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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상황 정리

<시>벽돌과 황금

벽돌과 황금

벽돌이 벽돌일 때는
노동자의 일당, 일용할 양식이 된다

그러나 그 벽돌이 집이 되어
부동산 문서 속에 들어가면
황금 찬란한 억대 궁전이 된다

놀부나라 강남은
여기서 얼마나 먼지
요새는 제비도 찾아가지 않는다

노동자의 손을 떠난 벽돌이
누우런 황금으로 변한 날
벽돌은 마술의 꿈을 꾼다
나는 저 밤하늘을 나는
한 마리 아름다운 궁전이 되고 싶다고!

그날밤 강남의 놀부는
벽돌로 쌓은 그 무덤 속에 누워서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꿈꾸고 있다

(문병란 / 1935년 전남 화순 출생. 40여년 문단 활동. 시집으로 『죽순 밭에서』, 『땅의 연가』, 『무등산』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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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지지 선언' 권용목의 굴절된 삶

'정몽준 지지 선언' 권용목의 굴절된 삶
[심층추적] 노동운동가가 재벌지지자로 변모하기까지
텍스트만보기   박수원(pswcomm) 기자   
1987년

▲ 29세의 청년 권용목은 한국노동운동의 살아있는 신화였다.
현대엔진에는 80년대 초반부터 고적답사반이라는 소모임이 있었다. 조립공장을 중심으로 대여섯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울산에서 가까운 경주 등 인근의 고적들을 답사하면서 노동의 찌든 때를 벗기고 단합을 도모하는 일종의 취미서클이었다. 그 고적답사반의 중심에는 권용목이 있었다.

87년 7월 5일 회사의 감시를 피해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울산 옥교동에 있는 한 디스코텍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100여명의 노동자들이 디스코텍에 모이자 홀 중앙에 '경축 현대엔진(주) 노동조합 결성대회'라는 글씨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대엔진 노조위원장에는 만29세의 청년 권용목씨가 선출됐다.

노조 결성대회를 무사히 마친 권용목씨는 점심시간이 되자 연단에 올라가 노동자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서 보고대회를 진행했다. 키165cm, 몸무게 57kg의 왜소한 체구의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권용목의 입에서는 장쾌한 열변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된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상여금 차등제가 없어지고 공해수당을 받게 된다는 기대를 가져도 좋습니다.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한국노동운동의 전환점으로 기록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현대엔진노조를 시작으로 현대미포 조선소에 노조가 생기고, 이어서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정공에 노동조합이 잇달아 결성됐다. 그리고 마침내 8월 8일 현대그룹노조 협의회가 결성됐다.

87년 8월 18일 4만여명이 넘는 현대노동자들이 중공업 운동장에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어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인정', '임금인상 즉각실시', '휴업철회'를 요구하며 남목 고개 마루를 넘어 공설운동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 앞에는 4500명의 중무장한 경찰들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날 폭력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손에 든 각목과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돌멩이를 노조대표들에게 반납했다. 그 노동자들을 지도한 사람은 바로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권용목 의장이었다. 그리고 정부에 노조인정을 약속 받게 된다. 현대그룹 노동운동의 살아있는 신화 권용목. 그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몸으로 쓴 장본인이었다.

노동자들의 열기도 뜨거웠지만 현대그룹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89년 1월 현대중공업 노조의 장기파업 128일을 넘기고 있었다. 1월 8일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현대중전기 노조대의원 대회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새벽 2시 30분쯤 복면을 쓴 사람들이 나타나 각목, 야구방망이, 곡괭이 자루 등으로 대의원들을 무차별 폭행했다. 그리고 새벽 5시쯤에는 권용목씨 등 4명이 잠을 자고 있는 현대 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 사무실에 야구방망이와 각목을 든 20여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누가 권용목이냐'고 물어가며 구타했다.

당시 현대그룹노조협의회는 "이 사건은 현대그룹의 조직적 음모에 의한 테러"라며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회장의 연루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당시 보수당인 신민주공화당조차 "경영주가 정당한 노동운동을 탄압한 표본적 사례"라며 "이 사건의 배후를 비롯, 전모를 철저히 파헤쳐 관련자를 형사처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정몽준 회장은 사건이 발생하기 이틀 전인 1월 6일 항공편으로 울산에 내려와 중역비상대책회의를 열고 조업정상화를 촉구하는 등 3박4일간 울산에 머무르다 1월 9일 서울로 올라간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테러사건에는 정몽준 회장이 지원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조기축구회 전·현직 간부들가 연루돼 있음이 확인됐다. 깡패들에게 구타를 당한 권용목 의장은 당시 팔에 깁스를 하고 집회에 참석해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회장은 의혹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2000년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권용목씨가 3년 만에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다.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물러난 직후인 97년 그는 환기통 청소업을 했지만 IMF 여파로 망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몇 개월을 떠돌다가 다시 사업을 한다고 캄보디아에 나가 있다가 그 사업도 여의치 않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게 1999년 9월 무렵이었다.

당시 국민회의는 신당 창당 준비와 함께 2000년 4.13 총선을 대비해 각계각층의 인사들 영입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여권의 신당 추진위원으로 영입됐다. 지금 민주당 노무현 후보 비서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계륜 의원이 그를 신당으로 끌고 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새천년민주당은 '동진 정책'의 일환으로 권용목씨를 울산 중구 조직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생각과 권용목씨의 '희망사항'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민주당은 울산 동구 출마를 권유했지만 권씨의 생각은 달랐다. 권용목씨는 결국 지구당 창당대회를 연기하고 조직책을 반납했다. 그는 출마를 꺼리는 이유에 대해 “민주노동당 후보가 지역구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울산인데 내가 출마하면 과거 노동계 동지들과 경쟁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권용목씨는 민주노총이 만든 민주노동당에 가지 않고 신당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엄청나게 세상이 변하고 있다. 지금 한 명 당선시키고, 8년 뒤에 10명 당선시켜서 뭘 할 수 있겠냐. 민주당 김말룡 의원을 보면 노동자를 위해서 헌신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구조가 그랬기 때문이다. 집권여당에 들어가서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권용목씨는 민주당이 전국구를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녹치 않았다. 민주당 비례대표 몫으로 노동계의 자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에게 자리가 돌아가는 정도였다.

비례대표를 약속 받았다고 생각하고 민주당에 입당한 배석범 민주노총 전 부위원장과 권용목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은 결국 비례대표를 배정 받지 못했다.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을 것"이라는 노동계의 비아냥거림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비례대표가 좌절된 이후 권용목씨는 또 떠도는 신세가 됐다.

2002년

▲ 국민통합21 노동특위 발대식에 참석한 권용목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모습을 감췄던 권용목씨는 2002년 2월 3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 나타났다. 민주당에서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였던 이인제 후보는 이날 386출신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 지역·노동 운동 인사, 청년·경제인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시대개혁연대' 창립총회를 진행했다.

권용목씨는 새시대개혁연대 대표로 행사에 참석했다. 권용목씨는 인사말을 통해 "우리의 지도자 이인제 고문님과 함께 모든 것을 내바쳐 함께 할 것"이라며 "이제는 길거리의 투쟁이 아니라 내가 서있는 분야에서 참여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2002년 11월 12일 국민통합21 노동특위 발대식장에 그는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행사장에는 이런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국민가치 실현을 위한 새로운 노동문화, 국민통합21 노동특위가 열어갑니다."

권용목씨는 이 자리에서 만난 <오마이뉴스>기자에게 "2년간 러시아에 있었다"며 "1700ha 땅에 약용식물을 재배하려고 한다"고 자신의 근황을 밝혔다. 권용목씨는 국민통합21 노동특위의 정책위원을 맡았다. 그는 단상 위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한 시대을 접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옛날에 '자본론'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100여 년 전에 씌여진 책이었음에도 책 속에 묘사된 방직공 노동자의 모습은 당시와 다를 바 없었다. 산업시대의 요구는 값싼 제품을 많이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지식기반사회로 변했다. 생산력의 확대는 새로운 가치를 요구하고 있다. 좋은 물건, 편리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대립과 갈등으로 만들 수는 없다. 자발적 참여와 창조적 생각이 있어야 한다. 또한 동북아 경제변화에도 대처해야 한다.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모습을 보라. 우리도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남북으로 동서로 노사로 대립하고 있다. 통합은 시대적 소명이다. 그것을 누가 해줄 수 있나? 바로 그 얘기를 하려고 한다. 남북과 동서, 노사의 막힌 곳을 뚫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번 대선은 향후 5년을 좌우한다. 국민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 정몽준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자."

▲ 권용목씨는 과거 자신과 '적'이었던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지지자'가 됐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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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협조로 점철된 대우차노조 06임단투(노정협)

노사협조로 점철된 대우차노조 06임단투


2001년 2월 19일은 175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노동자들이 일시에 정리해고 되면서 부평역 앞을 치열한 가두전투의 상징으로 만든 시발점이었다. 같은 해 4월 10일은 백주대낮에 웃통 벗은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공권력의 방패와 곤봉에 사정없이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며 피튀기는 살육의 날이었다.

2002년부터 단계적으로 복직되기 시작한 정리해고자들은 5년이 지난 올해 1600명이 복직되었다. 어찌됐든 ‘복직’이라고 언론에서는 ‘노사화합’의 성과라 호도하고, 집행부에서는 마치 그것이 그 동안의 자신들의 투쟁의 성과인냥 치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가?

GM자본은 부도위기에 처한 대우자동차를 분할인수하여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는 ‘인천대우’와 ‘GM대우’ 두 개의 법인이 공존하고 있었다. 법인이 통합될 때까지 노조는 식물노조 상태로 있을 것을 전제로 하는 ‘조건부 법인통합’으로 인해 GM자본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이후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삶도 말이 아니었다. 임금은 동결되고 주간1교대로 그나마 동결된 임금마저 야간과 특근수당이 배제된 반값으로 하락했다. 각종 수당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터무니없이 낮아졌으며 복지후생은 그림의 떡이었다.

게다가 더 서러운 것은 마치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분할하듯, ‘인천대우’와 ‘GM대우’ 소속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이었다. 연구소, 수출과 출고 관련 사업부와 정비, 그리고 창원과 군산 등은 ‘GM대우’로 소속되고 그 외 부평공장의 조립, 도장, 차체, 프레스만이 ‘인천대우’로 소속되어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작업복도 달랐고 대우도 달랐다. 당시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선봉에 서서 전투적인 가두투쟁을 벌이고 끝까지 공장점거를 사수하며 자본과 정권의 폭력에 맞선 경험이 있는 핵심 노동자들을 따로 관리하며 현장탄압과 감시에 익숙하게 만들고 숨죽이고 사는데 익숙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두 개의 법인으로 족쇄를 채우고, 인수의 전제조건이었던 무쟁의 선언으로 발목 잡히고, 현장탄압과 감시에 숨통이 막히고, 결국 눈과 귀까지 닫고 살아오면서 현장조직력은 박살났고, 매일같이 회사가 어렵다는 앓는 소리에 또 다시 해고될지 모르는 두려움만 쌓여갔다.

그러나 올해 두개의 법인이 ‘GM대우’ 하나의 법인으로 통합되었다. 무쟁의라는 식물노조는 다시 투쟁의 함성을 지를 수 있게 되었고, 마침 임금협상 뿐 아니라 단체협상도 걸려있는 올해, 드디어 뭔가 좀 될 줄 알았다. 더군다나 작년부터 적자에 허덕인다던 GM대우가 흑자로 선회했다. 그런데 결과는 영 딴판이다.

휴가직전 타결이라는 꼼수에 조합원들이 던진 것은, 분노! 그리고 부결!!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어…


지난 5월 19일 상견례를 시작으로 대우자동차의 임/단투가 시작되었다. 핵심요구안은 임금관련 120,350원(기본급대비 8.55%)인상과 고용안정 관련 ‘협의가 아닌 합의’로 할 것 등을 포함하여 인수과정에서 강탈당한 단체협약 원상회복 등이다. 또한 26개의 별도요구안에는 주간연속 2교대제, 비정규직 관련, 창원지부 부당징계 해고자, 각종 수당 그리고 1600명에 달하는 정리해고 복직자 관련 4대요구안 등이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성과없이 교섭횟수는 늘어났고 현장은 출투와 철야농성 외에 2달 반이라는 시간동안 ‘전간부 출근투쟁과 12일 4시간 부분파업 및 잔업거부, 14일 4시간 부분파업, 18~19일 2시간, 4시간 부분파업 및 파상파업’이 중앙쟁대위 지침인데 그마저도 부분파업은 다 진행되지 못했다.

이윽고 7월 13일 16차 교섭에서 사측이 제시안 ‘전향적인 안’을 던졌다는 얘기와 함께 여름 휴가를 앞두고 24일 잠정합의안이 발표되었다.

잠정합의안 내용은 임금은 호봉승급분 제하면 56,000원 인상(기본급 대비 3.98%인상) 그리고 단협개정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던 고용관련 핵심 조항인 12조) 회사의 합병, 양도, 이전 등 관련하여 노조에 90일 전에 통보하는 것은 명시했으나 협의를 합의를 따내지 못했고, 13조) 외주 및 용역전환, 사내하청, 외주화, 모듈화 등 관련사항도 협의를 합의로 따내지 못했다. 그 외 1600여명의 정리해고자의 4대 요구안은 아무런 진척도 없었으며 작년에 특별노사협의회에서 어느 정도 합의봤던 ‘해고기간의 근속 인정’만이 명시되었을 뿐이다. 또한 비정규직 관련 요구안은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

이런 걸레같은 안을 받아 들고 와서 잠정합의안을 확대간부회의를 통한다는 규약도 어긴채 이성재 집행부는 교섭대표 만장일치로 도출된 안이라며 현장에 선전하며 가결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집행부 현장조직인 ‘현장에서 희망을’을 제외하고는 전 현장조직이 조합원들에게 부결을 호소하는 선전선동을 시작했다. 정원투와 민노회는 독자중식집회와 노숙투쟁을 전개하며 투쟁을 전개했다.

노조 집행부는 잠정합의안이 도출되고 이틀 뒤인 26일 찬반투표, 28일 특근을 잡아놓았을 만큼 가결을 확신했지만 반대 52.2%로 잠정합의안은 보기좋게 부결됐다. 집행부가 바보라고 믿었던 조합원들에게 뒤통수에 짱돌을 맞은 셈이었다.

휴가로 열흘이라는 시간을 날리고 창원공장이 공사로 일주일을 더 쉬면서 아무런 투쟁 지침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집행부는 투쟁의지는 커녕 재교섭 의지도 없었다. 2주일이 지나서야 온 사측의 ‘일주일만 더 시간을 달라’는 요구에 집행부는 ‘그러자’며 또 일주일을 시간끌었다. 근 1달이 다되어가는 시간 동안 내려진 투쟁지침이라고는 전간부 주야 출투 및 철야농성, 그리고 한술 더 떠 교섭 재개되는 24일부터 이전 투쟁수위로 환원한다.(중앙쟁대위 지침 6호)는 내용이 전부였다.

그렇게 교섭에만 목매달다가 2차 잠정합의안이 8월 25일 도출됐다. 투쟁없는 잠정합의안이 어떤 성과가 있겠는가. 교섭위원들끼리 수정한 재교섭 9대 요구안에는 해고자 문제, 비정규직 문제, 고용 문제 등 돈 몇 푼보다 진정 쟁취되어야할 계급적 요구는 뒤로 한 채, 임금과 각종 수당 관련한 요구로만 한정하여 52.2%에서 단 가결에 필요한 단 4%만을 위한 재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결과 도출된 2차 잠정합의안이 1차 잠정합의안과 다른 점이라면 고작 호봉승급분을 제외하고 5,000원 더 인상된 임금인상액이 전부다.

현장에서는 “2차 부결투쟁을 들어가야 한다, 이성재를 끌어내려야 한다, 우릴 갖고 놀아도 이렇게 갖고 놀수는 없다…”(정원투 게시판 중) 등 분노로 들끓고 있다.

8월 25일 제2차 잠정합의안이 도출되었고 28~29일 찬반투표에서 60.9%로 겨우 가결되었다.

노동자보다 사용자를 더 걱정하는 GM대우노조 이성재 집행부!


5년이라는 세월동안 열악한 임금과 고용불안, 억눌린 현장 속에서 살아온 조합원들에게 올해 투쟁은 분명 큰 의미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합법적인 쟁의권 확보와 74.2%라는 조합원들의 압도적인 찬반투표 가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되는 투쟁양상은 전간부 출투와 철야농성이 전부였다. 토고 전 관람으로 대체된 임단투 전진대회를 시작으로 4달이 다 되어가는 교섭 기간 동안 파업지침은 전면총파업도 아닌 3~4번에 걸친 ‘4시간 부분파업과 파상파업’이 전부였다. 파업투쟁이 말 그대로 투쟁이 아니라 사용자들을 위한 ‘솜방망이’가 된 것이다.

중앙쟁대위 지침 3호 - 06임단투가 끝날 때까지 파상파업권은 위원장에게 위임한다.
중앙쟁대위 지침 5호 - 21일 교섭에서 수용할 수 없는 안이 나올 시 총파업을 포함한 일체의 투쟁에 대해 위원장에게 위임한다.


전 조합원이 참여하여 파업투쟁을 진행하는 노동자계급의 일반적 상식이 대우자동차노동조합에게는 파상파업이라는 비상식적인 전술로 탈바꿈되었다. 파상파업은 말 그래도 어느 현장은 파업에 들어가고 어느 현장은 파업에 들어가지 않는 등 따로 놀게 된다. 현장 대의원들의 현장 장악력에 따라 힘 되는 곳은 돌입하고 부족한 곳은 안되고, 결국 집행부는 역으로 ‘파업지침을 때렸는데 왜 참여하지 않느냐’며 책임을 전가한다. 아예 신차출시를 위해 윈스톰을 생산하는 조립2라인은 파상파업에서도 제외했다. 그러면서 부평역 지하상가 번영회, 부평 재래시장 번영회 임원진들과 만나서 ‘대우자동차 노조는 투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경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며 신차홍보와 판매에 협조를 구하고 돌아다녔다. 이게 노조 지도부의 모습인가, GM대우 경영진의 모습인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해도 한참을 못하고 있다.

참여율 저조한 출투와 철야농성으로 일관하고 신차출시는 해야 되니까 그곳은 파업 안하고, 그 외에는 대의원들이 알아서 파상파업 진행하라고 하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사측에 압박이되는 투쟁으로 발화될 수 있겠는가? 이 지침이 정녕 노동자들을 위한 것인가, GM자본을 위한 것인가? 가히 조합원들을 농락하는 수준이 환상적이다. 그리고는 투쟁을 조직하지 않고는 참여율 저조하다고 현장활동가들과 조합원들에게 ‘난 열심히 교섭할 때 너희들은 뭐했냐’며 생떼를 피우는 모습이 여느 노사협조주의자들과 판박이다.

교섭이 투쟁인가? 노조 지도부는 교섭하는 사람, 조합원은 지침만 내리면 따라 투쟁하는 바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난 5년간 무너진 현장권력에 기생해 GM자본에 구걸하는 어용, 노사협조주의자 이성재! 세분화된 근태코드와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팀제 및 현장통제에 신음하는 조합원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파업투쟁에 동참할 수 있도록 제대로 싸우고 조직하고 만들지는 않고 입으로만 투쟁하고 있는 노사협조주의자, 이성재!

그러면서 제대로 투쟁하라고 비판하고 선전하면서 압박하는 현장활동에 대해서는 위원장이라는 권위를 이용해 통제하고 공격한다. 자본에 대한 공격보다 훨씬 공격적이다.

06임단협 요구안 이외의 문구를 담고, 현장조직의 명칭이 들어가있는 현수막을 출근투쟁에 내거는 것은 … 정원투에서 조끼 이외의 단체복을 착용하고 정원투 회의를 통해 철야 농성 텐트를 설치한다는 결정을 하는 것은 … 조합원들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분열시키며 … 집단이기적인 발상이고 중앙쟁대위 행동지침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입니다.
(각 현장조직과 정원투에 보낸 중앙쟁대위 행동지침 준수 권고문(7.14) 중)


이성재위원장은 정리해고 복직자들의 조직인 정원투와 사사건건 마찰하고 대립하였다. 정원투가 기존의 현장조직을 대신하여 집행부의 협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정원투는 이성재집행부의 생각과 다르게 사조직이 아니다. 정원투는 대우차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한 살아 있는 역사이다. 정원투는 더 이상 대우자동차에 더 나아가 이 사회 전체에 정리해고가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대우자동차 전체 조합원의 투쟁의 구심이다. 이러한 정원투에 대한 집행부의 노골적인 도발은 집행부가 얼마나 현장으로부터 멀리 있고, 자본의 친위조직인지를 잘보여준다.

현장활동가들의 한계와 과제

이성재의 노사협조주의를 넘어선 노골적인 어용화는 사실 예견된 일이었다. 작년부터 시작됐던 GM대우 창원비정규직지회의 투쟁에 이성재 집행부는 연대투쟁을 커녕 이들의 투쟁을 공장을 볼모로 떼쓰는 막무가내식 투쟁으로 왜곡, 폄하하며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 것도 지원해줄 수 없다고 협박하는 한편, 투쟁의 주체들을 제외한 채 독단적으로 합의해 투쟁을 마무리시키키도 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 마치 예전의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을 자신이 다 한 것인 마냥 선전하면서 힘차게 연대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한 것이 무엇인가? 성명서 발표 외에 아무 것도 없다.

현재 상황 임단투 2차 투표가 마무리되었다. 28~29일에 걸친 찬반투표에서 60.9%의 찬성률로 겨우 가결되었다.

그러나 제 현장조직과 활동가들은 2차 투표에서는 가결될 것으로 생각하면서 임단투 마무리 이전에 사실상 20대 임원선거를 위한 체제로 전환했다. 게다가 대우차의 대표적인 민주파 현장조직이라고 하는 민노회 내부의 활동가들은 연대연합 선거로 선거주의에 매몰되었다. 이성재 집행부를 반대한다는 것은 이성재 집행부가 아닌 여러 현장조직 간의 무원칙한 연합이 아니라 이성재 집행부가 보인 노사협조주의에 대한 분명한 반대와 비정규직 투쟁을 탄압한 반노동자 집행부에 대한 전선을 분명히 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민노회는 임단투 전이나 임단투 기간이나 노사협조주의 집행부에 대한 제대로 된 반대전선을 치지 못했다. 오직 정원투 내에서 민노회의 개별회원들이 중심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또한 임단투 기간 중 가장 부각됐던 정원투의 4대 요구안인 “정리해고 복직자 해고기간 근속수당 지급! 퇴직금 재정산! 국민연금, 삼신생명 해고기간 회사 부담금 개인별 지급! 투쟁중 부상자는 산재에 준하는 조치 및 보상!”은 조합원들 전체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정원투 내부의 요구에 그친 한계가 있다. 제대로 된 노조라면 투쟁의 선봉에서 싸우다가 해고되고 압류되고 부상당한 모든 동지들의 원상회복을 쟁취해야 함이 당연 옳다. 그러나 1600명이라는 많은 노동자가 복직된 지금 그러한 요구를 어용집행부에게 강제시켜내고 복직자를 포함한 모든 조합원들이 함께 원상회복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06임단투 투쟁과 함께 맞물리는 정원투의 원칙적인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를 중점에 두고 가지 못한 한계도 있다. 이는 물론 투쟁해야하는 대우자동차 비정규직 주체의 문제도 있다. 그러나 지난 GM대우창원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의 투쟁에 창원까지 내려와 함께 연대투쟁했던 만큼, 이번 임단투 속에서도 비정규직의 문제는 이미 전 자본에 대한 전투적인 계급적 투쟁의 문제임을, 대우자동차에도 1000명이나 되는 비정규직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잠정합의안에는 그 어떤 비정규직 관련한 합의사항도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비판하며 관료적인 산별노조를 타격하는 근거로 삼았어야 했다.

이제 임단협투쟁이 마무리되고 노조 20대 임원선거가 남아있다. 임원선거에 임하는 우리 선진활동가들은 분명히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여 ‘선거를 위한 선거’가 아니라 ‘투쟁하기 위한 선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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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유전무죄 무전유죄&quot; 사실로 입증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실로 입증
기업인이나 정치인 횡령은 집행유예, 돈없고 빽없는 일반인 횡령은 징역형
고재만 기자, gojm0725@naver.com  
 
"돈이 없는 것은 더이상 죄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사실과 다른것 같다"

그동안 말로만 돌았던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사실로 입증돼 파장을 불러 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그동안 구설수에 오르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것을 처음으로 정확한 숫치와 근거를 바탕으로 한 조사 결과를 발표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노 의원은 16일(수) "기업체 대표이사와 배달원 횡령사건을 비교분석한 자료를 통해 기업체 대표들의 “횡령액은 717배나 많은데 실형을 사는 비율은 10.4%p나 더 낮다며, 이와 같은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 의원은 이 자료에서 “2002.1월~2005.8월 서울중앙지법의 횡령사건(형법 355조1항 업무상횡령 및 특정경제가중처벌법 3조1항 횡령) 판결문 461건을 정밀 분석한 결과, 배달원과 종업원 34명의 평균 횡령액은 636만원이고 실형을 산 사람은 15명(44.1%)에 이르는 반면, 기업체 대표이사급 83명의 평균 횡령액은 46억원에 달하는데도 실형을 산 사람은 28명(33.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노 의원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기업체 대표이사의 평균 횡령액이 배달원·종업원보다 717배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실형을 산 사람의 비율은 10.4%p나 더 낮은 셈이다.

노 의원은 또 “징역형을 선고받더라도, 기업체 전현직 대표이사들은 집행유예로 풀러나는 비율이 59.4%(69명 중 41명)에 이르러, 배달원·종업원의 37.5%(24명 중 9명)보다 21.9%p나 더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노 의원은 “비디오방에서 일하는 강씨는 21만원 및 카메라폰 1대(시가40만원 짜리를 중고업자에 1만원에 매도)를 생활비 및 유흥비로 소비한 죄로 징역 8개월에 처해졌고, 중국집 배달원 정씨는 음식대금 773,550원을 생활비로 소비한 죄로 징역 10개월에 처해 지는 등 무전유죄의 대표적 사례"라고 주장했다.

노 의원은 반면 “공적자금 수천억원이 투입된 현대전자산업(현 하이닉스반도체)으로부터 227억원을 횡령한 김영환 대표이사 및 146억원을 횡령한 김주용 대표이사는 기업의 관행, 故 정몽헌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 등의 이유로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고, 회사정리절차에 있던 한신공영을 인수해 340억원을 횡령한 최용선 대표이사는 실형전과(實刑前科)가 없고 범행을 자백했다는 등의 이유로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며 법원의 판결에 강한 불만을 나타 내기도 했다.

노 의원은 또 “크게 횡령한 사회고위층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소액을 횡령한 힘없는 서민들은 실형을 사는 사법현실 앞에서 서민들은 절망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밖에도 노의원은 “횡령죄를 범한 종업원·배달원 34명 중 사회봉사·보호관찰 처분을 받은 사람은 8명으로 23.5%에 이르는 반면, 기업체 전현직 대표이사는 83명 중 4.8%인 4명만 사회봉사·보호관찰 처분을 받아, 그 차이가 18.7%p에 이르렀다”고 밝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사실임이 입증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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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과 '실리' 조합원들의 선택은

'투쟁'과 '실리' 조합원들의 선택은
대우차노조 20대 임원선거 전망…3년간 누가 GM대우차의 미래를 보장할까?
 
대우차노조의 미래를 3년간 책임질 20대 대우차노조 위원장 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29일 치러지는 20대 임원선거에는 10여개 현장조직이 각각 연합해 모두 4팀이 출마,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으나 당락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20대 임원의 경우 산별전환 임기와 맞추기 위해 2년 임기를 3년2개월로 연장했기 때문에 지난 어느 선거보다 9,100여명의 조합원 표심이 신중해 질 수밖에 없다.

대우차는 1998년 이후 부도와 대규모 정리해고, 해외매각 등을 거친 뒤 지난해 인천대우차와 GM대우의 법인통합이 됐다. 따라서 차기 20대 집행부는 해외자본인 GM대우와 함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 안정적 성장과 함께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을 담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에 20대 임원선거에 출마한 4개 후보 모두 '고용안정'을 제1의 공약으로 제출했다. 공약과 관련해서는 크게 변별력을 지니지 않고 있다. 하지만 4팀 모두 위원장 후보자들이 역대 집행부에서 임원 또는 집행간부를 맡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당시 활동의 평가 역시도 조합원들의 주요한 판단근거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기호 1번 후보조는 현장조직 ‘현장희망’, ‘한길’이 연합해 출마했으며 이성재 위원장 후보는 현 위원장이다. 현장조직 ‘민주노동자회’, ‘자주노동자회’ 연합후보인 기호2번 김일한 위원장 후보 역시 17대 대우차 정리해고투쟁 당시 집행부 출신이다. 또 단일후보를 낸 기호 3번 ‘자주민주투쟁위원회’ 장순길 위원장 후보는 18대 집행부 당시 조직실장을 역임했으며 ‘전진하는노동자회’, ‘실천하는노동자회’ 연합후보인 기호4번 이남묵 위원장 후보는 16대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4개 후보조 모두가 조합원들에게 집행력에 대한 평가를 검증받았다.

이들은 이러한 집행력을 바탕으로 산별노조 전환이라는 과도기 속에서 대우차노조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을 보장하고 GM대우차의 장밋빛 미래를 그릴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조합원들은 어느 후보조를 선택할까.

기호1번 이성재 후보조는 지난 19대 임원선거에서 1차 투표 당시 23.7%로 결선투표에 진출, 2차 투표에서 50.6%를 얻어 당선됐다. 당시 현장조직 중 큰 영향력이 지니지 못한 '대민실노' '희망찾기' '통노회'가 연합해 출마해 당선 가능성이 적었음에도 ‘협상과 투쟁’이라는 이미지가 조합원들에게 각인돼 당선됐다. 그러나 올해 임단협 잠정합의안 1차 투표에서 52.2%로 잠정합의안이 부결된 데다 집행과정에서 노사화합, 노사상생의 이미지로 최근 비판적 평가를 받고 있다.

기호 2번 김일한 후보조는 지난 19대 집행부 1차 투표에서 출마해 20.1%를 득표, 3위에 그쳤다. 김 위원장 후보가 활동하고 있는 ‘민주노동자회’는 대우차 현장조직 중 가장 전투적 성향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실제로 17대 집행 당시 '정리해고투쟁위원회' 활동 등을 해 왔다. 따라서 GM대우로의 법인 통합이 완성된 지금, 조합원들이 전투적 성향의 집행부를 선택할 지는 미지수다.

기호 3번 장순길 위원장 후보조의 선거대책본부장은 이보운 18대 노조 위원장이 맡고 있으며 19대 임원 선거 당시 ‘자주민주투쟁위원회’ 소속 정연호 후보조가 출마해 12.3%를 득표했다. 장 위원장 후보는 기호 1번과 4번이 실리적 조합활동을, 기호 2번이 전투적 조합활동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과 달리, 중도적 합리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 러닝메이트 후보들이 창원과 군산 현장조직을 포함하고 있어 각 공장의 의견수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기호 4번 이남묵 후보조는 지난 19대 임원선거 1차 투표에서 이성재 후보조에 0.1%로 뒤진 23.6%를 얻어 2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했으나 47.5%로 낙선했다. 대우차 현장조직 중 가장 높은 조직률을 보이고 있는 ‘전진하는노동자회’ 소속으로 안정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기호 2번 김일한 후보조보다는 기호2번 이성재 후보조와 같은 합리적, 실리적 평가를 받고 있다.

대우차노조 관계자들은 이번 선거가 지난 역대 선거보다도 당락을 예측하기가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17대 선거의 경우 해외매각과 정리해고 투쟁이라는 조합원들의 생존문제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투쟁적 집행부가 선택된 반면, 18, 19대는 GM대우로의 인수과정에서 합리적 지도부를 선택하려는 경향이 보였지만 이제 법인통합이 완성된 이후 9,100여명의 조합원들이 '투쟁'과 '실리'에서 무엇을 선택할 지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마영선 기자  leftsun@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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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바르' 혁명인가 아니면 노동계급 혁명인가

[지금이 바로 기회이다] 그룹에게 보낸 편지

 '볼리바르' 혁명인가 아니면 노동계급 혁명인가?

 <이하의 글은 [사회 정의를 위해서는 지금이 바로 기회이다 운동](Fire This Time Movement for Social Justice, FTT) 그룹에게 보낸 국제볼세비키그룹(IBT)의 편지이다.>

동지들!

동지들은 최근 "베네수엘라의 혁명과 반혁명"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지금이 바로 기회이다], 2004년 9월/10월호). 이 글에서 후고 차베스는 "노동계급의 민주주의와 자결 투쟁"을 지도하는 "혁명가"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글을 통해 차베스와 그의 "볼리바르 혁명"이 자본주의 체제에 가하는 위협을 동지들은 상당히 과장하고 있다.

물론 베네수엘라는 미국이나 캐나다의 간섭이 없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신식민지 국가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관심은 이들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정권들에게만 해당된다. 역사는 이 점을 계속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2002년 4월 차베스를 제거하려는 반동 쿠데타는 이 점을 보여주는 완벽한 예이다. 이때 미국은 배후에서 쿠데타를 지원했다.

미국과 캐나다 지배계급의 중요한 부위들은 차베스에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차베스 정권은 한줌 밖에 되지 않는 베네수엘라 자본가와 지주들의 지배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극소수의 토착 자본가와 지주들은 제국주의의 베네수엘라 지배를 보장하고 있다. 1998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차베스는 경작되지 않고 버려져 있던 토지의 일부를 대토지 소유주들로부터 무토지 농민들에게 이전시키는 등의 약간의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의 수익 일부로 사회 개선 프로그램을 확대했다. 이 조치들의 결과 수백만 명의 베네수엘라 인민은 "흑인과 인디오의 피가 섞인" 차베스 대통령을 서민의 옹호자로 간주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계급인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다. 이 인식이 베네수엘라 상황을 맑스주의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출발점이다. 농민, 빈민, 노동계급의 중요한 부위들로 구성된 "무산자들"은 차베스를 지지한다. 그리고 그는 군대 내에서도 명백히 지지 기반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볼리바르 운동이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허세를 차베스는 부리지 않는다. 그는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로 미 제국주의에 대해 베네수엘라 자본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무산자들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을 통해 사회갈등을 완화시키려 한다. 그의 인민주의적 호소는 특권층과 그 하수인들을 소외시켰다. 그러나 그의 개혁 프로그램은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화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는 아르헨티나의 페론, 이집트의 나세르 등 좌익적 언사를 늘어놓았던 제 3 세계 민족주의자들의 전통에 서 있다.

미국에서 랠프 네이더는 착취자들과 이들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는 언사로 비판한다. 동지들은 [지금이 바로 기회이다]지의 같은 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이더는 종종 기업들의 행위를 비난하지만 문제의 근원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 이외의 모든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차베스의 비난은 이와 유사하다. 동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자본가 엘리트 가운데 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차베스가 정권을 잡기 이전부터 수년동안 베네수엘라에서 활동했던 국제기업들은 차베스의 '극단적인' 조치들 다수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권과 계속 거래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다른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국제기업들은 차베스 정권을 안정적인 정권으로 본다. 이 정권은 이들의 투자와 상당한 이윤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한편 차베스가 없는 베네수엘라는 미래를 알 수 없는 혼란을 의미할 것이고 이것은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린다."

 피델 카스트로의 일당 독재 국가는 노동계급에게 고유한 집단적 소유 형태 즉 쿠바 자본가 계급과 이들의 상전인 미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의 자산을 몰수한 소유 형태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차베스는 지금 존재하는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사회정의의 도구로 이용할 생각이다. 그런데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억압의 도구이며 따라서 노동계급의 사회지배를 위해서는 분쇄되어야 한다. 타리크 알리는 차베스에게 자신의 정치철학을 요약해 보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에 대한 차베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맑스주의 혁명의 교조적인 원리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우리가 노동계급 혁명의 시기에 살고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나는 이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 이 주장은 수정되어야한다. 현실은 내가 옳다는 것을 매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목적이 베네수엘라에서 사적 소유를 철폐하거나 무계급 사회를 건설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카운터펀치]지, 2004년 8월 16일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에서 혁명 대중은 봉기를 통해 짜르 체제를 타도했다. 그런데 혁명 대중이 아니라 좌익적 언사를 늘어놓던 임시정부가 정권을 잡았다. 이 정권이 바로 지금의 차베스 정권과 유사하다. 처음 러시아 국내의 볼세비키당 지도부는 "반동에 대항하는 한" 이 새 정부를 지지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망명지 스위스에서 귀국한 레닌은 주장이 전혀 달랐다. 논란에 휩싸였던 그의 "4월 테제"에서 레닌은 임시정부에 대한 어떤 지지도 거부하고 비타협적 반대를 주창했다. 그의 세 번째 테제는 의미가 확실했다: "임시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 이 강령으로 볼세비키당을 정치적으로 재무장시킨 레닌의 투쟁은 10월 혁명 승리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다.

1917년 8월 극우 반동 코르닐로프 장군은 임시정부의 "온건 사회주의자" 케렌스키를 정권에서 밀어내기 위해 무장 쿠데타를 시도했다. 이 역시 2002년 4월 차베스를 타도하려던 우익 쿠데타와 유사했다. 이때 볼세비키당은 코르닐로프 쿠데타에 대항해 케렌스키와 공동전선을 수립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금도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하지 말아야한다. 임시정부 지지는 원칙에 어긋난다. 누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코르닐로프에 대항하지 않을 것인가? 물론 우리는 대항해야한다! 그러나 이것과 임시정부에 대한 정치적 지지는 전혀 다르다; 여기에는 분리 선이 명확히 존재한다. 일부 볼세비키들은 타협을 하면서 사태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이들은 이 분리 선을 넘고 있다.

케렌스키의 군대가 하고 있듯이 우리는 코르닐로프에 대항해야하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케렌스키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그의 약점을 폭로한다. 이것이 바로 차이이다. 이것은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대단히 핵심적이고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차이이다."-- 레닌,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에게", 1917년 8월 30일

 레닌이 구별한 군사적 지지와 정치적 지지 사이의 차이는 중요하다. 2002년 4월 쿠데타와 같은 것이 다시 발생하거나 제국주의자 및 그 하수인들이 차베스를 공격할 때 사회주의자는 차베스의 민족주의 정권과 군사적으로 동맹해야한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에서처럼 자본주의 국가의 관리자인 정부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정치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다. 노동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조직적 독자성은 노동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절대적 전제조건이다.

지금까지 차베스가 실시한 제한된 토지개혁은 대지주들의 분노를 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농촌의 극악하게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크게 바꾸지는 않았다. 아직도 전체 농가의 3%가 경작 가능한 토지의 77%를 장악하고 있다. [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외교 세계]지 2003년 10월호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국토토지청의 토지 분배 조치는 너무 늑장을 부리고 있어서 농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한편 대지주들이 돈으로 조직한 살인부대와 사병(私兵)부대들이 줄리아, 바리나스, 타키라, 아푸레 등의 도에서 활동을 이미 시작했다. 이 음흉한 집단들은 노동운동과 모든 피억압 인민을 위협하는 피비린내 나는 반동의 전위이다.

이 위험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노동자와 농민들은 정당방위대를 조직해야한다. 국토토지청이 땅 부스러기를 나눠줄 때까지 끝없이 기다릴 것이 아니라 혁명가들은 빈농과 농촌노동자들이 대표위원회를 수립하고 도시 노동계급의 유사 조직과 연대하여 대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이 반동들의 권력을 분쇄하자고 촉구해야한다. 이 촉구는 농촌에 주둔한 병사들의 공감을 살 것이 확실하다.

경제를 노동자들이 통제하자는 주장을 차베스 정부는 가끔 호의적으로 인용한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소유체제를 보호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화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둘 중의 한 계급만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다. 최근 공장 폐쇄와 임금 체불에 항의하여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는 사례들이 줄을 잇고 있다. 모든 공장과 직장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노동자 위원회는 도시와 지역 차원에서 연합하고 농민 위원회와 연대하여 자본가들과는 독립적으로 생산과 분배를 조직하는 체제를 수립할 수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은 내외 자본가들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고 모든 피억압 대중조직들과 연대하는 노동자 위원회의 통치를 주창할 것이다. 대도시의 공업 노동자들 속에 뿌리내린 레닌주의 전위당은 노동자 정부만이 베네수엘라의 무산 토착 인민들, 빈민, 기타 피억압 대중의 근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선전과 실천을 통해 보여줄 것이다.

권력 장악 투쟁을 위해 노동계급은 자신의 정당이 필요하다. 이 정당은 현재 차베스를 지지하고 있는 소위 "진보적" 부르주아 분파를 포함하여 모든 부르주아 분파들과 정치적으로 완전히 독립해야한다. 힘을 얻어 다시 상승하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일전을 준비하며 베네수엘라 노동운동은 1973년 칠레 노동계급의 비극적 운명을 피하기 위해 자기 방어조직들을 수립해야한다. 그리고 계급 출신에 따른 군대 내의 분화를 적극 촉진하고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장교들을 중립화시켜야한다.             

베네수엘라 노동자를 비롯하여 자본주의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는 모든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1917년 4월 레닌이 명시한 비타협적 계급투쟁 강령으로 무장한 전투정당을 건설해야한다. 이것이 노동자 권력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혁명적 동지애를 보내며,

국제볼세비키그룹 올림

2004년 11월 27일

--- 'Bolivarian' or Proletarian Revolution?, [1917] No.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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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 비정규 현장위원 인터뷰

『인터뷰』
파업투쟁의 중심에 서있는 현장위원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현장위원


현대차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을 유심히 지켜보면, 전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파업지침이 일괄적으로 내려질 때도 있지만, 각 사업부별로 다른 것과 파업현장에서 일군의 무리들이 수시로 이야기를 하다가 조합원들 사이로 흩어지는 모습이다.

변화된 모습의 중심에는 현장위원이 있다. 비정규직노조는 올해 들어 기존의 소위원을 현장위원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이들의 주체적 활동에 주목해왔다. 이들은 조합원들과 수시로 대화하면서 그를 바탕으로 각 사업부에 맞는 전술을 논의하며, 비정규직노조의 결정사항을 조합원에게 전달하고 토론하고 있다. 이들의 주체적 활동이 강화되면서 비정규직노조 임원들과 각 사업부 대표들이 ‘현장위원의 등쌀에 못살겠다’는 행복한 투정(?)을 부리고 있는 모습이 종종 발견된다.

1, 2, 3, 시트 사업부의 현장위원을 만나 그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현장위원들은 현장에서 수시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있다.



“차근차근 밟아가서 현장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1공장 사업부 현장위원 최상아

최상아 1공장 현장위원은 비정규직노조 결성초기부터 결합해 활동을 해오고 있다. 첫눈에도 보기 좋은 인상을 가진 그는 수줍은지 짤막하게 이야기해 인터뷰가 쉽지 않았지만, 짧은 말속에 조합원에 대한 믿음이 묻어나왔다.

가입 초기부터 활동했으면 사측의 탄압과 회유에 힘들었겠다는 말에 그는 “세상을 바꾸려면 협박정도는 넘어서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짧게 이야기한다. 그는 “노조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어 가입당시부터 소위원을 했다”고 한다.

올해 투쟁의 특징에 대해 물어보자 비교적 길게 대답을 한다. 그는 “작년의 경우 불법파견의 문제로 투쟁을 일정중심으로 진행한 반면, 올해는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간담회를 비롯해 조합원과 수많은 대화를 통해 단체교섭의 중요성을 알려냈다. 작년 투쟁으로 서른명이 넘는 조합원이 징계를 당하면서 나서면 다친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지노위에 조정신청에서 쟁의권 획득까지 모든 과정을 (조합원에게) 보고하고, 징계자들이 복직과 징계도 약화되면서 현장에 힘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어떻게 투쟁이 진행돼야 될 것이냐는 물음에 “결론은 조합원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냐”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조합원들이 파업을 더 해야 한다며 성화다”
2공장 현장위원 노덕우

노덕우 2공장 현장위원은 비정규직노조를 인터넷을 통해 자기 발로 걸어들어 왔고, 올해 총대를 메고자(?) 비정규직노조 현장위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비정규직의 파업으로 현장이 멈춰서는 것을 보며 “우리가 파업해서 라인이 섰다는 자체가 마음이 뿌듯하고 할 수 있다는 긍지가 생긴다”고 했다.

2공장은 가장 늦게 파업에 돌입했는데 그는“우리는 현장을 먼저 구성하고자 했다. 현장위원들은 조합원과 간담회과 개별면담을 통해 의견을 묻고 조직을 해왔다. 개별교섭을 하면서 업체장들이 ‘바지사장이라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을 현장에 전달했고, 그들을 믿고 일해 온 조합원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현장위원이 출투를 시작하고 조합원들도 참여를 하며 쟁의권을 확보해왔다. 몸으로 부딪쳐 깨지더라도 우리가 한다는 조합원의 의지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며 그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2공장은 올해 처음으로 파업을 들어갔는데, (지금까지) 몸싸움자체를 한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대체인력 싸움에서 대가리가 깨져가면서도 조합원의 생각이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전술적으로 시기조정을 하려해도 조합원들이 더해야 한다며 성화다. 조합원의 생각을 받아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다”고 자신감있게 말했다.


“정규직조차 우리의 생존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3공장 교섭위원 정윤석

3공장은 신차투입으로 7월 1일 108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계약해지를 당했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지만, 40명 정도가 남아 농성투쟁을 시작했다. 현재 12명은 일하던 업체로 복귀했고, 나머지 농성자들의 복직도 조만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정윤석 3공장 현장위원은 그 과정을 이야기하며 “농성이 시작되고 전술변화에 대한 논의가 한참 진행될 때 25명 복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내부적으로 논의해 한명이라도 살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해서 그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정규직 대의원회에서 알아보니 12명의 공정만 있다는 것이다. 재논의가 3일 동안 격렬하게 진행됐고, 농성투쟁이 무너질 위기까지 갔었다. 우리는 아무런 요구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받아야 하는 것밖에 안 됐다. 우리와 한마디 없이 진행한 것이 많다. 작년 정규직이 비정규직노조 집단가입을 시킬 때 고용보장을 이야기했는데, 해고자들 대부분이 열성조합원이었다. 힘이 없어서 하청관리자도 무시하는데, 정규직대의원들도 우리의 생존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정규직 활동가에 대한 생각을 털어놨다.

하지만 그는 “3공장 안에서만 싸우면 농성투쟁이 고립된다고 생각했다. 대시민 선전전과 삼보일배 등도 구상했지만, 복귀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해 공장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2공장에 선전전도 가고, 타공장 투쟁에 꾸준히 결합했다. 타공장 사람들이 열심히 싸우는 모습에 ‘쟤네들이 정리해고된 애들이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성과를 많이 본 것 같다.
그리고 농성장에서는 파업 장소에 우리가 많이 불려 다닐 줄 알았다. 그런데 너무 잘 싸우더라. 20명이 150명의 관리자들과 대치하는데, 주눅 들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든 되겠구나는 생각을 했다. 3공장도 라인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해, 적은 인원이만 25일 거점사수투쟁을 진행했다. 사측이 방심했는지 관리자가 100명도 안되었고, 40분 라인이 멈췄고 120분 동안 가다서다를 반복했다"며 그간의 투쟁을 설명했다.


"원청의 불법대체인력 투입, 이해할 수 없다“
시트사업부 현장위원 이상완

시트 2부는 대체인력저지 투쟁에서 주·야간 함께 모여서 진행하면서 탄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초기에는 A조만 조직돼 있었다. B조는 파업과정에서 조직됐지만, 짧은 시간에 전조합원이 파업에 돌입했다.

이상완 시트사업부 현장위원은 B조에 속해있다. 그 과정에 대해 그는 “작년 단체가입을 했었지만, 원청에서 폐업하면서 업체를 두 개로 가르고, 탈퇴하지 않으면 자르겠다고 협박을 해왔다. B조는 겁을 먹고 하나둘씩 탈퇴하면서 무너졌다. 그런데 A조가 쟁의권을 획득하고 투쟁이 이어지면서, A조가 ‘우리를 대신해 싸울 수 없는 것이고 우리 권리를 찾자는 것인데 함께 해야 한다’고 의기투합해 6월 말에 단체가입을 했다. 그래도 파업은 어렵지 않느냐 했는데, 열외 한명 없이 파업에 돌입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합법파업임에도 원청에서 불법대체인력을 투입해 현장을 막고 있다. 몸싸움 없이 하고 싶은데, 대체인력을 뽑아내야하니까 몸싸움이 일어나고 있다. (사측의 이런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원청은 많은 인원이 카메라까지 들이대고 있지만, 우리는 맞을 뿐 아무것도 없다”며 현대차 사측에 대한 분노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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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 비정규 임단투 파업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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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비정규직운동 : 조합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비정규직운동 : 조합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현 시기 비정규직 운동의 성격과 사회주의자들의 과제


1. 서 문


비정규직 운동을 둘러싼 2006년 지금의 상황은 2002년과 유사하다. 2002년은 1999~2001년 비정규직 운동의 첫 번째 대중적 진출이 실패한 이후 숨을 고르면서 지난 국면을 평가하고 다음 국면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지금 상황도 그 때와 유사하게 2003~2005년 비정규직 운동의 두 번째 대중적 진출 이후 대열을 정비하면서 다음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지형지물을 살피고 나아가야 할 좌표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직 운동의 위상과 전망을 두고 운동진영 내부에서는 마치 오리가 수면 아래서 쉼 없이 발짓하듯 조용한 계급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비정규직 운동에 관한 운동진영 내 논쟁은 자본과의 적대전선 속에서 어떻게 전체 노동계급의 전투대형을 갖출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계급투쟁일 수밖에 없다. 운동진영 내부에는 노동계급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입장만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르주아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입장, 소부르주아적이고 중도주의적인 입장이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사회주의 노동자》는 2호, 3호에서 「대공장 사내하청 투쟁 3년, 평가와 과제」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바 있다. 이번 호 기획특집에서는 비정규직 운동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과 쟁점을 돌아보고자 한다. 나아가 현 시기 비정규직 운동의 성격 변화와 전체 운동에서의 위상 그리고 사회주의자의 과제를 제출하고자 한다.


2. 새로운 물결?


비정규직 운동에 관한 과거의 논쟁이 생각난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대략 5년 전일 것이다. 당시 비정규직 운동은 갓 출발점에 있었고, 활동가들의 투신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비정규직 운동이 갖는 잠재력에 주목한 우리는 대공장 운동에서 비정규직 분야에 역량을 투입하자고 요구했다. 그러자 많은 다른 그룹 동지들이 그것에 대해 ‘정규직 운동을 포기하는 것’이며, ‘사실상 대공장 운동을 청산하는 것’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비정규직 노동자투쟁, 그 새로운 전진을 주목하자!」『노동해방』2005-10-05


《노동해방연대》(구 《미래연대》)는 5년 전, 정확히 말하면 6년 전 비정규직 운동에 관한 논쟁을 떠올리면서 다른 그룹들의 ‘정규직 운동을 포기하는 것이며 사실상 대공장 운동을 청산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회고한다. 그러면서 다른 그룹들은 2-3년 전부터 그 실천에서 사실상 자신들의 계획을 수용하고 있다며, “이것은 5년 전에 우리가 상당히 겸손한 방식으로 제기했던 바로 그 명제 - 각자 노동해방의 원칙을 가지고 실천하자. 객관적 상황의 흐름은 무엇이 올바른지를 증명해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논쟁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하나의 흐름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 가 옳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논쟁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논쟁은 여전히 하나의 대립된 구도로 지속되고 있으며, 더군다나 지금, 2002년 상황과 유사한 2006년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비정규직 운동이 대중화되고 그 운동에 사회주의자들이 개입하고 있는 현실을 두고 ‘거 봐라. 그 때 우리가 말한 게 옳지 않았나’라고 자족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다른 그룹들의 정당한 비판을 진지한 자기평가 없이 사후적으로 손쉽게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다.

《노동해방연대》는 2000년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의 투쟁(롯데, 새한, 게이츠, 임창, 동우공영, 통인가게, 영남금속, 동방제약, 베스콘, 일진, 마마, 고속철도공단, 이랜드, 광주금속 동명분회, 대우금속, 갑을전자 등)을 주목하면서 ‘새롭게 떠오르는 희망의 물결’, ‘남한판 이스트엔드 운동’으로 바라보았다. 숫자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의 규모, 열악한 임금과 근로조건, 계급구성에 있어서 젊은 연령층과 여성노동자의 우위 등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운동의 성격을 ‘남한판 이스트엔드 운동’으로 규정했던 근거였다. 하지만 5~6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볼 때 과연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운동이 엥겔스가 주목했던 영국의 이스트엔드 운동을 재현하고 있는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이 운동이 《노동해방연대》가 과거에 주장했던 바대로 “대기업 노동자 운동의 퇴행의 물결이 낳은 일종의 가장 더러운 거품”을 쓸어버릴 새로운 물결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숙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5~6년의 경험은 오히려 비정규직 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조합주의 운동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에 기반을 둔 노동조합운동을 혁명적으로 이끌어 ‘제2의 87년’, ‘제2의 전노협’ 운동을 건설하자는 《노동해방연대》의 노선은, 한 마디로 말해 ‘혁명적 신조합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노선은 대공장 정규직 운동을 일종의 노동귀족으로 규정하고, “귀족화되고 결코 노동해방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영국의 거만한 기존 노동조합들”과 유비하였다. 이들의 노선은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대공장 정규직 운동에 대해서는 실천적 개입과 지도를 유보하면서 선전활동으로 제한되는 것으로(때문에 당시 다른 모든 사회주의 그룹들은 ‘기권주의’, ‘청산주의’라 비판했던 것이다) 비정규직 운동에 대해서는 조합주의와 대기주의 경향을 물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혁명적 신조합주의


어떻게 보면 《노동해방연대》가 주장했던 바대로 전투적으로 올라오는 새로운 운동에 자신의 배를 띄우고 그 물결을 따라 항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것이, 유일하지는 않겠지만 유력한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공장 정규직운동에 대한 개입과 지도를 기권한 데 있었던 게 아니라, 실은 대공장 정규직운동을 휘감고 있는 조합주의와의 투쟁에서 기권했으며 새로운 조합주의·전투적 조합주의·혁명적 조합주의에 자신의 배를 띄운 것에 있었다.

이는 6년 전 이 동지들이 주장했던 투쟁요구들에서도 드러난다. 당시는 IMF 이후 전 사회적인 구조조정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목줄을 겨냥하고 있었으며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계급적 전선이 형성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동지들은 구조조정 반대투쟁을 전 사회적인 문제의식으로 확장시키고 그것을 전 계급적인 투쟁으로 밀어 올리는 대신, 구조조정 반대를 추상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정리해고 철폐, 외주 용역화 격퇴, 노동강도 강화 반대”같은 명확하고 구체적인 요구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이 민주노총과 소부르주아 기회주의 세력들의 ‘일방적 구조조정 반대, 해외매각 반대’와 같은 껍데기 요구들을 비판하는 효과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역으로 전선을 해체하고 단사주의와 조합주의에 영합하는 결과를 불러온 것도 사실이었다.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517일 투쟁에서 구조조정 저지투쟁과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사진: 구 한통계약직노조 홈페이지)
《노동해방연대》(구 《미래연대》)의 혁명적 신조합주의는 투쟁요구안 뿐 아니라 전술과 조직노선에서도 그 조합주의적 경향을 드러냈다. 이러한 경향은, 2001년 말 운동이 다시 내리막길로 치닫자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조직적 퇴각론’이었다. 517일간의 영웅적인 한통계약직 투쟁에서 당시 이 그룹은 “‘정규직화 쟁취’도 노동조합의 중요성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 어떤 식으로 결정이 내려지건, 한통계약직 투쟁은 ‘노동조합 사수와 강화!’라는 단 하나의 원칙에 충실해야 하며 그것이 포기된다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라며 공공연맹과 함께 ‘조직적 퇴각론’을 주장했다. 한 마디로 조직을 남기고 투쟁을 접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동전화국 점거투쟁 등 비정규직 철폐와 정규직화 쟁취를 선도적으로 요구했던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은 단지 한 사업장의 투쟁이 아니라 2000년 이후 끈질기게 이어져 오고 있었던 비정규직 투쟁의 구심이었다. 따라서 캐리어사내하청 투쟁 이후 한통계약직 투쟁의 승패 여부가 전체 운동에 미칠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고, 비록 패배하더라도 ‘어떻게△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517일 투쟁에서 구조조정 저지투쟁과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패배하는가’가 당시 정세에서는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조직적 퇴각론’자들은 투쟁 패배를 전제로 놓고 민주노조를 거점으로 질서정연한 퇴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러한 논리는 ‘초기업노조건설’ 주장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논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특수한 존재양식, 즉 고립성·이동성·분산성을 이유로 산별노조나 일반노조, 지역노조와 같은 조직형식을 무슨 특별한 대안인양 제출하는 것과 맥을 같이 했다. 그러한 논리들은 당면투쟁을 회피하는 기회주의의 근거로 작용했다.

산별노조는 민주노총 관료들에게 비정규직 투쟁을 외면하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민주노총 관료들은 산별노조가 비정규직과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의 희망이라고 강변해 왔으나, 실제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나자 산별 전환이 되면 문제가 풀리니까 그 때까지 기다리라는 논리를 들이대며 비정규직 투쟁을 가로막았다. ‘조직적 퇴각론’에 이은 초기업노조건설 또한 2001년 말 대부분의 비정규직노조들이 장기투쟁으로 지쳐갈 때 투쟁을 접자는 관료들의 이데올로기로 나타났다. 당시 《노동해방연대》(구 《미래연대》)의 혁명적 신조합주의는 ‘우리가 하면 다르다’는 것 외에는 현실 운동에서 개량적 신조합주의와 구분되지 못했고, 그런 식으로 신조합주의 경향을 비정규직운동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5년 전 당시에 우리의 주장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동지들의 상당수는 지금 비정규직 투쟁의 현장에서 때로는 조역으로 때로는 주역으로 마주치고 있다. 그들은 2-3년 전부터 그 실천에서 사실상 우리의 계획을 수용하고 있다”니.

■ 이스트엔드와 신조합주의

이스트엔드(East End)란 영국 런던 북동부 템스 강 북안에 있는 구역으로 산업혁명 후 공업지대와 항만지구가 형성되어 이곳에서 일하는 극빈노동자가 사는 빈민가로서 유명했다. 이에 연유하여 런던뿐만 아니라 각 대도시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극빈계급의 거주지역도 이스트엔드라 부르고는 한다.

19세기 후반 영국 노동운동은 대공장과 숙련공 노조를 중심으로 개량주의와 조합주의가 창궐했다. 이러한 시기에 1880년대 후반부터 이스트엔드에 거주하는 하층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신조합주의’라고 불리는 전투적 노조운동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북부 직물공업지역에서 여성노동자들 중심의 새로운 조합들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기존 노조에서 소외된 많은 저임금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 또 제강업 분야의 반숙련공과 부두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도 결성되었다. 특히 1889년 부두노동자들의 파업 등 전투적 노동운동이 성장하였다. 이는 80년대 후반의 호황과 고용증가, 노동구성의 변화, 치안당국의 유화적 태도, 고용주의 묵인 등이 작용한 결과였다.

당시 영국에 거주하고 있던 엥겔스 역시 이스트엔드 운동에 주목하며 이 운동이 낡은 조합주의자들의 부르주아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운동 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처지』독일어 제2판 서문)

하지만 1890년대에 신조합주의는 침체에 빠지기 시작했다. 전투적 노동운동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 자본가들이 1893년 불황기를 타고 전면적인 탄압 공세로 나왔던 것이다. 새로운 노동조합들 중 하역·건축·가스 분야의 노동조합들은 탄압에도 살아남았지만, 이전보다 더 강화된 자본가의 권한을 받아들이는 대신 노동조합을 인정받는 방식으로 타협해야 했다. 그리하여 점차 기존의 숙련공 노동조합의 보수적이고 분파적인 모습을 닮아갔다.


개량적 신조합주의


이런 혁명적 신조합주의는 비정규직을 미조직 조직화의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민주노총 주류 이데올로기 집단의 개량적 신조합주의와 상당히 많이 닮아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노동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개량적 신조합주의자들은 2000년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이하 ≪비정규노동센터≫) 건립을 통해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사상적, 실천적 영향력을 점차 넓혀왔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남한 부르주아 노동운동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벗을 자임하는 ≪비정규노동센터≫는 지속적으로 남한 노동운동의 ‘낮은 노동조합 조직률’과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영국노총의 새 노조주의 운동, 미국 서비스노조의 ‘청소부에게 정의를’ 모델에 관한 윤진호 교수의 연구는 민주노총의 조직활동가 양성 프로그램, 전략조직화 사업 50억 기금 추진에 있어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비정규센터 기관지 『월간 비정규노동』은 “비정규·중소영세 노동자 조직화 경로로서의 지역일반노조”를 꾸준하게 특집으로 다루면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에 이론적 자원을 제공해왔다.

“비정규 노동자의 조직화는 초기업단위 조직을 통하여 실현된다. 지역일반노조이건 전국업종단일노조이건 비정규직의 조직화는 기업별 분단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으며 직·간접 고용 비정규 노동자의 조직화도 과도기적인 독자 조직을 넘어서 진정한 산별노조의 건설을 통해 계급적인 단결로 나아가야 한다”며, ≪비정규노동센터≫는 이를 “사회운동으로의 지향 - 사회개혁 투쟁으로서의 비정규노동자운동”이라고 규정했다. 다양한 업종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는 지역노조와 일반노조 동지들의 활동은 존중되어야 하며, 현재의 조건에서 그러한 활동방식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개량적 신조합주의자들의 노선으로써 제출되는 일반노조는 사실상 비정규직 운동에서 성장하고 있는 부문주의, 조합주의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개량적 신조합주의자들은 2005년 들어와서 ‘노동시장에 따른 노동조합 조직화 모델’을 제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단일노조로, 중공업·조선은 지역노조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대공장 정규직 운동의 조합주의를 그 외피만 건드릴 뿐 정면돌파 대신 우회로를 걷자는 것이다. 왜냐면 비정규직 운동이 대공장 정규직 운동의 조합주의와 매 시기 충돌하고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조합주의의 혁신과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삼는 게 아니라 기존의 조합주의 질서를 피해 새로운 조합주의를 위한 모델 찾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개량적 신조합주의자들은 최근 들어서는 ‘지역별 조직건설안’을 하나의 노선으로 제출하고 있다. 지역별 조직건설안은 지역노사정협의회의 현실화 흐름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비정규노동센터≫는 작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서 제기되었던 원청사용자성 인정투쟁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다자간 협상’ 그리고 이를 실질적으로 주도할 ‘민주노총 지역본부의 위상 강화 방안’을 제시한다. 지역별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협조적 노사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 개량적 신조합주의를 배경으로 제출되고 있는 비정규지역센터 사업과 김금수의 지역노사정협의회 구축 흐름은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이름으로 노동운동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3. 비정규직운동의 자주성


한통계약직 투쟁이 패배로 마감되면서 비정규직 운동은 잠복기로 들어섰고 사회주의자들은 평가와 전망 수립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문제로부터 캐리어사내하청 투쟁, 한통계약직 투쟁 등 지난 몇 년간의 뼈저린 경험과 실패로부터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은 ‘비정규직운동은 정규직운동의 엄호 없이는 홀로 생존하기 힘들다’, ‘장기간의 모색을 위해 현장에 뿌리내리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현중사내하청노조의 박일수 열사투쟁은 비정규직 스스로가 현장을 조직하고
자주성을 고양해야 한다는 임무를 제기했다. (사진: 현중사내하청지회)
2002년 모색기 동안 그러한 인식은 현실에서 다양한 논리와 방식으로 사회주의자들의 패배주의·대기주의적 실천양식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권력을 향한 전진》(이하 《전진》)그룹은 비정규직투쟁이 노동조합운동 차원에서는 전혀 받아 안을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대부분의 전투적 활동가들은 기존 정규직 운동 내 전투파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받아 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투파조차 비정규직 투쟁을 받아 안지 못했고 오히려 이들을 탄압하는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한라중공업과 캐리어, 한국통신 등에서 나타났다. 전투적 조합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비정규직 투쟁을 받아 안을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을 통해 확인된 것이었다.

《전진》은 또한, 비정규직 운동이 정규직 운동과 동떨어져 홀로 싸운다면 전체 운동의 발전은커녕 두 운동 모두 몰락과 붕괴에 처할 것이라는 점을 지난 투쟁의 교훈으로 삼았다. 두 운동이 분리된다면, 비정규직 문제는 서구처럼 시민사회운동으로 포섭되고 정규직운동은 노골적인 조합주의로 귀결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대공장 정규직의 선진노동자 운동과 새롭게 올라오는 전투적 비정규직 운동이 합류하여 하나의 뚜렷한 정치적 경향 즉 사회주의 운동으로 결집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사회주의자들의 당면과제 역시 그로부터 도출하였다.

《전진》은 1999~2001년 민주노총 관료들이 보인 전형적인 조합주의적 방식의 비정규직 노조 건설을 비판하고, 노조 건설은 새로운 조합을 ‘하나 더’ 만드는 데 목적을 두는 게 아니라 기존의 대공장 정규직 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재편’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전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공장 속으로 비정규직투쟁을 도입해야 하며 노동조합질서를 뛰어넘어 대공장을 중심으로 생산계열로 편재되어있는 사내하청 뿐 아니라 외주노동자들까지 단결시킴으로써 대공장 운동을 계급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이를 통해 대공장을 혁명운동의 관제고지로 만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시민운동으로 이끌리며 원자화되고 있는 비정규직운동을 끌어당겨야 한다. ··· 비정규직 투쟁을 통해 대공장에 계급 의식적 운동질서를 재구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될 선진노동자들을 결집시켜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 시기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선진노동자의 가장 중요한 당면 임무로 제기되어야 한다.

-「비정규직운동을 계급투쟁으로 대공장을 혁명의 관제고지로」
『노동자권력을 향한 전진』2호 2003-6-20

이는 선진노동자 운동 내 기회주의적 경향들은 사회주의라는 이념 자체에 대한 동의만으로 재편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대공장 사내하청투쟁이라는 실천적 잣대를 통해 선진노동자 운동 내에서 아직 건강하게 남아있는 계급의식적 활동가들을 재구축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진》의 입장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오히려 2003~2005년 다시 고양된 비정규직 운동은 기존의 민주파 혹은 전투파 현장조직의 실상을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전진》이 제기한 선진노동자 운동의 재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괴’를 통한 ‘창조’로 나아가지 못하고 확인사살에 그쳤을 뿐이었다.

왜 선진노동자 운동의 재편은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우선 대공장 선진노동자 운동의 붕괴와 타락 속도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해체 일로에 있는 대공장 선진노동자 운동 속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받아 안을 수 있는 정규직 운동 내 전술주체는 부재하거나 아주 미약했다.

반면에, 2003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대공장 하청노조 건설운동은 과거와 달리 대중적 운동으로 나타났다. 현대중공업과 같은 극단적인 예를 제외하고 자본은 하청노조의 건설과 생존을 어느 정도 용인해 주었다. 융합할 정규직 내 선진노동자 운동은 미약하거나 부재했고 사내하청 투쟁 자체로는 전(全)공장을 흔드는 투쟁으로 등장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사내하청노조들은 일정 규모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퇴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속에서 투쟁을 계속 밀고 나갈 만한 사회주의자들의 주체역량도 미약했다. 특히 구체적인 현실투쟁과 사회주의 정치선동을 결합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현실의 객관적 운동 상황과 사회주의자들의 주체 역량은 대공장운동의 사회주의적 재편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은 기존 운동의 재편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의 기반을 잡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며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대중투쟁 속에서 사회주의 정치선동의 활성화를 통해 차근차근 사회주의 운동의 기초를 밑바닥부터 형성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


비정규직 운동의 성격 변화


2002년 휴지기와 모색기를 거쳐 2003년 비정규직 운동은 다시금 노동자투쟁의 구심으로 떠올랐다. 현자아산사내하청지회가 노조 건설의 포문을 열자 그 열기는 울산으로, 광주로, 전국으로 이어졌다.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정규직노조가 나서주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노조 깃발을 세우고 원청자본과의 투쟁에 나섰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기아자동차 등에서 속속 건설된 비정규직 독자노조는 그 출발부터 대공장 정규직노조의 조합주의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자노조는 ‘현자비투위’의 독자노조로의 전환에 유감을 표명했고, 현중노조는 박일수 열사투쟁에 배신으로 일관함으로써 금속연맹에서 제명됐다. 1999년 한라중공업 권성원 집행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남한에서 비정규직투쟁의 의의는 단지 미조직노동자의 조직화라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비정규직에 대한 기존 정규직운동질서의 반(反)계급적 태도는 비정규직 투쟁이 ‘조합주의에 찌든 민주노조 운동의 혁신’이라는 과제를 부여받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비정규직노조 대표자들의 준비모임이었던 ‘전국비정규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이하 전비연)이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투쟁을 거치면서 기존 정규직노조의 조합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비공식적인 밀실협상으로 마무리된 것은 열사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했던 모든 동지들의 염원을 저버린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열사투쟁 과정에서 보인 대책위의 비민주성, 밀실교섭 등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우리 운동의 풍토를 바꿔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비판에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진지한 자세와 꾸준한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현장의 능동성과 자주성을 고양해야 한다” - 전비연(준) 홍영교 의장과
사노신의 이메일 인터뷰」『사회주의노동자신문』2004-4-14

2003년 이용석 열사, 2004년 박일수 열사 투쟁을 겪으며 “지역과 업종을 떠나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공동투쟁이 필요하다”는 자각 속에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이하 전비연)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전국적 공동투쟁을 기획하고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업은 조합주의적 운동질서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현실에서 결코 쉽지 않았다. 현중 박일수 열사투쟁에서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 투쟁을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사측의 이해를 철저히 대변했으며 상급단체는 정규직노조 눈치 보기로 일관했다. 하지만 비정규직 주체들은 역량의 부족함을 한탄하기보다는 비정규직 스스로가 먼저 나서서 자본에 맞서 공동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노조 운동을 아래로부터 혁신해야 함을 인식했다. 주체 역량의 미약함으로부터 각 단위노조들의 투쟁을 지도하고 묶어세우지는 못했지만, 전비연 활동을 통해 전체 운동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2003~2005년 투쟁시기를 경과한 지금, 그동안 비정규직 운동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단일한 성격이 점차 엷어지고 있다. 2003년 10월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비정규직 철폐하라”를 외치며 산화해 간 이용석 열사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비정규직의 문제를 알림과 동시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철폐’의 투쟁요구를 내걸고 투쟁할 것을, 연대할 것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각 노조가 처한 조건과 현안은 달랐지만 비정규직 철폐만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본질적인 문제임을 인식하고 연대투쟁에 나섰다.

2004년 겨울, 비정규직법 개악저지를 위해 전비연 소속 노조 4인의 동지들이
국회 앞 철탑 고공농성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사진: 현중사내하청지회)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고 비정규직 내에서도 사내하청, 특수고용, 건설일용, 일반노조, 공공,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운동이 확대되면서 더 이상 ‘비정규직 철폐’라는 단일한 요구로 비정규직 노동자 전체를 묶기 어렵게 되었다. 전비연의 ‘비정규권리보장입법 쟁취’ 투쟁은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전비연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며 각자의 핵심 요구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한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5대 요구’를 선전하며 법개악 저지 투쟁을 중심으로 투쟁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 운동은 특수고용을 중심으로 한 권리보장입법 투쟁흐름과 대공장 사내하청을 중심으로 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흐름으로 크게 이원화되었다. 노동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사용주들과의 투쟁도 중요하지만 노동3권 쟁취는 물론이고 유류비 보조, 부당과적 해결, 불법다단계 근절 등 현실문제 해결을 위한 대정부투쟁과 교섭을 필요로 했다. 하기에 법제도개선 투쟁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편으로 만 명 이상의 조합원이 있는 큰 노조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조직률이나 정책역량, 노조운영경험 등 노조의 물질적 기반이 취약하여 민주노총의 지원이나 대정부 교섭틀 마련에 의존하는 경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반면에 사내하청노조들은 현장 기반이 취약하기도 했지만, ‘원청사용자성 쟁취’, ‘파견법 철폐’가 아닌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에 갇혀 전국 투쟁에 결합하지 못했다. 사내하청노조들은, 비정규권리보장입법 쟁취 투쟁에서 보인 민주노총의 국회 중심의 대응(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주체를 배제한 채 노사정대표자회의를 통한 의견 접근에 공을 들이는데 골몰했다.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엄호하고 이 투쟁의 힘으로 정권․ 자본과 정면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사업장들을 교섭압박용으로 동원했다.)과 전비연의 국회 회기 중심의 대응 흐름에 대해 타당하고 건강한 비판들을 제기하였지만 이에 걸맞는 실천투쟁을 조직하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에 힘을 싣지 못했다.


사내하청 운동의 한계


비정규직 운동 내에서 전투적·계급적 입장을 제기하려 했던 사내하청 운동의 한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짚어보자. 독자노조건설투쟁 - 비정규직법개악저지투쟁 - 불법파견정규직화투쟁을 거쳐 오면서 사내하청노조 대표자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이러했다.


홍영교 : 대공장 사내하청노조가 많은 주목을 받고 출범했지만 과연 전체 비정규직 투쟁에서 간접고용노동자 부분이 무엇을 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이번 불법파견 투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모습이 있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투쟁 상을 가지고 있다. 정규직화 투쟁이 아니라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선봉에 서야 하는데 직접고용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에 집중하여 전국적인 노동자들의 이해를 받아 안아야 하는데 자기 현장의 문제만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한다. (중략)

홍성호 : 금타 정규직화와 직접고용의 사례를 봤을 때, 정규직화 된 사람들과 직접고용 된 사람들이 어제까지만 해도 동지였는데 오늘은 적이 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런 것을 봤을 때 일부 정규직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히 검토되어야 한다. (중략)

조성웅 : 하반기 정세에서 연대회의는 자신의 실력을 전투적으로 밀어왔다. 열우당, 크레인 점거투쟁은 모두 민주노총 압박전술이었다. 그 선에서 목표가 정해진 점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활동을 제한했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 자신의 현장을 조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첫째는 손배문제를 민주노총이 안받음으로 인해서이다. 둘째는 이 투쟁을 확대하기 위한 자기계획이 없고 형식적으로 대표자 회의 거쳐 민주노총 계획으로 입안되는 구조... 어찌 보면 평화로운 측면으로 이루어졌다. 정치적으로는 합의주의에 포섭될 가능성, 정치적 허약함을 보여주었다.

-「[좌담]비정규직운동의 자주성,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회주의노동자신문』2005-1-15


자본의 가공할 탄압과 원청노조의 노골적인 배신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의 크레인점거투쟁, 현자 비정규직의 불법파견 정규직화투쟁, 기아 비정규직지회의 라인점거 독자파업, GM-대우창원 비정규직지회의 고공농성 등 대공장 사내하청 투쟁의 불꽃은 2003~2006년 쉬지 않고 작렬했다. 하지만 투쟁주체들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바대로 사내하청노조들은 결정적인 약점과 한계를 안고 왔다.


GM대우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고공농성을 돌입하자 지난 4월 1일 창원공장
정문 앞에서 공장진격 투쟁이 벌어졌다.

첫째, 단사 안에 갇혀 비정규직운동의 일부이자 주도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울산지역의 경우 현대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던 업체가 폐업돼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사활을 건 투쟁을 전개한 대덕사지회가 있었다. 대덕사지회는 현대자동차의 이중개발을 계기로 업체가 폐업돼 공장과 현대자동차 정문에서 농성을 전개했다. 바로 정문 앞에서 공동의 적인 현대자동차 자본을 상대로 투쟁을 전개한 대덕사지회의 농성이 진행되었지만, 현자울산비정규직노조는 적극적으로 연대하지 못했다. 당시 5공장 조합원들이 휴게실을 점거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지속하는 등 비정규직노조 투쟁 중이었지만 연대투쟁을 통해 현대자본을 압박하는 투쟁으로 확대하지 못했다.

현자울산비정규직노조 뿐만 아니라 사내하청노조들은 눈앞에 보이는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아니라, 당시 벌어지고 있던 법개악저지투쟁에서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전국적인 노동자들의 이해를 받아 안아 선봉에 서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가 이기면 전체가 이기는 거다’라는 식의 왜곡된 대공장주의가 정규직운동에서 비정규직운동으로 흘러들어간 결과였고 사내하청 주체들의 목적의식적인 전망과 계획의 부재 탓이기도 했다.

둘째, 정규직노조와의 관계에서 비정규직 운동의 자주성을 올곧게 세워내지 못했다.

“19세기 말 영국 탄광노동자들이 자신들은 9시간 노동제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노동자 형제(자매 - 인용자)들과 함께 10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해 투쟁의 대열에 동참했던 높은 계급의식을 현 시기 남한의 대공장 노동운동에 불어넣을 수 있을 때, 중소영세 사업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든든한 엄호부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내하청 운동은 정규직 조합주의를 혁신해서 계급 의식적으로 이끌지 못했고, 비정규직 운동의 자주성은 역설적으로 정규직노조에 대한 의존성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었다. 기아 화성공장이나 현자 울산공장에서 모범적인 원하청 연대투쟁의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몇몇 선진적이고 전투적인 정규직 활동가들의 연대였지 정규직 운동과 비정규직 운동의 융합이라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현자노조 이상욱 집행부를 포함해 대공장 정규직노조는 사내하청의 연대 호소에 괄시와 외면으로 일관하는 속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은 단사 안에서 쟁취한 조그만 떡고물에 만족하며 서서히 정규직 정서를 닮아가고 있다.

셋째, 정치적으로 ‘전투적 조합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구조조정의 일방적인 희생양이었던 금속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사실 남한 비정규직운동의 첫 번째 주자였고 비정규직 운동의 초기 주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전체 계급운동의 가장 선도적 부분이라고 스스로를 자임했고, 추상적이고 모호하나마 조합운동을 뛰어넘어 노동해방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 역시 금속대공장의 선진노동자 운동처럼 전투적 현장주의를 넘어서지 못했고, 그로 말미암아 명확하게 사회주의적인 지향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못했다. 비정규직 철폐는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모호한 인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가운데 비정규직 철폐, 동일노동 동일임금 같은 전투적 구호를 제기하는데 머물렀다. 비정규직 운동이 전투적 조합주의에 자신을 한정시키는 것은 썩어 고름이 터져 나오는 조합주의에 새살을 덧붙여주는 격이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불법파견 정규직화투쟁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명확한 목적과 좌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대중의 정서에 영합해 들어가는 활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운동과 사회주의


현 시기 비정규직 운동이 확대되면서 그 내부에서는 단사(업종)주의, 개량주의, 조합주의 경향이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지금 극복하지 않으면 비정규직 운동은 기존 운동의 조합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정규직 운동은 끊임없이 내부투쟁을 통해 스스로를 쇄신하고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자 계급의 규율로 단련해야 한다. 또한 정규직 운동에 대해 한편으로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기대하고 의존했던 그동안의 관성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 운동의 선도적 주체들은 조합주의에 맞서 헌신적으로 투쟁하고자 하는 적지만 소중한 정규직 활동가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또 자신보다 더 열악한 임금과 노동조건 아래서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임금노동으로 살아가는 90%의 대다수 노동자들과 전체 운동의 대의를 위해 기꺼이 투쟁의 선봉에 서야 한다.

비정규직 운동은 이제 사회주의 운동의 기치를 선명히 해야 한다. 비정규직 운동은 그동안 신조합주의 뿐 아니라 사회개혁운동, 반(反)관료주의 전투적 현장운동, 반(反)신자유주의 불완전노동운동, 빈곤철폐를 위한 사회운동 등 다양한 내용으로 규정되어 왔다.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비정규직을 활용하고 비정규직 운동을 종속시키고 있다. 비정규직 운동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계급의 이해도 아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만도 아니다. 현 시기 비정규직 운동은 전체 노동계급의 정치 강령과 투쟁요구안을 내걸고 전진해야 한다.


4. 사회주의자들의 과제


이제 현장의 사회주의자들은 정규직,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전체 노동계급의 전위’라는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더욱 더 확고한 정치적 입장과 명료한 선전선동, 헌신적인 대중조직화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지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파업투쟁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현장 제조직들이 공투체를 형성하여 적극적으로 연대했던 것은 현장공동투쟁의 위력과 가능성을 보여준 소중한 계기였다. 또 현장조직·대의원 활동가들과 비정규직지회 활동가들이 모여 전 공장적인 지형과 정세를 함께 분석하고 파업투쟁 전술을 공동으로 기획·집행·평가했던 경험은 현장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실천이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작은 선례를 남겼다.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 현장위원이 정규직의 연대를 호소하는 선동 내용을
지회 조합원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하지만 ‘조합운동 차원에서의 공동전술팀’에 머물러 있는 우리 운동의 현실을 또한 냉정하게 직시해야 하며, 현 시기 사회주의자들의 과제가 무엇인지 깊이 각인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대공장 사내하청 운동을 초점으로 해서 전체 비정규직 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진한다 함은 비정규직 운동이 자신의 깃발에 명확한 강령을 새겨 넣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만의 문제라는 부문주의적 사고, 운동의 목적을 오로지 노조의 확대로만 바라보는 조합주의 사고를 벗어던지고 전체 노동계급의 입장을 견지할 때, 비정규직 운동은 비로소 민주노총과 대공장 정규직 운동을 혁신하는 수단 혹은 먼 미래의 ‘새로운 물결’이 아니라 현 시기 ‘전체 노동계급 운동의 선진부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선전·선동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당면 투쟁을 위한 선진노동자들과의 공동전술팀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이 아니라 선진노동자이자 사회주의자로서 함께 모여 사회주의를 학습하고 토론하고 조직하는 현장모임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실천과 선동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회주의 학습과 정치토론이 현장에서 대중을 만나고 현장투쟁을 조직하는 과제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의 학습-토론-조직이 첫 번째 과제와 연동하여 현 시기 사회주의 운동의 당면과제와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은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활동에 전 계급적인 의의를 불어넣고 사회주의적 이론과 정책 및 요구안을 정식화하고 제시하는 작업을 체계화해야 한다. 당면 투쟁에 대한 지지와 지원도 중요하겠지만, 현재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운동을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강령-전술-조직 모든 측면에서의 작업에 ‘톱니바퀴’가 되어야 하며 현장 상황을 핑계로 사회주의자로서의 조직적인 활동을 등한시하거나 주저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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