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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9/18
    변화된 것(2)
    burma
  2. 2007/09/18
    변화된 것(1)
    burma
  3. 2007/09/18
    핌에게서 온 편지
    burma
  4. 2007/09/18
    국경없는 친구들과 연대하는 모임 소개
    burma
  5. 2007/09/18
    2005년 11월 후원금 송금내역
    burma
  6. 2007/09/18
    감기 조심하세요
    burma
  7. 2007/09/18
    [펌] '꽃필라 운동' 만주와 샤말
    burma
  8. 2007/09/18
    아이들의 열악한 교육상황(2)
    burma
  9. 2007/09/18
    아이들의 열악한 교육상황(1)
    burma
  10. 2007/09/18
    비내리는 금요일
    burma

변화된 것(2)

Name  
   류은숙  (2005-11-23 19:03:46, Hit : 202, Vote : 16)
Subject  
   변화된 것(2)
--->변화된 것(1)에서 이어지는 글

난민 캠프에서의 삶에서는 식량을 재배하거나 수확하는 일이 없다. 그저 주어진다. 도정된 쌀, 강화 밀가루, 어묵, 말린 고추, 소금, 기름이 인도주의단체들에 의해 주어진다. 난민캠프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 눈으로 보면 음식을 위해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캠프 밖에서 일자리를 찾는 일을 제한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난민들의 수중에 돈이 있다할지라도, 그들의 ‘오랜 벗들’ 같은 계절음식이나 채소들은 난민들의 부엌에 등장할 일이 결코 없다. Muga의 입에서는 둘째딸이 태어난 이후로 채소나 열매의 이름이 떠난 날이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카렌족 음식에 사용되는 재료들의 이름을 결코 배울 수가 없다.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식량을 제공하는 인도주의 단체들의 영어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그녀가 여전히 최고 요리사라고 말하면서 Muga를 위로하려 했지만 그녀는 말했다. 요리가 제한돼 있기 때문에 그녀의 영감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난민캠프에서의 20년간의 생활에서 가뭄, 비, 태양, 겨울 바람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런 것들은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 때 의미가 있던 것들이다. 계절마다 찾아오던 자연의 오랜 벗들을 기다릴 희망이 없다. 오로지 희망은 언젠가는 고향에 가서 그 오랜 벗들을 찾아본다는 것이다.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Muga는 고향 쪽 절벽에서 눈을 떼고 바라봤다. 야생 버섯이 든 큰 바구니를 가진 검은 얼굴의 남자가 버섯을 좀 사겠느냐고 물었다. 야생버섯을 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버섯 채취자들은 국경을 넘어 버마 쪽에 가야하고, 그래서 한명은 최근에 대인지뢰에 왼쪽 다리를 잃었다.  

오랜 벗과 같은 야생버섯을 부엌에 들이려면 돈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Muga에게는 딸이 교사라서 벌어들이는 돈이 있다. Muga는 기쁜 마음으로 야생버섯을 샀다. 내일 그녀는 손님들에게 그녀의 오랜 벗인 야생버섯을 소개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앉아서 버섯 다듬는 일을 도우면서, 우리는 Muga의 얼굴에서 한줄기 미소를 봤다. 서쪽 절벽을 바라보니 비에 젖고 있었고, 우리의 마음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카렌족 출신의 또다른 아저씨는 가지의 경험을 얘기했다. 어렵게 구한 고산지대 쌀을 가지고 시내에 사는 아들을 만나러 갔던 얘기였다. 아들은 전기밥통으로 그 쌀로 밥을 지었다. 그리고 나선 뾰루퉁하게 아버지에게 물었다고 한다. “아빠, 왜 우리 카렌족 쌀은 이렇게 짧고 딱딱해요? 가게에서 파는 쟈스민 쌀 같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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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것(1)

Name  
   류은숙  (2005-11-21 16:49:10, Hit : 266, Vote : 18)
Subject  
   변화된 것(1)
난민캠프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냥 배급되는 것만 타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카렌 난민들이 고향에서의 농사일의 추억을 얘기하는 글인데, 모르는 채소나 곡물 이름은 그냥 영어로 놔뒀습니다.


변화된 것

(글쓴이: Chana Damnoen)

“그건 절벽 끝에서 떨어지는 것 같고 정신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것 같아.”

카렌 난민 캠프에서 나온 한 P'thee(삼촌)은 언젠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린 딸을 데리고 난민캠프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국경선을 따라 걷는 동안, 그의 어린 딸은 길가의 연록색 채소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빠, 저게 뭐야?”

"그날 저녁, Muga(아줌마)는 우리를 위한 식사를 정성껏 준비했어. 그녀는 난민캠프에서의 음식이 좋을 수가 없다는 점에 미안해하며 연신 부엌을 드나들면서 우리가 음식 맛에 만족해하는지 보려했어. Mae Sot에서 온 신선한 식품을 팔고 있는 캠프 시장에 많은 돈을 갖다 주고 산 것들이지만 그녀는 만족할 수가 없었어. "

"아줌마의 요리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어. 우리는 그 집을 나와서 무릎을 꼭 끌어안고 앉아서 바라봤어. 아줌마는 여전히 서서 국경 서쪽의 절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어-카렌주에 있는 그녀의 고향이 있는 쪽을. 그녀의 마음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을 거야."
------
언제나처럼 Salween 숲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카렌주 마을들 주변에 초록은 기쁨을 몰고 왔다.

“이렇게 날마다 비가 내릴 때는 쌀도 풀도 빨리 자라지. 우리는 날마다 김매기를 해야돼. 하지만 채소와 벼를 파종한 후에 집에 돌아오면 피곤함은 녹은 듯 잊혀지지” 한사람이 즐겁게 말했다.

또다른 소녀는 그녀의 대나무 바구니에서 꺼낸 잎사귀들을 보여주었다.

“여기 모든 게 음식이에요. 보세요. 양상추, khi-oon 잎사귀, polanisia, sweet basil, 봄양파, 호박줄기, 고구마 줄기. 들판에 나갈 때면 쌀하고 누룩만을 챙기고, 우리가 좋아하는 채소는 뭐든지 들판에서 얻을 수 있어요.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정말로 이 계절을 좋아했어요.” 미소가 그녀 눈에 비쳤다. “비가 오면, 엄마는 갖가지 고산족 간식들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멜론 케잌, 옥수수 과자, taro, 감자, 단호박...”

“채소들이 자라기 전에는 숲에서 야생 식량을 채취했어요. 비가 내리면 버섯과 대나무가 자라나길 기다렸죠. 지금부터 몇 달후면 옥수수, 야생 감자, 산 taro, 고구마, 호박, 오이, 멜론, 수세미 열매...정말 정말 많아요!” 덩치큰 남자가 열심히 설명했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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핌에게서 온 편지

Name  
   류은숙  (2005-11-04 19:53:13, Hit : 236, Vote : 22)
Subject  
   핌에게서 온 편지
한국의 친구들에게

지난번에 편지 쓴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군요. 저는 여느때처럼 여행을 많이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 달(9월 초)에는 타이의 최북단에 갔습니다. 거기는 버마 Shan주의 국경지역입니다. 무역과 관광을 위해 사람들이 매일 드나드는 공식적인 국경 입구가 있습니다.

Shan 주에 대해서 들어보신적이 있나요? Shan은 버마에서 가장 큰 소수민족 주이고 그 안에도 다양한 소수민족 집단이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무장집단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은 버마 군사정권과 휴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곳 상황은 다른 지역보다 더 나을바가 없습니다. 여전히 국경지대와 휴전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인신매매, 마약거래, 벌채․댐건설, 채굴같은 환경착취와 관련된 문제가 심각합니다.

‘국경없는 친구들’이 하는 대부분의 일은 Karen과 Karenni 주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Shan 주 출신의 Ak-kha & Lahu 소수민족 집단이 우리의 지원을 얻고자 해서 그들의 기초적인 인권훈련 프로그램을 위해 우리를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버마 출신의 Kachin과 같이 그곳에 갔습니다 Kachin은 제 말(타이어)을 버마어로 통역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아무것도 계획한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감명깊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처음에 주최측은 Ak-kha 공동체 지도자, 여성집단, 청년집단을 위한 일주일 프로그램을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국경을 넘어와야 하는데 타이쪽 국경에서의 안전 문제 때문에 그들은 참가자들이 이쪽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날마다 국경을 넘었다가 되돌아오는 일을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국경 경비대가 그들의 얼굴을 일주일동안 매일 보게 됩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은 3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가자들이 국경을 넘는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프로그램을 늦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가자들은 2-3명씩 따로 떨어져서 국경을 넘어야 했고 한번에 다같이 올 수 없었고, 밤에는 국경 문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런 모든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프로그램을 위해 온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버마에서 온 사람들은 특히 휴전지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배를 채우는 일밖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이 사람들은 아주 적극적입니다. 버마 내부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것을 배우려고 아주 열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사회를 위해 뭔가 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외부인들은 대개 이렇게 생각합니다. 처벌에 대한 공포와 억압 때문에 안에 있는 사람들이 뭔가 할 수 없다고요. 하지만, 제가 본 바로는, 그들이 공포 속에 살고 있는 것은 맞지만, 자신들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만큼 용감합니다. 여러분은 두려워하는 것과 동시에 아주 용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다른 감명은 여성 참가자들이었습니다. Ah-kha 문화에서 여성의 지위는 Karen이나 Karenni의 여성들보다 훨씬 낮습니다. 성과 인권과 관련된 세션이 있었는데 제 Kachin 친구(남성이었습니다)가 진행했습니다. 남성이 진행해서인지 남성 참가자들은 더 마음을 여는 것처럼 보였고 문제를 발전적으로 분석했습니다. 한 여성 참가자가 종결 프로그램에서 말했습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말을 들으니 너무 행복합니다. 인간 사랑을 정말로 이해해보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봤습니다.

이 여행을 마친후, 저는 몇가지 일을 위해 다시 Karen 국경지대로 갔습니다. 여기서 있었던 일은 다음 편지에서 얘기하겠습니다. 또한 다음주에는 Ah-kha 집단 사람들을 다시 만나서 프로그램 후에 참가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다음에 또 얘기하지요.

‘국경 없는 친구들’의 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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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친구들과 연대하는 모임 소개

모임소개


타이의 '국경 없는 친구들(Friends without borders)'과 연대하는 모임을 소개합니다. 1달에 만원으로

3세계 인권단체와 함께 한다는 취지로 2004년 11월 게시판을 열었습니다. 다른 여러 만원계의 활동이

중지되면서 만원계 사이트가 폐쇄되어 타이계만 2007년 9월 진보넷 블로그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

아래 소개글은 2004년 작성된 것입니다.

 


'국경 없는 친구들'에 대한 연대를 호소하면서 먼저 세가지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첫 번째는 제가 왜

이 일에 나서게 됐는지에 대한 개인적 동기, 두 번째는 '국경 없는 친구들'이 맞서고 있는 인권상황,

세 번째는 '국경 없는 친구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국경 없는 인권에 대한 여러분의 애정과

연대를 기다립니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류은숙 031601-04-065545

1. 나와 핌(Pim), 샤론(Sharon)


나는 92년 여름부터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활동가로 일해왔다(2007년 현재는 인권연구소 '창'에서

활동하고 있다). 99년 봄, 나는 미국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 인권연수프로그램 참가자로 선정돼,

팔자에 없는 미국 구경을 하게 됐다. 인권프로그램의 내용은 국제인권법에 대한 그렇고 그런 강의들

이었고, '인권'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별로 인권적이지 못한 환경 탓에 우울한 몇 달을 보내야 했다.

거기서 나는 핌과 샤론을 만나게 됐다. 핌은 버마난민 관련 활동을 하는 타이 여성이었고, 샤론은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은 컬럼비아대 학생이었다. 기숙사에서 같은 층을 쓰게된 핌과 나는 성장하면서

여성으로서 느꼈던 문제들, 가족과의 관계, 조직에서 느끼는 문제, 서로가 처한 인권상황에 대한 얘기

들로 밤을 지새는 일이 많았다. 수업 때문에 우연히 알게된 유태계 미국인 샤론은 미국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해서 동료 미국인들에게 곱지 않은 눈초리를 받는 학생이었다. 우리 셋은 의기투합이 되어

학교 앞 맥주집과 기숙사 방을 오가며 연일 토론을 벌였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헤어지던 날, 우리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몰랐지만, 서로가 처한 상황에서 인권에 대한 열정을 안고 살아가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핌은 서류 일에 치중하는 거대 단체를 그만두고 좀더 현장에 가까운 일을 시작하겠다고 했고(그래서

만든 것이 '국경 없는 친구들'이었다), 샤론은 네팔에 가서 아동인권과 관련된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곧 자기들의 뜻대로 일을 시작했고, 우리는 서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일을 격려했다.

나는 사랑방으로 돌아와 변함없이 일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나는 짜증스럽게 울리는 전화벨에 잠을 깼다. 놀랍게도 핌의 전화였다. 메일은

늘상 주고 받았지만, 전화가 온 것은 처음이기에 무척 놀랐다. 그리고 전해 온 소식은 샤론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위암이었다. 불과 서른의 나이였다. 피부색과 국적이 달랐지만, 동료를 잃은 슬픔은 마찬가지

였다. 우리는 샤론의 죽음으로 오래오래 우울했다. 샤론의 아버지는 딸에 대한 회상을 담아 '나의 딸,

샤론'이라는 책을 만들어 전세계에 있는 샤론의 친구들에게 보내줬다. 나와 핌도 그 책을 받았다.

샤론이 품었던 꿈은 '세계 시민'이 되는 것이었다는 것, 네팔에서 아이들과 보낸 시간들, 마지막 날들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에 대한 얘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와 핌은 이런 저런 일로 힘들 때

마다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공유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핌을 재회한 것은 그 후 세 차례였다. 타이에서 열리는 인권워크샵이나 회의가 많은 까닭에 재회의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그때마다 핌은 국경지대의 열악한 상황, 버마 난민들이 타이에서 이주노동자

로서 겪는 문제 등에 대해 '나날이 심각해지고 더 나빠지고 있다'고 했다. 가장 최근의 재회는 지난

여름(2004)이었다. 이번에는 핌의 상황이 너무 나빴다.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재원이 바닥났다는 것

이었다. 사무실도 임대료 때문에 시내에서 벗어나 인적 없는 교외로 옮긴 후였다. 지금 상황으로는

단체의 문을 닫고 국경지대에서 자원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연말까지는 문을 닫을

생각이었다. 지배층이 오랜 세월 조성해온 버마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타이 내부에서의 모금이

어렵고, 1세계에서 오는 지원은 대개 풀뿌리 조직보다는 유명세를 가진 거대 조직으로 가는 상황에서

자구책은 없어 보였다. 핌이 하고 있는 일은 난민, 이주노동자, 아동노동자로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꼭 필요한 일인데, 그 일이 돈 때문에 중단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서글픈 일이었다. 어렵게 인권운동

사랑방 살림을 꾸려온 나로서는 한 조직을 운영한다는 것이 정말 힘든 일임을 잘 알고 있다.

나는 핌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문을 닫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곳 형편도 어렵지만, 작은 지원

이라도 여기서 조직하면 환율차이 때문에 그곳에서는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사랑방의 몇

몇 동료들이 나서주었고, 이미 사랑방을 후원하고 있는 자원활동가들도 힘을 보태기로 했다. 그래서

 '국경 없는 친구들'과 연대하는 모임을 꾸리게 됐다.

배제와 탄압과 억압은 지금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맞서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가본 적 없는 밀림에서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지금 우리가 겪는 인권문제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맞서는 사람들이 갖는 희망은

우리의 희망이고, 우리를 인간이게끔 한다.

2. 현재 상황


타이에서 고무돼온 인권이데올로기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인권('All' human rights for 'All')의

개념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인권'이 의미하는 바는 민족, 성, 종교,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포함한 모든 인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타이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특히 소수민족과 버마 난민들이다. 이들의 인권은 오랫동안 부인되거나 무시돼왔다.

인종차별주의와 외국인혐오는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낳았고, 이들을 인권에 대한 정보에서 고립시

키고, 또한 서로를 고립시켰다. 이러한 압력, 의사소통과 이해의 부족이 흔히 갈등을 일으킨다.

버마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타이 북부지역의 고산지대에는 적어도 8십여만명의 소수민족이 살아가고

있다. 현재, 버마의 정치·경제적 폭력에 부가된 버마군사정권과 소수민족간의 내전 때문에, 타이에는

백만명이 넘는 버마난민이 있다. 이들 중에서, 약 14만 명의 소수민족 난민에게 타이-버마 국경에

인접한 캠프에 일시적으로 머물 것이 허용되고 있다. 반면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국경지대에 숨어

살고 있으며, 이들은 대개 카렌(Karen), 카레니(Karenni), 샨(Shan) 같은 소수민족 출신이다.

이처럼 버마에서 쫓겨나 타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난민'이라는 진짜 상황에도 불구하고, 타이

정부에 의해 '불법 이주자'로 간주되고 있다. 동시에, 타이에서 살고 있는 적어도 4십만명의 소수민족

사람들은 타이 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들 중 거의 절반은 불법으로 간주되며, 그들과

상관없는 나라로 추방될 위험에 취약하다. 그러나, 소수민족출신으로서 타이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타이 사회가 가진 태도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이들도 마찬가지의 차별에 직면해 있다. 난민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국가 당국에 의한 인권침해와 비국가행위자에 의한 인권침해가 벌어지고 있다.

더욱이, 정부와 주류언론의 선전에 영향을 받은 타이 사회의 부정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이들 취약한

소수집단은 인권의 존중을 향한 투쟁을 지향할 수 있는 유익한 정보로부터 고립될 뿐 아니라, 잘못된

선전 때문에 서로를 구별하고 나누게 되고, 서로간의 갈등에 빠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의 인권문제에 대해 상이한 집단의 사람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소수집단과 난민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고립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책임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며, 타이 사회를 이해할 수 있고, 인권과 평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일을 함께 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가질 수 있다. 경험 있고 우호적인 타이 시민사회

조직과 더불어 당사자들 자신이 결정하고 실행할 때야 이런 프로그램은 가장 잘 성취될 수 있다.

난민과 소수민족에게 법률자문, 인도주의적 원조, 개발 프로젝트를 제공하는 단체들이 있지만, 인권에

관심을 가진 단체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더욱이, 이들 소수의 단체들조차 타이의 국가정책과 관련된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난민과 소수민족 당사자들은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거의 가질 수는 없다.

인권교육 프로그램(human rights capacity building programs)을 난민과 소수민족이 살아가고 있는

지역 차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단체는 거의 없으며, 이들 대부분의 활동은 99년부터 지금까지 '국경

없는 친구들'에 의해 펼쳐지고 있다. 또한 국경 지대에서 상이한 소수민족간에 인권과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이끌 수 있는 단체도 없다. '국경 없는 친구들'은 소수민족과 난민의 인권에 특정하여

활동을 벌이고 있는 유일한 타이 단체라고 할 수 있다. 풀뿌리 지역 민중들 자신에 의해 성취되고

유지될 때에만이 인권과 평화가 보장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국경 없는 친구들'은 다양한 소수민족과

난민 집단간의 네트워크를 건설하고 있다.

3. 국경 없는 친구들


'국경 없는 친구들'은 치앙마이(타이의 북부도시)에 있는 타이의 민간단체이다. 99년 7월에 설립되었고,

사무실은 국경지역에도 있다. 치앙마이의 사무실은 주로 문제를 알리기 위한 대안언론활동을 하는데,

여기에는 잡지, 비디오, 책 등이 포함된다. 국경지역에 있는 지역사무실은 난민과 소수민족간의 네트

워크 건설 프로그램과 인권교육활동을 벌이고 있다. 활동가들 자신이 난민과 소수민족 출신으로서

'국경 없는 친구들'의 교육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이었던 사람들이다.

<목적> 타이인, 소수민족, 버마난민 사이의 인권과 평화의 증진
주요목표
1. 난민들의 인권에 대한 타이 대중의 이해와 인식의 향상
2. 타이내의 소수민족과 버마 난민들의 인권에 대한 지식과 능력의 강화
3. 평화로운 인권사회를 향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타이 대중, 소수민족, 버마 난민간의 화해, 네트

워크의 건설과 강화

<계획하고 있는 활동들>
1. 소수민족과 난민의 목소리를 타이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잡지 발간; 타이어와 영어가 동시

, 2달마다 발간, 그 외 책 발간, 교육 비디오와 캠페인 자료 발간; 이 잡지는 치앙마이 내의 주요

업소(미장원, 식당, 찻집 등)에 비치됨.
2. 국경지대에서의 소수민족 문화 행사
3. 인권과 평화 훈련 워크샵; 버마 내에서 활동하는 지역지도자들에 대한 훈련을 포함한 10여 차례의

워크샵
4. 난민 캠프에서의 아동교육 프로그램; 그들 자신이 난민인 선생님들이 난민아동의 상황과 문화에

적합한 커리큘럼과 교재를 개발
5. 교환 포럼; 타이인, 타이내의 소수민족, 난민간의 관련 인권주제에 대한 교환 포럼, 타이청소년과

타이 내에 사는 버마 청소년간의 교환 포럼

계좌번호

국민은행 031601-04-065545 (류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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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후원금 송금내역

Name  
   류은숙  (2005-11-02 10:33:44, Hit : 189, Vote : 21)
Subject  
   2005년 11월 후원금 송금내역
10월에 모인 후원금을 다음과 같이 전달했습니다.

11월5일이 '국경없는친구들'과 함께하는 만원계가 만들어진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원래 이날 오프라인 모임을 할까 했는데 이런 저런 일에 바쁘다보니 계획도 못세우고 공지도 못했습니다. 핌이 11월에 한국에 올 수도 있을 것 같아 핌의 한국행에 맞춰 만원계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는 희망도 있었는데, 무슨일이 있는지 핌에게서 확답이 오지 않아서요. 핌과 일단 연락을 취해보고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 오프라인 모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11월 되십시오.




9월 잔액 20,170 원

10.4 김태* 1만
        유해* 1만
        이민* 1만
        조대*1만
10.10 이윤* 1만
10.25 김나* 1만
        김재* 1만
10.26 이민* 1만
10.31 황수* 1만 5천
10.31 류은* 5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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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65,170원

11월 2일 송금 150달러+수수료 5천원=162,651원
잔액 2,519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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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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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10-24 21:49:03, Hit : 147, Vote : 21)
Subject  
   감기 조심하세요
지난 토요일에 정말 추웠죠? 전 반팔 입고 설치다가 얼어죽는 줄 알았어요. 아침 저녁의 기온과 낮의 기온이 정말 다르니 감기 조심들 하세요.

핌이 보내준다던 원고는 소식이 없고 치앙마이에 간 벗들로부터 핌과 만나 호숫가에서 잘 먹고 정말 거하게 마셨다는 소식만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게시판에 올릴 자료가 아주 말랐네요. 이럴땐 만원계 여러분들이 글 올려주시면 좋겠는데, 정말 손가락이 근엄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 만원계 회원 분들은요...몸에 드는 감기 조심하시고 가을 날 마음 감기도 살살 앓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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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꽃필라 운동' 만주와 샤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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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10-14 11:32:24, Hit : 196, Vote : 12)
Subject  
   [펌] '꽃필라 운동' 만주와 샤말
만원계의 일원이신 해정씨가 먼 타국에서 쓴 글인데, 좋아서 퍼왔습니다. 경향신문에 투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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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로] ‘꽃필라 운동’ 만주와 샤말

두 사람 앞에 서자 고단하다 느꼈던 내 삶은 투정이 되고 만다. 만주와 샤말은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에 있어 잊혀지지 않을 ‘영웅’이지만, 그들의 삶은 누군가의 말처럼 ‘던져진 삶’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모욕을 견뎌야 했고, 또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했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의 품에서 꿈을 꿀 나이에 16살의 만주는 가족을 위해 홀로 한국에 왔고,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 세 개를 잃고도 보상은커녕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길거리로 쫓겨났다. 그가 같은 처지에 놓인 12명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우리도 사람”이라며 1994년 1월부터 벌였던 한 달간의 농성은 우리사회에 이주노동자 실태를 고발하는 최초의 행동이었다. 농성은 산업재해를 입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동법 적용과 보상 실시라는 큰 성과를 일궈냈지만 19살 그는 꿈을 잃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생활-


“한국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좋은 사람도 있더라고요.” 사람들은 어린 그의 투쟁이 우리사회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말했지만 그는 사람들이 무너진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고 말했다.


살아남기 위해 드러눕는 것 이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때, 그래서 절망과 공포가 너무 컸을 때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그의 투쟁에 격려와 지지를 보냈고 손을 잡아 주었다. 그때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래서 결심했단다. 앞으론 누군가를 위해 살아보겠다고.


귀국한 그는 ‘네팔 노동조합 연맹(GEFONT)’에서 이주노동자를 위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책상뿐이었지만 얼마 후 이주노동자를 위한 상담소가 만들어졌고 그 과정에서 그는 네팔에 없어서는 안 될 노동운동가로 우뚝 섰다.


하지만 고단한 삶은 오늘도 계속된다. 3명의 동생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으로, 장애인으로, 그리고 전통적인 네팔 사회에서 미혼 여성으로 그는 살아야만 한다. 그렇지만 지금 그는 꿈을 꾼다. 아직도 손을 대면 신음이 새어나올 듯한 상처를 딛고 오늘을 살아내는 꿈을. 컴퓨터를 전공하는 학생으로, 아동노동을 없애기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로.


네팔 이주노동자 연합 사무국장,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위원장으로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에서 ‘신화’가 되어버린 샤말. 그의 20대 역시 한국의 공사판에서, 공장에서, 신문배달을 위해 오르고 또 올랐던 뒷골목에서 지나갔다. 성실히 정직하게 일했지만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욕설과 모멸이 따라다녔다. 생존을 위해 한국행을 선택했던 이름 모를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차별과 천대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꿈을, 목숨을 잃었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투쟁을 시작했던 그는 2004년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이던 중 체포돼 그해 4월 네팔로 강제 추방됐다. 10년 만에 돌아간 고향 땅이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반정부 인사’로의 낙인과 생존과의 전투였다. 자신을 주체하기도 버거웠던 그는 한국에서 2년 동안 일했지만 돈 한 푼 벌지 못하고 추방된 또 다른 이주노동자와 함께 살았다. 공부를 가르치고, 직장을 알선해주고, 가족들의 생계를 도와주고. 사람들의 칭찬에 그는 말한다. ‘더불어 사는 것, 손잡는 것일 뿐’이라고. 낮에는 노동운동가로, 밤에는 생계를 위한 직장인으로, 그리고 학생으로 바쁜 삶을 사는 샤말.


-귀국후 네팔 노동운동가로-


그들은 20년 전의 자신들인 어린이 노동자들을 위한 꿈을 꾼다. 어린이 노동자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한 ‘꽃필라(피지 않은 꽃봉오리에 꽃을 피우는 운동/KOPILA)’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것. 이를 위해 네팔의 활동가들은 월급의 5%를 보태고 있다. 오랜 가난과 계속된 내전 속에서 네팔에만 2백50만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공장과 탄광과 거리에서 일한다.


1,000원도 되지 않는 돈을 벌기 위해 하루 14시간의 노동과 학대를 견디면서. “당장 현실을 바꿀 순 없지만 최소한 아이들이 학교를 통해 꿈꿀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들의 바람처럼 아이들이 꿈꿀 수 있기를, 샤말과 만주가 누구보다 행복해지기를, 그리고 당신 역시 손을 맞잡아 행복해지기길.


<네팔 카트만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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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열악한 교육상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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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10-12 10:34:09, Hit : 167, Vote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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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의 열악한 교육상황(2)
도망다니며 사는 삶은 대부분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이 부족하다. 담요도, 옷도 없고 매일 매일 식구들을 위한 양식을 얻는 것도 문제이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학교를 중단하도록 결정한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아이들이 부모를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부모를 돕는 길을 택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0살의 Saw Lay Wah는 말한다.
'나는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하고, 때론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요. 난 더이상 학교에 있고 싶지 않고 배우고 싶지도 않아요. 자라서 어른이 되면 농사일로 살아갈 거예요.'
Saw Lay Wah는 살아온 짧은 삶속에서 이미 많은 문제들에 직면했고, 특히 일용할 양식을 위한 고충때문에 꿈이나 배움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아주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배울 시간이 없다. 교사들 또한 생활을 위해 고분분투한다.

학교 교사인 Naw Has Wah는 말한다. 이런 아이들의 상황은 보여주는 바는 아이들에게 배울 기회가 그럼에도 계속 제공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피난민 아이들의 교육에 심각한 장애는 또한 교사가 되려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고 싶어하지만 자신의 가족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가르칠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 새로운 교사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우리들의 미래는 이 아이들에게 달려있어요. 하지만 책도 교실도 없이 도망다니며 배워야만 할 때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교육이 대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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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열악한 교육상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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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10-10 18:41:31, Hit : 186, Vote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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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의 열악한 교육상황(1)
Naw Hsa Wah는 학교 선생님일 뿐만 아니라 치료도 해야하고 농사도 지어야 한다. 그녀는 40여 카렌족 학생들의 희망이다.
Naw Hsa Wah는 버마군의 공격위협 때문에 학교를 이리저리 정글로 옮겨다녀야 했다고 말한다.
'나는 마을의 유일한 교사예요. 그래서 다섯 학급을 가르쳐야 해요. 교육자료가 없어요. 학생들은 연습장과 펜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라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마을 촌장이어서 아픈 사람들을 돌봐줄 책임이 있다.
'나는 남편이 바쁠때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도와요. 또한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고 내 가족을 위해 양식을 구해야 해요. 하루가 끝날 때면 진이 빠져요.'
하지만 학생들이 배우는데 열심일 때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버마군이 올때면 우리는 정글로 도망쳐 숨어야 해요. 그때는 나무 밑에서 수업을 해야만 하죠.'
그녀의 경험은 버마 내부의 피난민들에게 공통된 경험이다. 카렌주에서, 교육을 받는 일은 항상 버마군의 위협하에 있다.

우기 중에는 버마군의 활동이 뜸해지지만 우기가 끝나면 그들의 파괴활동이 증가한다고 한다. 이로 인해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없게 된다. 피난민 아이들의 교육을 발전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보고에 따르면 7개 카렌족 지역에는 아주 많은 학생들이 있지만 그들을 가르칠 훈련받은 교사가 아주 모자라다.

지속적인 군사 위협으로 인한 불안정성 때문에 접근불가능한 정글속에 숨어야 하고, 이로 인해 아이들의 교육환경은 열악해질수밖에 없다.

버마 내부의 피난민들은 지속적으로 도망다니는 고된 삶을 살고 있지만, 많은 아이들은 교육에 목말라한다.

13살인 Saw Hsa Lay Moo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봤다. 그로인해 감당키 어려운 감정을 극복해야 함에도 이 아이는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간직하고 있다. '정글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배우고 싶어요. 마을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올 수 없었어요. 아름다운 집을 떠나야 했어요. 모든 것을 뒤에 둔채요. 내가 자라서 교육을 받게 되면 나는 망친 것들과 맞서 싸울 거예요.'

하지만 Saw Hsa Lay Moo의 배우고 싶다는 열망은 군사적 위협과 공포, 지속적인 피난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떨어져 나가고 결국은 포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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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는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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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5-10-07 17:45:58, Hit : 202, Vote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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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내리는 금요일
1년내내 여름속에 사는 핌은 추위라는 걸 모릅니다. 오늘 우리 사이트를 위해 '국경없는 친구들'의 글을 좀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메일을 보내면서 날씨 얘기를 썼습니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있고, 점점 추워지고 어두워지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약간 쓸쓸한 계절이라고요. 게다가 오늘은 천장에서 비가 새서 한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하루종일 신경쓰이는 군요.
할일은 많은데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가운데 맞는 주말은 언제나 마음의 짐입니다. 그래도 만원계 여러분, 날씨가 이렇다고 너무 우울해하지 마시고 여유로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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