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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2 요약 발제문

 

오늘 시간의 향기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러나 언재는 안 그랬냐만은 찝찝하다. 사색적 삶에 대한 의문점이 완전이 해소되지 않은듯 하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책의 전체적 기반이 된 것이 하이데거의 철학이다. 하지만 나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잘 모른다. 물론 이 책이 쉽게 써져있어서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깊숙이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껴진다. 이해 할 수 없는 용어들이 연달아 나와 몇 번이나 다시 읽고 이해가 안가 그 페이지를 넘겨던 적이 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하이데거의 철학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을때 느낀 나의 한계는 그의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에 있다. 책 본문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그 자체로 사색적인 향기가 가득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향기를 맡아 본적이 없고 그 향기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 한계가 있다. 이 책을 읽고 생긴 새로운 욕구와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다는 것(이 책이 설명한 것이 나에게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이다. 어떠한 책을 읽을이 아직 생각해둔 것이 없지만 입문서를 염두해두고 있다.

본문 요약

 나는 같은 저자의 피로사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시간의 향기라는 책을 말하기 이전에 전 저작 피로사회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그 책을 무성의하게 읽은 것이 미안해서 이기도 하지만 주된 이유는 피로사회가 이러한 사회를 분해해서 설명, 진단하였다면 시간의 향기는 그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피로사회는 현대의 노동하는 기계로 전락해 버린, 노동을 위해서만 사는 현대인들을 진단한다.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이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언젠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고, 문뜩 내가 뒤처지는 것 같고, 그래서 뭔가 취업박람회 같은데를 뒤적거린적이 있다면 훌룡한 피로사회의 구성원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소설 이론 서문에서 이러한 말을 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제 그러한 시대는 지나갔다. 그 별은 이념이 되었든, 역사가 되든, 진리가 되었든, 신이 되든 간에 그 별은 사라졌고 그러한 시대를 상징하는 냉전 또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노동, 소비 기계가 되어 신경질환, 비만, 암(피로사회에서는 긍정성의 과잉이 만든 질환이라 설명한다)등을 달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채로 외롭게 질주하는 이들이 남았고, 폐허속에서 별을 찾기 위해 앓아눕는 이들이 작가들이 있다. 별은 시간의 흐름을 잡아주는 중력의 역할을 한다. 신화의 시대는 영원함을 기본으로 한다. 신은 시간을 주관하여 모든 것들은 신의 섭리에 맞추어 만들어진다. 책은 이를 한 폭의 그림 같다고 말한다. 이제 신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이 시간의 주인이 되었다. 인간으로의 권력교체가 일어나면서 시간의 안정성이 무너졌다. 신이라는 받침대가 사라졌다. 역사의 시대는 하나의 선 같은 시간이다. 모든 것은 과정이다. 이는 진보의 과정이고, 때로는 퇴락의 과정이다. 역사적 시간은 과거를 반복하기 보다는 미래를 따라잡는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동일자의 반복이 사라지고 사건이 이를 대신한다. 시간의 의미는 미래에서 나온다. 미래가 지향점이 되는 순간 가속화를 낳는다. 아직까지 시간이 의미를 지니는 동안에는 가속화는 가속화로 인식되지 않는다. 이러한 내달리는 선에서 서사적인 긴장, 목적론적 긴장이 사라져버리면, 선은 방향 없이 어지러이 날라다닌다. 시간은 원자화되어 방향없이 이리저리 헤메인다. 점들 사이에는 공허가 있다. 이 간극은 권태의 원인이 된다. 이 간극이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 가속화 된다. 이 가속화의 힘은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서사는 시간에 향기를 불어 넣는다. 반면 원자화된 시간은 향기가 없다. 받침대에서 분리된 시간은 마구 내달린다. 가속화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요즘 유행하는 느리게 살기는 치료가 될 수 없다. 이 대안으로서 책은 사색하는 삶, 머무르는 삶을 말한다. 음 비유하자면 구본주 작가의 <배대리의 여백>이 담은 찰나의 순간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구본주 작가 전시회를 보러 갔던 경험은 매우 강렬해서 잊을 수 없이 자주 비유하게 된다.) 사색하는 삶은 노동하는 삶, 활동하는 삶과 대비된다. 노동의 강조와 행동의 강조는 모두 활동적 삶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다. 활동하는 삶은 활동이 아닌 모든 것을 삶에서 지워버린다. 조급하다. 시간의 압박은 우회적인 것, 간접적인 것도 파괴한다. 우회적인 것을 빼면 언어는 명령과 고함밖에 남지 않을 것이며 걷는게 지루해진 인간이 춘 춤은 행진으로 경직된다. 폭력은 집적성을 지향한다. 활동적인 삶은 조급하다. 그 속에 머뭇거림이나 멈춤이 없다. 하이데거의 <들길>은 사색의 공간이다. 그 길은 어디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머무름의 공간이다. 사색은 일이 도중에 멈추는 순간 시작된다. 책은 괴테를 인용한다. ‘바이올린은 멎고, 춤꾼은 멈춘다.’ 춤꾼은 멈추는 순간에 공간 전체를 지각하고, 이 순간은 다른 춤이 시작도기 위한 전제이다. 책은 사색적인 시간, 사색적인 삶을 예찬한다. 그리고 책 마지막에 들어서서 말한다. ‘노동의 민주화에 이어 한가로움의 민주화가 도래해야한다. 그래야 노동의 민주화가 만인의 노예화로 전복되는 것을 막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니체를 인용한다. '우리의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반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 받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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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1

시간의 향기 발제문

꽤 오래전에 잡은 책이고, 워낙 얇은 책이라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이번주 안에 아마 책거리를 하게 될 듯 싶다. ....이해안되는 부분이 있고, 힘든 부분도 있다. 책에서 하이데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살짝 맨붕되기도 했다. 용어 자체가 생소하고, 하이데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밖에 없으니 그런 것일지도.

지금까지 내가 읽은 분량이 지금 가속화되고 사막화 되고 있는 시간이 어떠한 연유로 생겨났고, 어떠한 일을 야기시키는지를 설명했다면, 이후 읽을 것은 이에 대한 대안적 사유이다. 마치 어떤 기분이냐면.... 적당한 비유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게임에서 최종보스를 앞두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시험을 앞둔것 같다.

삶이 가속화되고 인간은 사색적 능력이 사라진다. 마치 비유를 하자면 무한이 빨라지는 런닝머신위를 무한히 질주하는 것 같다. 언잰가 보았던 구본주 작가의 <Mr. Lee>처럼 말이다.(밤이라 그래서인지 자꾸 비유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오직 가속화되는 시간속에 맞추어 달리는 이들은 이리저리 방향성을 잃고 헤메인다. 삶이 가속화 되는 이유는 실제로 삶이 빨라지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들이, 삶들이 방향성을 읽고 이리저리 헤메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들이 중력을 잃어버렸다. 시간이 받침대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신에서 인간의 권력 교체는 시간을 관장하던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으로 넘어오면서 시간의 안정성이 무너졌다. 신은 영원의 상징이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시간 또한 영원히 동질하다.

신화의 시간이 한 폭의 그림이라면 역사의 시간은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선이다. 목표는 뭐가 자리하든 방향성을 갖춘다. 이러한 서사적 긴장, 목적론적 긴장이 사라질 때 선은 점으로 분해되어 원자화 된다. 역사/서사에서 정보의 시대가 되었다. 시간이 가볍게 날라가듯이 정보 또한 그러하다. 점들 사이에는 공허가 있다. 그곳에서 권태가 싹이 튼다. 간극을 비우고자 시간은 더욱떠 빨라진다. 삶이 가속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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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 <나탈리 사로트와 소설> 요약 발제문 2

그럼에도 소설 분야에서 가장 소중한 성과는 이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비평들인데 이는 비평들을 소설이라는장르를 체계적으로 고찰하려는 인상적인 시도이다. 소설에서 아직까지는(1966) 이러한 비평들이 오늘날의 가장 흥미로운 미평이다.(모리스 르랑쇼, 롤랑 바르트, E. M. 시오랑, 알랭 로브-그리예, 나탈리 사로트, 미셸 뷔토르, 비셸 푸코) 이들의 평론이 소설보다 더 중요하다는 근거는, 이 글들이 지금껏 어떤 작가가 도달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하고도 야심에 찬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예로서 나탈리 사로트의 평론집 '의혹의 시대'이다. 사로트는 그가 주장하는 바를 소설에서 실현시켰다는 것을 떠나(작가는 결정적인 측면에서 아니라고 본다), 전통적 소설에대한 비판을 화제로 이끈 이 책을 소설의 이론적 반성의 좋은 출발점이 되리라 여겨진다. 사르트는 자연주의와 객관적 리얼리즘을 폐기하고 '심리의 어두은 공간'을 심문하는 것이 현대 소설가의 임무라 여긴 버지니아 울프의 입장을 뭘 모르는 '고지식한'태도라고 여기며, 메리 매카시의 견해에 대해서도, 그의 견해는 이야기 속에 하나의 실재 세계를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기억에 남을 만한 주인공들을 만들어내는 낡은 소설의 속성으로 희귀할 뿐이라 비판한다.

리얼리즘에 반대하는 사로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현실이 그리 명확한 것은 아니다. 세상사가 그리 현실감이 넘치지 않으며 소설에서 그려지는 현실이 편안하게 받아들여 짅다면 우리는 이를 의심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사로트가 구식 소설을 반대하는 것은 납득 가능하다. 이러한 작품들은 훌룡한 작품이라고 여길 수 는 있어도 당신으로 하여금 주눅들게 만든다. 전지적인 작가가 인생이란 이런 것이고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라고 가르치는 것을 듣는 다는 것은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로트가 전통적 수법(하나의 장면을 설정하고 주인공에 대해 묘사하고, 그를 이리저리 이동시키는 수법 )을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 또한 옳다. 세세한 묘사, 어떠한 넥타이를 어떻게 매는 것을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누가 관심을 가질까.

그럼에도 가장 복잡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소설 속에 심리 분석이 진부한 것인 동시에 반단 착오라는 사로트의 주장이다. 그가 말하는것은 울프, 조이스 프루스트의 소설이다. 사로트는 행동 밑바닥에 깔린 숨은 생각과 감정을 탐구하며, 사건을 등장인물과 플롯으로 대체할 수 있는 묘사 방법을 탐구하는 소설들 말이다. 사로트는 조이스가 이런 심연에서 건저 올린 것은 방해받지 않은 말의 흐름뿐이었다고 말하며, 프루스트 또한 독자가 그의 상상 속 박물관에 자리를 잡게 될 한 다발의 광범위한 허구적 등장인물들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로트의 소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 만금 조이스의 소설과 다름 없으며, 심리 또한 완전하게 거부하지 못한다. 물론 사로트가 원하는 심리적인 것은 등장인물과 플롯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없는 심리적 요소이다. 그는 조건부의 심리학, 즉 낡아빠진 목적을 이뤄줄 새로운 수단으로서의 심리학에 반대한다. 이는 소설을 근본적으로 뒤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소설가는 살인이나 굉장한 연애등 구질구잘한 사건으로 독자의 주의를 흐트러뜨려서도 안된다. 사건은 자잘할수록, 밋밋할수록 좋다. 그러나 사로트의 주인공들한테는 정말로 무슨 행동이라 할 것들이 없다. 행동에 앞서서 행해지는 이런 준비 단계와 암중모색이 사로트 소설의 진짜 주제이다. 사로트가 주장하는 것은 끊임없는 독백으로 이뤄진 소설, 등장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도 독백의 연장이 되는, 침묵의 연속만이 진짜 화법 소설이다.

 

인간의 감정과 감각이 복잡하다는 것은 무조건 존중해야 한다는 사로트의 소설 강령에는 무언가 고무적인 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 안이한 점은, 사로트는 심리라는 것을 모호하게 평가할 분만 아니라, 이에 대해 지극히 교조적인 처방을 내린다는 것이다. 사로트는 심리의 미묘함에 대해 혼란스런 기준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감정이라 움직여 다니는 거대한 덩어리로 그 안에서는 뭐든 찾아낼 수 있다는 사로트를 누가 반박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사로트는 더 나은, 더욱 면밀한 심리묘사 기법을 위해 심리를 공격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과 사로트가 제시하는 소설 강령은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한다 해도, 소설가에게는 그 동시를 좀더 세련되고 정말히게 재현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는 것 말고도 선택의 여지는 많다. 그의 주장대로 등장인물의 성격이 조수와 물결, 소용돌이가 한데 합쳐지는 지점, 대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스킨다이빙도 쓸모는 있다. 위헙을 각오하고 수중 깇숙한 곳에서 겪은 형체 없는 경험에 입체적 윤각을 부여하고, 그 세계에 정동된 형상과 감각적 몸체를 선사하여는 소설가의 노력을 경시하는 사로트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로트는 작가에게 동시대인을 즐겁게 하고, 가르치고 개심시키고픈 욕구를 억제하라 권고한다. 그저 자기 누에 보이는 reality,를 진지하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라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현실의 정의가 얼마나 편협한가이다. 그가 말하는 현실이란 현실을 뒤덥는 선입견과 이미지가 제거된 현실이다. ‘현실’을 접하고자 하는 이라면 “지금까지 열려지지 않은 어떤 것, 자신이 보기에 자신이야말로 그것을 본 최초의 사람이라 여길 만한 것‘에 도달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한다면 소설의 독자에겐 얼마나 많은 현실의 단면이 필요할 것인가. 소설가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조합하고 변형시키면 안될 이유가 있는가. 자신을 그가 지칭하는 선입견과 진부한 이미지에 가둬두면 안될 이유는 없다. 그는 현실이라는 관념을 들춰냄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쓸데없이 편협하게 만들고, 손상시키고야 말았다. 사로트의 선언은 마당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입장을 제대로 옹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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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1 <나탈리 사로트와 소설> 요약발제문 -1

해석에 반대한다. 수전 손택.

나탈리 사로트와 소설.

 

교훈주의는 실로 예술의 현대적인 요소이다.(1966년) 교훈주의의 중심 교리는 예술은 발전 해야하고, 그리하여 해당 장르를 진보시키며, 더 나아가 새로운 기법을 창조하는 것이 주요 목적인 것이다. 이 경우에는 예술이 친숙하거나, 즐거움을 주는 매체라기 보다는 교훈적이고 충고조의 작품이 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작품의 예로는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스타인과 베케트가 쓴 산문, 베베른과 불레즈가 작곡한 음악이 있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장르는 이러한 경향, 책의 표현대로 전장에 멀리 떨어져 있다. 소설은 19세기 예술의 원형적인 형식으로서,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히 현세적인 개념, 진정으로 야심에 찬 정신을 갖고 있지 못한 현실, '흥미로운 것'의 발견, E. M. 시오랑이 “하층 계급의 운명”이라고 부른 것을 완벽하게 확인 시켜준 장르이다. 소설은 사회속에 인간을 다룬다. 소설은 세계를 그대로 모방해 인물을 배치한다. 이 같은 기존 서사 형식에는 소설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요소들이 빠져있다. 이러한 서사 형식은 심리를 발견했다거나 주제를 ‘경험’으로 치환하지 못했다. 소설이 열려있는 형식이 된 것은, 바로 이처럼 ‘경험’을 기록하고자 하는 열정, 사실에 대한 열정에 있다. 모든 예술 형식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경험계를 초월하는 일련의 절대적 기준이 적용되나. 소설은 앞서 서술한 이유로 어떠한 정보든지 구성이든지 생각을 수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소설은 재미가 있다. 그러나 음악, 조형미술 등 예술의 진보라는 교훈주의를 좇고 19세기 리얼리즘이 지녔단 교리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동안 소설이란 예술 형식은 20세기 내내 그 어떤 것도 자기 것화 하지 못한 체 속물주의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결국 우리 시대(1966년 이후)의 소설은 예술의 ‘진보’라는 생각, 전위라는 은유에서 보여주는 전투적인 이데올로기 같은 미심쩍은 관념들에 연루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는 소설이 독해되어야 하는, 몇 번씩 다시 읽어 뜻을 해석해야하는 된다는 것이고 이는 매우 지루하고 재미없는 짓일 것이다. 잘난 체하고 꼰대적인 책들이 범람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들은 두 가지 흐름으로 주로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다. 초기에는 모리스 블랑쇼, 조르주 비타이유, 피에르 클로스프스키가 이끌었다. 두 번째 흐름은 1950년대의 저자로, 미셸 뷔토르, 알랭 로브 그리예, 클로드 시몽, 그리고 나탈리 사로트가 봅힌다. 이들의 공통점은 19세리 리얼리즘 전통에 따라 성격을 묘사하는 것이 소설의 임무가 아니며, 심리라는 관념을 버리겠노라고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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