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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일상

 

 

1.

새로 산 MP3는 라디오 기능이 더해졌다.

기능에 맞춰, 라디오 안 들으면 새로 산 기계가 아까우니까,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이젠 라디오 중독이 되어 사무실에 미니까지 깔아놓고 듣는다.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 아름답지만 지나가면 사라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의 상징으로 여기던

라디오를 들으며, 라디오의 엄청난 인기를 실감하는 현실은 더 재밌다. 기분 괜찮다.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조작까지 할 정도로 인기 있는 라디오.

인터넷 강국,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100%를 향해 달려가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21세기 풍경.

사람들은 여전히 대화를 원하고, 그보다는 수다를 원하나 보다.

처음 대학 입학해서 대학생이라면 영화 보고 한마디 정도는 떠들 줄 알아야 교양인이라고

생각했던 당시에, 인기 절정의 씨네21을 1년간 정기구독 했었다. 그때 씨네21에는

'디지털화 시대에 과연 극장은 살아남을 것인가' 따위의 염려 섞인 글이 자주 등장했었다.

홈씨어터고 나발이고 극장은 잘만 번창해서 이제는 천만 관객 시대다.

감성마저 디지털화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인가?

 

다 알 거 같은데, 그래서 세상은 다 예상대로 흘러갈 거 같은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 세상, 참 모를일이다. 사람 속처럼.

 

 

2.

2004년 김선일 씨 추모 집회 참가 건으로 2007년에 소환장이 날아왔다.

불법 도로 점거 혐의라는데 내 기억엔 집회 참가한 적은 여러 번 있지만 몸싸움을 하거나

행진 코스 밖으로 나갔던 기억은 없다. 기억에 확신이 있었다. 거부하고 싶었다.

그냥 안나가버리면 그만이지. 수배 날리고 잡아가겠다고 협박하면 그러라고 그러고 나중에

국가 상대로 소송을 해버리겠다고 생각도 했다. 그런데 부모님이 너무 불안해 하신다. 죄를

지은 적이 없어도 국가가 '너 죄 지었지?'라고 협박하면 주눅들고 겁먹는 게 한국 사람들이다.

 

3번을 무시한 끝에 결국 출석했다.

대답은 최대한 무성의하게.

 

"그날 집회에 참가했었나요?"

"2년 전 그날에 뭐했는지 당신은 기억해요?"

(기억한다고 대답하는 형사)

푸훗, 잠시 썩소를 날리며 비웃었더니 형사가 급흥분.

"전 분명 불리한 증언은 안 해도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얘기하기 싫음 안하셔도 되요."

"아, 저 지금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는 거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푸훗, 또 비웃음.

"가입하신 단체나 소속이 있습니까?"

"글쎄요..대답하기가 귀찮네요."

...........

이런 식으로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다. 형사는 상대를 무조건 범죄인 취급한다.

일단 기를 꺾어놓고 보자는 식이다. 질문은 온통 유도 심문 뿐이고, 삐딱한 답을 하면

그대로 받아 워드를 친다. 담당검사에게 '이 사람 상태 안좋다'고 보여주려는 뻔한

수작이다. 내가 묻는다.

"그런데 뭐 내가 거기 있었다는 증거 좀 보여주시죠."

"아 그러잖아도 지금 사진 보여드리려 했습니다."

 

 경찰이 내세우는 유일한 증거는 사진 판독.

사진을 보는 순간. 거의 박장대소를 할 뻔했다. 비슷하게는 생겼는데 그 사진은 내가 아니었다.

사실 웃을 일이 아니다. 분노로 치를 떨어야 하는데 안절부절하는 형사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모두 모여든다. 사진과 내 얼굴을 번갈아 비교해보며 이리 저리 분석하느라

난리가 났다. 그러면서 맞다 틀리다 비슷하다 지들끼리 신났다.

 

결국 사진을 국과수로 보내야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취조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형사는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느라 조낸 비/굴/해/진/다.

"본인 사진을 본인이 제일 잘 알지. 본인이 아니라는데 확실하겠지."

"아 저희는 그냥 확인만 할 뿐이지 본인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면 괴롭힐 이유가 없습니다."

"어쩐지 첫인상이 좀 다르시더라. 얼굴을 보니 이렇게 선동할 사람이 아닌데 사진 속 인물은

굉장히 인상이 사납고 강해 보여. 나도 좀 이상하다 했지."

"아까 대답하신 거 중에서 '글쎄요. 대답하기가 귀찮네요.' 이 부분은 '없습니다'.로 바꿉시다."

 

자기가 알아서 지금까지 주고 받은 이야기들을 죄다 수정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짜증과 분노와 통쾌함이 뒤섞여서 표정 관리가 안된다. 계속 비웃음만...

나오면서 생각했다.

 

나를 증거하는 이 얼굴이란, 타인에게는 유일한 '나'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닐까? 묘한 느낌이었다. 쌍둥이 중 한 명을 사랑했는데

어느 날 나머지 한 명을 연인으로 착각했다. 그런데 상대가 그 사실을 숨긴다.

그럼 난 영원히 바뀐 사람을 사랑할 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상상이지만, 오늘 그런

느낌이었다. 진상과 허상, 현실과 Picture의 경계가 모호한.

 

 

3.

집 안을 나올 때마다 초등학교 앞을 지난다.

할아버지가 된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턱걸이 시범을 보이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봄바람에 실려 그 풍경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어느 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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