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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02
    <시>벽돌과 황금
    바람돌이
  2. 2006/10/02
    '정몽준 지지 선언' 권용목의 굴절된 삶
    바람돌이
  3. 2006/10/02
    노사협조로 점철된 대우차노조 06임단투(노정협)
    바람돌이

<시>벽돌과 황금

벽돌과 황금

벽돌이 벽돌일 때는
노동자의 일당, 일용할 양식이 된다

그러나 그 벽돌이 집이 되어
부동산 문서 속에 들어가면
황금 찬란한 억대 궁전이 된다

놀부나라 강남은
여기서 얼마나 먼지
요새는 제비도 찾아가지 않는다

노동자의 손을 떠난 벽돌이
누우런 황금으로 변한 날
벽돌은 마술의 꿈을 꾼다
나는 저 밤하늘을 나는
한 마리 아름다운 궁전이 되고 싶다고!

그날밤 강남의 놀부는
벽돌로 쌓은 그 무덤 속에 누워서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꿈꾸고 있다

(문병란 / 1935년 전남 화순 출생. 40여년 문단 활동. 시집으로 『죽순 밭에서』, 『땅의 연가』, 『무등산』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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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지지 선언' 권용목의 굴절된 삶

'정몽준 지지 선언' 권용목의 굴절된 삶
[심층추적] 노동운동가가 재벌지지자로 변모하기까지
텍스트만보기   박수원(pswcomm) 기자   
1987년

▲ 29세의 청년 권용목은 한국노동운동의 살아있는 신화였다.
현대엔진에는 80년대 초반부터 고적답사반이라는 소모임이 있었다. 조립공장을 중심으로 대여섯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울산에서 가까운 경주 등 인근의 고적들을 답사하면서 노동의 찌든 때를 벗기고 단합을 도모하는 일종의 취미서클이었다. 그 고적답사반의 중심에는 권용목이 있었다.

87년 7월 5일 회사의 감시를 피해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울산 옥교동에 있는 한 디스코텍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100여명의 노동자들이 디스코텍에 모이자 홀 중앙에 '경축 현대엔진(주) 노동조합 결성대회'라는 글씨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대엔진 노조위원장에는 만29세의 청년 권용목씨가 선출됐다.

노조 결성대회를 무사히 마친 권용목씨는 점심시간이 되자 연단에 올라가 노동자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서 보고대회를 진행했다. 키165cm, 몸무게 57kg의 왜소한 체구의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권용목의 입에서는 장쾌한 열변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된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상여금 차등제가 없어지고 공해수당을 받게 된다는 기대를 가져도 좋습니다.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한국노동운동의 전환점으로 기록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현대엔진노조를 시작으로 현대미포 조선소에 노조가 생기고, 이어서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정공에 노동조합이 잇달아 결성됐다. 그리고 마침내 8월 8일 현대그룹노조 협의회가 결성됐다.

87년 8월 18일 4만여명이 넘는 현대노동자들이 중공업 운동장에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어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인정', '임금인상 즉각실시', '휴업철회'를 요구하며 남목 고개 마루를 넘어 공설운동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 앞에는 4500명의 중무장한 경찰들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날 폭력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손에 든 각목과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돌멩이를 노조대표들에게 반납했다. 그 노동자들을 지도한 사람은 바로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권용목 의장이었다. 그리고 정부에 노조인정을 약속 받게 된다. 현대그룹 노동운동의 살아있는 신화 권용목. 그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몸으로 쓴 장본인이었다.

노동자들의 열기도 뜨거웠지만 현대그룹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89년 1월 현대중공업 노조의 장기파업 128일을 넘기고 있었다. 1월 8일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현대중전기 노조대의원 대회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새벽 2시 30분쯤 복면을 쓴 사람들이 나타나 각목, 야구방망이, 곡괭이 자루 등으로 대의원들을 무차별 폭행했다. 그리고 새벽 5시쯤에는 권용목씨 등 4명이 잠을 자고 있는 현대 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 사무실에 야구방망이와 각목을 든 20여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누가 권용목이냐'고 물어가며 구타했다.

당시 현대그룹노조협의회는 "이 사건은 현대그룹의 조직적 음모에 의한 테러"라며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회장의 연루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당시 보수당인 신민주공화당조차 "경영주가 정당한 노동운동을 탄압한 표본적 사례"라며 "이 사건의 배후를 비롯, 전모를 철저히 파헤쳐 관련자를 형사처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정몽준 회장은 사건이 발생하기 이틀 전인 1월 6일 항공편으로 울산에 내려와 중역비상대책회의를 열고 조업정상화를 촉구하는 등 3박4일간 울산에 머무르다 1월 9일 서울로 올라간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테러사건에는 정몽준 회장이 지원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조기축구회 전·현직 간부들가 연루돼 있음이 확인됐다. 깡패들에게 구타를 당한 권용목 의장은 당시 팔에 깁스를 하고 집회에 참석해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회장은 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2000년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권용목씨가 3년 만에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다.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물러난 직후인 97년 그는 환기통 청소업을 했지만 IMF 여파로 망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몇 개월을 떠돌다가 다시 사업을 한다고 캄보디아에 나가 있다가 그 사업도 여의치 않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게 1999년 9월 무렵이었다.

당시 국민회의는 신당 창당 준비와 함께 2000년 4.13 총선을 대비해 각계각층의 인사들 영입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여권의 신당 추진위원으로 영입됐다. 지금 민주당 노무현 후보 비서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계륜 의원이 그를 신당으로 끌고 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새천년민주당은 '동진 정책'의 일환으로 권용목씨를 울산 중구 조직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생각과 권용목씨의 '희망사항'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민주당은 울산 동구 출마를 권유했지만 권씨의 생각은 달랐다. 권용목씨는 결국 지구당 창당대회를 연기하고 조직책을 반납했다. 그는 출마를 꺼리는 이유에 대해 “민주노동당 후보가 지역구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울산인데 내가 출마하면 과거 노동계 동지들과 경쟁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권용목씨는 민주노총이 만든 민주노동당에 가지 않고 신당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엄청나게 세상이 변하고 있다. 지금 한 명 당선시키고, 8년 뒤에 10명 당선시켜서 뭘 할 수 있겠냐. 민주당 김말룡 의원을 보면 노동자를 위해서 헌신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구조가 그랬기 때문이다. 집권여당에 들어가서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권용목씨는 민주당이 전국구를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녹치 않았다. 민주당 비례대표 몫으로 노동계의 자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에게 자리가 돌아가는 정도였다.

비례대표를 약속 받았다고 생각하고 민주당에 입당한 배석범 민주노총 전 부위원장과 권용목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은 결국 비례대표를 배정 받지 못했다.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을 것"이라는 노동계의 비아냥거림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비례대표가 좌절된 이후 권용목씨는 또 떠도는 신세가 됐다.

2002년

▲ 국민통합21 노동특위 발대식에 참석한 권용목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모습을 감췄던 권용목씨는 2002년 2월 3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 나타났다. 민주당에서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였던 이인제 후보는 이날 386출신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 지역·노동 운동 인사, 청년·경제인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시대개혁연대' 창립총회를 진행했다.

권용목씨는 새시대개혁연대 대표로 행사에 참석했다. 권용목씨는 인사말을 통해 "우리의 지도자 이인제 고문님과 함께 모든 것을 내바쳐 함께 할 것"이라며 "이제는 길거리의 투쟁이 아니라 내가 서있는 분야에서 참여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2002년 11월 12일 국민통합21 노동특위 발대식장에 그는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행사장에는 이런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국민가치 실현을 위한 새로운 노동문화, 국민통합21 노동특위가 열어갑니다."

권용목씨는 이 자리에서 만난 <오마이뉴스>기자에게 "2년간 러시아에 있었다"며 "1700ha 땅에 약용식물을 재배하려고 한다"고 자신의 근황을 밝혔다. 권용목씨는 국민통합21 노동특위의 정책위원을 맡았다. 그는 단상 위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한 시대을 접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옛날에 '자본론'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100여 년 전에 씌여진 책이었음에도 책 속에 묘사된 방직공 노동자의 모습은 당시와 다를 바 없었다. 산업시대의 요구는 값싼 제품을 많이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지식기반사회로 변했다. 생산력의 확대는 새로운 가치를 요구하고 있다. 좋은 물건, 편리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대립과 갈등으로 만들 수는 없다. 자발적 참여와 창조적 생각이 있어야 한다. 또한 동북아 경제변화에도 대처해야 한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모습을 보라. 우리도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남북으로 동서로 노사로 대립하고 있다. 통합은 시대적 소명이다. 그것을 누가 해줄 수 있나? 바로 그 얘기를 하려고 한다. 남북과 동서, 노사의 막힌 곳을 뚫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번 대선은 향후 5년을 좌우한다. 국민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 정몽준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자."

▲ 권용목씨는 과거 자신과 '적'이었던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지지자'가 됐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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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협조로 점철된 대우차노조 06임단투(노정협)

노사협조로 점철된 대우차노조 06임단투


2001년 2월 19일은 175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노동자들이 일시에 정리해고 되면서 부평역 앞을 치열한 가두전투의 상징으로 만든 시발점이었다. 같은 해 4월 10일은 백주대낮에 웃통 벗은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공권력의 방패와 곤봉에 사정없이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며 피튀기는 살육의 날이었다.

2002년부터 단계적으로 복직되기 시작한 정리해고자들은 5년이 지난 올해 1600명이 복직되었다. 어찌됐든 ‘복직’이라고 언론에서는 ‘노사화합’의 성과라 호도하고, 집행부에서는 마치 그것이 그 동안의 자신들의 투쟁의 성과인냥 치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가?

GM자본은 부도위기에 처한 대우자동차를 분할인수하여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는 ‘인천대우’와 ‘GM대우’ 두 개의 법인이 공존하고 있었다. 법인이 통합될 때까지 노조는 식물노조 상태로 있을 것을 전제로 하는 ‘조건부 법인통합’으로 인해 GM자본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이후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삶도 말이 아니었다. 임금은 동결되고 주간1교대로 그나마 동결된 임금마저 야간과 특근수당이 배제된 반값으로 하락했다. 각종 수당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터무니없이 낮아졌으며 복지후생은 그림의 떡이었다.

게다가 더 서러운 것은 마치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분할하듯, ‘인천대우’와 ‘GM대우’ 소속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이었다. 연구소, 수출과 출고 관련 사업부와 정비, 그리고 창원과 군산 등은 ‘GM대우’로 소속되고 그 외 부평공장의 조립, 도장, 차체, 프레스만이 ‘인천대우’로 소속되어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작업복도 달랐고 대우도 달랐다. 당시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선봉에 서서 전투적인 가두투쟁을 벌이고 끝까지 공장점거를 사수하며 자본과 정권의 폭력에 맞선 경험이 있는 핵심 노동자들을 따로 관리하며 현장탄압과 감시에 익숙하게 만들고 숨죽이고 사는데 익숙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두 개의 법인으로 족쇄를 채우고, 인수의 전제조건이었던 무쟁의 선언으로 발목 잡히고, 현장탄압과 감시에 숨통이 막히고, 결국 눈과 귀까지 닫고 살아오면서 현장조직력은 박살났고, 매일같이 회사가 어렵다는 앓는 소리에 또 다시 해고될지 모르는 두려움만 쌓여갔다.

그러나 올해 두개의 법인이 ‘GM대우’ 하나의 법인으로 통합되었다. 무쟁의라는 식물노조는 다시 투쟁의 함성을 지를 수 있게 되었고, 마침 임금협상 뿐 아니라 단체협상도 걸려있는 올해, 드디어 뭔가 좀 될 줄 알았다. 더군다나 작년부터 적자에 허덕인다던 GM대우가 흑자로 선회했다. 그런데 결과는 영 딴판이다.

휴가직전 타결이라는 꼼수에 조합원들이 던진 것은, 분노! 그리고 부결!!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어…


지난 5월 19일 상견례를 시작으로 대우자동차의 임/단투가 시작되었다. 핵심요구안은 임금관련 120,350원(기본급대비 8.55%)인상과 고용안정 관련 ‘협의가 아닌 합의’로 할 것 등을 포함하여 인수과정에서 강탈당한 단체협약 원상회복 등이다. 또한 26개의 별도요구안에는 주간연속 2교대제, 비정규직 관련, 창원지부 부당징계 해고자, 각종 수당 그리고 1600명에 달하는 정리해고 복직자 관련 4대요구안 등이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성과없이 교섭횟수는 늘어났고 현장은 출투와 철야농성 외에 2달 반이라는 시간동안 ‘전간부 출근투쟁과 12일 4시간 부분파업 및 잔업거부, 14일 4시간 부분파업, 18~19일 2시간, 4시간 부분파업 및 파상파업’이 중앙쟁대위 지침인데 그마저도 부분파업은 다 진행되지 못했다.

이윽고 7월 13일 16차 교섭에서 사측이 제시안 ‘전향적인 안’을 던졌다는 얘기와 함께 여름 휴가를 앞두고 24일 잠정합의안이 발표되었다.

잠정합의안 내용은 임금은 호봉승급분 제하면 56,000원 인상(기본급 대비 3.98%인상) 그리고 단협개정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던 고용관련 핵심 조항인 12조) 회사의 합병, 양도, 이전 등 관련하여 노조에 90일 전에 통보하는 것은 명시했으나 협의를 합의를 따내지 못했고, 13조) 외주 및 용역전환, 사내하청, 외주화, 모듈화 등 관련사항도 협의를 합의로 따내지 못했다. 그 외 1600여명의 정리해고자의 4대 요구안은 아무런 진척도 없었으며 작년에 특별노사협의회에서 어느 정도 합의봤던 ‘해고기간의 근속 인정’만이 명시되었을 뿐이다. 또한 비정규직 관련 요구안은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

이런 걸레같은 안을 받아 들고 와서 잠정합의안을 확대간부회의를 통한다는 규약도 어긴채 이성재 집행부는 교섭대표 만장일치로 도출된 안이라며 현장에 선전하며 가결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집행부 현장조직인 ‘현장에서 희망을’을 제외하고는 전 현장조직이 조합원들에게 부결을 호소하는 선전선동을 시작했다. 정원투와 민노회는 독자중식집회와 노숙투쟁을 전개하며 투쟁을 전개했다.

노조 집행부는 잠정합의안이 도출되고 이틀 뒤인 26일 찬반투표, 28일 특근을 잡아놓았을 만큼 가결을 확신했지만 반대 52.2%로 잠정합의안은 보기좋게 부결됐다. 집행부가 바보라고 믿었던 조합원들에게 뒤통수에 짱돌을 맞은 셈이었다.

휴가로 열흘이라는 시간을 날리고 창원공장이 공사로 일주일을 더 쉬면서 아무런 투쟁 지침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집행부는 투쟁의지는 커녕 재교섭 의지도 없었다. 2주일이 지나서야 온 사측의 ‘일주일만 더 시간을 달라’는 요구에 집행부는 ‘그러자’며 또 일주일을 시간끌었다. 근 1달이 다되어가는 시간 동안 내려진 투쟁지침이라고는 전간부 주야 출투 및 철야농성, 그리고 한술 더 떠 교섭 재개되는 24일부터 이전 투쟁수위로 환원한다.(중앙쟁대위 지침 6호)는 내용이 전부였다.

그렇게 교섭에만 목매달다가 2차 잠정합의안이 8월 25일 도출됐다. 투쟁없는 잠정합의안이 어떤 성과가 있겠는가. 교섭위원들끼리 수정한 재교섭 9대 요구안에는 해고자 문제, 비정규직 문제, 고용 문제 등 돈 몇 푼보다 진정 쟁취되어야할 계급적 요구는 뒤로 한 채, 임금과 각종 수당 관련한 요구로만 한정하여 52.2%에서 단 가결에 필요한 단 4%만을 위한 재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결과 도출된 2차 잠정합의안이 1차 잠정합의안과 다른 점이라면 고작 호봉승급분을 제외하고 5,000원 더 인상된 임금인상액이 전부다.

현장에서는 “2차 부결투쟁을 들어가야 한다, 이성재를 끌어내려야 한다, 우릴 갖고 놀아도 이렇게 갖고 놀수는 없다…”(정원투 게시판 중) 등 분노로 들끓고 있다.

8월 25일 제2차 잠정합의안이 도출되었고 28~29일 찬반투표에서 60.9%로 겨우 가결되었다.

노동자보다 사용자를 더 걱정하는 GM대우노조 이성재 집행부!


5년이라는 세월동안 열악한 임금과 고용불안, 억눌린 현장 속에서 살아온 조합원들에게 올해 투쟁은 분명 큰 의미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합법적인 쟁의권 확보와 74.2%라는 조합원들의 압도적인 찬반투표 가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되는 투쟁양상은 전간부 출투와 철야농성이 전부였다. 토고 전 관람으로 대체된 임단투 전진대회를 시작으로 4달이 다 되어가는 교섭 기간 동안 파업지침은 전면총파업도 아닌 3~4번에 걸친 ‘4시간 부분파업과 파상파업’이 전부였다. 파업투쟁이 말 그대로 투쟁이 아니라 사용자들을 위한 ‘솜방망이’가 된 것이다.

중앙쟁대위 지침 3호 - 06임단투가 끝날 때까지 파상파업권은 위원장에게 위임한다.
중앙쟁대위 지침 5호 - 21일 교섭에서 수용할 수 없는 안이 나올 시 총파업을 포함한 일체의 투쟁에 대해 위원장에게 위임한다.


전 조합원이 참여하여 파업투쟁을 진행하는 노동자계급의 일반적 상식이 대우자동차노동조합에게는 파상파업이라는 비상식적인 전술로 탈바꿈되었다. 파상파업은 말 그래도 어느 현장은 파업에 들어가고 어느 현장은 파업에 들어가지 않는 등 따로 놀게 된다. 현장 대의원들의 현장 장악력에 따라 힘 되는 곳은 돌입하고 부족한 곳은 안되고, 결국 집행부는 역으로 ‘파업지침을 때렸는데 왜 참여하지 않느냐’며 책임을 전가한다. 아예 신차출시를 위해 윈스톰을 생산하는 조립2라인은 파상파업에서도 제외했다. 그러면서 부평역 지하상가 번영회, 부평 재래시장 번영회 임원진들과 만나서 ‘대우자동차 노조는 투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경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며 신차홍보와 판매에 협조를 구하고 돌아다녔다. 이게 노조 지도부의 모습인가, GM대우 경영진의 모습인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해도 한참을 못하고 있다.

참여율 저조한 출투와 철야농성으로 일관하고 신차출시는 해야 되니까 그곳은 파업 안하고, 그 외에는 대의원들이 알아서 파상파업 진행하라고 하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사측에 압박이되는 투쟁으로 발화될 수 있겠는가? 이 지침이 정녕 노동자들을 위한 것인가, GM자본을 위한 것인가? 가히 조합원들을 농락하는 수준이 환상적이다. 그리고는 투쟁을 조직하지 않고는 참여율 저조하다고 현장활동가들과 조합원들에게 ‘난 열심히 교섭할 때 너희들은 뭐했냐’며 생떼를 피우는 모습이 여느 노사협조주의자들과 판박이다.

교섭이 투쟁인가? 노조 지도부는 교섭하는 사람, 조합원은 지침만 내리면 따라 투쟁하는 바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난 5년간 무너진 현장권력에 기생해 GM자본에 구걸하는 어용, 노사협조주의자 이성재! 세분화된 근태코드와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팀제 및 현장통제에 신음하는 조합원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파업투쟁에 동참할 수 있도록 제대로 싸우고 조직하고 만들지는 않고 입으로만 투쟁하고 있는 노사협조주의자, 이성재!

그러면서 제대로 투쟁하라고 비판하고 선전하면서 압박하는 현장활동에 대해서는 위원장이라는 권위를 이용해 통제하고 공격한다. 자본에 대한 공격보다 훨씬 공격적이다.

06임단협 요구안 이외의 문구를 담고, 현장조직의 명칭이 들어가있는 현수막을 출근투쟁에 내거는 것은 … 정원투에서 조끼 이외의 단체복을 착용하고 정원투 회의를 통해 철야 농성 텐트를 설치한다는 결정을 하는 것은 … 조합원들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분열시키며 … 집단이기적인 발상이고 중앙쟁대위 행동지침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입니다.
(각 현장조직과 정원투에 보낸 중앙쟁대위 행동지침 준수 권고문(7.14) 중)


이성재위원장은 정리해고 복직자들의 조직인 정원투와 사사건건 마찰하고 대립하였다. 정원투가 기존의 현장조직을 대신하여 집행부의 협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정원투는 이성재집행부의 생각과 다르게 사조직이 아니다. 정원투는 대우차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한 살아 있는 역사이다. 정원투는 더 이상 대우자동차에 더 나아가 이 사회 전체에 정리해고가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대우자동차 전체 조합원의 투쟁의 구심이다. 이러한 정원투에 대한 집행부의 노골적인 도발은 집행부가 얼마나 현장으로부터 멀리 있고, 자본의 친위조직인지를 잘보여준다.

현장활동가들의 한계와 과제

이성재의 노사협조주의를 넘어선 노골적인 어용화는 사실 예견된 일이었다. 작년부터 시작됐던 GM대우 창원비정규직지회의 투쟁에 이성재 집행부는 연대투쟁을 커녕 이들의 투쟁을 공장을 볼모로 떼쓰는 막무가내식 투쟁으로 왜곡, 폄하하며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 것도 지원해줄 수 없다고 협박하는 한편, 투쟁의 주체들을 제외한 채 독단적으로 합의해 투쟁을 마무리시키키도 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 마치 예전의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을 자신이 다 한 것인 마냥 선전하면서 힘차게 연대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한 것이 무엇인가? 성명서 발표 외에 아무 것도 없다.

현재 상황 임단투 2차 투표가 마무리되었다. 28~29일에 걸친 찬반투표에서 60.9%의 찬성률로 겨우 가결되었다.

그러나 제 현장조직과 활동가들은 2차 투표에서는 가결될 것으로 생각하면서 임단투 마무리 이전에 사실상 20대 임원선거를 위한 체제로 전환했다. 게다가 대우차의 대표적인 민주파 현장조직이라고 하는 민노회 내부의 활동가들은 연대연합 선거로 선거주의에 매몰되었다. 이성재 집행부를 반대한다는 것은 이성재 집행부가 아닌 여러 현장조직 간의 무원칙한 연합이 아니라 이성재 집행부가 보인 노사협조주의에 대한 분명한 반대와 비정규직 투쟁을 탄압한 반노동자 집행부에 대한 전선을 분명히 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민노회는 임단투 전이나 임단투 기간이나 노사협조주의 집행부에 대한 제대로 된 반대전선을 치지 못했다. 오직 정원투 내에서 민노회의 개별회원들이 중심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또한 임단투 기간 중 가장 부각됐던 정원투의 4대 요구안인 “정리해고 복직자 해고기간 근속수당 지급! 퇴직금 재정산! 국민연금, 삼신생명 해고기간 회사 부담금 개인별 지급! 투쟁중 부상자는 산재에 준하는 조치 및 보상!”은 조합원들 전체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정원투 내부의 요구에 그친 한계가 있다. 제대로 된 노조라면 투쟁의 선봉에서 싸우다가 해고되고 압류되고 부상당한 모든 동지들의 원상회복을 쟁취해야 함이 당연 옳다. 그러나 1600명이라는 많은 노동자가 복직된 지금 그러한 요구를 어용집행부에게 강제시켜내고 복직자를 포함한 모든 조합원들이 함께 원상회복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06임단투 투쟁과 함께 맞물리는 정원투의 원칙적인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를 중점에 두고 가지 못한 한계도 있다. 이는 물론 투쟁해야하는 대우자동차 비정규직 주체의 문제도 있다. 그러나 지난 GM대우창원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의 투쟁에 창원까지 내려와 함께 연대투쟁했던 만큼, 이번 임단투 속에서도 비정규직의 문제는 이미 전 자본에 대한 전투적인 계급적 투쟁의 문제임을, 대우자동차에도 1000명이나 되는 비정규직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잠정합의안에는 그 어떤 비정규직 관련한 합의사항도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비판하며 관료적인 산별노조를 타격하는 근거로 삼았어야 했다.

이제 임단협투쟁이 마무리되고 노조 20대 임원선거가 남아있다. 임원선거에 임하는 우리 선진활동가들은 분명히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여 ‘선거를 위한 선거’가 아니라 ‘투쟁하기 위한 선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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