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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419파업 파업기(노동전선)

노동전선에 1999년 기고한 글입니다. 평가라고 했지만, 파업기네요.

생전 이런 긴글은 처음 써본지라 일주일이나 걸렸습니다.

아직 파업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쓴 글이라 걸러지지 않은 곳이 많이 있네요^^

[1999년_노동전선 투고.hwp (26.50 KB) 다운받기]

 

 

 

8일간에 걸친 파업을 마치고

  

손승권(서울지하철노동조합 조합원)

 

 

  1. 파업에 들어가기까지

  

  작년 한 해, 전 사업장에 걸친 정리해고의 광풍은 공공부문으로 그 칼날이 겨누어지면서, 서울지하철에 대해서도 '지방공기업 구조조정 혁신'이라는 미명 아래 도발을 시작했다. 정원의 30%에  해당하는 3,447명의 감축과 임금삭감, 복리후생비 삭감이라는 '혁신방안'은 현장을 들끓게  만들었다. 서울시와 공사는 경영진단 용역을 통하여 구조조정안을 계속  흘리고 있었으며, 현장에 직무분석팀을 투입하려 하였고, 지원부서(본사  및 현업 사무실)에  대한 자체 직무분석을 시분 단위로 수행하게 하였다. 또한 자신들의 구조조정안을 발표도 하기 전부터 명예퇴직을 강제 시행하고, 고령자 대기발령, 사규의 일방적 시행 등 도발을 행하였다. 공사와 서울시는 1월 28일 최종적인 구조조정안을 통하여 2,078명의 인원감축, 정년단축, 임금삭감, 복리후생 축소를  들고 나왔다. 또한 97년에 체결된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이 아직 남았음에도 체력단련비와 대학생 학자금을 지급하지 않는 등 선제공격을 해왔다.

  이에 11월에 출범한 8대 집행부는 가장  먼저 구조조정 투쟁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구조조정특별위원회(이후  '고용안정과  지하철개혁특별위원회'로 명칭 변경)를 구성, 구조조정안에  대응하는 노동조합의  안을 마련하였으며, 지회별 총회, 현장순회 조합원 교육 등을  통하여 구조조정 투쟁을 준비하였다. 노동조합은 '노동시간 단축, 지하철개혁, 고용안정 쟁취'의 요구 조건을 가지고 두 차례의 특별교섭(2월 12일, 3월 3일)을 하였으나,  사측의 단협사항 불이행 등 불성실한 태도와 정권과 서울시의 태도 불변으로 인하여 결렬되었다. 또한 9월 30일 통합을 선언한 공공부문 3조직은 12월 22일 '공공대통합과 99년 공동투쟁 승리를 위한 투쟁본부'(이하  공투본)로 전화한다.  3월 통합연맹  창립을 앞두고 '공동투쟁을 통한 조직건설'을 목표로, 공공부문에 불어 닥친 구조조정의 문제는 한 단사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므로 연맹의 6대 요구안을 중심으로 한 총파업투쟁을 천명하였다.

  

  구조조정에 대한 조합원들의 분노의 함성은 노동조합의 구체적 투쟁계획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현장에 가득 차 있었다.  대리, 과장 등 현장의 중간관리자들도 불안함을 표현하기 시작하였고, 현장의 조합원  동지들은 이번에는 한 번 제대로 된 투쟁을 하자고 하면서  작년 현대자동차와 만도기계의 투쟁을 상기하며 투쟁의 상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번 투쟁에 대한 조합원들의 높은 열기는 12월 15일 서울역에서 열린 제1차 조합원 총회에서 확인된다. 4천5백여 명이 넘는 조합원들의 열기는  집행부의 기대를 넘어선 것이었고, 조합원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후 5차 총회(3월 4일, 청량리역)까지 연인원 2만2천 명이 넘을 정도로 조합원들 투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3월 5일 집행간부들이 서울시청 항의방문 도중 연행되자,  사복투쟁과 작업거부 투쟁에 즉각적으로 돌입하여 집행간부들을 구출할 정도로 투쟁의 사기는 드높았다.

  또한 현장에서는 현장의 현안에서 시작하여 현업사무소와 국지적 투쟁을 만들어 내는 등 총파업 투쟁을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총파업 D-day가 다가옴에 따라 역사 방송, 차내 방송 등  효과 높은 대시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전동차가 멈추는 파업을 위하여 차량,  기술지부의 5일간 작업거부 투쟁이 배치되었다. 이러한 투쟁에 조합원들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임하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8일간에 걸친 파업을 마치고

  

손승권(서울지하철노동조합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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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을 마련하며

 

  민주노총의 2차 총력투쟁이 끝났습니다. 서울하철노조를  필두로 한 1차 공공연맹의 투쟁이 메이데이투쟁과 연결되지  못하고 마무리되었는데, 메이데이투쟁 이후 2차 총파업투쟁도 긴 공백을 경험한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2차 총파업투쟁은 역시도 민주노총 전체의 총력투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금속산업연맹과 보건의료조노조를 중심으로 분산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전국적 정치총파업을 통해  현재의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은 이제 힘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전국적 정치총파업만이 우리의 대안입니다.  그러기에 상반기  투쟁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그 평가에 기초해서 새로운 투쟁전술을 마련하고, 투쟁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평가는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다음 호로 미루고, 이번 호에서는 서울지하철 노조의 파업투쟁과 2차 총력투쟁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 합니다.

  서울지하철 파업투쟁에 대한 평가는 투쟁에 직접 참가하신 동지들의 이야기를 담아서 정리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신  동지와, 서울대에서 농성하신 동지 두 분, 그리고 학생 사수대 동지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직접 참여하신 분들의 생생함이 이후 투쟁평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상반기 투쟁에 대한 동지들의 평가가 잘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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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지하철 노동조합은 '노동시간 단축, 지하철 개혁, 고용안정 쟁취'의 요구조건을 가지고 4월 19일 04시부로  총파업투쟁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4월 26일 저녁 위원장의 명령에 따라 파업을 중단하고 현장에 복귀하였다.

  

  

  1. 파업에 들어가기까지

  

  작년 한 해, 전 사업장에 걸친 정리해고의 광풍은 공공부문으로 그 칼날이 겨누어지면서, 서울지하철에 대해서도 '지방공기업 구조조정 혁신'이라는 미명 아래 도발을 시작했다. 정원의 30%에  해당하는 3,447명의 감축과 임금삭감, 복리후생비 삭감이라는 '혁신방안'은 현장을 들끓게  만들었다. 서울시와 공사는 경영진단 용역을 통하여 구조조정안을 계속  흘리고 있었으며, 현장에 직무분석팀을 투입하려 하였고, 지원부서(본사  및 현업 사무실)에  대한 자체 직무분석을 시분 단위로 수행하게 하였다. 또한 자신들의 구조조정안을 발표도 하기 전부터 명예퇴직을 강제 시행하고, 고령자 대기발령, 사규의 일방적 시행 등 도발을 행하였다. 공사와 서울시는 1월 28일 최종적인 구조조정안을 통하여 2,078명의 인원감축, 정년단축, 임금삭감, 복리후생 축소를  들고 나왔다. 또한 97년에 체결된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이 아직 남았음에도 체력단련비와 대학생 학자금을 지급하지 않는 등 선제공격을 해왔다.

  이에 11월에 출범한 8대 집행부는 가장  먼저 구조조정 투쟁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구조조정특별위원회(이후  '고용안정과  지하철개혁특별위원회'로 명칭 변경)를 구성, 구조조정안에  대응하는 노동조합의  안을 마련하였으며, 지회별 총회, 현장순회 조합원 교육 등을  통하여 구조조정 투쟁을 준비하였다. 노동조합은 '노동시간 단축, 지하철개혁, 고용안정 쟁취'의 요구 조건을 가지고 두 차례의 특별교섭(2월 12일, 3월 3일)을 하였으나,  사측의 단협사항 불이행 등 불성실한 태도와 정권과 서울시의 태도 불변으로 인하여 결렬되었다. 또한 9월 30일 통합을 선언한 공공부문 3조직은 12월 22일 '공공대통합과 99년 공동투쟁 승리를 위한 투쟁본부'(이하  공투본)로 전화한다.  3월 통합연맹  창립을 앞두고 '공동투쟁을 통한 조직건설'을 목표로, 공공부문에 불어 닥친 구조조정의 문제는 한 단사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므로 연맹의 6대 요구안을 중심으로 한 총파업투쟁을 천명하였다.

  

  구조조정에 대한 조합원들의 분노의 함성은 노동조합의 구체적 투쟁계획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현장에 가득 차 있었다.  대리, 과장 등 현장의 중간관리자들도 불안함을 표현하기 시작하였고, 현장의 조합원  동지들은 이번에는 한 번 제대로 된 투쟁을 하자고 하면서  작년 현대자동차와 만도기계의 투쟁을 상기하며 투쟁의 상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번 투쟁에 대한 조합원들의 높은 열기는 12월 15일 서울역에서 열린 제1차 조합원 총회에서 확인된다. 4천5백여 명이 넘는 조합원들의 열기는  집행부의 기대를 넘어선 것이었고, 조합원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후 5차 총회(3월 4일, 청량리역)까지 연인원 2만2천 명이 넘을 정도로 조합원들 투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3월 5일 집행간부들이 서울시청 항의방문 도중 연행되자,  사복투쟁과 작업거부 투쟁에 즉각적으로 돌입하여 집행간부들을 구출할 정도로 투쟁의 사기는 드높았다.

  또한 현장에서는 현장의 현안에서 시작하여 현업사무소와 국지적 투쟁을 만들어 내는 등 총파업 투쟁을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총파업 D-day가 다가옴에 따라 역사 방송, 차내 방송 등  효과 높은 대시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전동차가 멈추는 파업을 위하여 차량,  기술지부의 5일간 작업거부 투쟁이 배치되었다. 이러한 투쟁에 조합원들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임하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2. 파업투쟁

 

  4월 18일~19일(일~월) 파업 1일차 파업투쟁의 돌입은 당연한 것이었다.  수많은 파업불발에 익숙(?)해진 조합원들도 이제는 정말 파업군장을 준비하고 각각의 사전 집결지로 모였다. 군자기지(차량),  신정기지(기술),  창동기지(역무),  명동성당(중앙,   승무)으로 모인 6,000여 명의 조합원들은 폭력경찰의 위협을 뚫고 파업 전야제를 힘 있게 사수했다. 또한, 파업 전야제를 마친 차량지부는 건국대를 거쳐 세종대로 전 조합원이 진입하였고, 그곳에는 300여의 학생사수대  동지들이 지하철 노조의 선봉대로서 우리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지회별로 젊은 조합원  동지들을 중심으로 사수대 지원투쟁을 벌여내었지만, 우리 지하철 노동자들은  언제 스스로의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을 지 못내 아쉬웠다.

  세종대로 일단 진입하기는 하였지만 04시의  파업출정식을 이 자리에서 2,300여 동지들과 같이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니 거점을 이동하는 줄행랑 싸움이 될 지, 산개되어 지방을 떠도는 싸움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03시 30분 경, 우리는 세종대를 둘러싼 8,000여  명의 전투경찰의 위협에 결국 낮 일정의 지침만을 받은 채 소조별로 산개하였다.  비록 파업 출정식을 힘 있게 하지는 못했지만 이동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위원장의 파업돌입 선포는 가슴 벅찬 일이었다. 이제 우리에겐 파업투쟁전선을 완강하게 지속시켜 내는 일만 남았다.

  조합원들은 사우나에서, 여관방에서, 동료의 자취집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1시 서울역, 공공연맹 총파업 선포  집회로 집결하였다. 수많은 공공부문 동지들 중에서 서울역 광장의  선두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서울지하철 동지들이 너무나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만나는 이들과의 악수에 힘이 들어간다. 이제서야 우리가 파업을 했다는 실감이 든다. 우리는 명동성당을  거쳐 차량, 기술, 역무 지부의 제2의 거점인 서울대로 향하였다. 서울대는  전투경찰 병력이 계속 배치되고 있었다. 학생사수대의 헌신적인 노력과 차량  조합원들의 집단적 사수대오로 파업대오에 합류하고자 한 모든 동지들이 결집할 수 있었다.

  이어서 아크로광장에서 열린 야간집회는 세  개 지부와 소속 지회들의 깃발들로, 파업대오의 신나는 함성으로 물결쳤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의 환영사 중 "서울대의 역사에서 이 아크로의 계단이  넘쳐서 장미광장까지 차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는 역사의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는 말처럼 우리는 역사를 바꾸어 나가기에 너무나 충분해 보였다.

  

  4월 20일(화) 파업 2일차

  

  전날, 강의실과 식당, 복도에서 잠을 잔 조합원들은 아침 일찍 서둘러 노천극장으로 대오를 이동하였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서울대에 들어와 시설을 사용하고 있지만, 학생들에게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집회 앰프도 최대한 작은 것을 사용했다.

  조합원들에게 또 하나의 지참물이 생겼다. 은박깔판이다. 전날 잠자리로 사용하던 깔판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모습은 영락없는 노숙자의 그것이다.

  아침 조합원총회에 노천극장을 가득  메운 세 개 지부  조합원들은 다시 한번 서로의 모습을, 서로의 대오를 보면서  놀라워하며 함성을 질렀다. 이날은 총회가 수시로 열렸다. 파업농성 프로그램이 사전에 충분히 기획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날 총회가  거듭될수록 대오가 불어난다는 것이다.(서울대만 6,000에 가까운 파업대오가 집결했다.) 아침보다 낮이, 낮보다는 야간총회가 더 많은 조합원들로 가득 차 간다는 사실은  우리 투쟁이 초반 승기를 잡았다는 증거이고, 거점농성이 조합원들로 하여금 자신감과 투쟁의 열기를 더욱 더 불어넣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약한 고리라던 역무의 조합원들은 변함없이 대오를 유지하는 차량의  동지들을 보면서 강고한 전선으로  묶일 때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으며, 선봉적 역할을 자임해오던 차량의 조합원들도 불어나는 역무의 파업대오를 보면서 새로운 신뢰와 동지애로 격려를 보냈고, 스스로에 대해 새로운 힘을 받았던 것이다.

  이날, 검찰에서는 21일 04시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전원 직권면직 하겠다.'는, 공사의 인사규정에 있지도 않은 협박을 가해왔다. 또한 3일 이내에 파업을 깨겠다고 장담을 하고 있었다. 파업의 첫 위기가 온 것이다. 기술지부에서는 지회장과 조합원이 전원 복귀한 지회가 발생하였고, 복귀자가 발생한 지회가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복귀자들을 파업현장으로 다시 끌어내기 위한 기술지부 현장 간부들의 강력한 현장순회 활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 이러한 현장 활동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조직 행위(특히, 현장간부에  의해 저질러진 '특급' 반조직 행위)에 대한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대응의 부재는 이후 전선의 일부분이 무너지는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4월 21일(수) 파업 3일차

  

  전날 밤 10시가 훌쩍  뛰어넘어 온 저녁 도시락으로  배를 채우고 조합원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아직 새벽이 오려면 꽤 남은 시간에  조용한 비상이 걸렸다. 침탈이 예상된단다. 명동성당 집행부에서는 침탈 시 산개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새벽 어스름한 시간에 오천 명이 넘는  대오가 관악산을 넘어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할 뿐더러 파업대오를 급속히 약화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이날 새벽의 비상은 약간의 소동으로 정리되었지만,  침탈에 대비한 농성장의  준비, 현장 간부들의 의견과 결의를 모아내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파업기간 내내, 이러한 현장단위에서의 토론과 결의는 집행부로부터 요구되지도 않았고, 여성부의 분임토론을 제외하고는 적극적으로 제기되지도 않았다. 이날  오후 여성부는 역무소 단위별

여성조합원 분임토론과 대자보를 통한 외화작업을  펼쳐냈다. 내용은 조기 복귀자에 대한 조직적 대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었다. 분임토론의 결과는 바로 이날 저녁부터 여성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파업대오에 결합하게 하였다.

  검찰의 21일 04시 시한  직권면직 협박은 20일  오후와 동일한 복귀율(공사 측 발표)로 이미 깨졌다. 일부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파업대오는 아직도 견고했다. 서울대 농성장은 상당히 좋은 조건이었다. 따뜻한 봄볕의 햇살과 적당한 솔밭의 그늘, 넓은 잔디동산은 조합원들이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명동성당의 승무 동지들이 물 부족,  공간 부족으로 제대로 씻지도, 쉬지도 못한다는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명성 지옥, 서울대 천국'이었다.

  이날부터 야간총회가 본격적으로 광란(?)의  문화제로 바뀌어갔다. 짧은 집회와 긴 공연은 농성의 피곤함을  씻기에 충분하였지만 우리가 투쟁의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4월 22일(목) 파업 4일차

  

  파업 4일차이다. 이미 노숙자의 수칙(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둔다.  잠은 수시로 잔다.  얼굴은 씻지 않는다.  깔판은 꼭 챙긴다.)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 조합원들은 한편으로는  거점농성의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휴대용 라디오를 통해서 뉴스를 듣고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관해 삼삼오오 이야기하고 있지만, 버티면 이긴다는 식의 농성  지도부의 선전과 지침 외에는 총파업 투쟁 승리의 전망과 실천과제 논의에 대한 주문과 목적의식적 배치는 어디에도 없다.

  '조합원들은 이만큼도 잘 버티고  있는 것이다. 많은 것을  요구하면 더 지친다.'고 한다. 조합원들은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힘든 것을 참아주고 지도부를 따라가 주는 것이 아니다. 이번  총파업투쟁의 목적이 자신의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고, 반드시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조합원들의 힘을 믿고, 보다 밀도있는 파업 프로그램이 제기되어야 할 시기였다. 매일  두시에 민주노총의 집회가 열린다는데, 이날은 서울본부 차원의 총집결 투쟁을  한다는데 서울대 거점은 투쟁의 바다에 떠있는 섬같다.

  

  4월 23일(금) 파업 5일차

  

  '가족의 날'이다. 22일 명동성당에서는 가족과  함께하는 열린 음악회가 있었다. 매일 낮에 시꺼먼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서울대 버들골은 오랜만에 가장을 만나는 아내와 아이들로 넘친다. 활기찬  기운이다. 나와 같은 총각 조합원들은 굳이 서울대까지 부를 사람이  없지만, 애인과 가족들과  함께 버들골을 거니는 모습을 보며 임금노동의 삶을 벗어난 노동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괜한 낭만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을 보낸 조합원들의 얼굴엔 한편으로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었다. 가장의 몸건강을 걱정하면서도 가족들은  미복귀로 인한 불이익을 걱정하였던 것이다. 매일같이 악선전해대는 언론과 반상회, 동사무소와 구청을 통해 하루에도 몇 차례 걸려오는 복귀 종용  전화들은 가족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한 젊은 조합원이 많이 흥분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심장이 약한 노모가 동사무소의 전화를 받고 많이 놀라셨다는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어떤 조합원은 장인이 찾아 왔다. 복귀를 종용하는 장인어른을 돌려보낸 그 조합원은 여전히 파업대오에 있었다. 공사와 정권의 이러한 방해공작이 투쟁의 칼을 더욱 더 갈게 할 뿐이다.

  이날, 당산역 열차 사고가 있었다.  과로에 지친 대체인력 기관사가 당산역에서 제때 제동을 걸지 못해 차단벽을 박아 생긴 사고이다. 다행히 큰 사상사고가 아니었지만 우리 파업투쟁의 위력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단순한 진리가 다시 떠오른다. "세상은 노동자에 의해 굴러간다."

  

  4월 24일(토) 파업 6일차

  

  오후부터 헬기가 버들골을 선회하면서 조합원들을 위협한다. 흙바람에 나들이 나온 어린 아이들이 놀라고 정성스레 싸온  음식들은 못 먹게 되어버렸다. 민주노총에서 마로니에 집회 후에 서울대로 이동하고자  해서 더 심한가 보다. 이날 전투경찰 병력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농성장에서는 거점을 사수해야 하고 사수대를 꾸려 파업대오를 지키자는 주장이 현장활동가들 사이에서 주장되고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10년의  투쟁역사에서 올곧게 공권력에 대항해보지 못한 경험들은 스스로의 행동을  제약하고, 예단하고 있었다. 또한 지도부 역시도 현장활동가들의 결의에 기반하지 않은  채 가장 소극적인 대응책인 산개 전술을 제시할 뿐이었다. 파업사수의 역할은  아직도 학생동지들에게 지워져 있었다.

  7시 30분. 상황실로부터  이동명령이 내려왔다.  관악산 정상에서 대기한다는 것이다. 두어 번에 걸쳐 이동준비와 대오 형성을  반복하다가 밤 9시 30분이 넘어서 산을 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혼란이 왔다. 연주암에서 농성태세로 대기한다는 사전의 정보와 다르게 차량의 일부대오가 과천 방향으로 넘어간 것이다. 길게 늘어선 산악행렬  대오에서는 다시 노천극장으로  복귀하라는 명령과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이 혼재되었다. 결국 새벽 3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우리는 대오에 합류할 수 있었다. 기술과 역무 대오는 서울대 상황실의 명령에 맞추어 산 속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찌감치 내려온 후였다.

  이날의 관악산 전술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그것이 전술의 오류이든, 예정된 선택이었든 그동안 견고하게 유지되어 오던 차량지부 대오를 흔들었고, 조합원들 사이에서 차량지부만 피해본다는 악선전을 돕는 기능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25일(일) 파업 7일차

  

  전날의 산행은 조합원들을 지치게 하였다.  일정의 정상적인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기술지부가 보이지 않는다. 20명 안팎의 동지들만이 외로이 깃발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날 연행되었던 동지들이 속속 다시 서울대로 모여들고 있었다. 명동성당에서는 공사와 경찰의 비열한 조합원 납치에 항의하는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조합원들은 한국통신의 총회에 신경을  쓰면서 야간총회에 모였다. 낮부터 한 번 더 침탈이 있으면 이제는 도망가지 말고 맞붙어 싸우잔다. 현장활동가들 역시 더욱 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였고 이날의 투쟁기조를 옥쇄투쟁으로 가져갔다. 야간총회 도중 전투경찰이 서울대 정문 안 100여 미터까지 진입해 들어왔다. 대오는 바로 중앙도서관 근처로  이동하였고 사수대를 꾸리기 시작하였다.

  지회당 20명, 전체 300여 명도 힘들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무려 천여 명에 가까운 조합원 동지들이 사수대로 나섰다. 어느 지회는 너무 많이 나와 20여 명을 연락조로 편성하기 위하여 지원을 받자, 기동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지원하였다가 사수대로 다시 복귀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합원들의 투쟁열기는 아직도 충분하였다. 조합원 사수대는 학생 사수대의 후방을 지키면서 유사시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물량을 준비하고 아스팔트 바닥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결전을 기다려온 것에 비해 그날의 상황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중앙도서관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역무지부를 중심으로 새벽 2시경에 가족들이 몰려온 것이다. 울며 복귀하자는 가족들을 돌려보낸 역무 조합원들은 가슴에 커다란 바위덩어리 하나를 지고 있었다.

  

  4월 26일 (월) 파업 8일차

  

  우리는 거점 사수투쟁으로, 스스로의 무장된 투쟁으로, 무계 7일의 협박을 뛰어 넘었다. 복귀자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파업의 대오가, 그것도 핵심대오들이 굳건히 총파업의 전선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보니 농성장이 술렁거린다. 한국통신의 파업 불발에 조합원들이 동요하고 있다. 사실 많은 조합원들이 한국통신  파업에 대해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도부는 신문광고를 통해 '토론을 강화'하라 할 뿐 무엇을, 어떻게 토론하고 조직하라는 말이 없다. 중식 집회도  취소되고 지도부의 기자회견까지 기다리라는 말뿐이다. 예견된  한통의 파업철회에 대오가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지도부는 대오를 추스리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은 안을 가지고 교섭을 요청하였다. 그동안 교섭을 구걸하던 정권은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읽고서는 공사 사장의 이름으로 교섭을 거부한다. 남은 길은 현재의 파업대오들(4,078명, 그것도 차량과 승무의 파업대오가 거의 유지된)로 파업을 완강하게 지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도부는 조직역량 보존을 근거로 완전한 백기투항을 하였던 것이다.

  서울대 파업대오는 저녁 6시,  차량지부장의 간략한 경과보고와 명동성당으로의 이동명령(불행히도 부탁에 가까웠다.)에 명동성당으로 결집하였다. 파업철회가 예상되지만 그래도 위원장의 새로운 결단을  기대하며, 그것도 안되면 내 귀로 복귀명령이라도 듣고 가겠다는 처절한 심정으로 조합원들은 명동성당으로 모였다. 명동성당은 이미 기자들을 향해 격렬히 저항하는 조합원들과 흐느끼는 여성조합들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 혼란이 밀려온다.

  

  

  3. 복귀 후

  

  26일 22시를 기해 조합원들은 복귀를  하였다. 차량기지의 경우, 경찰 병력의 주둔으로 몸싸움과 연좌 농성을 벌이고 기지로  복귀할 수 있었다. 모두들 가슴 속에 비수를 품고 무너지는 가슴을 쓸어내면서 서로에 대해 격려의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반조직자들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라고 생각했다.

  복귀 다음날부터 현장은 냉냉하게 얼어  있었다. 먼저 복귀한 주임, 대리들과 조합원들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혀 있었고,  조기 복귀자들은 아침부터 자구책 마련이라며 대책회의를 하고 출입문마다 전투경찰이 배치되어 현장을 감시하고 있는 등 현장의 긴장감은 더욱  더 높아갔다. 차량기지뿐만 아니라 승무소, 역사 등에서 소위 '왕따' 사건이라는 마찰들이 일어났다.

  사측은 이러한 마찰들을 침소봉대하여 현장에 대한 탄압을 가해왔다. 어느 역에서 멱살을 잡는 사태가 벌어져 119로 신고가 들어가자 경찰이 출동을 하였다. 신고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 하였지만 경찰은  공의를 불러 그 자리에서 1주 진단서를 첨부하여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주변에 있던 예닐곱명의 조합원들을 체포했다. 째려보기만 해도 협박이고 조금만  거칠게 항의해도 폭언․폭력으로 엮는다. 그러고는 "입조심해라. 까불다 다친다"며 조합원들을 협박한다.

  대의원, 간부들의 경찰조사로 빈 현장을 비집고 들어와 지도부의 잘못으로 파업이 망쳐졌다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노동조합의 최소한의 활동인 분임토의마저 방해한다. 그러면서 주임,  대리들의 상설협의체를 구성하여 노동조합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소위 '공안대책회의'라 불리는 이 협의체는 매일같이  현장의 발언들과 움직임에  대해 체크하고 있다. 이제 조합원들은 일터에서조차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어렵게 분임토의를 하더라도 누구를 통해 자신의 발언이 보고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아끼게 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지도부는 조직적 퇴각을 한다고 하였지만 현장은  그렇지 못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순간 현장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책임지지 못하는 곳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재파업을 선언하지만 공사의 소명서 요구에 노동조합의 단일한 소명서를 만들었을 뿐  집행하지 못하는 사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4. 4.19 총파업 투쟁의 교훈과 과제

  

  8일에 걸친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그 일단의 막을 거둔 상태이다. 우리는 이 총파업투쟁을 승리로 볼 것인가? 패배로 볼 것인가?

  혹자는 구조조정이 지금 시행되지 못하게  막았으므로 승리라고 자평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은 것도, 막아낸  것도 없다. 더욱이 파업투쟁에서 조합원들이 보여준 투쟁의 의지와 열기에  부응하는 투쟁과 조직적 성과를 내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패배적 투쟁을 하였던  것이다. 이제 문제는 어떠한 교훈을 얻을 것인가이다.

  먼저, 서울지하철 노조는 총파업투쟁을 완강하게  끌고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했다. 투쟁의 의지는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계획으로 제출되고 실행하는 것이다. 차량, 역무, 승무지부의 경우,  공사가 발표한 복귀율로 보더라도 1~2일차를 제외하고 7일차까지 파업대오는 견실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합원들의 투쟁 열기를 상승시킬 수  있는 농성장의 프로그램은 너무나 빈약했다. 식사 전의 간략한 집회와 문화공연이 농성장의 모든 일정을 대체하였고, 그 속에서 조합원들은 수동적으로  배치될 뿐이었다.  중앙의 계획으로 분임토의가 적극적으로 배치되어 상황의  공유와 투쟁의 방향이  아래로부터 모아졌어야 한

다. 지회장들 마저 회의를 통한 논의는 없고 지시사항만 있다고 답답해 할 정도라면, 지회-분회-소조로 이어지는 잘 짜여진  조직체계는 조합원에 대한 관리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25일 밤의 천  여명의 사수대가 잘  보여주듯이 파업대오를 사수하고자 하는 조합원들의 열기는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파업 사수대를 일찍이 계획 속에서 준비하지 못했다. 대중의 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조합원 대중의 높은 열기에 놀랬던 것일 수 있다.

  두 번째, 과감한 파업전술의 부재이다. 우리는 5일간에 걸친 작업거부 투쟁을 실시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전동차가 멈추는 파업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전동차가 정상적으로 운행되는 한 자본과  정권은 우리 파업의 파괴력에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이번  투쟁에서 승무지부의 완강한  투쟁으로 전동차를 운행할 기관사가 없어 전동차 운행이 단축되었을 뿐,  전동차가 중간에 퍼지는 일은 파업 후반으로 갈수록 거의 없었다. 언론의  '전동차 고의 고장설'에 휘둘리는 모습은 노동자의 권리인 파업권을 스스로 제약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세 번째, 지지엄호투쟁의 잘못이다. 서울지하철의 이번 파업투쟁은 99년 노동자 투쟁을 열어가는 포문의 역할이었다.  민주노총 차원의 공동파업을 조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더라도 파업대오에 대한 지지지원 투쟁을 강화하고, 전투경찰의 병력을 분산하기 위해 시내  곳곳에서의 힘있는 가두  투쟁을 조직했어야 한다, 그 속에서 곳곳의 투쟁사업장 동지들을  배치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민주노총의 투쟁이 될 수 있도록 관장했어야 했다.

  

  우리는 이번 파업을 통하여 조합원의 투쟁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간부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는 총파업투쟁의 준비 과정에서부터 현장의 소소한 투쟁을 만들어 낼 때  부터, 총파업 투쟁기간 내내, 투쟁이 지도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합원들의 열기로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진정 중요한 성과이다. 이러한 현장의 동력을 틀 안에 가두어 놓지 않고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현장의 활동가들에게 남은 문제이다.

  또한 기층 단위의  현장간부들부터 의견을 전체  차원에서 수렴하고 물화시켜 낼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만이 이후의 투쟁을 승리로 담보할 수 있는 길이다. 이번 파업기간 동안  '총파업투쟁 완전 승리를 위한 지하철 현장활동가 일동' 명의의 유인물 작업과 투쟁은 그 영향력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투쟁의 과정 과정에서 현장활동가들의 입장을 모으고  공개적으로 제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또한 우리는 파업대오를 침탈하려는 공권력에 대항하여 노동자 사수대를 조직한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자신의 대오는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동지들에 대한 새로운 신뢰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99년 투쟁을 힘차게 열어 제꼈던 우리 지하철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은 끝났다. 투쟁으로 뜨거웠던 조합원들은 이제 다시 현장에서 불어닥치는 탄압의 광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새로운 투쟁의 내일을  기약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 역사는 패배의 역사였다. 그러나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투쟁의 승리를 위해 스스로 단련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투쟁의 아픔을 딛고 아직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자본과 정권에 대해  보다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극심한 현장탄압 속에서 재파업 선포에 맞추어 명동성당에 모인 2,000여 명의 조합원 동지들은  아직도 우리의 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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