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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선생은 보라.

수많은 탈식민주의자들(de-colonialist)이 '德'(Democracy) 선생과 '賽'(Science) 선생이라는 서구 현대성의 핵심 가치가 가진 제국주의적 폐해를 여러 번 지적했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민주'와 '과학' 이데올로기의 강고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 어찌보면 너무 식상한 이야기일 수 있다. 유치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딱 한 번만 언급을 해야겠다. 

 

나의 입론에 비추어 보면 이렇다. '민주'와 '독재'라는 구도는 제국주의 세력과 그 매판 세력에 의해 20세기 내내 그리고 최근까지 전세계에서 폭력적으로 관철되어 왔고, 자주 전쟁의 구실이 되어 왔으며, 현재 '조선반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이원적 접근의 전제는 그것의 적용 대상을 균질화(시간적 단선화/공간적 평면화)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대상의 '역사'와 '지리'의 다원성을 소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대상이 '당위적으로' 탈역사적이고 탈지리적인 '현대' '국가'로 전제된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 하에서 '민주'와 '독재'라는 구분이 가능해진다. '사회' 내의 민주세력과 독재세력도 이와 같은 외재적 관점에 의해 구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없는 민주 세력이 민중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민중의 삶이 역사를 가진다는 전제하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독재' 정권이므로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관점은 정확히 '민주'에 부합한다. 그러나 남한에서 이 '민주'는 그 내부의 좌/우의 분기를 포함하더라도 대체적으로 서구의 보편주의적 현대성에서 주어진 것이다. 당연히도 '남한'에 대한 이러한 '민주'/'독재'적 인식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 담론 자체가 부여한 바와 같이 남한의 '현대'/'국가성'과 같은 '정상성'이라는 단일한 기준을 공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제 문제는 오로지 남한 내부의 문제(또는 '세계[시민])의 문제)가 되어 버리고, 그에 대한 해석, 진단, 문제해결 방안 또한 '현대' '국가'에 대한 보편주의적 이론(나아가 그의 이원적 구성으로서 특수주의적 이론)으로 제시된다. 결국 식민주의적 인식은 이와 같은 가상성을 매개로 '외부'와의 역동적 관계를 소거하는 자폐적인 인식으로 귀결된다. 요즘도 팽배한 박정희와 그에 이어지는 박근혜에 대한 '악마화'된 선동적 관점은 외부적 관련성을 내부적 맥락과 결합하여 종합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지적 현실이 낳은 단편적인 인식의 표현이다. '민주화' 담론은 이와 같은 '정상성'의 가상적 성취를 역사화한 담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상성'의 논리와 역사에서 은근슬쩍 사라지는 '미국'의 존재를 보라.

 

그러나 '신식민성'이라는 '식민성'의 연속성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성'과 '국가성' 모두 기각된다. 이는 지식사상적으로 보편/특수주의적 해석이 아닌 주체적인 지식생산의 관점을 요구한다. 보편적 '현대' '국가' 이론을 주체적으로 참고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뒤집어 씌울 수 있는 우리의 역사와 현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내재적 전화가 없는 '반독재'는 인식론적으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이 민주/독재 담론은 지식사상적 담론이 아니라 '정치'적 담론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담론이 지식사상의 영역에 직접 도입될 경우,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의 논리로 진정한 '민주'와 결합될 수 있는 지식사상을 형성할 사상해방공간의 출현을 제약하는 인식론적 효과를 갖게 된다.

 

정리하자면, 탈식민주의적 학지의 견지에서 보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주체적 평가는 당연히도 '반독재'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 출발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지적 현실은 어떠한가. 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민주'를 표방하는 '식민주의적 학술체제'가 이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사고의 수준에서는 유치하지만 현실에서는 강력한 권력작용이기도 하기 때문에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박정희 독재정권 옹호'라고 비난받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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