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 개인으로서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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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아: 나 좀 가만 놔 둬, 국아. 응?

강국: 그 분이, 그렇게 밉냐? 그렇게 이해가 안 되냐?

중아: 안 미워. 이해해.

강국: 그럼 친자 확인이라도 해. 일주일이면 결과 나와.

중아: 지금은 좀! 내가 사람이 돼야, 부모를 만나지. 난 아직 사람이 아니야. 계속 입양 다닐까? 한국에서 힘들다고, 아일랜드 가족한테 엎어지고, 거기서 힘들었다고 다시, 한국 가족한테 엎어지고. 그렇게 살까 나? 사람 아니고, 입양아로만 살까?

강국: 뭐…, 입양아는 사람 아닌가….

중아: 진짜 사람. 내가 만드는, 진짜 사람. 아무도 안 끼어들고, 내가 만드는 사람으로, 아무한테도 안 맡겨지고, 내가 만드는 사람으로. 나 그렇게 만들고 싶어. 너한테 엎어져 있느라고, 그걸 안 했다 내가.

강국: 난, 네가 나한테 엎어져 있는 게 좋은데. 난 내가 네 힘이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너한텐 별로였네.

 

- 김진만 연출, 인정옥 극본, <아일랜드>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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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연휴를 만나서 밀린 영상과 글을 (다시) 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젤 좋아했던 드라마인 <아일랜드>다.

당시 위 장면을 가장 인상깊게 봤는데

다시 봐도 역시 그렇다.

작품의 주제가 집약되어 있기도 하고,

중아와 국이 이별하는 이유를 가장 분명하게 상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대사는, 적어도 내가 본 드라마에 한에서는,

<아일랜드>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그게 입양아든, 고아든,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이든,

드라마에서 '정상 가족'의 유대에서 이탈한 인물들은

대개 새로운 가족을 찾아 헤매거나 기존 가족을 회복하려는 식으로

얼마간 필사적으로 움직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이 '연옥'에서 심한 고통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아일랜드>가 가족이나 공동체 일반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일랜드>는 이 이탈의 시간을 어떻게든 단축시키려 들기보다

이 시간을 유예하면서 '개인-되기'를 뒷받침하는 환경으로 변조하려 한다.

'계속 입양 다닐까'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나듯

이 장면에서 말하는 '가족' 및 가족에 대한 소속으로서 '입양'(adoption)은

'일차 공동체' 및 유희 없는 소속 방식으로서 '접착'(adhesion)의 환유일 것이다.

개인이 되려면 그런 소속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중아는 주장한다.

거리두기를 통해 확보된 여백에서, 직업이나 우정,

그리고 (중아가 자신에게 '엎어져 있'길 바라는 국과는 만들 수 없는) 사랑의 관계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이 되라는 것, 가족에 '가입'하되 가족에 '접착'되지 말라는 것이

내가 이 장면에서 수신한 전갈이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중심에 고복수라는 남성이 있고,

송미래와 전경이라는 여성은 어쨌든 그의 (필수적) 지지자 역할에 머무른다면,

<아일랜드>의 중심에는 이제 이중아라는 여성이 서고,

강국과 이재복이라는 남성이 그녀의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지지자가 된다.

여성의 개인화/개성화를 중심에 놓을 뿐더러

다른 관계(그게 직업이든, 가족이든, 연애든간에)를 이 목적의 수단이나 조건으로

이 정도까지 배치한 드라마가 과연 있었던가?

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중아의 개인화 방식은, 물론 이 드라마의 중심에 있긴 하지만,

중아가 상징하는 인물의 기질에 맞는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이 드라마에는 네 명의 주요 인물, 더 정확히 말하면 소수자 유형이 나온다.

(탈)입양아 이중아, 고아 강국,

에로연기로 가족을 부양하는 한시연, 실업과 반실업을 오가는 이재복.

각자에게는 소수자로서의 아픔이 있고,

이를 치유하거나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관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중아가 원하는 관계를 국은 (어느 시점 후에는) 주지 못하고

시연에게 필요한 관계를 재복은 (역시 어느 시점 후에는) 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중아의 입장에서 국이 상징하는 (가족과 경호로 대표되는) 안정성은 독이고,

시연의 처지에서 재복이 상징하는, 자유롭지만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관계 역시 그렇다.

국과 재복 자체가 나쁜 이들은 아니나, 어느 시점 후의 중아와 시연과의 관계에서는

슬픔이 따라나올 따름이다.

 

즉 이 드라마는, 소수자들끼리, 또는 상처 입은 이들끼리 서로 이해하고 보듬는다는

통상적인, 하지만 대개는 안일한 관념을 비판한다.

말하자면 소수자들의 자생적 유대란 없다.

그들 각자의 상처와 아픔, 거기에 알맞는 치유와 관계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접근한다면 오히려 사태가 악화될 뿐이다.

어느 시점 후의 중아와 시연에게 국과 재복은 고통을 크게 할 뿐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 후에 중아가 재복을, 시연이 국을 만난다면

그들은 선순환을 그리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자유를 원하는 중아에게는 '기둥서방'이,

보호를 원하는 시연에게는 '경호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별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한 관계를 깡그리 파괴하지 않으면서 다른 관계로 성공적으로 이행할 것인가

라는 <아일랜드>의 이 놀라운 질문.

(이 드라마 2회 마지막 부분에서 '1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중아와 국, 시연과 재복은 다소 느닷없이 함께 살고 있으며,

국이 중아를 보내주겠다고 마침내 결정하는 것은 15회이다.

드라마 대부분이 이별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런 드라마가 2004년 공중파 방송국에서 제작되고, 방영되고,

따라서 기록으로 남았다는 게 놀랍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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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1/05/06 15:33 2011/05/0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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