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응답할 수 있음

"비상상황입니다." 20일 밤, 인권운동의 소식을 공유하는 텔레그램방에 '긴급 구호 요청' 글이 올라왔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단체였다. 회원 중 자가격리자가 발생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는데, 마스크나 손소독제 등 기본적인 예방 물품의 수량 확보도 어려우니, 십시일반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다음날, 택배상자 사진 하나가 올라왔다. 동참한다는 한 단체의 메시지와 함께. 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할 수 있음'이기도 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런가 하면 질문부터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규모 집회를 강행한 보수단체들이었다. 지금까지 코로나19에 관해 확인된 사실들을 살필 때 옥외 집회 전면 금지가 필수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집회 자체보다 주최자의 인식이었다. 자신들은 "목숨을 걸고 나오기 때문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발상. 이들에게 감염병이라는 재난은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가의 문제일 뿐, 서로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한국의 코로나19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다. 잘 대응하더라도 감염 추세가 꺾이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첫번째 국면을 거치며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알게 되었고, 초기에 규명된 바이러스의 특징을 크게 벗어나는 현상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감염 전파를 막는 데 조금은 능숙해진 상태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새로운 국면의 질문은 바이러스의 전파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그치지 않아 보인다. 
신종감염병의 등장은 한 사회가 지닌 대응역량-감염에 대한 지식, 병을 치료하기 위한 기술, 전파를 관리하기 위한 행정 등-을 넘어서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재난이다. 위기의식을 보태려는 말이 아니다. 감염에 관한 통계나 현황, 추세, 피해 규모 같은 것만으로 우리가 겪는 현재를 규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바이러스를 직간접적으로 마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게 외출이든 등교든 출근이든 여행이든, 내가 하려던 일을 '해도 되는가, 하면 안되는가' 매순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우리 모두가 재난 중에 있다. 새로운 국면의 질문은, 우리의 삶과 일상이 어떻게 지속가능하도록 만들 것인가여야 한다. 
재난은 서로의 운명이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는 순간들을 만든다. 그래서 누군가의 선택이 연속적인 실패의 출발점이 되기도 쉽지만, 어떤 행동은 작은 성공의 연쇄를 만드는 물꼬를 틀 수도 있다. 차이는 선택이나 행동 자체에 있지 않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려는 의지를 어떻게 행동으로 모아낼 것인가에 달려있다. 불확실성을 피할 수 없을 때 개개인을 어떻게 지킬지 묻는 것은 답을 찾기 어렵지만, 우리를 서로 지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다면 오히려 길을 내기 수월해진다. 설령 내가 감염되더라도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누군가 감염될 때 나도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수록 우리는 재난으로부터 함께 벗어날 수 있다. 
… 자가격리자가 겪는 두려움과 불편과 곤란한 사정 등을 묻고 들을 방법은 없을까. 신종감염병이라는 이유로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하는 사람들을 함께 애도할 만한 의례는 없을까. 병가나 돌봄휴가나 휴직을 불이익 없이 쓸 수 있으려면 어떤 기준이 필요할까. 문을 닫게 생긴 작은 가게나 작은 공장의 사람들, 생계활동의 지속이 어려워진 사람들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 마스크가 더 권장되는 사람들에게 더 돌아가도록 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 … 
첫 국면에서 정부가 얼마나 신뢰를 주는가가 중요했다면, 두번째 국면에서 관건은 시민사회가 얼마나 재난 대응을 이끄는지에 달려있어 보인다. 현재로서 정부는 감염 확산을 막는 방역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러스 관찰로는 해법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삶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삶이 먼저 무너지고 있는가. 서로의 운명이 촘촘히 얼킨 그물망에서 조금 덜 흔들리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 거들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 할 때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응답하기 위해 여기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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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3 13:41 2020/02/2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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