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에 관한 짧은 생각

아니나다를까 지금까지 발리바르 글만 읽었다. ㅠㅠ

뭐 그래도 놀지는 않았으니까...

 

아직 충분히 읽지도 않았고

거기서 다루는 여러 화두를 다룰 수도 없는 노릇.

한두 가지 정도에 관해서만 조금 더 생각해 보려 한다.

 

알다시피 맑스주의 역사에서 공산주의는 항상 사회주의와 쌍을 이뤘다.

사회주의가 지향할 '규제적 이념'이든, 사회주의를 보다 급진화.발본화할 필요성이든.

그런데 1998년에 쓴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라는 글에서 발리바르는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쌍을 해체하려고 시도하며

사회주의의 다음 단계로서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공산주의

라는 도발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물론 1990년대 초반에 쓴 '공산주의 이후의 유럽'이나

심지어 1976년에 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도 이런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이번 글에서 발리바르는 이 명제를 연장하면서

공산주의에게 '사회주의의 지양'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역설적 대체보충'

또는 '인민주의의 대안'라는 새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와 '인민(주권)'(peuple)이라는 준거점을 공유하는 인민주의라는 혁명적 담론,

자본주의(또는 제국주의)에 맞선 '인민-되기'라는 혁명적 운동

'내부에서의' 대안적 비판으로 공산주의를 재규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지금까지 발리바르의 이론화와 수미일관할 뿐더러

그의 사변적 작업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이 '공산주의'의 혁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계승하고 스피노자를 경유하여

'대중들'(masses)을 이론과 정치의 중심 문제로 제기한 그의 작업은

어떤 점에서는 현 정세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인민주의

에 대한 좌익적 개입을 이론적으로 준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인민주의에 대한 우익적 비판을 부지불식간에 수용하고

대중운동의 인민주의 경향 앞에서 외재적 계몽주의로 후퇴한 것이야말로

(나를 포함한) 어떤 이들의 가장 큰 이론적.정치적 패착이었다.

 

현 정세에서 맑스(주의)가 다시 돌아온다고 할 때

그것은 비단 사회주의, 그리고 그 이론적 기초로서 (정치)경제학 비판

의 귀환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불가결한 필요조건이며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이론의 문화주의 경향을 감안할 때

막대구부리기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만이라면, 그것은 '좋았던 옛 시절'로의 회귀일 뿐이며,

그럴 거였다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를 힘겹게 읽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맑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 도식을 비판하면서

역사에는 경제와 이데올로기라는 '두 개의 토대'가 있다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를 데 없이 쇼킹한 명제를 제시하고,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맑스주의만으로는 결코 안 되며

스피노자를 비롯, 맑스주의 이외의 이론적 자원을 읽어야 한다고 할 때,

그 말로 말미암아 기존의 체계가 해체되는 고통을 겪고

새로 열린 저 막막한 지평 앞에서 현기증을 느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맑스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지만,

어차피 문제는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맑스의 어떤 부분을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할지

가 아니었던가.

 

사회주의-공산주의 쌍을 해체하면서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인민주의-공산주의로, 새롭게 자리를 배정한다.

내가 볼 때 그 정치적 함의 중 하나는,

민주주의를 놓고 인민주의와 공산주의가 각축을 벌이는 현 정세에서

사회주의(그리고 (정치)경제학 비판)라는 관점을 충실하게 견지하는 것만으로는

결정적 문턱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공산주의가, 곧

인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우익적 전유에 맞선 민주주의의 좌익적 전유

(아마 더 정확히 말한다면 '탈-전유'(ex-appropriation))가 필요하다.

사회주의 없이 공산주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없이 사회주의 없는 것 역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인민주의를 비웃거나 매도하지 않고 진지하게 다루는 것.

내가 보기에 우리가 우선 출발해야 할 곳은 거기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미 거기서 출발했기 때문에

너무 늦지 않으려면 더욱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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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0/10 21:22 2010/10/10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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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산주의에 대한 발리바르의 새로운 정식화

    Tracked from 지연효과 (After-Effect) 2010/10/12 07:42 Delete

    장선생 덕분에 저도 좋은 글 읽었습니다. 부랴부랴 읽어서, 좀 더 자세히 뜯어봐야할 것 같습니다만, 예전에 제가 쓴 '왜 더 많은 민주주의인가?'에서 슈미트에 대한 발리바르 논의를 해석하면서 저도 피티 독재가 피티에 대한 독재로 변하는 문제는 결국 근대 '주권'의 아포리아에 관련될 것이라고 지적했었는데, 거기에 대한 발리바르 자신의 답변이 드디어 이 글에 나온 것 같습니다. 인민주권에 대한 내재적 비판으로서의 공산주의 또는 (인민주의로 퇴락할 수 있..

  2. @leereel9님의 트윗

    Tracked from @leereel9 2010/10/25 04:20 Delete

    http://blog.jinbo.net/aporia/138 "오늘 독서에 관한 짧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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