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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18호]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인가 명백한 자본주의인가?(번역)

 

 [창간18호]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인가 명백한 자본주의인가?(번역) 

  

노정협    2006-07-27 20:15:12, 조회:65, 추천:2 

중국의 사회성격을 둘러싼 논쟁들이 다시 벌어지고 있다. 중국이 애초부터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는 주장, 모택동 사후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으로부터 사실상 자본주의로 되었다는 주장, 중국의 사회주의가 관료주의적이지만 아직 완전히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주장, 중국공산당이 상부구조를 차지하고 있지만 공산당이 자본가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경제적 토대는 이미 사적 소유기업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자본주의라고 보는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글은 우리사회의 변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중국사회를 인식하는데 도움을 주는 글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기회가 되는 데로 이와 관련한 다양한 시각의 글을 번역해서 소개할 것이다.(편집자 주)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인가


명백한 자본주의인가?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에 대한 많은 시각들이 있다. 그런데 쉽게 간과되고 있는 사실은 그 큰 나라가 19세기 중반에는 제국주의 권력에 의해 수탈당했었고,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1930년대의 일본의 침략은 계속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일본을 패배시켰고 계속해서 30년의 기간 동안 세계인구의 1/4이 살고 있는 거대한 국가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완전히 무능력함을 보여주었던 중국의 부르주아 정당인 국민당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혁명은 앞선 러시아의 혁명과 같지는 않았다. 러시아 혁명에서 존재했던 노동자 민주주의의 시기가 중국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1930년대에 중국공산당은 이미 스탈린주의의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에서처럼 스탈린주의에서 경제 성장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인적, 물적 자원의 많은 희생 속에 만들어 낸 것이었다. 초기 몇 십 년 동안 연간 성장률은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악영향에도 불구하고 9%를 웃돌았다. 전후 자본주의 진영의 심각했던 첫 대공황 기간인 1974년에도 중국은 GDP 10%대의 성장을 보였다. 독립 당시 중국과 비슷한 발전수준이었던 인도의 경우 1957년에서 1970년까지 중국의 절반 수준의 성장률을 보였다. 경제성장은 중국사회를 변화시켰지만 80년대에는 산업화된 국가들에 뒤처지게 된다.



외국투자에 대한 개방



중국 체제가 외국 투자에 개방하기로 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것은 중국 경제의 부진을 고려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당시 사회에 노동자에게 완전한 발언과 비판의 자유가 보장돼 있었다면 개방은 통제될 수도, 사회주의를 강화하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적 체제의 분위기 속에서,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배반당한 혁명’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사적소유와 경쟁에 기초한 생산력은 운명을 다해왔다. 대조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결과로서의 소유관계는 분명 새롭게 형성된 국가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쁘띠 부르주아 경향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우위는 경제 형태로 인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닌-그 조차 여전히 멀었지만- 독재에 의한 정치적 수단을 통해 확보되었다. 경제의 총체적인 성격은 국가 권력의 성격에 따른다.”


이것은 사회주의 경제가 모든 인구의 물질적 요구를 보장해 주는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소유에 대한 욕망을 대신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지 못하는 동안 모든 것은 진정한 의회나 소비에트 같이 노동자들의 결정권을 향상시킬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 성장을 유지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러시아와는 달리 중국에는 이들 중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은 권력을 잡기 이전부터 관료화되고 있었다.


그렇게 혁명 이후 몇 십 년 동안 중국공산당과 국가 기구에는 부패와 관료주의가 존재하고 있었고, 80년대 초반 자본주의의 매력에 이끌리게 되었다. 트로츠키가 설명했던 것처럼 관료화된 스탈린주의자들은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시스템에 대한 남용으로 보았고, 그것을 소유권으로 바꿔 가지려했다.


이러한 변화가 동유럽과 90년대의 소련연방에서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통제 하에서 경제성장을 수반하며 보다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중국 관료들은 소련연방의 경험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었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전에 이미 시장경제의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었다.



등소평의 승리



공산당 내의 개방에 대한 논란은 등소평 사후 문화혁명의 계속을 주장했던 사인방을 1976년 10월에 체포하면서 축출시킨 바로 뒤 1977-78년에 시작되었다.


등소평은 홍콩과 마카오 주변에 4개의 특별 경제구역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국 등의 중국계 화교자본을 유치하려 시도했다. 그것은 느리고도 모순적으로 진행되었다. 80년대 초반 집체농장을 각각의 농민들에게 장기간 대여하도록 하고, 80년대 중반 상당수의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가격통제를 없애면서 질적 변화가 시작되었다.


외국의 투자가 들어오자 농업 생산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인플레도 발생했다. 1980년에서 1985년까지 약 1억대의 텔레비전이 판매되었다. 1985년에서 1990년까지 약 5천만대의 세탁기와 4천만대의 냉장고가 판매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고위급 관료의 자녀들은 주로 미국과 영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천안문



첫 번째의 주식 거래는 1988년 심천에서 시작되었고, 1990년대 상하이가 뒤를 이었다. 이는 베이징 천안문 항쟁으로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가 대량학살을 당했던 1989년 6월 3,4일  바로 그 시기였다.


가격 인상과 공산당의 부패에 맞서 한 달 동안 진행되었던 저항운동은 대량학살로 끝났다. 저항에는 수백만의 학생, 노동자뿐만 아니라 그에 공감하는 당국가 기구의 일부 층도 함께했다. 자오쯔양 총리는 진압명령에 동의하지 않고, 정치의 일부를 개방해야한다는 의견으로 실각 당하고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 되었다.


등소평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핵심을 비판하던 시위대를 주저 없이 공격했다. 일 년 여의 논쟁 끝에 결국 자본주의에 대한 개방의 속도를 늦출 것을 요구하는 당 일부의 의견을 채택하지 않았다. 무력진압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연안 지역과 베이징의 외국 투자 개방을 추진했다. 그래서 푸동과 상하이에 맨하탄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고, 오늘날 이곳은 중국의 중요한 상업허브가 되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1991년에 이미 농촌지역의 실업자는 1억을 넘어섰다. 지방에는 실업자 혜택이나 연금 계획이 없기에 이들은 전적으로 가족에 의존하고 있다. 그 해에 60억 달러의 외국 투자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 20%는 대만에서 온 것이었다.


1992년 10월 중국 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이러한 변화를 ‘사회주의시장경제’라고 명명하였다. 93년에는 13.7%의 GDP 성장이 있었고, 그 후 8%대의 평균 연간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1993년 9월 14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건설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에 대한 결정”을 공식 채택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국가적 소유가 국가 경제의 주요한 토대에 남아 있더라도 국가나 집산, 사적 소유 등 모든 형태의 소유는 경제발전에 이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공적 소유가 지배적 역할을 하는 여러 경제 분야에 결합된 발전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 소유 기업의 더 많은 경영 기법의 변화가 필요하며 시장경제의 요구에 부응하는 현대적 기업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당과 정부가 어떻게 거시적 경제 통제를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뜨겁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결국 노선은 바뀌지 않았다. 1996년에는 중앙 계획의 자취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중국공산당의 자본가들에 대한 개방



1998년에서 1999년까지 대량 해고와 노동자 희생을 동반하는, 경제에서의 국가적 영역을 과감하게 줄이면서 외국 투자에 더 넓은 길을 터주도록 하는 과정이 공식적으로 진행되면서 저항도 많았던 개방의 시도는 더욱 확고해진다. 그렇지만 민주적 개혁과 관련된 문제들에는 여전히 인색했다. 국영기업 중에서 손실을 남기는 기업과 이윤을 남기는 기업을 구분해내기 위한 분리, 통합이 진행되면서 국영기업은 뒤죽박죽되었다. 이윤을 남기는 기업은 민영화 되고 손실을 남기는 기업은 도태되도록 남겨졌다. 그 과정에서 당 고위 관료와 가족들이 가장 좋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결과 지난 6년 동안 적어도 7천만의 국영기업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2001년 7월 1일에는 자본가들이 당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공식결정이 있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WTO에 가입하게 된다.


중국에서 친자본가적 입장이 비교적 쉽게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네 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계속된 경제 성장으로 농촌에서 유입되는 수많은 새로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는 한편 경제성장은 소수의 자본가들을 더욱 부유하게 했다. 농촌에서 20-25 유로하던 임금이 도시에서는 80-180유로로 상승했다.


중국 상품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0여 년 간 480기업이 6천억 달러의 거대한 투자를 벌인 과정에서 발전한 기술력, 그리고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10배에서 20배 정도 저렴한 노동력이라는 조건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빠른 수출의 증가는 수입의 증가와 보조를 맞추었고, 기간시설에 대한 투자도 증가했다. (1994년에서 2004년 사이 35000킬로미터의 도로가 건설되었고 앞으로 10년 간 85000킬로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84개의 도시에서 곧 지하철 체계를 건설할 것이며 철도나 항공, 산업단지 등이 또 준비되고 있다.)

새롭게 형성되는 자본가계급의 핵심은 외국의 중국계 거주지에서 들어온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관료의 가족들, 친척들이 차지했다. (상하이에만 해도 대만에서 돌아온 이들이 60만 정도 살고 있다.)


개혁개방에는 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 그리고 홍콩의 중국으로의 통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은 마치 자본주의의 트로이 목마와 같았다. 홍콩을 통해 심천 경제특구는 지난 20여 년 동안 연간 31%가 넘는 성장을 해왔다. 홍콩의 주요 자본가들은 중국 대륙의 새로운 자본주의로 통합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다. 97년의 홍콩반환은 자본가계급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중국인들의 해외 거주지 또한 중국 자본주의를 성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3년 까지 전체 외국 투자의 2/3가 외국 중국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 중 상당수는 대만에서 온 것이었다.


국가에 의한 재정관리나 통화의 불환성이라는 특징은 중국이 97년의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증가하는 지불불능의 대출금(98년에 전체의 40%를 차지했다)의 영향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수입의 35%를 저금하는 중국의 높은 저축율과 6천억 달러를 축적하게 했던 무역 흑자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국가의 빚은 급격하게 증가했지만 여전히 GDP 25% 이하로 남아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국내 저축으로 충당되고 있다.


2002년 가을 16차 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은 대 자본가들을 상당수 선출하면서 중앙위원회의 40%를 교체하였고, 당내의 부르주아지들의 위치를 강화하였다. 전체 인구의 5%가 공산당 당원인 반면에 자본가들의 당원 비율은 30% 수준이다. 이렇듯 새로이 형성되는 계급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전 부주석 룽이런의 아들 룽즈젠을 들 수 있는데 800억 유로에 달하는 자산을 신고한 그는 항공산업, 통신, 건설, 도로 산업 등에 다양하게 투자하는 ‘CITIC’ 이라는 투자금융회사를 지배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기초 세우기



과거 자본가들에 대한 투자 개방은 사회주의 경제 영역을 강화시키는 한에서 사회주의적 경제 내에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GDP의 절반정도가 사적 기업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통계가 체제 전체가 작동되는 방식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자본이 충분치 못한 국영기업들이 어떻게 최저의 가격으로, 손해를 보면서 사영기업으로 넘어가고 있는가를 보다 중요하게 봐야할 것이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20%가 국가 수입의 47.5%를 소비한다고 한다. 최근 2년 동안 중국은 BMW의 최대 시장이었으며, 자동차 수요에 대한 급격한 증가로 상하이에서는 새 번호판을 경매로 팔기까지 한다. 2004년 8월에 번호판 가격은 2600 유로정도로 올라갔으나 4월까지 가격은 4500 유로로 치솟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이 세계 생산의 중심이 되어왔다는 것은 명백하다. 작년에 5% 증가한 세계무역 중 60%의 성장이 중국의 몫이었다. 중국 수출품에 대한 보호주의적 조치를 취해야한다는 요구가 있음에도 중국의 무역이 높은 비율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미국, 유럽, 일본, 대만, 한국 등의 상품의 상당수(약 60%)가 자국으로 다시 수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근 유럽 연합에서 중국의 섬유제품 수입에 제한을 두려는 것은 네덜란드나 벨기에, 덴마크 같은 국가들과 가을-겨울 (의류) 컬렉션에 지장을 받는 ‘자라’나 ‘베네통’ 같은 상당수 다국적기업의 반대를 받았다. 상위 500개의 다국적 기업 중에 470여개 기업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 계급



중국혁명은 세계에서 가장 단물이 많은 식민지 지역을 제국주의자들의 지배에서 떼어놓았다. 십여 년 동안 중국은 식량 생산을 자급하도록 했고, 산업화의 기초를 놓았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인적, 물질적으로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도 계속 나아갔다. 그들은 그들의 특권을 계속 강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로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과거의 국제주의에 대한 립서비스마저 공세적인 민족주의로 탈바꿈했다. 엄청나게 들어오는 외국 자본과 농촌에서 유입되는 새로운 노동자 계급의 결합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중국은 이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할만한 많은 양의 상품을, 거대한 노동력을 손에 넣게 된 자본가들을 위한 높은 이윤을 생산하게 되었다.


엥겔스가 19세기 중반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묘사했던 노동자 착취의 수준이 21세기에 재현되고 있다. 중국의 노동자 계급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며 연간 2천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조합의 전통도 없고 법률상으로 보장된 권리도 없다. 임금은 체불되기 일쑤이다. 중국의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당국가 관료가 결탁한 적에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와 불평들을 인식하면서, 노동자 스스로의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미 투쟁은 시작되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추산하는 것 만해도 2003년 동안 3백만 노동자들의 58000여 건의 투쟁이 진행되었다. 십 년 전 이 수치는 9000건에 머물러 있었다. 최근 2년 동안 임금이 50% 오른 것도 사실이다.


2004년 5월 19일 ‘La Repubblica’는 유럽에서 150 유로에 팔리는 팀버랜드의 부츠가 어떻게 중국 중산지방에서 일하는 14살의 아이에게 45센트의 임금을 지급하면서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글을 실었다. 어린 노동자들은 안전장치나 유급휴일도 없이 하루에 16시간을일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에서 수차례 보았던 것처럼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착취에 저항하는 투쟁을 벌일 것이다. 나폴레옹의 말을 바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력한 중국의 노동자 계급이 일어날 때 자본주의 세계는 흔들리게 될 것이다.”

출처: www.marxist.com (In Defence of Marx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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