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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여행...어느 성당에서 정원을 배경으로

 

 

1. 어릴 때 그러니까 초딩 정도까지는, 다락방에  쌓아둔 책을 보며 하루를 보내도 지겹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 중 단연 백과사전이 백미. 15권짜리 동아백과사전에는 10살짜리 소년에게는 흘러넘칠만큼 다양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특히 나는 동물편을 즐겨 봤는데 먼 이국땅의 동물을 대할 때는 마치 세계를 다 품에 안은 것처럼 즐거워서 상상조차 하기 힘들던 미지의 세계를 와작와작 다 씹어 먹을 기세로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그 곳에서 선데이서울도 처음 봤다. 15권짜리 계몽사 위인전집과 몇 권 인지 모르지만 그림 하나 없이 수백페이지를 빼곡히 글자로 채운 한국문한전집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낡고 퀴퀴한 먼지 냄새, 닳아가는 책냄새...그 냄새가 낯설지 않아서인지 난 헌책방이 좋다. 거기서 그림없는 책들을 읽기 시작하던 무렵에 난 세상이 좀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처럼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직관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무엇인가가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느낌. 그 느낌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온갖 추상명사들의 의미를 생각했던 거 같다.

 

 

 

 

>> 베트남이 생각난다. 빨간 모자에 노란별, 미치겠다. 나 저거 사줘~

 

 

 

2. 오늘 수업 시간에 '성개방형 결혼'이란 주제로 10여명이 토론을 벌였다. 요즘 이 주제로 비교적 고민이 많은 관계로 사회자를 떠맡고. 남자와 여자의 생각을 골고루 들으며 비교분석에 들어갔다. 뭐든 기존 통념에 반하면 대체로 좋아하지만서도,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은 이후로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딱 하나 있었다. 자유로운 연애와 다양한 성관계를 원한다면 대체 왜 결혼을 한단 말이냐? 굳이 같이 살고 싶으면 동거를 하던지. 그래서 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왜 굳이 결혼이란 제도적 구속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성개방을 추구하는지. 몇몇 사람들의 답을 듣고 좀 이해가 갔다. 요컨대 서른 넘어서 결혼을 하지 않는 여자가 받게 되는 각종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종합해볼 때 결혼은 상당히 현실적인 요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 따위의 환타지는 없고, 다양한 사람과 자고 싶고 사랑이란 감정도 여기 저기 생겨나는데 동시에 결혼이 주는 안정감을 원하면... 성개방형 결혼도 가능하지 싶다. 뚜시쿵. 처음엔 그 안정감의 실체가 대체 뭔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하고 있었으니. 일단 결혼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고(아~~노처녀는 공격적이고 히스테리컬하다는 주위의 평을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결혼하라는 스트레스 안받아도 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고(하나같이 결혼을 해야 돈이 모인다고들 한다. 더 정확히는 결혼해야 돈을 미친듯이 벌게 되는 거 같다.), 국가에서 혜택도 더 많이 주고(하다못해 전세대출 받을래도 결혼한 사람이 유리하다는 친구의 한탄), 무엇보다 출산과 육아 문제를 생각할 때 경제적 안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아무리 혼자 키운다해도 서포터없이 이겨내기는 힘겨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욕구들을 제대로 고민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상당히 간편하게 '그냥 동거를 하면 되는거지'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듣고보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 싶다. 상대가 흔쾌히 동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거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도 엄청난 압력이 되겠구나 싶었다. 남자 입장에선 성개방을 허용한다면 동거가 편한 점이 많겠지만, 이것도 은근히 남성중심적인 사고겠구나 싶었다. 돈없이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보다 결혼해서 집도 마련하고 제대로 갖춰놓고 사는걸 원하는 심리를 뭐라하기도 어렵고... 사랑과 안정, 두가지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고 싶다는데 뭐라고해. 그래서 난 오늘 이후로 '성개방형 결혼'을 심증적으로가 아니라 제대로 지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토론자들에게 이해시켜줘서 고맙다는 말도 했다.

 

근데 어지간히 성숙하지 않고서야 쌍방간에 저걸 견뎌낼 사람, 특히 남자가 얼마나 될까? ㅋㅋ..진짜 재밌는 거는 이런 토론 하다보면 꼭 얼굴 빨개지고 흥분해서 자기 얘기 주절주절하는 사람이 나온다는거다. 난 점잖게 사회봤는데 중간에 강사가 끼어들어서 여기 저기 들쑤시며 도발한 덕분에 몇 명은 완전 바닥드러내고 만신창이 됐다. 처음엔 다들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육아 문제 나오니까 슬슬 일부 남자 애들이 조건부 찬성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아빠나 엄마가 둘이면 애가 받게 될 상처는 어쩌냐? 게다가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받게 될 상처는? 그 비난을 어떻게 감수하냐? 사회적으로 너무나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등등... 그러다 차츰 속내가 다 드러나기 시작. 지지입장에 선 학생이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했다. 아는 사람 중에 남자쪽에 문제가 있어 임신이 불가능한 부부가 있는데 여자 쪽에서 이혼을 해야 하는건지, 아님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같이 살아야 하는건지, 그럼 성관계는 어떻게 되는건지 고민이란다. 그러자 한 남학생이 '사랑한다면 당연히 평생 함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흥분. 그러자 한 여학생이 '그건 여자를 지나치게 무성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편견 때문'이라고 반박. 그러자 옆에 앉은 남학생이 한술 더떠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결혼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숨긴 것이라면 이혼해도 할 말이 없다'고 흥분. 이 때다 싶은 강사 바로 공격. '그럼 입장을 바꿔 여자 때문에 임신이 불가능한데 남자가 다른 사람이랑 섹스하는 건 어찌 생각하나요? 가령 성매매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러자 순간 당황한 남학생. 그건 인정할 수 있다고 말을 꺼내다가 이내 분위기 파악하고 말을 바꾼다. '전 그래도 사랑한다면 평생 같이 살 수 있어요. 당연히 평생 참아야죠' 아구야~~아서라...급기야는!! '전 아직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애초에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잖아요. 그 정도는 평생 이겨내야죠!"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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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T

 

쿵~~~~게임 오버. 유유히 사라지는 강사. KO승. 얼굴이 화끈 화끈. 벌겋게 달아오른 남학생. 쯔비~~

 

 아무튼 덕분에 생각이 많이 정리됐다. 유쾌했다. 이젠 결혼 하는 사람들 뭐라 안하기로 했다. 자의식 때문인지, 아님 갈수록 동료가 줄어들어 불안한건지 결혼식 때마다 '결혼은 뭐하러 하냐?'고 초치고 다녔는데. 이젠 그 짓도 그만해야겠다. 그러면서 끝내는 마지 못해 결혼한 것이라는 답을 얻어내고야 마는 그 심술도 그만둬야겠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미안해하며 날 격려하게 만드는 짓도 그만~~그만!! 다들 심각하고, 진지하다. 자기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그래서 나름 그렇게 결심한 것을...괜히 상처주면서 혼자 강한 척하는 것도 지겹다. 내가 결혼의 이유를 못 찾으면 그 뿐이지. 강요는 왜...

 

성개방형 결혼...나쁘지 않다. 그런데 결국 항상 제일 중요한 문제는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

 

 

 

 

>> 가을이다...

 

 

3. 오늘 '신화와 역사' 수업 시간에 또 잤다. 이런 것도 일종의 조건반사인가? 처음에 한 번 두 번 눈치보며 졸았는데, 이젠 이 수업시간만 되면 자동으로 잠이 온다. 처음엔 자다깨다 반복하면서 강사 눈치도 보고, 중간중간 수업 들어보려고 애쓰며 버티기도 했는데...요즘은 거의 기절하다시피 1시간 15분을 내리 잔다. 자다 깨기가 싫을 정도로 혼곤하게 잔다. 그리고 급기야 오늘은 자다가 이 수업을 듣는 꿈을 꿨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나는 가끔 내 무의식의 세계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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