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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h Shu-mei 史書美-Transnationalism and Critical Theory Reconsidered (再論跨國主義與批判理論)
http://www.complit.ucla.edu/people/faculty/shih/
오늘 강연이 있어서 잠시 학교에 갔다가 얼떨결에 같이 밥까지 먹고 왔다. 강연자의 책이나 글을 전혀 읽어보지 않은 채 강연에만 근거해 초보적인 판단을 해 보았다. 피곤하므로, 간단히 질문과 관련한 메모만 남겨둔다.
나는 actional한 주체성과 minor(ity) transnationalism 사이의 긴장에 대해서 질문했다. 반응적인 것이 아닌 능동적인 행위/실천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여기에 계보학적 역사연구가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그렇지만, minor(ity) transnationalism은 최소한 공통성을 근거로 하기 위한 구조적 분석이 불가피할 것이다. 결국 둘 사이에는 긴장이 있는 것 아닌가? 미조구치 유조가 종축과 횡축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횡축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간 것은 나름 중요한 문제를 던져준다. 미조구치는 옥시덴탈리즘이나 본질주의의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史書美 선생은 파농을 따라, 주체성의 문제를 reactional한 것으로 사고하는 기존의 구도에서 벗어나 actional한 것과 함께 파악한다. 파농은 헤겔의 대논리학?을 따라 새로운 휴머니즘/인본주의를 추구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공통성은 결국 nation으로 파악된다. 거칠게 말해서 nation에 의해 주변화된 소수자들 사이에 transnational한 주체성을 획득한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녀의 기본적 구도는 기본적으로 nation이라는 보편성에 근거한다고 보인다. 이는 사카이 나오키에게서 확인한 것과 같은 것이다. 결국 민중의 실재적 역사가 포스트식민적 논리의 역사에 환원되어 버린다. 국민과 국민국가의 형성에 모든 역사가 환원된다. 국민과 국가적 관계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주체성의 문제, 즉 actional이라는 문제의식은 후자, 즉 국민의 서사에 환원되어 버릴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역사가 배제되는 이유는 예상할 수 있듯이 그것이 본질주의로 전락할 위험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구도에서는 절대 국민이 아닌 민족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미조구치 선생과는 반대로 이들은 옥시덴탈리즘을 피하기 위해서 종축을 버리고 횡축, 특히 국민의 서사만을 취한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분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화교출신이다. 그 후 대만에서 대학을 다니고 미국에서 학위를 했다. 현재 한국에는 연고가 없다고 한다. 한국어로 대화를 해보지는 않았는데 의사소통은 가능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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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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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에 대한 본질주의/특수주의적 또는 옥시덴탈리즘적 접근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모종의 인종주의/국민주의/국가주의적 위험으로 나타난다면, nation에 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비판은 nation의 보편성을 전제함으로 인해 국가간의 역사구조적 차이를 무차별화하는 '이론적 국민주의'를 띠며, 구체적 현실 속에서는 외부적 보편주의와 공모할 위험으로 나타난다.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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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꺼내서 확인해 보니 헤겔의 대논리학이 아니라 정신현상학을 인용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인지 강연자가 잘못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자의식은 즉자적으로도 대자적으로도 존재한다. 그것은 자의식이 또 다른 자의식을 위해서도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의식이란 인정과 승인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방적인 행위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뭔가 생산적인 것은 쌍방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마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인정하듯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써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의식의 본질적 특성이 완전히 벌거벗은 존재는 아니라는 것, 그 외양을 최초로 만들었던 그런 순진한 형태로 머무르는 것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삶이 팽창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개체의 주체성 구성의 차원에서 action과 reaction의 통일적 이해는 헤겔을 원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일정한 지속성과 역사적 구조를 갖는 한 사회의 집단적 주체로서의 대중의 action과 reaction은 헤겔의 논의로 설명이 가능할까? 사회 집단의 사회경제적 구조와 정신적 구조의 action의 측면은 결국 마르크스적 변증법이 필요한 것 아닌가? 탈식민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 가능성은 이렇게 개체와 사회라는 서로 다른 주체를 설정하는 것과 관련되는 듯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개념의 변증법이라는 헤겔적 틀을 폐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인식 주체와 대상이 달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