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알튀세르의 작업 전체는 '돌발로서의 시작'(commencement qua surgissement)이라는 문제로 집약될 수 있을지 모른다. 초기에는 새로운 과학의 설립이, 후기에는 새로운 세력이나 정치체의 설립(물론 이런 구분은 편의적이고 도식적인 것이다)이 각각 전면에 나선다. 그가 철학에 점점 더 중심적 지위를 주는 것도 이 때문일 텐데, 초기(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비판 이후)의 알튀세르에게 철학이란 아직 과학이 아닌 것(이데올로기 특히 이론적 이데올로기)에서 과학이 돌발하는 그 순간, 또는 차라리 그 갈등적 과정과 투쟁 자체를 이르는 것이고, 후기(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비판 이후)의 알튀세르에게 철학은 (모든 정치적 실천을 과잉결정하는) 이데올로기(특히 실천적 이데올로기)에서의 계급투쟁, 맞수가 점유하고 있는 상징적 진지를 탈취하고, 확보한 진지를 탈환하기 위해 끝없이 이어지는 맞수의 공격에 응수함으로써, 유리한 이데올로기적 세력관계를 설립.지속하는 갈등과 투쟁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은 과학이 아니고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보기에, 자신이 정의한 의미에서의 철학이 없다면 새로운 과학은, 더욱이 혁명적 정치는 시작될 수 없다. 세계는 허공이 아니라, 무언가로 이미 가득 차 있는 곳으로, 기성의(accompli, accomplished) 질서와 세력관계는 새롭고 혁명적인 것이 시작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성의 질서를 동사적 의미에서 '미완'(inachever, incomplete)시키고, 새로운 것의 도래를 예견/선취(anticiper, prefigure)하는 차이화(différenciation, differentiation)와 거리두기(Verfremdung, distanciation), 자리바꿈(déplacement, displacement), 심지어 (시베르탱-블랑이 말하는 것처럼) '은유화'(métaphorisation, metaphorization)와 (랑시에르 식으로 말하자면) '탈동일화'(désidentification, disidentification)의 실천이 필요하다. 이는 실험적이고, 불확실하며, 잠재적인, 따라서 일종의 내기(pari, wager)의 성격을 띤다. 철학이 과학이나 정치가 아니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 또는 차라리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시된 우발성(aléatoire, contingency)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과학과 정치는 시작할 수 없거나, 시작했다 하더라도 느닷없이 중단되고 소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정세는 항상 변화하며, 맞수 역시 변화한 정세를 이용하여 새롭고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끝없이 반격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알튀세르가 '철학'이라는 이름을 완강하게 고수함으로써 제기하려 했던 것은, '돌발로서의 (재)시작'을 위해 필요한 지적 조건은 무엇이고, 그것을 확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였다. 알튀세르의 작업에 관해 이런저런 이견들이 있겠지만, 그가 제기한 이 문제는 가히 영원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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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1/07/17 13:03 2011/07/17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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