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 문화 산업 챕터 발표문 초고

2010/12/03 16:01

  사실 오늘 발표를 위해 쓴 거였는데 수업 진도가 많이 나가지 않아 발표하지 않게 되었다.

  일단 이걸 초고로 하고 살 좀 붙여서 다음주에 다시 발표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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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 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지난 11월 6일 오전 8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라는 1인 밴드로 활동하던 이진원 씨가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이슈가 되었던 건 한 음원 유통 플랫폼에서 그에게 비상식적인 음원료를 지불했다는 것. 이진원 씨가 항의하자 그 회사 전용 사이버 머니(도토리)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가 이런 처우를 받은 이유는 단 하나. 상품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상품성이 유일한 판단 기준인 게 음악뿐이겠는가? 많은 이들에게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를 전달했던 독립영화도 대통령 앞에서는 ‘돈벌이 수단’이 될 뿐이고 해외에 진출한 드라마가 얼마에 팔렸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리고 스포츠 스타들은 그가 흘린 땀이 아닌 그가 받는 계약금과 연봉으로 평가 받는다.

 

 문제는 문화의 상품화가 문화 자체뿐만 아니라 공급자와 수요자의 생각이나 가치관 모두를 동일하게 만드는 데 있다. 생태계에 다양한 종이 있을수록 좋듯 하나의 사회에도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 많은 곳에서 이 다양한 의견과 방식을 문화라는 장소에서 꽃피웠는데 위대한 인물들은 그 사회에 통용되는 양식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정적일 때는 양식보다 다른 의견과 방식을 따랐다.(198~199P 변형) 인류의 진보는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런데 자유로운 생각의 장이었던 문화가 ‘최소비용 최대효용’이라는 경제적 논리가 만나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 산업은 하자 없는 규격품을 만들 듯이 인간들을 재생산하려 든다.(193P) 또한 효율성에 대한 요구는 기술을 심리 조종 기술로, 즉 인간을 조종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 버렸다.(246p) 그리고 이런 규격품에서 벗어나려 하는 인간에게는 철저한 소외를 통해 징벌을 내린다. 순응하지 않는 별종은 경제적인 무능 상태에 빠지게 되고 이는 나아가 정신적 무능력을 초래한다.(202P) 또한 소비가 최고의 미덕임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 속에서 오직 진리에 호소하고자 하는 언어는 돈 버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현실의 사람들을 짜증나게 할 뿐이다.(223p)

 

 또한 현대 대중문화의 또 다른 특징으로 너무나 가볍고 자극적이다. 문화 상품의 속성은, 제작물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민첩성과 관찰력과 상당한 사전 지식을 요구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 재빨리 스쳐 지나가는 사실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만든다는데 있다.(192p) 자극적인 음식을 먹게 되면 그에 중독되며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게 되듯이 대중문화도 자극적인 걸 접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더 강한 걸 찾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왜 이걸 봐야 하는가’ 또는 ‘이게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같은 성찰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결국 문화의 상품화와 그로 인한 획일화, 그리고 가벼움은 궁극적으로 정치,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대중문화의 양식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바로 사회적 위계질서에 대한 순종이다.(199p) 분명 자신은 불합리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양식에 익숙해져 누군가에게 순종하게 된다. 또한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며 자신의 이해관계를 배신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 201P의 한 문장을 조금 틀어서 본다면 문화 독점으로 가는 경향을 잡지 못해 파시즘을 잡지 못했다. 1930~40년대 유럽이 그러했고 현재의 대한민국이 그러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민주화 정부 시기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대부분 재벌 2세였던 걸 떠올려 보자. 그리고 선거 즈음 스타의 소장품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펀드 투자에 대해 이야기 하던 MBC <일요일일요일밤에>에서 방영되던 <경제야 놀자>를 생각해 보자.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도 이런 것들이 2007년 대선에서 ‘경제=성공’ 이라는 프레임을 작용시켰다. 그리고 그 프레임의 최대 수혜자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무엇이 있을까? 개인이 참여하는 ‘대중문화’를 지향하는 건 어떨까? 책에는 청취자들을 서로 엇비슷한 방송 프로그램들에 권위적으로 복종시키는 라디오는 그들을 수동적인 객체로 만든다고 (185P)나와 있지만 지금은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인터넷의 발달로 피드백이 가능하며 기술과 장비의 발달로 자신이 직접 창작하는 UCC 물들도 많아지고 있다. 여기에 블로그,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이용해 자신의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이나 사는 이야기들을 알리는 1인 미디어가 발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것들을 통해 천편일률적이던 대중문화에 다양성을 접목시키는 게 지금까지 대중문화의 폐해와 여기에서 오는 사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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