로 1000여 명의 청소년들이 집회에 모이기도 했는데 이 또한 참일청 등에서 조직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1994년 공안정국에서 정부가 ‘샘 사건’을 터뜨리면서 크게 위축되고 약화되어갔다.


청소년인권운동

  한 차례 단절을 겪은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인권”의 언어로 “최우주 씨 사건”을 통해 부활했다. 춘천고등학교 최우주 씨는 학교의 강제자율학습, 강제보충수업에 대해 청와대, 교육부, 강원도교육청 등에 민원을 제출했다는 글을 하이텔 게시판에 올렸다. 본래 헌법소원을 내려다 절차상의 문제로 민원을 제기하게 되었다고 밝힌 최우주 씨는 ‘학교가 학생의 기본권을 짓밟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습의 자유, 신체의 자유, 여가권 등이 이슈가 된 이 사건은 이후 두발자유화, 학생 대표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 등의 의제를 만들어낸 ‘학생복지회’와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을 전후하여 분출된 다양한 청소년들의 목소리와 직접 행동은, 주로 인권의 언어를 통해 이슈를 제기했다. 두발자유, NEIS 반대, 강의석 씨에 의해 촉발된 미션스쿨 종교자유, 강제야자폐지, 청소년의 노동에서의 권리(아르바이트와 현장실습) 등은 모두 인권의 측면에서 주장되었다. 사학비리와 사학법개정 문제도 계속 제기되고 있는 등, 모든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현재 인권운동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인권운동이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주요한 부분임은 분명하다.

  청소년인권운동은 ‘인권’이라는 보편적 원칙에서 청소년도 결코 예외가 아니며, 청소년이 성인과 다르지 않은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의 주체임을 주장한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기존의 민주화운동으로부터 갈라져 나오면서 인권운동의 형태를 취한 것은 자연스럽다. 이는 1990년대 초반부터 인권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 신사회운동들이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독립해가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방법론에 대해


4.1. 대중운동지향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수단적으로 대중운동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은 어느 정도 명확하다. 비단 진보적 청소년운동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진보적 운동들 대부분이 수단적인 면에서 궁극적으로 대중운동을 지향한다. 잘못된 사회체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다수 민중의 저항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전형적으로 수적으로는 소수가 아니지만 권력 관계상 소수에 처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 연대하고 집단적 조직을 이루어 권력의 평형을 맞추려 해야 한다. 이는 마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권력의 평형을 맞추려 하며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청소년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일터로 집중되듯이 ‘학교’라는 공간으로 다수가 집중되는 상황에 처해있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방법론에서 노동운동의 방법론과 유사한 부분을 상당수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사점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역사 속에서의 몇몇 사례들을 통해 대중운동을 지향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광주학생항일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발단은 전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괴롭힌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이전부터 광주지역에서는 동맹휴학과 같은 형태로 식민지 우민화 차별 교육에 저항하는 운동이 계속 벌어져 왔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펼쳐나가도록 조직했던 것이 ‘독서회’였다. 독서회의 전신은 마르크스주의 성향을 띤 비밀 지하조직인 ‘성진회’였다. 장재성 씨 등이 주도했던 성진회는 한 차례 해산하여 각 학교에서 조직 활동을 벌이다가 각 학교별 기반을 갖춘 뒤 독서회의 형태로 다시 통합했던 것이다. 모임의 회원들은 각 학교, 각 학년, 각 반별로 단위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소녀회’도 상당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적 기반과 투쟁 경험이 있었기에 광주의 활동가들은 1929년 11월 3일에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의 패싸움 형태로 터져 나온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발 빠르게 대처하여 2차시위를 각 학교별로 계획하고 이후의 백지동맹 등의 장기적인 행동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꾸준한 싸움 덕에 결국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는 학생들의 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었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주목할 점 중 하나는, 신간회를 비롯한 다른 항일단체들이 학생들의 운동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다른 사회운동과 유리되어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운동과 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참교육 운동

  1989년에는 전교조가 결성되면서 1년 동안 전국적으로 총 46만 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참교육 운동에 나서는 놀라운 운동이 일어난다. 1990년의 18세 미만 인구가 1400명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 중고등학생의 약 1/10 정도는 투쟁에 나섰다는 소리다. 이처럼 청소년들의 참교육 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교조 교사들의 양심적인 외침과 요구가 청소년들의 요구와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했다. 비인간적 교육 속에서 최소한의 권리조차 누릴 수 없었던 청소년들은 그런 현실을 바꾸고자 끊임없이 싸워왔으며, 그 싸움은 전교조 창립을 계기로 더욱 격렬해졌다. 전교조 교사와 학생들의 유대로 운동은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갈 수 있었고, 학생들은 전교조 교사가 우리 이야기를 대신해주고 희생당한다는 생각에 참교육 운동에 한층 더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참교육 운동 때 보여준 학생들의 동원력과 조직력은 그동안 축적되어 왔던 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학생들의 저항의 구심점은 1987년 6월 항쟁의 흐름 속에 조직되어 온 소모임, 동아리, 학생회 등이었다. 청소년들은 1987년을 전후하여 교육 문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쳐왔고, 특히 1987년 6월항쟁을 경험하면서 학내에 적극적으로 소모임과 조직 건설을 시도했다. 그들은 학내의 대중적 조직 기반이 필요함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동아리나 소모임 등에서 학생들은 사회비판적 의식을 키워가고 있었고, 또 그런 조직들의 자주적 학생회 투쟁으로 세워진 직선제 학생회에 적극적이고 의식 있는 학생들이 진출하면서 학생회 조직은 운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모임들은 전교조 출범 등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자, 그동안 축적된 역량들을 모두 드러내가면서 유인물을 만들고, 다른 학우들을 조직하며 행동을 주도하는 등의 역할을 참교육 운동에서 해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학교와 정부의 탄압으로 학내에서의 이런 모임들이 많이 약화되자, 1989년의 참교육 운동을 경험했던 청소년들은 학교 밖에 청소년단체를 만들어서 청소년 대중 속으로 침투해가는 운동을 펼쳤다. ‘청소년회 샘’ 같은 경우는 1994년에 공안사건으로 파괴당하기 직전에는 거의 200여 명의 청소년들이 수련회나 문화 분반 활동 등을 통해 참여했다. 그 청소년들은 샘에서의 대화나 경험에서부터 사회 및 학교의 문제에 눈을 뜨고 유인물을 돌리는 등의 활동을 하여 학교 안에 문제를 일으켰다. 이런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샘의 상근자들이 가서 학교와 담판을 지어서 징계를 철회시킨 적도 있었다. 이는 학내의 활동이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고 사라져 갈 때 어떤 식으로 활동을 지속시킬 수 있는지 한 방법을 보여준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

  ‘학생인권과 교육개혁을 위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중고등학생복지회’의 일부 멤버들이 대중조직 건설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제기하면서 2000년도에 만든 단체이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무엇보다 2000년의 두발자유운동(일명 노컷운동)으로 유명하다. 당시 노컷운동은 웹연대 with의 인터넷 서명운동을 통해 불붙었으나, 그 불을 더욱 번지게 한 것은 바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오프라인 활동 ― 거리선전․서명운동․집회․인권선언 등이었다. 이 두발자유운동은 2000년 여름부터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으며, 당시 ‘준비위원회’의 (준)을 붙이고 있던 전국중고등학생연합(준)도 광주, 목포, 부산 등 각 지역에 지부를 설립하며 양적으로 크게 팽창하였다.

  그러나 두발자유화운동은 양적 질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의 기만적인 ‘학교별 합의’ 지침에 일반 청소년들이 넘어가면서 그 불꽃이 꺼지게 된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을 비롯하여 다른 단체들도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2000년 두발자유운동은 각 학교에서 각개격파당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각 학교별 지회전이란 형태를 통해 대중조직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초기 대중조직 전략은 ‘형식적 대중조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즉,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을 대중조직으로 먼저 설정한 뒤 학생회․동아리․단체의 규합을 유도한 것이다. 청소년들의 지지를 통해서 대중조직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 아닌, 대중조직이 먼저 설정된 후에 거기에의 결합을 요구하는 방식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이 학생회 조직에 집착한 것도 문제를 낳았다. 사실 학생회장단 모임은 상당수가 엘리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따라서 학생회 조직을 규합하려 한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학내 지지기반이 많이 부족했고, 또 여러 대중조직 전략의 오류와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지부 및 지회에 대한 관리 소홀로 좌절을 겪게 된다. 그리고 학내에서 싸울 힘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후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본격적인 지회 전술은 2001년 봄 활성화 되어 서울지역의 경우 최소 파악된 것만 10여 개 이상의 지회가 활동했다. 그러나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조직관리 능력 미숙으로 자신의 조직 규모에 대한 파악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생적으로 각 학교에서 생겨난 모임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그 모임들이 학교의 탄압으로 해체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중앙은 지회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학교의 탄압은 너무도 강했다. 활동을 원하는 회원들이 계속 가입하면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덩치는 빠르게 커졌지만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이 덩치를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장기적으로는 대중조직 건설에 실패했던 것이다.


  앞서의 사례들을 통해 살필 수 있는 것은, 간략하게 축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학교를 거점으로 하는 학내의 대중적 조직을 건설하여 지속시켜야 한다.(소모임활동, 혹은 지회전) 탈학교청소년의 경우도 일터나 청소년문화의 집 등의 거점이 가능할 것이다.

② 이러한 기반이 없을 때는 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또 그 계기를 촉발시키는 것은 학교 밖에서의 활동(참일청, 샘, 그리고 전국중고등학생연합 등)이다.

③ 대중조직 건설은 차근차근 이루어져야 한다. 거품만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각 학교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저항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지원하는 데 세심한 주의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여러 인프라 면에서 따져보면 이제 막 시작하는 걸음마 운동이다. 기존에 활동하던 청소년들이 성장해서 성인이 되면서 조직이 흔들리는 등의 청소년운동 특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재학 중일 때 아래 학년과 잘 접촉해서 조직에 끌어들이라는 것 외에는) 획기적인 답이 제시되지도 못하고 있으며, 또 정말로 대중조직 건설이란 것도 밑바닥에서부터 해나가는 길고 힘든 작업이다. 그러나 그런 긴 작업과 시행착오의 역사가 선행되지 않으면 어떠한 운동도 발전하지 못한다. 과거의 여러 사회운동들도 그런 시행착오와 패배의 역사를 겪으면서 발전해왔음을 주지하며 인내심을 갖고 대중운동 건설에 임해야 할 것이다.


4.2. 경계해야 할 방식

  현재의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경계해야 할 것에는 ① 피터팬주의 ② 비정치성이나 정치적 중립의 환상 ③ 온라인 만능주의 ④ 정부나 국가에 대한 의존 등이 있다.

  피터팬주의는 청소년이 아닌 비청소년들의 개입을 극도로 꺼리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진보적 청소년운동을 공격하는 데 국가나 보수적 세력들이 ‘성인들의 조종’이라는 식의 비난을 일삼아 온 데서도 비롯되며, 또 청소년들이 성인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 하는 과민한 반응에서도 비롯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안정적인 조직과 활동가의 부재를 낳았으며 운동의 발전을 막는 요인이 되었다. 활동가가 청소년에서 나이를 먹어 자연스레 비청소년이 되면, 설령 활동할 의지가 있다고 해도 청소년운동에서 소외되면서 운동의 경험이 축적되는 것을 가로막았다. 청소년운동에서 청소년이 가장 중요한 주체가 되어야 함은 사실이나, 비청소년들도 거기에 얼마든지 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장애인인권운동을 장애인만 하는 것이 아니듯이. 비청소년들이 청소년운동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지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고민해야 하며, 그들의 운동 경험들을 전달할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비정치성이나 정치적 중립의 환상은 기존의 정치나 기성운동에 대해 꺼리는 감정 등에서 비롯된다. 이는 다분히 청소년들을 기존의 운동으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오랜 책략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비정치성 주장은, 청소년운동이 기존의 어떤 이념이나 운동과 무관한 ‘순수한’ 운동이거나 또는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 운동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운동에 제약을 만들 뿐이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다른 운동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전략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도 있지만, 사실 비정치성을 내세우는 단체는 활동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단체는 어떤 활동에 정치적인 색깔이나 기존 단체, 정당, 이념 등이 관련되어 있으면 그런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 따라서 오히려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자신의 대의에 일치하는 것에는 거리낌 없이 동의해야 한다. 마치 ‘학생인권법안’이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에게서 발의되었다고 해서 이를 지지하는 것을 꺼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민주노동당이 학생인권법안을 발의했기에 다른 정당보다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만능주의는 청소년들의 오프라인 조직이 필요 없으며, 편리한 온라인에서의 활동만으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에서의 활동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단적으로 이야기해서 온라인 서명 1만 명과 교육부 앞에 피켓들고 진을 친 500명의 청소년 중에서 더 강한 압박감을 느끼게 하고 실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후자이다. 중고등학생복지회가 온라인을 기반으로 삼은 것은 억압적인 학교 현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회한 것에 불과했다. 온라인은 비록 자유로운 활동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지만, 그만큼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크지 못하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온라인 만능주의는 현실세계에서의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한 청소년들에게서 드문드문 엿보이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제 행동의 중요성을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정부나 국가에 의존하는 것은, 직접 청소년들을 조직화하고 세력화해서 스스로 권리를 찾게 하지 않고 국가나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무엇을 해달라고 별다른 행동 없이 ‘청원’하는 형태의 운동을 의미한다. 이는 관변단체의 성격을 띤 곳에서 자주 보이는 것으로, 오히려 청소년들의 진보적인 요구를 달래서 체제 안으로 흡수하려고 한다. 이는 인권이 결국 자신이 쟁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며, 국가의 요식적인 행정 또는 입법 활동에 의존하게 만들어 운동의 목표 달성을 더디게 만든다.

  이상과 같은 여러 문제들은 지금까지 진보적 청소년운동에서 나타난 몇 가지 문제들에 불과하다. 앞으로 계속 운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더 다양한 문제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으며, 그러한 문제점들이나 시행착오를 얼마나 빨리 인식하고 해결하느냐에 따라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발전이 좌우될 것이다.



5. 맺음말

  진보적 청소년운동은 앞으로 계속 발전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발전을 위해서 계속 이슈를 만들고 행동을 벌여야 한다. 질적 발전과 양적 발전이 병행되기 위해서, 연구 및 정리와 행동을 통한 선동 또한 병행되어야 한다.

  대중적 투쟁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기를 앉아서 기다렸다가는 낭패를 보게 된다. 활동가들은 결정적인 기회나 대중의 의식 전환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만들고, 또 그때가 왔을 때 벌일 효과적인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연대하고 저항하면서 운동 기반을 조금씩이라도 만들어가야 한다. 행동이 행동을 낳는다. 그리고 그런 꾸준한 노력이야말로 길을 준비하는 일이다.

  주지할 것은,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내에서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고, 학내의 인권침해 사례를 모으고 비판할 학내 모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학교는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이자 청소년들의 생활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청소년인권문제의 많은 부분이 학교에 집중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탈학교 청소년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학교의 중요도는 퇴색되지 않는다.

  학내 모임은 학교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당분간 다소는 비밀스럽게 행동할 필요도 있다. 학내에서 관심 있는 친구들을 유도하고, 동아리 등에 스며들어 그들의 주장(학교 측의 활동 제한이나 각종 검열)을 옹호하여야 한다. 각종 전단지나 간행물을 학생 사회에서 유포시키고, 자주 모임과 토론회를 열어 결속을 다져야 한다. 그리고 지회-모임의 지속을 위해서 학생회나 동아리에 적극 참여하여 선후배 사이의 교류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학생회에 진출해서 학생회를 진보적인 성격으로 만들어 학교에 저항하고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일 것이다.

  덧붙여서 학교 밖에는 이러한 학교별 모임을 지원하고, 구성할 지역별 조직, 전국적 규모의 조직이 필요하다. 특히 이 단위에서 진보적 청소년운동의 목소리를 낼 간행물 발간이 매우 중요하며, 학교별 모임의 토론회에 발제자나 연사를 보내줄 필요도 있다. 또한 회원들의 학교별 모임 건설에 도움을 주고, 같은 학교 회원이나 주변 학교 회원 혹은 모임에 연결고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진보적 청소년운동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은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학교와 사회의 탄압은 계속되고 있으며, 대중조직 건설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언제 달성될지 불분명하기만 하다. 두발자유운동도 7년째이지만 아직 두발자유를 이루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우리는 계속해서 길을 준비해갈 것이고, 끈기를 갖고 청소년의 인권이 보장되고 청소년들이 권리의 주체이자 사회 변혁의 주체로 나설 수 있을 때까지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더 행복하고 가치있게 살 수 있는 사회, 인간이 수단인 동시에 목적으로도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를 인간이 소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억압이 있는 한 저항도 있을 수밖에 없다.  (기왕 저항하는 것, 조직적으로 꾸준히 해서 목적 달성 가능성도 높여줘야 할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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