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리스’라는 기름이 덕지덕지 발라져있는 컨테이너 박스가 있었다. 진짜 구리다.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수많은 시민들의 앞에 컨테이너 박스가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명박산성’에는 시민들이 보내는 조롱과 야유가 가득했다. 마치 포토라인처럼 수많은 플래쉬가 터지기도 했다. 나는 ‘명박산성’에 “명박아, 그냥 그 안에서 평생 살아라”라고 쓴 종이를 붙였다. 그 컨테이너 박스는 스스로 현실을 마주할 수 없는 정권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미 ‘권력’은 컨테이너 박스 앞으로 넘어와 있었다.

 

그 공간에서 나는 관광객이 될 수도, 소풍나온 사람이 될 수도, 화풀이를 하는 사람이 될 수도, 권력을 노려보는 사람이 될 수도, 그 어떤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그 자리에 있어야 할까, 그게 고민의 시작이었다.

 

#2.
나는 ‘민주주의는 차벽을 넘는다’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있었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차벽 따위는 이미 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컨테이너 박스 앞에서는 안타까운 논쟁이 열린 민주주의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티로폼을 쌓아서 올라가겠다는 사람들과 ‘비폭력’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든 시민들과 예비역들의 논쟁이었다.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닫힌’ 토론은 상당히 격앙된 분위기로 흐르는 듯했다.


아마도 7일 촛불집회 말미에 등장한 쇠파이프 등에 대한 우려가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을 더욱 단호하게 했을 지도 모른다. 7일 내가 있었던 근처에서는 ‘비폭력’을 설득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소리 할 꺼면 집에나 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슬펐다. 쇠파이프를 들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다른 방식을 설득하는 사람을 아예 배제해버리는 목소리는 정말 싫었다. 하지만 ‘비폭력’을 외치는 이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 발 앞으로 나서려는 것조차 제지하는 예비역들의 통제나 손만 들어도 ‘비폭력’을 연창하며 개개인을 압도해버리는 힘은 또다른 폭력이었다.


한 명의 화난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길가에 돌멩이를 차는 것밖에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열 명의 화난 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녀들이 모두 돌멩이를 걷어차지는 않을 것이다. 십만 명에 이르는 화난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다시 한 사람이 쇠파이프를 들게 하는가. 나는 일방적인 ‘비폭력’ 구호가 그런 상황에 ‘폭력’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거리에서 외치는 ‘비폭력’ 구호는 시위대에게 비폭력 직접행동을 고민할 잠깐의 여유는 주었을지 모르지만 어느새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만 남아 오히려 비폭력 직접행동에 대한 고민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3.
비폭력 직접행동에 대한 고민이 내 안에 싹튼 건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을 할 때부터인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는 모호하고 나는 무엇이 폭력이고 비폭력인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해명하는 것은 비폭력 직접행동에 대한 고민의 시작점이 아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하나의 양식이다. 무엇을 위해 비폭력 직접행동을 하려고 하는지가 고민의 시작인 것이다. 가능한 한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끊임없는 성찰이 비폭력 직접행동의 힘이다. 폭력 앞에서 등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려는 것이 비폭력 직접행동의 시작 아니었던가. 그리고 우리 앞에는 컨테이너 박스로 현현한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폭력이 있었던 것이다.

 

#4.
컨테이너 박스 앞에는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어 토론을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컨테이너 박스 앞에서 어떻게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를 함께 고민했다. 적어도 컨테이너 박스가 폭력이라는 점은 분명해졌고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분노와 자신감들을 보게 되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컨테이너 박스 앞에 스티로폼을 쌓기로 하고 꽤나 높은 연단을 만들었다. 거기 올라가 컨테이너 박스 너머에 숨어있는 이명박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연단 위에 어느 순간 내가 올라서서 마이크를 잡고 서있었다. 10일 밤부터 계속 토론을 해왔던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미 연단을 향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이 스티로폼들이 왜, 어떻게 쌓인 것인지를 말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사회자의 역할을 맡게 되기도 했다.

 

연단은 의외로 높아서 아래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말들이 잘 안 들렸다. 컨테이너 박스 앞쪽에서 뭔가 논쟁이 계속 오가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스티로폼을 해체하고 내려오라는 사람들과 쌓겠다는 사람들의 논쟁인 줄 알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것이 컨테이너 박스 바로 앞으로 스티로폼을 옮겨 컨테이너 박스 위로 올라가자는 사람들의 항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훨씬 많은 사람들이 컨테이너 박스로 올라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쨌든 컨테이너 박스 앞으로 스티로폼이 다시 쌓였고 급하게 올라가려는 사람들과 말리려는 사람들 사이에 격한 몸짓들이 오갔다. 그 순간 마이크와 앰프는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자리를 떠났고 스티로폼으로부터 떨어져있는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앞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러 의견이 오가다가 깃발만 올라가자는 의견이 모아져 결국 컨테이너 박스 앞에 수많은 깃발들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깃발들이 하나둘 올라갈 때쯤 나는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5.
나는 비폭력 직접행동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그 자리에 남아있던 폭력을 돌아본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부족한 고민과 상상력의 한계와 자신감의 부족에 아쉬움을 놓지 못한다. 장애인들은 접근이 불가능한 스티로폼이 저항의 상징이 되어버린 자리에 남겨진 폭력, 여성들이 개입하기 쉽지 않은 격렬한 몸싸움의 자리에 남겨진 폭력, 더욱 평등한 토론이 가능한 수많은 공간으로 자유롭게 분할되고 합체되지 못한 뻣뻣한 연단과 마이크의 폭력, 결국 컨테이너 박스 위에는 깃발을 쥔 이들만이 올라가게 되었던 또 다른 폭력. 그 안에서 나 역시 그걸 넘어설 수 없었다.


그깟 컨테이너 박스, 무서워서 못 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안 넘는 거라고 얘기하고 나서도 나는 스티로폼 연단에서 내려오지 못했고 그 다음을 상상하지 못했다. 컨테이너 박스 앞으로 스티로폼을 쌓자는 주장이 격렬해질수록 나는 불안한 마음에 동요되었고 스티로폼을 굳이 옮기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자’로서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하기에는 부적절한 얘기를, 그냥 여기에 두자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스티로폼을 옮기기로 할 때는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넘어서는 민주주의를 상상하지 못했다. (이름을 밝히고 사회를 맡았던 진에게 미안하다. 마이크를 잡았던 ‘빨간 조끼녀’에 대한 인신공격이 그이에게 쏟아지고 있다.)

 

나는 여전히 스티로폼을 쌓는 것 자체를 반대하며 그 자리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컨테이너 박스로 올라가자는 의견들 앞에 왜 움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안전’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채웠고 엄청난 긴장이 나를 묶어세웠는데 돌이켜보면 그 ‘안전’이라는 말은 관리와 통제의 언어이기도 했다. 유쾌한 상상력 같은 건 애초에 꽝인 내가 더욱 경직되어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시 새로운 축제가 시작되었어야 할 자리에서 나는 참 무력했다. 어쩌면 더욱 자유롭게 많은 이들이 컨테이너 박스에 올라갈 수 있었을 수도 있다. ‘안전’에의 우려는 오히려 밤부터 오랜 시간 함께 토론하며 스티로폼을 쌓았던 깃발 들지 않은 이들의 자리를 빼앗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는 동안 내가 느꼈던 어떤 ‘책임감’의 적절한 수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비겁하지도 않고 주제넘지도 않는 ‘책임감’은 어떤 것이었을지, 눈치 보지 않으면서 오만하지도 않은 ‘자유’는 어떤 것이었을지, 1/1000들이 모인 평등이 아니라 1들이 소통하는 평등은 어떤 것이었을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모두가 각자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것도 아닐 테고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만 줄기차게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떤 ‘결론’을 관철시키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닌 것도 분명하고 아무런 주장 없이 대세를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비폭력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시 또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묻는 토론으로 돌아가지는 않아야 할 듯하지만 폭력에 대한 성찰은 끊이지 않아야겠다. 


내가 모르는, 알아야 할 질문들을 얻은 그 자리에서 비폭력 직접행동에 대한 고민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6.
민주주의는 차벽을 넘어섰을까. 컨테이너 박스 뒤에 숨은 이명박을 넘어섰을까. 스티로폼을 쌓고 컨테이너 박스에 깃발들이 휘날린 것은 그 시작일 뿐이지 않을까. 넘어섰다는 자신감이 그 너머에서 더욱 많은 민주주의를 증식시키지 못한다면, 비폭력에 대한 성찰을 확산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그런 하나의 에피소드일 수도 있다.


한 달이 넘는 동안 다양한 양식으로 뻗어나갔던 비폭력과 민주주의 안에 새로운 내용이 채워져야 할 때다. 우리에게 행동을 요청하는 폭력의 실체는 무엇인지, 광우병 쇠고기 협상만으로 한정되지 않는 폭력이 단순한 사안의 나열을 넘어 설명되고 소통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수많은 사안들과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촛불의 힘이 어디로 향할 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이명박 퇴진 구호가 거리에서 쏟아지고 있지만 그 구호들이 퇴진운동으로 모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폭력들을 넘어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도 이야기되어야 한다. 컨테이너 박스 앞에 쌓인 스티로폼의 ‘상징’은 현실에서 ‘힘’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모아진 '힘'의 경계에서 삐그덕대거나 맴도는 것들이 배제되지 않고 다시 새로운 '힘'의 씨앗이 되도록 해야 한다. 다시 비폭력 직접행동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 비폭력 직접행동은 세상을 멈추는 것, 그리고 다시 만드는 것을 향해 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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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3 00:14 2008/06/13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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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 2008/06/13 01:0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나는 합의할 수 있는 것만 대충 합의해서 집행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요. 크, 그렇다고 서로에 대한 냉소만이 남는다는 건 아니지만. 이것들은 정말 어려운 문제.

  2. mong 2008/06/13 12:3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무튼 고생하셨어요. 이건 여전히 논쟁 중

  3. 미류 2008/06/13 14:2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su/넹, 정말 어려운 문제. '대충' 하기가 어려운 문제인 듯. ㅠ,ㅠ

    mong/응, 고생 안했다면 거짓말이지만, 고생했다는 인사를 받기는 민망... 여전히 논쟁 중인 것은 무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