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2009년 베쓰볼

2009/12/30 22:16

1학기에 수강했던 정치학 수업에서 정치와 관련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발표를 하는 과제가 있었다. 나는 ‘민족주의의 폐해’를 선택하였다. 황우석 사태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진보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분들의 잘못도 이야기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민족주의에 대해 디스(Diss) 한 놈이 올 해 3월에는 뭐 했을까? WBC 국가대표 유니폼 져지 사려고 10만원 모으고 있었다.(결국 실패했다.ㅠㅠ)

 

리쌍의 ‘발레리노’를 들어보면 이런 가사가 나온다. ‘무언가를 지켜야 하는 건 그것에 지쳐도 미쳐야 하는 것.’ 확실히 난 야구에 미쳤었다. 지켜야 할 게 없었음에도 지치도록 야구에 미쳐 있었다. 어머님의 구박과 좁아져 가는 대인관계 속에서도 야구를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2004년 풋풋한 스무 살 새내기 때 이런 사실을 밝히면 “나는 매니아요” 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강산이 바뀌려 시작하는 5년 후-대운하 땜에 진짜 바뀌려 한다.- 똑같이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에게 “아, 그러세요. 주위에 그런 사람 많은데.”라는 심드렁한 대응만 돌아오게 되었다.

 

WBC 대만 전 류현진 선수가 1번 타자에게 내 준 볼넷부터 한국시리즈 7차전 나지완 선수의 끝내기 홈런까지. 2009년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배회하였다. 야구라는 유령이.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 즉 초등학생과 사춘기 청소년, 여대생과 남학생 커플, 부부와 미취학 아동들이 유령을 보려고 입장료를 지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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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 야구장을 찾습니다. 그리고 선수들은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출처=기아타이거즈 홈페이지)

 

프로야구는 이들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았다. 비록 KBO가 상식 이하의 행정을 펼치며 팬들의 마음을 비참하게 한 적은 있었지만 최소한 선수들은 팬들을 실망시켜주지 않았다.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 하나에 혼과 열정이 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극적인 승부를 불러오고 이는 또 다른 사람들을 야구팬으로 만드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오승환 선수를 상대로 한 박용택 선수의 만루 홈런, KIA 타이거즈의 단일 개월 최다승인 20승을 완성했던 장성호 선수의 만루 홈런, 홍성흔 선수의 갈매기 타법에 이은 끝내기 안타까지 이 모든 게 팬이 없었다면 나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흥행만큼이나 논란거리도 많았다. WBC 결승전에서 임창용 선수의 싸인 미스 논란. 선수들의 잦은 부상과 노후 된 구장들. 방송사와 대행사간의 중계료 문제. 감정싸움까지 오가게 했던 한국시리즈 대결. 허점투성인 FA제도. 돔 구장 건설계획과 히어로즈 현금 트레이드 논란. 선수노조 결성 노력까지. 오로지 야구결과만을 이야기 했던 예전과 달리 야구와 관련하여 많은 소재들과 담론들이 논쟁의 장으로 소환되었다.

 

22년 째 야구팬으로서 이런 현상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지만 흐뭇해지기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야구가 몇몇 소수 팬들의 전유물에서 모두가 즐기고 고민하는 문화코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특이한 걸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자기만 좋아하면 외로운 법이다. 올 해 확실히 난 이런 외로움에서 벗어났다.

 

다만 이런 야구 열기를 이용하려는 몇몇 정치인들의 행태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4대강 살리기에 성공하면 야구장도 자동적으로 짓게 된다고 주장하는 분. 지난 7년 동안 야구장을 짓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다가 줄어드는 지지율과 연고지 팀의 극적인 우승을 보며 쌩뚱맞게 돔 구장을 건립하겠다고 이야기 하는 광역단체장. 과연 이 분들은 야구를 이용하며 살림살이가 나아지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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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저는 행운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구 가지고 밥 먹고 살고 싶은 데 가능할까요?(출처=미디어스 홈페이지)

 

이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베이스볼 오타쿠를 시작하는 시점이 늦었다는 건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크다. 개인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많은 야구인을 만나고 싶었고 나름 야구 전문 블로거 로서 활약하고 싶었던 올 해의 바람이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구 열기에 편승해서 칼럼으로나마 야구팬들과 만나기에 야구와 관련하여 많은 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 블로거 분들께 죄송하기만 하다.

 

2009년 부끄러운 칼럼리스트에서 2010년 ‘전문’이란 단어가 부끄럽지 않는 야구 전문 블로거로 환골탈태할 것을 약속하겠다. 내 방 넷북 앞에서 때로는 현장에서 야구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할 것이다. 많은 분들의 접속과 격려 그리고 질책을 기대하고 있겠다.

 

사흘 후 2010년이 다가온다. 혹자는 ‘올 해 반짝 흥행이 아니냐. 내년 2010년 시즌이 문제다.’ 라고 걱정한다. 이런 행복한 시간 전에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관중석에서 흐르는 벨 소리를 듣는 것도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이 들의 걱정에 일면 동의한다.

 

하지만 올 해 많은 분들이 야구가 무미건조한 스포츠가 아닌 인간의 희로애락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이라는 걸 알지 않았는가. 야구는 야구다.(Baseball Being Baseball) 야구가 달라지지 않으므로 벌꿀이 꽃을 향해 날아오듯 많은 분들이 이 희로애락을 다시 느끼기 위해 야구장을 방문할 것이다. 벌써 2010년 프로야구가 기대된다. 내년에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야구장과 미디어스에서 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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