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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시대 2: 윤주형 동지의 삶과 죽음

 내가 윤주형 동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희망광장에서였다. 말쑥하고 핸섬한 차림의 청년이 예의도 바르고 비정규직. 정리해고 노조탄압 없는 세상을 위한 공동투쟁단 활동 및 울산 희망버스등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이고 경찰하고도 잘 싸웠다. 같이 술을 먹게 되더라도 남한테 신세지는 것을 정말로 싫어했고, 자신도 어려우면서 자신보다 더 어려운 동지를 돕기도 하였다. 4년여 동안의 힘든 해고생활에도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2012년 6.7월 당시 현대차에서 1사1조직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그때 당시 어떤 사람과 논쟁이 붙기도 했고, 모 기관지에 기고하기 위해 4월에 약속했던 글쓰기를 위해서 그가 있는 화성까지 차를 몰고 가서 밤늦게 까지 이동우. 윤주형 동지 인터뷰를 했다. 그 열정에 윤주형 동지는 그때부터 나를 믿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해서 쓴 글은 내 블로그에 있는 글이다.   (오월동주, -기아차 1사1조직 흡수통합에 대한 전면폭로 http://blog.daum.net/avantgarde2/?t__nil_login=myblog)

 

 이운남 열사의 죽음 이후 동지 중 한 분이 아무래도 윤주형 동지가 걱정이 돼서 가보라고 해서 조암에 갔다. 조암의 윤주형 동지 자취방 근처 중국집에서 단 둘이 술을 마셨다. 그때가 12월31일 이었는지 윤주형 동지 죽기 한 달 전인지 보름전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윤동지는 카톡창에 해복투를 그만 두겠다는 말을 하였고, 해복투 동지들한테도 통보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소식이지만, 자신이 아버지처럼 따르던 자민통 사람한테 극심한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네가 무슨 창녀냐?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게?” 이후에 마음을 다잡고  해복투 활동을 다시 하기로 했다. 2012년 8월부터 그는 심적으로 무척 아파했다. 기아차지부에서 복직상정이 두 번씩 거부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자민통 (자주.민주.통일. NL 경기동부연합. 전국회의등의 속어) 이라고 다함께.금속의 힘등 얼치기 좌파관료들 때문에 복직상정이 되지 않았고, 두 번째는 그가 헌신적으로 몸담았던 자민통에 의해서 복직상정이 거부되었다. 2012년 4월 기아차 대대상황이 카톡을 통해서 희망광장 때 함께했던 동지들한테 알려졌다. 윤주형 동지가 해고된 이유는 생산라인을 통제하던 사측 전직관리자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작업거부투쟁을 주도했다고 하여 해고당했다. 그 사측 전직관리자라는 사람은 노동조합의 2년여의 투쟁과정 속에서 관리자에서 면직 되었지만. 후에도 계속해서 공정변화와 주야간 전환배치를 노동조합 분회와 합의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하였다. 그들이 매도하는 윤주형 동지의 폭언이란 대의원 신분으로 회사 측에 항의하며 작업거부투쟁으로 노동조합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며 그로인해 해고당한 것이다. 전직관리자라는 사람은 또한. 기아차지부의 막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노회(기아민주노동자회) 위원장의 매형이기도 하였으며, 비정규직지회와 정규직지부의 통합인 1사1조직 통합 때 노조원이 되었다. 그러니까. 1사1조직 흡수통합은 전투적인 비정규직 지회를 무장해제 시켰을 뿐만 아니라. 어용들마저 조합원으로 가입시킨 것이다. 기아차지부는 그 어용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조합원간의 쌍방 폭언. 폭행이라고 하면서 윤주형동지를 매도하였다. 같이 투쟁했던 자민통 일파들은 빠지고 윤주형 동지만 해고되었다.

 

 윤주형동지는 민노당 당원이기도 했으나, 3자합당에 대해서는 강력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자민통 그룹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했던 자민통 동료들과도 자주 논쟁하고, 같이 기거하던 자취방에서도 쫓겨났다.

 

 윤주형 동지는 자민통과 기아차지부와 해고자신분 조차 인정하지 않던 금속노조 관료들에 대해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고 그들을 무척 싫어했다. 운동권 좌파. 우파 양쪽에서 윤주형 동지는 극심한 상처를 받았기에 양측을 모두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 윤주형 동지가 스스로 정치적인 진로를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윤주형 동지는 늘 상 겉으로는 웃고 다녔지만 정작으로 그는 외톨이였다. 나 또한 마음에 드는 조직이 없었고, 서로의 생각과 감정이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 죽이 잘 맞았다. 가끔씩 단 둘이 술 마시면서 우리 같은 사람들 모아서 멘붕클럽 이라도 만들자고 했다. 항상 웃고 다녔던 그의 이면엔 그는 항상 아파했고 힘들어 했다. 너무 힘들고 하면 그는 가끔씩 모든 연락을 끊고 해고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것 같았다. 추석 때 기아 해복투 동지들이 모두 힘들어 하는 것 같아 메시지를 남겼는데 아무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추석 지나고 보름만에 윤동지한테 전화가 와서 밤늦게 까지 술을 마시고 사우나에서 자고 다음날 상원사로 단풍구경을 갔다. 그날이 윤주형 동지 생일이었는데 막상 전화를 하려고 했더니 전화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솔직히 내가 그의 고통에 아무런 얘기조차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멘붕클럽 비슷한 소모임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좌파와 통진당이 함께 있었다. 정말로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하였고. 서로의 생각들이 너무나 다르다 보니. 아무런 구체적인 계획조차 잡을 수 없었고 모임도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나중에 생긴 그 모임 조차도 윤동지에게 버팀목이 되지 못했고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윤동지는 평생 운동을 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어렵지만 죽기 전까지 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운동의 조직화를 시도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또 자민통 사람들한테 상처를 받았다. 

 

  8월에도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죽기 마지막 만남에서도 아무얘기도 할 수 없었다. 윤주형 동지는 그날 이운남 열사의 죽음에 남일 같지 않다고 했고 나도 그렇다고 했다. 당시 내가 직장이 없어서 새로 직장을 구하고 있었는데 몇 군데 연락처를 주면서 기거할 데 없으면 전기세. 수도세만 내면 되니까 자신의 자취방에 있으라고 하였다. 그것이 윤주형 동지가 할 수 있었던 마지막 SOS 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대로 윤동지의 힘든 모습에 멘붕에 빠져 있었다. 계속되는 죽음의 도미노 현상 때문에 잠시라도 운동과 페북을 접고 싶었다. 계속되는 죽음의 도미노 현상 때문에 잠시라도 운동과 페북을 접고 싶었다. 내가 갖고 있는 운동에 대한 패배주의가 다시 내 속에서 고개를 들고 나를 힘들게 했다. 아무런 운동에 대한 전망도 없이 내가 옆에 있다고 해서  그다지 상황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에 다른 곳에 취직자리 신청한 곳에서 연락이 와서 그곳을 나갔다.  그 당시 내 판단은 틀렸고. 윤주형 동지의 판단이 옳았다. 나는 그의 옆에 있어야 했다. 설마 그가 죽음을 선택할 줄은 미처 몰랐다.

 

 윤주형 동지가 죽기전날, 윤동지의 애인동지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윤동지하고 연락이 안된다는 것이다. 내가 전화를 해보니 안 받았다. 잘 지내느냐는 내 문자에 그는 짧게 잘 지낸다고 답변했다. 그날따라 일이 무지 바쁘기도 했지만, 너무 짧은 메시지에 좀 서운하기도 했다. 아니. 마지막으로 나마저도 윤주형 동지는 차갑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문자를 받았는데 확인한다는 자체가 두려웠다. 윤주형 동지의 자결 소식이었다.

 

 왜? 왜? 하필이면 너냐고? 왜냐고? 이 바보같은 윤주형! 모든 것이 믿겨지지 않았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1주기때 윤주형 동지가 친했던 동료가 말한다. 윤주형 동지가 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느냐고? 그 얘기를 두 어번 정도 더 들은 것 같았다. 그 얘길 들을때 마다 억장이 무너진다. 아니. 나도 해맑고 착하고 순수했던 윤동지를 무척 좋아했다. 내가 조금만 더 둔감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곁에 있었더라면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아파하고 자책했다. 6개월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침에 눈을 뜬다는 자체가 괴로웠고 정말로 죽고 싶었다. 최근 1주기 추모제도 사실 많이 괴로웠다. 미안하다. 윤주형, 그의 죽음은 내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기아차지부. 사내하청 관료안 자민통은 열사의 명예를 위한 원직복직 투쟁을 회피하기 위해서 절충안을 가져오기도 하였고, 해복투 이동우 동지가 윤동지의 죽음을 이용한 다는 음해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몰려와서 깽판을 치거나 서둘러 장례식을 끝내기 위해서 시신탈취시도를 해서 연대동지들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급기야 조의금을 들고 튀었다. 기아차지부와 사내하청 소식지는 폭력으로 얼룩진 장례라는 내용의 조선일보 같은 찌라시 글로 오히려 연대동지들을 모독했다. 일말의 사과조차 없었던 그들이 1주기 때 또 와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열사와 우리들을 또 우롱했다. 같은 노동자라고 하더라도. 같은 계급이 아니다. 어용 비스무리, 노사협조주의. 노사화합을 주장하는 그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은 결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대적인 계급이다. 윤주형 동지를 죽인자들은 1차적으로 현대기아자본 이지만, 2차적으로 윤동지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죽게 만든 자들은 자민통이 장악하고 있는 기아차지부. 사내하청 관료들이다. 난, 내가 죽으면 죽었지 이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3차는 연대동지들의 무관심.둔감함. 특히. 윤주형 동지가 좋아했던 내가 그를 죽였다. 내가 조금만 더 그의 곁에 있었더라면.  미안하다. 윤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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