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평등길 도보행진 나흘째, 밀양을 걷던 날입니다. 송전탑 반대 투쟁 하러는 다녀봤지만 차별금지법으로는 처음이라, 같이 걸을 분들이 많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어요. 영남루에 정말 많은 분들이 나와주셔서 고맙고 반가웠는데 그 중 밀양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있었습니다. 발달장애인 회원 분들이 함께 걸으러 오셨더라고요.
평등길은 정말 많이 듣고 배우고 나누는 시간이었고, 그런 좋은(?) 얘기는 걷는 동안에 많이 썼는데요, 이날은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는 하겠는데 그 다음 무슨 말을 꺼내기가 부담스러운 거예요. 이렇게 물어봐도 되나? 말 건네는 걸 불편해하시면 어떻게 하지? 등등등.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는 게 괜히 배제되는 느낌을 주는 건 아닐까 싶어서 누구한테도 말을 걸기가 어려워지더라고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며 걷는데 그게 어떤 세상인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심정. 당혹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는지, 그날 이후로 잊고 있었습니다.
몇일 전 문득 이날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평등길에서 만나 이야기 나눈 분들 대부분은 처음 뵙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뭘 물어보거나 말을 거는 순간은 언제나 상대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시작되었지요. 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왜 더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을까. 다 다르지만 더 다른 사람처럼 여겼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근본적으로 동등한’ 인간의 존엄을 말하고 익혀도 무력해졌던 순간. 그런데 기억을 더듬다 보니 이게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차별이 뭐고 평등이 뭐고 떠들지만 처음부터 알았던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쭈뼛거리고 어색한 순간의 난감함을 함께 겪고 토로하고 넘겨주던 동료들이 있어서, 먼저 말 걸어주며 관계를 이끌어주는 이들이 있어서, 나는 조금이나마 떠들 수 있는 이야기들과 감각을 얻었고, 언제나 다 알 수 없는 것을 마주하는 시간이겠구나… 생각하고 보니 더이상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기댈 수 있는 동료들이 있어, 어제는 무력했지만 내일은 다를 수 있다는 설렘이 생기니 마음이 평온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걸 모두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게 차별금지법이겠구나…
어제는 인권운동사랑방 동료들과 ‘차별을 끊고 평등을 잇는 2022 릴레이 단식행동 <평등한끼>’에 참여했습니다. 평등한 일터, 존엄한 노동을 바라며 권리찾기유니온, 노동도시연대, 라이더유니온, 인권운동사랑방,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함께 집회를 준비했어요. “이 시간은 어차피 우리가 밥을 못 먹는 시간입니다.” 한창 음식 배달을 해야 하는 라이더에게 ‘평등한끼’는 어떤 것일까 짐작해보려는데,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가 “신분을 증명하거나 사람들과 계속 같이 있어야 하는 걸 피하고 싶은 성소수자들이 라이더 일을 많이 합니다.”라며 같이 싸워야 할 이유를 덧붙이니 ‘평등한끼’가 더 풍성해집니다. 서류상 5인미만 사업장을 만들어놔서 부당해고 구제신청도 해볼 수 없었던 이야기, 비정규직 차별 막는다면서 차별 조장하는 데 기여한 비정규직법 이야기… 싸워야 할 이유가 많아지는 만큼 힘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배부른 느낌은, 이 자리가 서로 동료 되기를 약속하는 자리였던 덕분이겠죠.
“평등이 밥이다” 차별금지법은 평등이라는 밥을 담을 밥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별의 일상에서도 우리가 짓는 평등. 그런데 이건 밥 짓는 자리에 함께 있지 않고는 정말 감각하기 어렵습니다. 더 멀리 있는 사람, 더 혼자 있는 사람과는 나누기가 어렵죠. 누군가는 짓고 누군가는 그걸 먹고 기운을 내고 다시 누군가를 위한 밥을 짓고. 그릇에 담아야 더 많이 나눌 수 있겠지요.
차별금지법, 이건 밥그릇 싸움입니다. 빼앗기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 빼앗기지 않을 방법을 찾는 일이니까요. 빼앗아가는 일을 정당화하는 핑계들이 더는 통용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니까요. 우리가 매일 먹고사는 밥에, 평등에 대한 감각까지 담았으니 이런 밥그릇 싸움이라면 정말 해볼만 하지 않나요? 소유와 독점의 밥그릇 대신 나누고 키우는 밥그릇.
정치가 차별금지법에 이리도 소극적인 게 이해도 됐습니다. 국회의원이나 다른 정치인들은 제 밥그릇 하나쯤은 잘 챙기는 이들이라 다른 이의 밥그릇 살필 여유가 없겠지요. 하지만 특권으로 채운 밥그릇이 부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은 밥이 더 찰지고 맛나다는 건 백프로 보증, 하지 않아도 모두 아는 거 아닐까요? 정치인들의 밥그릇에도 이제 특권 대신 평등을 좀 채워주고 싶네요. 아무리 미워도,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평등을 배우고 알 권리가 있으니까요. 이제 차별금지법 만듭시다요.
잊고 있던 밀양의 시간이 떠오른 건 혹시 단식행동을 앞둔 때라 그랬을까요? 체한 듯 걸려있던 시간을 소화하게 된 기분이랄까, 왠지 건강단식 느낌입니다. https://bit.ly/equality-fast 에 나도 참여한다 신청해주시면 서로 반갑고요, 참여 안내가 궁금한 분들은 https://equalityact.kr/2022relayfast/ 여기로.
월~금 점심시간에는 국회 앞에서 집회가 이어지는데요 차제연 유튜브 계정 https://www.youtube.com/channel/UC5cTuqeow7Th-bX2Y0eWHYQ 에서 보실 수 있어요. 혼자 평등한끼 뻘쭘한 분들은 생중계 보면서 평등한끼를 ^^;; 저녁에는 온라인 평등밥상도 열려요 https://bit.ly/fast-together 매주 화~목. 깨알같죠?
지금은… 밥에 뜸 들이는 시간… 펄펄 끓었던 지난해를 돌아보며…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간인 거… 모두 아시죠? #평등한끼 #차별금지법있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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