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유월 밤

2009/06/15 00:21 생활감상문

유월 첫주엔.... 그냥 가만히만 있는 주말이 너무 절실했다. 자체 입원 모드를 바랄 만큼 아프거나 피곤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머리를 쉬게 하고 싶었다. 쫓기며 일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난 것도 아닌데... 그냥 마감으로 시작해 어버이날/스승의 날 지내고, 중간중간 사람 만나고 국상 분위기의 한 주간까지 겪으니 너무 많은 일들에 접속한 기분이었다. 그냥 가만가만히 있는, 리셋하는 이틀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지난 주 일요일 밤에 생각하니... 무슨 무기력증이 온 거 같더라. 그러고 월요일을 맞으려니 기분이 또 갑자기 초조해졌다. 출근하자마자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치고, 시커멓게 부은 얼굴로 출근했는데, 오백 년 만에 싸이 방명록으로 후배 Yeon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월/화/수 시내에서 연수가 있어, 간만에 칼퇴근을 할 수 있으니 저녁을 먹자고. 화욜은 사내 강의로 MSG샘의 지젝 강의가 있고, 수욜은 불어 수업. 시간은 당일인 월요일밖에 없다. 재작년에 함께 일본 여행 다녀왔다가 가을에 Yeon의 동기인 Soo 결혼할 때 만나고 처음 보는 거라... 제법 수다거리는 많았다. 늘 그렇듯 주로 내가 떠들었지만.

마침 그 전 주일에 T/V 선배인 HJ옹이 뭐 부탁할 거 있다면서 전화하고, 당일에는 權's와 통화한 터라 선배들 흉까지 사알짝~. 후배들 소식도 뒤늦게 입수. 한 학번 아래인 Yeon의 동기들도 유날리 결혼들을 열심히 한 터라... 이제 날만 잡으면 되는 쭌~을 제외하면 Yeon만 솔로[아, 그러고 보면 내 동기들도 결혼들 열심히 했는데... 그나마 우린 나까지 두 명인가 세 명 남았던가? 1월에 L군이 결혼했음에도 결혼에 대한 나의 지지부진한 생각은 별로 변화가 없으니].

적성에 안 맞는 은행에 어쩌다 들어가 초반에는 덤벙대는 성격 때문에 고생하고, 웬만큼 자리를 잡은 지금에는, 그 놈의 책임감 강한 성격 탓에 야근 너무 당연시하고(이게 우리 T/V 출신들의 문제이긴 하지) 그러면서.... 몇 년을 만나도 생활의 변화 없이, 그렇다고 돈 버는 재미가 있다거나 은행 때려치고 뭐 하고 싶은 것도 없이, 결혼에 대한 의식도 없이, 나이만 먹고 있는 Yeon이다. 바로 전날까지도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주제에... 또 선배랍시고, 변화를 추구하라고... 회사에서 적성에 맞는 부서로 바꿔 보던지... 이래저래 꼬여 못 쓴 논문... 경력에 도움 될 만한 주제로 바꾸어서... 새로 써서, 인사고과라도 높이던지... 어줍잖은 충고를 한다. 이렇게 무기력 혹은 귀차니즘에 빠진 직장인들이랑 얘기하고 있을 땐... 그래도 내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고, 남들에게 도움도 되고, 어쨌든 생계도 해결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는 건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 그러면 열심히 해야 하는데.

가끔은 남들에게 호기심 덩어리, 열정 덩어리라는 얘기도 듣는다(실력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늘 무언가를 배우면서 일할 수 있다는 보람도 크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뭔가를 못 넘어서는 게 있다. 수영도 동작은 다 배웠지만 결국 혼자 하질 못하고, 자전거도 탈 줄 알지만 운동장에서만 맴돌며, 등산도, 인라인도, 요가도, 재즈댄스도 마찬가지. 일도 어떤 면에서 분명 소질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데, 실수가 잦다. 사람도 많이 좋아하지만, 매달리질 못한다. 무엇에도 강박을 갖지 않는 게 내 유일한 강박이란 우스개를 대학 다닐 때 한 적이 있는데, 여전히 그런 거 같다. 아마추어로 살면 안 될까 하는. 팔 만한 능력을 상품으로 갖는다는 게... 지금까지는 꽤 성공적이었는데, 참 갈수록 힘들다. 화요일 지젝 강의에서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선생님께 물어보고 싶었다. 완벽하지 않은 부모의 오류를 덮지도 않고, 부모를 떠나지도 않고 사는 히스테리증은 그럼 어떻게 되냐고. 워워~ 선생님은 지젝 연구자이지, 임상 상담가가 아니라고...- -;;

수욜에 프리랜서로 함께 일하는 북디자이너 O실장님을 만나서... 일 얘기 후에 잠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쨌든 목표는 10년차 편집자 되기. 하지만 독하게는 안 살기가 목표라니깐...... 일에 지면 안 된단다. 이만큼만 하면 되지...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때부터 일이 재미 없어진다는 충고(그 냥반도 이 바닥에서 20년. 보통 선수는 아닌 것이다)

후닥닥 불어 수업 듣고, 나와 퇴근 전에 마무리 안 되었던 일이 어찌 되었나 전화를 해본다. 일단 다시 회사에 들어가진 않아도 되는 상황. 우물쭈물하다 찜찜할 것 같아 시청에 갔다. 그날은 6.10이었던 것이다. 낮에 신간 편집 후기에... 거부의 말을 되찾자. 기막히다고 입도 다물고 살진 말자... 이렇게 썼는데 곧장 귀가하긴 그랬다. 6.10을 의식해서 챙긴 적도 없건만. 그냥 5.29 영결식 이후에 광장에서 모일 수 있을까 없을까가 나한텐 더 중요했다. 전날 밤에 시청광장을 지키니 어쩌니...해서... 이미 광장 뺏기고 상황 종료된 거 아닌가 했더니 9시쯤 도착한 광장은 초만원. H양은 낮부터 사전행사 다니다가 막 귀가하는 길. M선배는 학교 행사 있어서 못 왔다고 상황 어떠냐고 전화만. 나중에야 통화된 M군은 다른 일로 다망하시어 오지도 못하고, 문자에 답도 안 하고. 10시 반에 문화제 막 끝났을 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평일이고,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니까. 사람도 많고, 이거 뭐 너무 분위기 널널한 거 아냐? 한 것은 완전히 나의 착각. 시청에서 광화문 걸어가는 사이에, 2중 3중으로 쫘악 깔린 전경들.... 뭐야 완전히 차벽 안에서 집회한 꼴이잖아? 평화롭게 끝나지는 않겠구나...라는 느낌이 들면서 꼭 먼저 도망가는 기분이 들더군.

기분이 나쁜 것도 기운이 없는 것도 아닌데, 다만 할 말이 없는 상태. 혹은 욕망이 없는 상태. 결핍은 많은데...... 이것저것 모두 우물쭈물하는 상태랄까. 금욜에 엠티 가서도 평소처럼 나서서 요리하고, 재미있게 놀면서도 피곤하고. 술은 맛이 없고. 그래서 일찍 잤다. 그 와중에 집이랑 잠깐 통화. 몇 달 잠잠하시더니, 아버지는 선을 보라 하셨다. 작년 여름부터 선은 안 보고 있는지라... 그냥 안 본다고 했다. 올해로 두번째 거절이던가, 세번째 거절이던가... 아버지도 더는 채근 안 하신다. 뭐지?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보고 싶은 건 아니기도 하고. 혼자 헛웃음. 갈 때도 올 때도, 운전하는 동료들 심심하게 할 말도 없고, 잠은 오는데 잠이 들지는 않고.... 내가 이렇게 말이 없을 수도 있구나 싶어 스스로 낯설었다.

엠티 끝무렵에 양평장이 장날이길래... 장터 구경을 했는데,  갓 농장에서 따온 느타리버섯이랑 빨갛게 무친 무말랭이 한 근을 샀다. 느타리버섯은 양파랑 볶아 주고, 주중에 만든 멸치볶음이랑 김치까지 곁들이니 주말 밥상이 깔끔하니 맛나다. 제철인 오디 한 그릇 사다 잼도 한 병 만들었다. 빨래 세 판 하고, 이탈리아 여행 간 Y양 대신 화분에 물 주고, 그 화분에 자란 로메인이랑 토마토 따먹고, 낮잠자고, 라면 끓여 먹고, TV 보고, 겨우 겨우 집청소를 했다. 10시 반에 H군이 저녁을 못 먹었다고, 집에 밥 없냐고 문자가 왔는데, 딴 때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전화를 걸었더니... 생각해 보니 너무 늦어서 그냥 삼각김밥 사서 집에 들어가겠단다. 담주에 마감이라... 이렇게 늘어질 때가 아닌데..... 갑갑하니까 안온한가 싶기도 하고, 뭔가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게 아닐까?

다들 느끼겠지만, 참 안온하기가 힘든 때여서... 자꾸 주저 앉고 싶은가 보다. 새벽에 소나기가 온단다. 빨래 걷으러 마당에 나가니 흐린 저녁 공기가 축축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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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5 00:21 2009/06/15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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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M  2009/06/15 1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라 말로 하긴 어렵지만... 강이님이랑 막 얘기하고 싶게 만드는 글이에요. ^^;
    • 강이  2009/06/15 2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어라 답하긴 어렵지만... EM님이 막 얘기하고 싶은 게 뭘까 궁금하게 만드는 댓글이군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