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1966년(!)에 알튀세르는 "레비스트로스에 관하여"라는 글로

레비스트로스를 비판한다. 그의 사후에 유고로 출간된 이 글은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의 쟁점,

나아가 당대를 풍미한 구조주의 사조와 알튀세르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몇 가지 논점이 있겠지만, 지금은 한 가지에만 집중하려 한다.

알튀세르는 레비스트로스가 형식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알튀세르 자신이 형식(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즉각 덧붙인다.

비판 대상은 형식주의 일반이 아니라, 잘못된 종류의 형식주의라는 것이다.)

특히 문제는, 그가 가능성과 실재성의 관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어떤 형식적 가능성이 실재하게 되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알튀세르가 볼 때 진짜 설명해야 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왜 다른 가능성이 아니라 이 가능성이 실현되게, 따라서 실재적이게 된 것인가?"

("Pourquoi c'est tel possible et pas tel autre, qui est devenu, qui est donc réel?"(p.441)

"Why is it this possibility and not another which has come about, and is therefore real?"(p.26))

 

이는 필연성의 관점에서 가능성의 관점을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오히려 이 질문이야말로 알튀세르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실현되지 않은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과학적 필연성'의 틀에 가두려고 한 것이라고,

결국 알튀세르가 말년에 제기한 '우발성/마주침의 유물론'은

필연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능성이라는 화두를 복권시킨 것이다 등등.

 

아직 가설이지만,

나는 이 논쟁을 정확히 가늠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를 우회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상드르 마트롱(Alexandre Matheron, "Essence, Existence and Power in Ethics I: The Foundations of Proposition 16", God and Nature: Spinoza's Metaphysics, E.J.Brill, 1991, p.29.)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질문, 곧 "왜 무(無)가 아니라 어떤 것이 실존하는가?"

("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라는 질문을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마트롱이 볼 때 <윤리학> 1권의 신 증명에서 스피노자가 제기하는 명제는

"그 본질이 인식가능한(즉 모순이 없는) 모든 것은,

외부의 장애물이 그것이 실존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면, 실존한다."

("Anything whose essence is conceivable (i.e., non-contradictory) exists

if no external obstacle prevents it from so doing.")

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즉 무언가가 실존하지 않으려면,

그것이 실존해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본질에 내재적이든, 외재적이든,

그것이 실존하지 않아야만 하는 실정적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질문을 대체하는 스피노자의 질문은 이것이다.

"왜 모든 것이 아니라, 다만 특정한 사물들이 실존하는가?"

("Why are there only certain things rather than everything?")

 

알튀세르가 레비스트로스에게 제기한 쟁점은

바로 이런 스피노자적 노선 위에 있는 것 아닌가?

'가능성'이라는 모호한 말을 가지고 '필연성' 또는 '인과성'의 문제를 회피하지 말라는 것.

그러나 이는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헤겔적 명제를 보수적으로 전유,

따라서 현재와 같은 실존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움과 변화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실적 가능성이 있는지를 유물론적으로 분석하고,

그 가능성이 현실성/실재성에도 불구하고 실존하지 않는 이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실존하는 것을 가로막는 물질적 장애물, 또는 세력관계

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유물론적 요청과 다르지 않다.

 

가능성이라는 개념은,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 공허하기 일쑤다.

가능성을 말할 때 즉각 제기되는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현실이 지배하는가, 왜 그런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는가

("신이 선하고 전능하다면, 왜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는가,

왜 신은 우리를 고통 속에서 신음하도록 내버려 두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면, 왜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가,

왜 인간은 봉기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지배와 공모하는가?" 등등)

라는 뼈아픈 질문이다. 이와 대결하지 않는 한 가능성 개념은 무력할 뿐이고,

더 이상 가능성을 믿지 않는 냉소주의,

현재의 지배 관계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라고 믿는 보수적 현실주의,

또는 현실을 거부하고 유토피아로 도피하는 자폐주의

에 대해 의미있는 반작용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 스피노자를 따라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현실에는 현실을 초과하는 대안적이고 실재적인 반경향들이

항상-이미, 그리고 항상-아직 실존한다.

문제는 관념적 가능성을 되뇌이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적 반경향들을 인식하는 것,

그것들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세력관계를 인식하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현실의 물질적 도래를, 이 경향들과 함께 기획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나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 사이의 쟁점은

결국 관념론과 유물론, 정치적 보수주의와 급진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귀착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아직 가설에 불과하고

더 다듬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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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0/17 17:16 2010/10/1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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