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책에 손도 못 대다가 다시 조금씩 읽고 있다. 오월에 읽으려고 샀던 오월의 사회과학을 이제서야 읽었다. 광주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해준 책이다. 아주 오래 전에, 이 책에서 설명하기론 '민중항쟁론'이라는 입장을 취한 이후로는 더 이상 질문을 품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민주화론이나 민중항쟁론이나 당시에 질문을 품었던 이들이 만들어낸 담론이며 그만큼 세상은 밝혀졌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질문들을 벼리지 못하고 굳어갔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담론뿐만 아니라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운동들의 현실이기도 한 듯. 

 

책이 다루는 주제와는 별개로, '인권'에 대한 고민이 들게 한 책이기도 하다. 광주민중항쟁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했던, 혹은 존엄을 세움으로써 '민중'일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역사로 설명하는 것이 내게는 무겁게 다가왔다. 일단은, 어이없게도 내가 한번도 광주에서 함께 싸운 사람들의 역사를 '존엄'이라는 말을 통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점 자체가 읽는 내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무거웠던 것은, 그래서 광주민중항쟁을 '인권'의 역사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에, 저자가 "광주 시민들이 추구했던 인간 존엄성은 ... 서양식 근대국가의 법 개념인 인권과는 다른 것"이라고 잘라 말했기 때문이다. 인간 존엄성이, 인권과 다르다. 물론 존엄이 무엇이냐를 두고 다르게 말하고 싶은 것은 있다. 인권이 서양식 근대국가의 법 개념'일 뿐'인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저자의 시선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질문을 나에게 돌려, 지금 여기에서 '인권'이 인간의 존엄성을 갈구하는, 세우는, 독려하는 언어가 되고 있는지 물어보니 자신이 없어졌다. 

 

이것은 '인권'에 대한 질문이기보다는 인권'운동'에 대한 질문이다. 사실 인권은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법 개념에 붙들려있다. '인권'만으로는 '운동'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느 운동인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이것은 이미 한국에서도 국가인권위의 설립이나 요즘 유행하는 지자체의 인권조례 등을 통해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인권'이 운동의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인권은 (자기)조직화의 언어가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현실에 맞서 무언가를 주장할 때 그것에 '권리' 혹은 '인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것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한 사람의 주체로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되새기며 힘을 낼 수 있는 기운을 준다. 그리고 인권은 연대의 언어가 될 수 있다. 보편성을 본질적 성격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그/녀만의 외로운 외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외침일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또한 인권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들을 모색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함께 만들어나가야 할 가치로서의 인권. 물론 그만큼 인권은 취약한 점을 가지는 언어다. 인권은 그 자체로서 적대나 모순을 드러낼 수 있는 언어가 아니며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논의하기 위한 이론 틀이나 사상적 기초도 따로 없다. 보편성은 연대의 가능성을 만들어내지만, 개인이나 집단의 주체성을 해명하기 어려워지며, 현실의 권력관계를 뒤엎기 위한 당파성을 품지 않은 보편성은 도덕규범에 그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과제'로 받아들이면서 더 밀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혼자 쉬면서 멀리 있어서 그런지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과연 있어야 할 곳에 있는지, 있고자 하는 곳에 있는지. 인권의 기운으로 어떤 대중적 힘들이 생성되고 있는지, 지금의 질서를 넘어서고 싶은 꿈을 꾸게 하는지, 두고두고 살피면서 가는 수밖에. 오늘도 많은 인권활동가들은 여기저기에서 그 기운을 불어넣고 있겠지. 벤야민의 책을 이어서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 "모든 혁명적 긴장이 신체적인 집단적 신경감응이 되고 집단의 모든 신체적 신경감응이 혁명적 방전이 되어야만 비로소, 현실은 <공산주의자 선언>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 자체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인권의 기운이 이런 집단적 신경감응을 일으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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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4 14:20 2012/12/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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