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합니다. 이청준.'

2008/01/29 23:51 베껴쓰기
내가 처음으로 이청준 선생님을 만난 것은 1977년 가을이었다. 그때 출판부의 태도을 총 지휘하고 있던 정병규 씨의 소개로 조선호텔 사무실에서 첫 만남을 갖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때까지 이청준 선생님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불어를 전공한 나는 대학 입학 이후에 한국 문학을 대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 입학 이전에 접했던 한국 작가는 김동리, 황숭원, 이범선 등과 같은 원로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정병규 씨로부터 들었던 이청준 선생님은 한국 순수문학의 최정상급 작가라는 정보밖에는 가진 것이 없었다.
시내에서 식사 겸 술을 한잔 한 뒤, 이 선생님 댁 부근에서 2차까지 끝마쳤을 때였다. 마침 술집 앞에는 작은 서점이 하나 있었다. 이 선생님은 나를 그 서점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자신의 창작집 <별을 보여드립니다>를 한 권 구입했다. 물론 나로서는 처음 보는 책 제목이었다. 이 선생님은 그 책의 표지를 넘긴 후 하얀 속 면지에다 무엇인가를 적은 후 그 책을 나에게 주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는 차 안에서 <별을 보여 드립니다>의 표지를 넘겼을 때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안합니다. 이청준."
나는 그동안 많은 책을 증정받아 보았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증정사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안합니다. 이청준."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 짤막한 글은, 그러나 묘한 감동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 짧은 글이 실은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이 사장, 보아하니 내 작품은 하나도 읽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출판사 사장은 작품을 통하여 작가와 교감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는 출판사 사장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좋은 출판사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출판사의 가장 큰 재산은 돈이 아니라 필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만나서 매우 반가웠습니다. 이 만남이 깊은 교제로 지속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나의 작품을 읽어보십시오. 바쁜 사람에게 이런 요구를 해서 미안합니다. 이청준.'
--이재철, <'믿음의 글들, 나의 고백-홍성사의 여기까지>에서
 

이만한 필자의 겸손함도 그것을 읽을 줄 아는 출판인의 마음도... 멋지다.

유명한 필자여서도, 한때를 풍미한 출판사 사장이어서도 아니다.

그 간결함이 내 마음에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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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9 23:51 2008/01/29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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