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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가 Violence et Civilité (2010) 45쪽 각주 2에서 언급한

4편의 글 중 3편은 구했는데,

Philippe Raynaud, "Les philosophes et la civilité", dans Phlippe Roger (dir.), L'Homme des Lumières de Paris à Pétersbourg, Naples, Biblioteca Europea, Vivarium, 1995. 은 도서관에 없다.

도서관에 신청할 수 있는 책 한도도 넘어서 아마 당분간 구하기 어려울 듯...

 

이 중 단행본은 제외하고,

사전(辭典) 성격의 논문 2편을 올린다.

 

[Civilisation-Civilité.pdf (2.14 MB) 다운받기]

[La civilité et la politesse.pdf (2.66 M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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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14:01 2011/06/0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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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존의 출가

"즐겁게 놀고 난 하루의 피로를 풀려고 태자는 침상에 몸을 기대셨다. 수많은 아리따운 궁녀들은 태자를 위로하려고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장단을 맞춰 춤을 추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무의 미묘함도 고요한 태자의 마음을 움직일 길이 없었다. 태자는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궁녀들도 이를 보고서는 춤추고 노래할 흥이 나지 않아 주악을 그치고 잠에 빠졌다. 향유의 등불만이 고요함 중에 깜박이고 있었다. 태자는 문득 잠에서 깨어나 침상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보셨다.

정적에 넘치는 밤, 아름다운 궁전, 향기로운 향등 속에 지친 무희들의 잠든 한심한 모습! 참으로 낮에는 화려한 궁전도 밤에는 무덤 같았다. 태자는 몸서리치면서 일어나 "일체가 이 모양이다. 더 참을 수는 없다"고 마음 속으로 부르짖고는 곧 궁전을 탈출하려고 결심(한다)."

- 불교성전편찬연구회 편역, <신역 불교성전>, 홍신문화사, 1992, 22~23쪽(제5절 출가).

 

불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지만

석존의 출가에 관한 설화,

곧 천하에 부러울 게 없던 한 태자가

궁의 네 문을 나서 노, 병, 사를 목격한 후 출가자를 만나는 장면('사문출유'),

그리고 출가를 결심한 태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왕이 베푼 성대한 연회가 끝난 후

그 아름답고 화려하던 사람과 물건이 어지럽고 추하며 무덤처럼 변한 걸 보고

궁을 탈출하는 장면은 기억에서 쉬 잊히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늦게까지 술 먹고 그 자리에서 잠들었다가

다음날 폐허로 변한 모습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허무함을 느낀 적이 꽤 있거니와,

주위가 어지럽지 않고, 또 제대로 집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전날 술자리에서의 흥겨움 심지어 '광란'과의 괴리 때문에

다음날의 평범한 일상을 왠지 우울하게 느끼는 경험을 할 때마다

저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근래 왁자지껄한 술자리를 자주 안 하다 보니

어쩌다 그런 자리를 들르고 나면 때때로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어제 오랜만에 동기들이랑 술을 먹고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도 좀 그랬다.

휴일이어서, 숙취를 이기고 정신없이 출근할 필요도 없고

술이 완전히 깨지 않아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으며

영화도 왠지 확 끌리지 않는 날.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불경의 저 장면이 새삼 떠오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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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22:16 2011/05/10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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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 개인으로서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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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아: 나 좀 가만 놔 둬, 국아. 응?

강국: 그 분이, 그렇게 밉냐? 그렇게 이해가 안 되냐?

중아: 안 미워. 이해해.

강국: 그럼 친자 확인이라도 해. 일주일이면 결과 나와.

중아: 지금은 좀! 내가 사람이 돼야, 부모를 만나지. 난 아직 사람이 아니야. 계속 입양 다닐까? 한국에서 힘들다고, 아일랜드 가족한테 엎어지고, 거기서 힘들었다고 다시, 한국 가족한테 엎어지고. 그렇게 살까 나? 사람 아니고, 입양아로만 살까?

강국: 뭐…, 입양아는 사람 아닌가….

중아: 진짜 사람. 내가 만드는, 진짜 사람. 아무도 안 끼어들고, 내가 만드는 사람으로, 아무한테도 안 맡겨지고, 내가 만드는 사람으로. 나 그렇게 만들고 싶어. 너한테 엎어져 있느라고, 그걸 안 했다 내가.

강국: 난, 네가 나한테 엎어져 있는 게 좋은데. 난 내가 네 힘이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너한텐 별로였네.

 

- 김진만 연출, 인정옥 극본, <아일랜드>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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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연휴를 만나서 밀린 영상과 글을 (다시) 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젤 좋아했던 드라마인 <아일랜드>다.

당시 위 장면을 가장 인상깊게 봤는데

다시 봐도 역시 그렇다.

작품의 주제가 집약되어 있기도 하고,

중아와 국이 이별하는 이유를 가장 분명하게 상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대사는, 적어도 내가 본 드라마에 한에서는,

<아일랜드>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그게 입양아든, 고아든,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이든,

드라마에서 '정상 가족'의 유대에서 이탈한 인물들은

대개 새로운 가족을 찾아 헤매거나 기존 가족을 회복하려는 식으로

얼마간 필사적으로 움직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이 '연옥'에서 심한 고통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아일랜드>가 가족이나 공동체 일반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일랜드>는 이 이탈의 시간을 어떻게든 단축시키려 들기보다

이 시간을 유예하면서 '개인-되기'를 뒷받침하는 환경으로 변조하려 한다.

'계속 입양 다닐까'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나듯

이 장면에서 말하는 '가족' 및 가족에 대한 소속으로서 '입양'(adoption)은

'일차 공동체' 및 유희 없는 소속 방식으로서 '접착'(adhesion)의 환유일 것이다.

개인이 되려면 그런 소속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중아는 주장한다.

거리두기를 통해 확보된 여백에서, 직업이나 우정,

그리고 (중아가 자신에게 '엎어져 있'길 바라는 국과는 만들 수 없는) 사랑의 관계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이 되라는 것, 가족에 '가입'하되 가족에 '접착'되지 말라는 것이

내가 이 장면에서 수신한 전갈이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중심에 고복수라는 남성이 있고,

송미래와 전경이라는 여성은 어쨌든 그의 (필수적) 지지자 역할에 머무른다면,

<아일랜드>의 중심에는 이제 이중아라는 여성이 서고,

강국과 이재복이라는 남성이 그녀의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지지자가 된다.

여성의 개인화/개성화를 중심에 놓을 뿐더러

다른 관계(그게 직업이든, 가족이든, 연애든간에)를 이 목적의 수단이나 조건으로

이 정도까지 배치한 드라마가 과연 있었던가?

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중아의 개인화 방식은, 물론 이 드라마의 중심에 있긴 하지만,

중아가 상징하는 인물의 기질에 맞는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이 드라마에는 네 명의 주요 인물, 더 정확히 말하면 소수자 유형이 나온다.

(탈)입양아 이중아, 고아 강국,

에로연기로 가족을 부양하는 한시연, 실업과 반실업을 오가는 이재복.

각자에게는 소수자로서의 아픔이 있고,

이를 치유하거나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관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중아가 원하는 관계를 국은 (어느 시점 후에는) 주지 못하고

시연에게 필요한 관계를 재복은 (역시 어느 시점 후에는) 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중아의 입장에서 국이 상징하는 (가족과 경호로 대표되는) 안정성은 독이고,

시연의 처지에서 재복이 상징하는, 자유롭지만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관계 역시 그렇다.

국과 재복 자체가 나쁜 이들은 아니나, 어느 시점 후의 중아와 시연과의 관계에서는

슬픔이 따라나올 따름이다.

 

즉 이 드라마는, 소수자들끼리, 또는 상처 입은 이들끼리 서로 이해하고 보듬는다는

통상적인, 하지만 대개는 안일한 관념을 비판한다.

말하자면 소수자들의 자생적 유대란 없다.

그들 각자의 상처와 아픔, 거기에 알맞는 치유와 관계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접근한다면 오히려 사태가 악화될 뿐이다.

어느 시점 후의 중아와 시연에게 국과 재복은 고통을 크게 할 뿐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 후에 중아가 재복을, 시연이 국을 만난다면

그들은 선순환을 그리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자유를 원하는 중아에게는 '기둥서방'이,

보호를 원하는 시연에게는 '경호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별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한 관계를 깡그리 파괴하지 않으면서 다른 관계로 성공적으로 이행할 것인가

라는 <아일랜드>의 이 놀라운 질문.

(이 드라마 2회 마지막 부분에서 '1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중아와 국, 시연과 재복은 다소 느닷없이 함께 살고 있으며,

국이 중아를 보내주겠다고 마침내 결정하는 것은 15회이다.

드라마 대부분이 이별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런 드라마가 2004년 공중파 방송국에서 제작되고, 방영되고,

따라서 기록으로 남았다는 게 놀랍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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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6 15:33 2011/05/0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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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읽을 글 중 하나

학교수업 중에 <논문연구>라는 과목이 있는데

강의계획이 있는 정식수업이 아니고,

(석사/박사)논문 주제와 관련있는 교수를 선정하여 1대 1 지도를 받는 수업이다.

말은 그런데, 실제로는 대개 형식적으로 진행되어서

한 학기에 한두 번 정도 만나서 밥먹고 얘기나누는 데 그치곤 한다고 들었다.

 

나는 이번 학기에 김홍중 선생과 논문연구를 하기로 했는데

학기 초에 만나서 상의하기를,

너무 부담스럽게 하지는 않되, 그래도 너무 형식적이지는 않게 진행키로 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 적당한 불어 글을 하나 번역하고 이야기하는

자리를 갖는 것으로 했다.

 

무슨 글을 읽을까 좀 고민하다가

지난 학기 보고서 쓴 것도 있고, 개인적인 관심사이기도 해서

마르셀 모스의 <사회학과 인류학>에 레비스트로스가 붙인 서문(1950)

을 읽기로 했다. [Introduction (1950).pdf (3.90 MB) 다운받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담없이 가자고는 했지만

정식으로 레비스트로스를 읽는 건 처음이라 어떨지 모르겠다.

뭐 이런 장치라도 있어야 고민을 놓지 않을 것 같아서 벌인 일이긴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닌 건 분명하다.

오늘이 벌써 4월 5일이니까 이제 2주 남았다.

하는 일은 별로 없는데, 시간은 참 빨리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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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5 20:17 2011/04/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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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으로 귀엽다!

며칠 전, 지브리 스튜디오 25주년 기념 차

일본 부도칸에서 열린 히사이시 조 콘서트 DVD

를 구했다. (구할 수 있는 주소는 http://www.etorrent.co.kr/bbs/board.php?bo_table=torrent_mov1&wr_id=2091258&page=&c_page=1)

지브리 팬이라면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공연인데,

중간에 한 아이가 포뇨 노래를 부르는데, 정말 충격적으로 귀엽다!

사실 이 캡쳐 사진으로는 그 느낌이 잘 전달되지 않고

이 아이의 율동과 노래를 함께 들어야 한다.

웃지 않고 무표정하게 부르니까 더 귀엽다.

인형이 노래부른다면 아마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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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1 13:47 2011/04/0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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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A politics of civility therefore aims at changing the social conditions of perception, which are not only cultural, but also institutional. Such change is possible provided we do not adopt a narrow, purely legal and administrative view of institutions, but see them as a dialectical interplay of traditions and critiques, collective and individual inventions, where the exception and the provocation shape new normativities. Which is typically what writers, artists, and experimental thinkers aim to do."

- Etienne Balibar, "Interview with Étienne Balibar", in Beth Hinderliter et al. eds., Communities of Senses: Rethinking Aesthetics and Politics, Duke University Press, 2009, p.319.

 

오늘 수업은 참 쓸데없었는데

특히 제도와 사회운동을 외재적으로 대립시킨 점이 더 그랬다.

듣다 보니 며칠 전 읽은 위 문구가 떠올랐다.

뭐 그랬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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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2 21:45 2011/03/22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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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혹을 못 이기고 인터뷰를 읽었다...

월요일이 되어야 복사기를 쓸 수 있으니,

새까맣게 줄치며 읽을 수 있을 그 때까지 어떻게 기다릴지...

어쨌든 발리바르의 이 언급(그리고 이 언급 전후의 다른 언급들)은

알튀세르와 랑시에르, 발리바르(나아가 푸코와 브레히트와 맑스),

그리하여 정치와 예술(또는 감성학으로서의 미학)의 관계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퍽 흥미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으리라.

 

"(…) It would be fascinating, if we had time, to discuss these concepts'[랑시에르의 'partage' 개념 - 인용자] relationship to a traditional notion of ideology in the Althusserian sense. From Althusser, Rancière inherited a Brechtian insistence on the reciprocity of perspectives between theater and politics, which allows one to understand how political agents can distance themselves from their own representations in history or actively produce new ones. But Rancière completely rejected the Marxian idea that discourses ― with the ideal exception of the discourse of a scientific practice of politics ― remain blind to their own determinations. This also leads him to suggest another possible understanding of the aesthetic metaphor of the theatrical stage, the one that I borrowed from Freud's idea of "the other scene," that is, the theater of the unconscious. This has been for years the latent, at times even explicit, divergence between Rancière and me (perhaps two very different ways of departing from Althusser): he would insist on the manifest side of the scene, the semantic and sensible process that makes the conflict visible, and I would insist on the hidden side of the scene (except for some violent intrusions), which calls for a "civilization" of revolution itself. He would also insist on the emancipatory breakthrough that sets a new stage for the political by giving a new visibility to the discourses and the bodies that were barred from public expression; and I would insist on the risks, the ambivalence of the violence that is necessary to break the consensus, to remove or open up the power structures that prevent the subaltern from sharing in the public sphere or the dominant culture. (…)"

- Etienne Balibar, "Interview with Étienne Balibar", in Beth Hinderliter et al. eds., Communities of Senses: Rethinking Aesthetics and Politics, Duke University Press, 2009,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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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9 16:46 2011/03/1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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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개념의 효과

"Car le même problème se pose également dans toutes les disciplines qui ont pour objet les faits culturels: qu'est-ce qui permet de reconnaître, par exemple, dans l'ensemble des phénomênes divers et confus à travers lequels il se réalise, ce qu'on appelle un mariage? Croit-on qu'on puisse se contenter d'observer les gestes des acteurs? Inversement, croit-on qu'il suffise de constater qu'on enferme depuis des siècles des individus désignés comme des coupables pour affirmer qu'il s'agit d'une seule et même pratique? Lévi-Strauss notait que deux récits mythiques qui ne se ressemblent pas peuvent être deux formes d'un même mythe, alors que deux motifs narratifs semblables appartiennent en réalité à des univers tout à fait différents, et convoquait à la barre les textes de Saussure. Le structuralisme en histoire n'a-t-il pas aussi été avant tout une manière de relever le problème que posait la délimitation d'un événement? Et si Foucault a pu sembler un temps appartenir au structuralisme, n'est-ce pas parce qu'il proposait un concept d'énoncé qui ne confondait pas avec telle ou telle phrase prononcée? Mieux, dans toute son œuvre, ne s'efforce-t-il pas de défaire les continuités apparentes pour montrer que des pratiques apparemment similaires, comme l'enfermement, l'aveu, l'abstinence, peuvent avoir une définition profondément différente en fonction des contextes historiques dans lesquels elles sont prises? De même, Althusser a eu recours au concept de structure lorsqu'il s'est agi de montrer que le corpus des textes de Marx ne fournissait pas l'unité pertinente permettant de comprendre sa pensée parce qu'il était traversé par un «changement de problématique». La structure ne désignait pas la forme d'une totalité donnée, mais au contraire le moyen de diagnostiquer les discontinuités réelles sous les continuités apparentes. Il n'y a pas une méthode commune, mais un problème commun, qui a été construit de manières différentes."

- Patrice Maniglier, La Vie énigmatique des signes - Saussure et la naissance du structuralisme, Éditions Léo Scheer, 2006, pp.16~17.

 

구조주의 운동이 공유한 문제, 유사성 비판.

인상적인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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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3 13:48 2011/03/1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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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us first remember Machiavelli, particularly one aspect of his thought which has been particularly influential on contemporary neo-republican and democratic theories which in the post-68 era combined a post-totalitarian reflection on the immanent perversions of revolutionary conquests of power and, more positively, a phenomenology of “new social movements”, which aimed not so much at “conquering power” than democratizing existing institutions or pushing and coercing the State towards its own democratization (thus in a sense retrieving  a fundamental tradition of civic mobilizations and movements for civil rights). I am particularly thinking of Hannah Arendt, Claude Lefort, and Jacques Rancière. Machiavelli’s proposition, as we remember, expressed in the first chapters of the Discourses on Livy, states that in class societies (he speaks of the “humors” among which the wealth, prestige and power are unequally distributed in the Republics, ancient or modern, Rome and Florence being taken as examples), the objective of the dominant classes is to keep their power and increase it continuously, therefore oppress the dominated mass, but the objective of the mass is simply not to be dominated: it is not to conquer power or reverse the relationship in a symmetric manner, to become dominant in turn, but to neutralize the dominant will to power. The consequences of such negative representation of the political quest for justice, whose relative success in the history of Republics Machiavelli would credit for their prosperity and stability, are far reaching as we know, perhaps more than ever in today’s politics."

- Etienne Balibar, "Justice and Equality: A Political Dilemma?: Pascal, Plato, Marx"

(내가 가지고 있는 영역본의 출처는 Umbra였던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 어쨌든 인터넷에 전문이 있어 링크한다. www.mcrg.ac.in/Lecture_Etienne.pdf)

 

작년 언젠가 이 글 불어본을 인용했는데

오늘 우연히 영역본을 인터넷에서 찾았다.

작년에도 이 문구를 인용하고 단상을 적어 두었는데

다시 봐도 눈에 확 들어오는 주장이다.

계속 생각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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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0 16:39 2011/03/1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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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의 2009년 인터뷰

생각난 김에, 웹서핑 중 우연히 구한 발리바르의 2009년 인터뷰를 등록한다.

(http://www.puf.com/puf_wiki/images/7/7a/Interview_Balibar.pdf)

 

제목이 "Il faut développer une éthique de soi"인데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후기 푸코를 비판적으로 상속하는 발리바르 나름의 방식이 아닐까 해서인데

물론 '상속'과 '비판'이 함께 있다는 게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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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6 20:25 2011/03/0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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