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 N <인권의 재장전> 2강. 인권과 그 적들: 인권과 정치의 분리불가능성

 

 

강사는 프랑스혁명과 그 정치적 효과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인권'에 대한 맑스의 비판과 아렌트의 비판을 소개한다. 인권의 보편성이 정치적 중립성으로 환원되고 모두가 동의하는 가치로서 도덕의 영역에 들어가려는 지금, 인권의 정치성을 다시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혁명은 '인권'을 태동시킨 구체적 계기라고 할 수 있는데 프랑스혁명을 두고 버크는 인간의 정념이라는 본성에 비추어볼 때 혁명이 오히려 권리를 후퇴시킬 수 있고 권리는 오로지 국가를 통해서만 기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버크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토마스 페인은 <인권>이라는 팜플렛을 낸다. "도처에 그곳 나름의 바스티유가 있고, 모든 바스티유에는 전제군주가 있다"며 프랑스혁명은 전제정 그 자체에 대한 반대로부터 시작해 "사회의 공통된 이익과 공통된 인권"에 의해 성립된 "이성의 국가"로 나아가려는 저항이었다고 프랑스혁명을 옹호한다. '인권'을 둘러싼 논쟁은 이미 정치논쟁이었으며 프랑스혁명은 인권의 이념을 정치적인 실체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게 강사의 주장.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분출시킨 다양한 권리들은 "오래지 않아 다시 질서의 이름으로 닫히기 시작했다." 인권에 대한 반대의 논리가 이제 급진저거 정치세력으로부터 나온다. 맑스는 인권을 "인간들과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이기적인 인간들의 권리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유는 인간과 인간을 구별하는 권리일 뿐이며 평등은 모두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권리의 평등, 안전은 이기주의의 안정화를 보장하는 권리라는 것이다. 맑스에게 인간의 현실적 해방은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으나 인권은 이기적인 개인들을 만들어내는 담론이다. 

 

아렌트는 국민국가가 만들어지는 시대, 국가로부터 추방된 무국적자 혹은 난민들을 권리의 체제에 포함되지 못하는, 단지 '인간'이기만 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권리를 가질 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인권의 근원적 박탈. 인간의 조건 상실. 이런 현실에서 인권이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태어난 인권은 수많은 기표들이 경합하는 이념이었으나 이 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부르주아 남성들의 자유주의적 인권. 그리고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체제에 의해 인권은 봉합되었다. 그러나 자유, 평등, 연대라는 인권의 근본 가치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면(맑스와 아렌트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늘날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인권의 의미와 효과를 규정하는 조건들"로부터 인권을 탈부르주아화하고 탈국가화해야 하지 않겠나. 오늘날 인권에 필요한 것은 보편성보다는 차라리 당파성, 이라는 것이 강사의 주장이다. 

 

 

강의를 듣기 전 다른 이유로 읽었던 몇 가지 글들을 포함해 들었던 생각들. 

 

인권운동사랑방은 '진보적 인권운동'이라는 개념을 제출한 적 있다. 2000년 전후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집필자였던 서준식은 '인권' 개념이 "비틀린" 것을 지적하며 그것을 넘어서자고 주장한다. 비틀린 인권은 위에서 강사가 지적했던 것과 다르지 않으며, 맑스의 인권 비판과 거의 같은 주장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해 자유로운 개인의 등장이 요청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권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고 초계급적 형식을 띨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 조건은 인권이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하다는 것이 진보적 인권운동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서준식은 "이 시대가 한국 인권운동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운동전략 수립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며 "인권의 근본은 '생존'을 중심으로 한 인간적 존엄의 회복에 있다는 철저한 인식에서 재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권운동사랑방이 사회권을 강조하고 다양한 활동을 시도했던 것 역시 이런 맥락에 있고, 내가 사랑방에 매력을 느꼈던 것도 비슷한 이유다. 나는 '인권'운동사랑방 활동을 하면서도 '인권'을 등한시했고,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인권'활동가로서 부적절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긴장, '인권'이 어떤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힘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경험들이 뒤섞이면서 '인권' 개념에 대한 비판의 의미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됐다. 어쩌면 '그 적들'에 의해 너무 많이 포획되어 버린 '인권'을 다시 정치적으로 벼리는 것에 용기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반성과 함께. 

 

맑스의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를 처음 읽을 때 나에게 '인권'은 들어본 적은 있었을지 모르나 머리속에 들어와본 적은 없는 말이었다. 그러니 그것이 '인권'에 대한 비판이라고 읽히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나는 당시 정치적 쟁점이 되었던 유태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글로 읽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 인권운동을 하게 된 후 그 글을 다시 읽은 것은 그것이 '인권' 비판이었기 때문인데, 솔직히 그때도 그게 그다지 '인권' 비판으로 읽히지 않았다. 그때 역시도 '인권'이 머리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때였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그 글은 사실 '인권'을 빼고 읽어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글이다. 맑스의 저작 중 '인권'에 대해 언급된 거의 유일한 저작이라는 점에서 이 글은 '인권'에 대한 맑스의 비판을 집약한 글로 언급되는데, 나는 그게 그리 적절한 해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맑스가 그 글을 통해서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인권' 그 자체라기보다는 '인권'이라는 담론으로 수렴되면서 사그라드는 해방의 열기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정치 세력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평가는 전혀 아니다. 그가 글을 통해 말한 것들은 여전히 유효하고 핵심적인 지적들이다. 다만 어떤 개념과 그 개념에 대한 비판을 정치적으로 읽어내는 방식을 좀더 고민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지금뿐만 아니라 당시에도 '인권'은 움직이는 개념이었다. 당시 봉기에 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인권법체계를 염두에 두거나 구상하면서 움직였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지금의 인권체제는 국민국가의 성립과 세계대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근대적 기획 등을 삭제한 채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맑스의 비판 역시 '인권' 개념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인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어떤 정치적 힘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맑스는 인권 속에서는 인간이 유적 존재로 파악될 수 없으며 인간과 사회가 적대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금 인권은 인간이 독립적이고 구별되는 존재로서 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장려하는 데에 동원되기보다는 타인/타자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을 촉구하고 연대를 독려하는 데에 사용된다. 

 

진보적 인권운동론은 인권이 개인의 권리로 환원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인권'이 만들어낸 수많은 개인들이 세상을 바꿔왔고 '인권'을 저항의 언어로 만들어왔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가족의 재산이었던 여성과 아동, 생활의 수단이었던 노예, 그리고 근본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을 부정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통해-인권체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권'의 기운에 전염된 저항을 통해- 해방을 기획할 수 있었다. 맑스가 말했던 '유적 존재' 역시 단순히 집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도 집단도 아닌 제3의 위치.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아직까지는 없는 듯하다. 어쨌든 개인과 집단이라는 열쇠말을 통해 '인권'에 대한 비판을 살필 때 흥미로운 점은, 맑스의 비판은 유적 존재들을 분리된 개인으로 호출하여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끌어들인다는 점에 있으나, 아렌트를 비롯해 그 후 현대 정치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비판들은 특정한 사람들을 배제하여 방치함으로써 견고한 경계를 가진 집단을 구축하는 체제로 인권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는 점이다. 그만큼의 차이가 역사적 시간의 차이기도 할 텐데, 흥미롭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에게는 '인권'을 통한 또다른 (입지의) 정치학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오히려 인권비판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 

 

'인권'에 대한 최근의 비판들에 대한 강의는 다음 시간인데 아쉽게도 다른 일정이 있어 들을 수가 없다. 기대되는 강의인데. 아렌트 이후의 비판들은 대개 배제, 예외 등을 통해 전개되는데 나는 아직 이것들을 '법' 없이 읽을 수가 없다. 인권법체제와 인권체제는 다를 듯한데 이런 비판들은 '법'을 중심으로 전개가 된다. 그래서 법이 언급하지 않거나 포함하지 않거나 배제하는 주체의 인권이 과연 인권의 이름으로 주장될 수 있는가가 주요 쟁점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인권)법이야말로 특정한 주체들을 배제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인데 과연 정치적으로 유효한 개념일 수 있느냐, 일 수도 있겠다. 이건 다음에 다시 정리해야겠지만, 

 

실제로 활동하면서도 부딪치게 되는 고민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은 그렇다. 지금 필요한 인권론은 이론이 아니라 선언이 아닐까.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의 억압과 그 원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 우리가 어떤 권력관계들에 의해 조직되어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유지되거나 간과되는 것을 드러내며 어떻게 저항할 것인지, '인권'이 만들어내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틈새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 갈 것인지, 를 말 그대로 선언. 필요한 건 개념의 해설이 아니라, 인권의 역사로부터 얻어낸 영감의 고백은 아닐지. 보편성보다는 당파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파적인 것이야말로 보편적인 것이라는 선언이 아닐지. 

 

뭐 이런 고민들에다가. 진보적 인권운동론에서 '진보'의 근대성과 '생존'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하는데,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어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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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0 13:45 2012/07/2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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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2/08/02 15:1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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