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혹시 내가 슬픔을 너무 억누르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되는 거라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람들이 자주 안부를 물어. 힘들지 않냐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 하루에 한번씩, 두번씩 병원을 다녀오는 것? 핸드폰 진동이 울릴 때마다 마음이 덜컥 하며 손을 쭈뼛거리게 되는 것? 그런 게 힘든 걸까. 그렇다면 조금 힘든 지도 모르겠어.

가끔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하곤 해. 먼 친척이거나 제자들이거나, 뭐 아빠한테 전화하기는 부담스럽다고. 급한 마음을 다독일 새 없이 전화를 걸어서 그런지 전화를 받는 내가 오히려 마음이 느긋해지기도 하지. 사람들은 그런 걸 물어봐. 위독하시다면서? 가망이 있는 거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어떤 게 위독한 걸까.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아무도 모르는 건데 그렇다고 아빠가 하루하루 앞날만 내다보며 살아야 하는 상황도 아니거든. 짧다면 짧은 시간이겠지만 날수를 따져보거나 시간을 계산해보면 그 또한 짐작하기 어려운 긴 시간들이야.

 

마음이 아픈 게, 그냥 갑자기 올려다본 하늘이 눈이 부셔 코끝이 시려오는 게, 아빠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는 거야. 나는 그의 가족이고 딸이고 그는 나의 아빠이기 때문이라고 묻어버릴 수 없는 나만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은 거야. 모든 '아빠'가 아플 때 세상의 모든 '딸'들이 아파하지는 않지. 아파하기를 기대해서도 안 될 테고. 저마다의 관계가 있을 텐데 그걸 어디서부터 추스려올려야 할 지. 나와 그가 나눈 것들, 나눌 것들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내가 참 좋아하던 아빠 옷이 하나 있다. 와이셔츠야. 무채색의 선들이 굵기와 명도를 달리하며 반듯이 가로지르는 위로 붉은 빛을 띤 점들이 박혀있는 셔츠. 고등학교 다닐 때 몇 번 빌려입다가 서울 올라오면서 아예 가지고 와버렸어. 헤. 어찌나 자주 입었는지 소매 끝단과 목의 칼라깃이 다 닳아진 후에도 버리지는 못해 한참을 두었다가 몇 년 전 이사할 때 정리를 한 것 같아.

그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어. 청바지를 한껏 걷어올리고 신발은 가방에 둘러맨 채 맨발로 바닷가를 걷다가 누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는 내 얼굴이 찍힌 사진. 참 좋아했었는데. 그 사진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모든 것들이 언젠가 사라질 테지만 없어지지는 않아.

 

그런 생각을 가끔 해. 아주, 아주 먼훗날 그를 그리는 마음이 그의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아쉬운 마음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그걸 조심스럽게, 힘겹지 않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냥,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눈물이 조금, 아주 조금 흐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눈물은 참아야 한다고. 눈물방울에 맺혀있을 소중한 기억들을 하나하나 새겨놓아야 하니까 눈물이 주루룩 흘러버리게 두면 안될 테니.

 

하지만 그렇게 먼훗날의 일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지금 나는 오래동안 떨어져 지내던 그를 매일같이 만나고 있어. 전화로는 느낄 수 없던 그의 표정들을 읽기도 하고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자랑을 하기도 하지. 몸이 좋지 않을 때는 얼굴이 창백해지기도 하고 누렇게 변하기도 하지만 늘 잘생겼다는 것만은 변함없지. 흡. 가끔은 둘이서 엄마 흉을 보기도 하고 엄마랑 둘이서 그를 놀리기도 하지. 엄마한테 괜히 툴툴대다가 고생 많다고 몰래 이야기할 때는 참 느낌이 좋아. 워낙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지만 말을 붙일 때마다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요즘이야.

 

그러니 어떻게 힘들겠니.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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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5 19:34 2005/10/2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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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군 2005/10/26 19:4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는 멋지고 강해요.

  2. dhbhrl 2005/10/29 16:2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Forsan et haec olim meminisse juvabit. - Virgil, Aeneid I, 203.

  3. 미류 2005/10/31 15:3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달군, 고마워요. 근데 정말 강한 사람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일 텐데 저는 여전히 강한 척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어렵네요. ㅎ

  4. 미류 2005/10/31 15:3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dhbhrl, 사전 찾아보란 말인감?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