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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1949~2009): 다르게 쓴 역사> 상권이 출간 되었다.

상하권으로 구성된 책이 상권 먼저 나오다 보니, 의도는 아니었지만 당분간 저자와 역자의 후기를 감추는 효과가 있다. 잘 된 것일까? 모택동처럼 소귀신 뱀귀신이 유인되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기분이다. 벌써 각종 좌우파 보편주의의 귀신들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모택동처럼 이 귀신을 때려 잡을 수는 없다. 그냥 비유가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 힘도 없으니까...

사실 전리군 선생이 말하는 복잡화와 풍부화는 같은 것이 아니...
다. 궁극적으로 후자를 담보하지 못하는 전자는 역시 이론주의적이기 쉽다. 그래서 아마도 구조주의는 일정하게 이론주의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이 '문혁 이야기'라는 일각의 분석에는 문혁에 대한 보편적 이해의 틀이 작동하는데, 이건 아무래도 마르크스로부터 기원하는 측면이 크고, 기존의 틀에서 가장 많이 나간 것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같은 틀에 갇힌다. 한국인에게 중국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독일인에게 영국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우리는 어떤 '중국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독일인에게 영국이야기를 해준 마르스크처럼, 우리에게 중국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또 다른 한국인 '마르크스'가 있는가?

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보편적 마르크스로 하여금 중국을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은 마르크스에게도 폭력적이다. 그것이 바로 탈역사화된 보편주의적 틀의 관점일 것이다. 오히려 역사적 블록을 강조하는 그람시적 접근, 좀더 확장하면 탈식민주의decolonialistic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랬을 때, 이 책의 부제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다르게 쓴 역사'라는 부제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앞으로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진지하게 있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난다는 전제에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이 한국인에게 처음이자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http://www.hanulbooks.co.kr/tot_book/content.asp?pBID=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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